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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행으로 응축된 불교적 사유와 시간 의식 – 최동호 시인의 『생이 빛나는 오늘』(서정시학 2024)
4행시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번에 출간된 최동호 시인의 『생이 빛나는 오늘』은 그동안 그가 주장하던 극서정시의 완성체로 보인다. 4행으로 시행을 제한하는 것에 대하여 시인은 자신의 산문에서 “4행시가 가진 기승전결이라는 미학적인 구조는 해체적 상황에 직면한 우리 시에 새로운 생명력을 되찾아줄 것”이라고 말하며, 그동안 본인이 주창했던 극서정시는 극도의 밀도를 지닌 단형시를 추구하는 것이었지만 형태적 모호성이 있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탐색 끝에 디지털적 사행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토로하고 있다. 여기서 기승전결이라는 구도는 대단히 중요하다. 흔히 시에서는 그런 논리적인 구조를 무시해도 괜찮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세계시의 차원에서 보면 잘 쓰여진 시들은 완벽하게 그 구도에 맞추어지고 있다.
이번 시집은 꽤 오랜 숙성의 시간을 거친 끝에 출간한 것으로 생각된다. 2021년 『황금 가랑잎』을 출간하고 3년이지만 그전부터 4행이라는 화두에 매달렸을 것이다. 아시다시피 제한된 공간에 시를 맞춰 넣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시집의 표제시를 먼저 읽어보자.
전생을 묻지 마라
금생이 전생이다
후생을 묻지 마라
금생이 후생이다
- 「생이 빛나는 오늘」
전생과 금생과 후생이 하나이다. 과거나 미래에 매달리지 말고 지금 현재를 보라는 말은 불교에서 되풀이 강조하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과거에 매달리기 쉽고 또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사실 가장 확실한 것은 지금의 순간이며 이것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끊임없이 과거로 바뀌고 있다. 전생에 지은 업에 의해 현생이 이루어지고 현생의 업에 의해 후생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인과론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현생에 전생과 후생이 하나라고 말한다. 그리고 제목은 “생이 빛나는 오늘”이다. 금생 즉 지금의 오늘은 가장 빛나는 날이다.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누려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살면서 우리는 가끔 이런 순간을 맞는다. 지금 이 순간 세상이 멈추었으면 하는 순간, 그런 황홀한 기쁨의 순간 말이다. 이러한 사유, 불교적 사유가 이 시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아무래도 짧은 시의 순간 포착과 선적인 사유가 맞기 때문일 것이다.
좌중을 주장자로 내려친 선승이
팔뚝을 꺾어 허공에 던진 뼈다귀
그림자 하나 줍지 못한 바보들
산천을 진동하는 소리 넋 나간다
- 「대보름」
어느 선승이 주장자를 내리치며 할을 외치고 있다. 그것의 처절함은 2행에서 “팔뚝을 꺾어 허공에 던”지는 행위로 표출된다. 달마의 제자 혜가의 일화를 연상케 하는 처절한 진리 추구의 한 장면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대중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바보처럼 멀뚱하니 있다. 그때 “산천을 진동하는 소리”를 터뜨리며 깨달음의 보름달이 둥실 떠오르는 것이다. 좌선은 어려운 수행이다. 깨우침이라는 것이 그냥그냥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주장자를 내리치는 것은 미몽을 헤매고 있는 대중들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서이다. 사실 선불교의 이런 순간을 우리가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 깨우침을 향한 처절한 노력을 용맹정진이라고 한다. 실제 공부하는 스님들은 하루 8시간 이상 좌선을 한다. 시는 3행의 “바보들”에서 사실 절정이다. 일반적인 대중들은 모두 바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4행의 “진동하는 소리”는 오히려 안타까운 소리로 들린다. 이 시의 짧은 암시는 여전히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중생들의 모습이다.
돌중은 애꿎은 목탁이나 치고
선승은 해골바가지 두드리고
떠돌이 거지는 각설이 타령
봄바람 흥겹게 노는 빈 깡통
- 「떠돌이 거지」
이 시도 그러하다. 돌중과 선승, 떠돌이 거지가 제각각 하나씩 두드리고 있다. 엉터리 중은 통상적인 목탁을 두드리고 선승은 해골바가지를 두드린다. 거지는 각설이 타령을 부르며 깡통을 두드리고 있다. 그냥 해오던 대로 목탁만 치는 스님은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해골바가지를 두드리는 선승은 생사의 한계를 떠나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그러나 이런 것 저런 것 없이 가장 자유로운 이는 거지다. 그래서 그의 빈 깡통에는 봄바람이 흥겹게 놀고 있는 것이다. 그 바람이 아주 아름답고 자유롭게 읽힌다. 부처의 길을 따라 도 닦는 스님이나 거지나 궂이 경계를 지을 필요가 있을까. 실제 원효대사는 이런 무애행을 했었고 이것을 통해서 더 높은 경지로 올랐다.
「해골바가지 우물통」이라는 시의 전문 “꿈속의 피비린내까지/다 지우고 난/해골바가지 우물물 맑은 물/푸른 하늘 흰 구름”을 음미해 보자. 육탈되어 핏기 다 가신 하얀 해골바가지에 우물물을 한 바가지 담아 놓았더니 하늘과 구름이 투명하게 비친다. 역시 원효대사의 일화를 생각나게 하는 이 시는 우리가 흔히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과 깨끗하기 짝이 없는 것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그 둘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아마 깨우침의 경지가 이러할 것이다. 「경이로운 열반」에서의 “육신을 태워 하늘에 공양하고/잿더미에서 얻은 불사의 생명/덧없는 육신을 뛰어넘은 구도자/경이로운 빛, 성스러운 법신”이라는 구절도 앞의 두 편에 이어지는 연작시처럼 읽힌다. “잿더미에서 얻은 불사의 생명”은 스님들의 법구에서 나오는 사리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성스러운 법신”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불교에 대한 상상력은 이 시집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어린 손자 지팡이 삼아 꼬부랑 길 언덕/부처님 찾아가던/까칠하게 말라붙은 할머니 젖가슴/불심의 깊은 샘”이라고 노래한 「불심의 젖가슴」은 앞의 시들과는 좀 다르다. 아마 어느 할머니가 손자를 앞세워 절을 찾아가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 할머니 연세가 드셨는지 손자의 손에 많이 기대고 있다. “꼬부랑길”은 할머니의 등이 굽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 할머니의 말라붙은 젖가슴이 불심의 샘이라는 데에 이 시의 핵심이 있다. 그 젖가슴과 지팡이를 통해서 늙은 할머니와 어린 손자의 사랑과 생명이 이어지고 있다. 비록 말라붙었지만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사랑의 샘이다.
푸른 물방울 속에
부처가 있고
둘 데 없는 내 마음은
부처 품에 있다
- 「물방울 부처」
물방울 속에 부처가 있고, 갈피 못 잡고 헤매는 내 마음은 부처의 속에 있다. 원불교에서 말하는 처처불상, 세상 곳곳에 부처가 있다는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 작은 물방울 속에도 투명한 부처가 있다. 내 마음은 늘 갈등을 일으키는 허약한 것이지만 그 작은 부처들에 둘러싸여 편안해진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유명한 구절 “모래 한 알 속에서 세계를 보고/한 송이 야생화에서 천국을 본다”를 생각해 보자. 블레이크의 이 구절이 계속 회자되는 것은 그 독특한 우주관 때문이다. 물방울 속의 부처도 그러하지 않은가. 물방울 하나 속에 우주와 부처가 다 담겨 있다는 것이다. 「굴뚝새」의 “뽀얀 한기에 잠긴 석등/새벽 절 마당 기침 소리/아랫마을 꽃피는 굴뚝 연기/박명을 품는 부처 눈길”도 유사한 사유이지만 아주 아름답다. 절집 마당의 새벽 풍경이다. 석등이 새벽 공기 속에 싸늘하고 마당을 쓸거나 거닐고 있는 노스님의 기침 소리가 들리는 모양이다. 저 아래 사하촌에는 굴뚝마다 밥 짓는 연기가 퐁퐁 솟아오르고 있다. 참으로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런데 이 새벽의 희미한 빛 속에 모든 것을 품는 부처의 눈길이 비친다는 것이다.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법신불, 처처불상의 모습이다.
봄비가 시비를 적시고 있다
글자가 흐려지고 돌이 마모되고
사람들 마음도 점차 지워지고
남는 것은 글자도 시도 아니다
- 「시비」
주제가 약간 바뀌고 있다. 시를 천년토록 남기고 싶어 시비를 세우고 글자를 새기지만 새 생명을 일깨우는 봄비가 그 시비에는 아주 독이다. “글자가 흐려지고 돌이 마모되”게 하는 것은 바로 비바람이다. 식물을 키우고 생명을 부여하는 봄비는 바로 모든 생명 가진 것들을 회복시키는 힘인 동시에 사람들이 애써서 만들어 놓은 것을 파괴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마음도 점차 지워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모든 것은 공이요 제행무상이다.
이어지는 시에 대한 허무감은 「허깨비 시인」에서 “죽어라 쓰는 사람, 목숨까지/걸었다는 풍문이 떠돌았지만/세상 저 너머까지 가서도 결코/멈추지 않을 허깨비 그림자”라고 표현되고 있다. 시마에 들면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터져 나옴이 아니라 지나치게 힘들여 쓰는 시, 이것은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시인들은 목숨걸고 쓴다. 그 노력은 가상하지만 그것은 시가 아니다. 죽어서도 멈추지 못할 “허깨비 그림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여기서 자유로우랴. 이것은 「문패」에서 또 다른 서글픈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하며(“너, 이 천하의 못된 놈/시인이라고 문패 걸고/온갖 헛된 말 써대고 살았구나”), 그렇게 죽어라 써내지만 “읽히지 않는 시는 버려진 고아/폐간되는 잡지/인터넷 그물망에서도 폐기되는/시, 청춘도 지랄도 디지털”(「디지털 그물」)이라고 허탈하게 표현되기도 한다. 시가 넘쳐나는 세상, 그러나 시인들도 남의 시는 읽지 않는다. 결국 무수히 만들어내고 써진 시들은 고아처럼 길 잃고 헤매다가 폐기되는 것이다. 생각하면 참으로 고되고 슬픈 작업이다. 어쩌랴, 그래도 운명처럼 쓰게 되는 것을.
눈동자에 번득이던
섬광 잡지 못하면
지평선 너머 천릿길 갈 수 없다
아무리 산호 채찍 후려쳐도
- 「명마의 눈동자」
이 시는 그 쏟아져나오는 시들 가운데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처럼 읽힌다. 눈동자에 스치는 순간의 빛을 잡아내지 못하면 결국 시는 실패다. 평범에 그치고 장거리 주자로 살아남을 수 없다. 아무리 산호 채찍과 같이 화려한 후원을 받아도 결국 쓰레기 더미로 파묻히게 된다. 순간적인 그 섬광, 그 시의 핵이 되는 번뜩임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필사적인 노력의 보상으로 읽히는 것이 다음의 시다.
파지 쌓인 책상에 쏟아지는
정오의 폭포같은 햇살,
빙하 만년 푸른빛 펼치는 눈부신
세상의 파도 물결
- 「빙하의 시」
버린 종이들이 어지럽게 쌓인 책상에 정오의 햇살이 쏟아진다. 그런데 그것이 마치 하얀 빙하의 만년 얼음에 넘실대는 푸른빛 파도처럼 보이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얀색과 푸른색의 대비를 주목해 보자. 이것은 그 어려운 고행과 험로의 시작 과정에서 어느 순간 찾아오는 환희처럼 읽힌다. 무수히 고치고 다시 읽고 버리고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드디어 완성의 순간은 찾아온다. 그 순간의 희열은 일종의 법열이다.
아마 시인은 시간의 흐름을 무척 의식하며 살았을 것이다. 시작을 하고 문예지 만들고 시인 제자들 가르치고 그 많은 행사 주관하고 그야말로 초를 쪼개가며 살았을 그의 삶은 「초침벼락」에서 “정수리 때리는 초침/찰나는 예외 없다/느리게 가던 하루, 손을 떨구는 노인/단칼의 찰나”라고 표현되고 있다. 초침이 째각이는 작은 소리가 벼락처럼 들린다. 어쩌면 과도한 의식일 그 시간의 흐름은 냉혹한 것이어서 누구도 비켜갈 수 없다. 느리게 가는 하루는 어릴 때의 시간이고 손을 떨구는 노인은 늙어서 더 이상 시간을 의식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일생이라는 긴 삶도 단칼의 찰나에 의해서 결판난다.
나비가 날개를 펼칠 때마다
바위가 책장처럼 열리고
책 읽으려 하는데 나비는 날아가고
단풍잎만 뒤척이는 바위
- 「나비의 책」
이 시는 마치 장자와 나비처럼 여러 가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나비가 날개를 한 번씩 펼 때마다 바위가 열리고 그것을 들여다보는 순간 나비는 날아가 버리고 단풍잎만 뒤척이며 남아있다. 남가일몽과도 같은 환각이다. 그런데 묘한 매력이 있다. 원래 단풍잎이 떨어져 있는 바위를 나비로 착시했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바위가 책처럼 열리더라는 것이다. 이 시야말로 완벽한 기승전결의 구도를 가지고 있다. 날아가 버리는 나비에서 일종의 절정에 오르고 마지막 행의 뒤척이는 단풍잎은 의식의 깨어남이다.
「가을」이라는 시의 전문 “가벼이 단풍잎 바람에 날리고/맑은 햇살 황금빛 바람/쨩쨩쨩/유리창 부딪쳐 가을이 우네”도 매우 감각적으로 읽힌다. 날리는 단풍과 햇살과 바람이 어울려 유리창에 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것이다. 이 “쨩쨩쨩”이라는 의성어는 그 소리만으로 이 시의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가을이 우네”에서 어느덧 가을이 와 있음을 탄식하듯 말하는 것이다. 「초원의 길」의 전문 “아무도 가지 않은 길 한 사람이 가고/열 사람이 이어 가면 발자국이 남고/천 사람이 가면 소문난 길이 되지만/발자국 사라지면 잡초가 길을 덮는다”도 주목할 만하다. 초원에는 달리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열 사람이 같이 가면 발자국이 남고 천 사람이 가면 길이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잡초로 덮인다. 여기의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말하는 상징물처럼 읽힌다. 역사를 통해 무수한 문명의 성쇠를 본다. 아마 몽고나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이런 시가 떠올랐을 것아다. 뻔한 이야기 같지만 4행의 시를 통해 아주 밀도 있게 표현되고 있다.
이 시집에서 마지막으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나이에 대한 의식이다. 늙어가면서 느끼는 자괴감이야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이백의 유명한 한 구절 “백발삼천장”을 생각해 보자. 어느날 아침 얼굴을 비춰보니 백발이 성성한 내 모습, 갈 길은 멀고 해는 저물고 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자화상」의 전문 “거울 속에서 귀신 만나 분명/저 백발 귀신 어디서 봤더라,/머리통에 주먹 한 방 날리니 갑자기/해골 통 속 내가 튀어나온다”를 천천히 읽어보자. 일단 독자는 웃음을 머금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재미라기 보다는 누구나 자신의 모습에서 느끼는 공감이 될 것이다. 「그림자」에서도 그것은 “항상 뒤에 따라오던/등신 그림자 어느 틈에/길게 자란 전봇대 앞에서/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다”라고 표현되고 있다. 그림자는 늘 내 뒤에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틈에 그것이 생의 주도자가 되어 내 앞에 성큼성큼 걸어가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가고 있다. 신경도 쓰지 않던 못난 것이 갑자기 커지고 나는 왜소해졌다.
독한 감기로 칠팔일 넘게 누웠다가
밖으로 나가 걸어보니 세상은
치열한 여름, 발자국 흔들리는 한낮
구두 뒤축에 박히는 찰진 햇살
- 「햇살」
젊을 때는 감기로 눕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주일이나 드러누웠다. 겨우 일어나 외출해 보니 어지럽고 발이 불안정한데 바깥은 치열한 여름이다. 3, 4 행을 잘 음미해 보시라. 언어의 경제성이 뛰어나다. 그리고 흔들리는 구두의 뒤축에 햇살이 닿는데 그 햇살 찰지다. 감각에서 뛰어나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이 들어가면 세상을 보는 눈도 관대해지고 연민에 차게 된다. 「거리의 악사-인사동 골목에서」에서의 “때 절은 모자에 동전 몇 잎/저물녘 바람 차가운 등덜미/지폐처럼 날리는 황금빛 선율/녹슨 현을 밟고 가는 행인들”을 음미해 보자. 거리의 악사는 우리 사회에서는 흔치 않지만 인사동에서는 거리의 특성상 가끔 보인다. 물론 거리의 악사이니 형편이 어렵다. “때 절은 모자”나 “차가운 등덜미”에서 그것은 아주 농축되어 전달되고 있다. 그런데 음악은 “황금빛 선율”이다. 그것은 고액권 지폐처럼 날리고 있다. 비록 형색은 남루하나 그 음악은 훌륭하다. 그런데 문제는 음악의 가치를 모르는 행인들이다. 그들은 “녹슨 현을 밟고” 무심하게 지나간다. 그들은 아직 음악에 대한 이해도 의식도 없다. 이런 여러 가지가 4행의 시에 빈틈없이 들어가 있다.
마지막으로 쪽방촌의 어느 한때를 잡아서 표현한 “쪽방촌 뒷골목/마지막 선술집/오줌 지린 길바닥 납빛 햇살/하얗게 얼어붙은 밥알”(「겨울 햇살」)을 읽어보자. 쪽방촌이라면 철거 직전의 하꼬방마을이다. 거기에서 다들 떠나가고 마지막까지 남은 어느 선술집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오줌이 흘러내린 길바닥과 거기에 얼어붙은 밥알 하나에 눈길을 두고 있다. 참으로 썰렁한 광경이다. 선술집이 조용할지 왁자지껄할지가 궁금해지는데 햇살도 납빛으로 힘없이 비치고 있다.
4행시는 응축에 생명이 있다. 풀어놓으면 한 편의 에세이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네 줄 시에 축약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기승전결의 응축에 의하여 시적 긴장이 빛나고 있다. 그동안 극서정시를 추구하며 단시 쓰기를 계속하던 최동호 시인의 노력이 이번 시집에서 빛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불교적 사유와 시간에 대한 성찰이 4줄의 시들에서 기막힌 균형감을 보이며 반짝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