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선의 족보 없는 독립군 家系
김희선 의원의 독립군 가계 의혹, 김 의원 본관 찾기에 실패
작은 할아버지 김학규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을 받았다
吳東龍 월간조선 기자
자신을 독립군의 후손이라면서 ‘의성(義城) 김씨’라고 주장해 온 열린우리당 김희선(金希宣) 의원이 최근 ‘의성 김씨’ 대종회 사무실에 보좌관을 보내 자신의 본관(本貫)을 확인하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17일 발매된 월간조선 9월호가 보도했다.
김희선 의원의 작은 할아버지라는 광복군 3지대장 김학규(金學奎ㆍ1900~1967) 장군은 김구(金九)의 남북 협상 노선을 반대하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의성 김씨’ 대종회 측은 “며칠 전 김희선 의원의 보좌관이 찾아와 가계도(家系圖)를 그려가며, 김 의원 일가(一家)가 ‘의성 김씨’가 맞는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었다”면서 “하지만 김 의원측이 파(派)를 알지 못해 확인할 수 없었다”고 했다.
대종회 측은 “지난 16대 총선 때도 김 의원이 ‘의성 김씨’라고 주장해 우리가 김 의원에게 입증할 만한 자료를 요청했으나 ‘정리가 안돼 있다’는 답변만 들었다”고 했다. 1969년 결혼한 김희선 의원은 1970년 자신의 호적에 ‘의성 김씨’로 등재했었다.
최근 김 의원은 ‘김희선 의원의 본관(의성 김씨)과 김학규 장군의 본관(안동 김씨)이 다른데 어떻게 할아버지가 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자, “증조할머니가 재가(再嫁)를 하는 과정에서 작은 할아버지 김학규(金學奎ㆍ1900~1967) 장군은 ‘안동 김씨’가 됐고, 친할아버지 김성범은 생부(生父)의 본관을 따라 ‘의성 김씨’로 남았다”고 주장했었다.
김 의원이 ‘독립 운동가 가문’으로 자부할 수 있는, 사실적(史實的) 근거는 작은 할아버지라고 주장하는 김학규 장군뿐이다. 그러나 김희선 의원이 ‘안동 김씨’라고 주장한 김학규 장군도 ‘안동 김씨’ 족보에 올라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안동 김씨’ 종친회 측은 “김학규 장군이 안두희(安斗熙)를 김구(金九) 선생에게 소개한 분이라는 얘기가 있어, 족보 전체를 꼼꼼히 살펴봤는데 김학규 장군의 이름을 족보에서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종친회 측은 “김학규 장군 연배의 ‘안동 김씨’ 돌림자 항렬은 규(圭)ㆍ진(鎭)ㆍ한(漢)ㆍ동(東)으로, 김옥균(金玉均)이 갑신정변 때 역적으로 몰리면서 고종이 25세손 항렬자인 ‘균(均)’을 ‘규(圭)’로 대체해 사용하도록 했다”면서 “김학규 장군의 ‘규(奎)’는 ‘별 규’자로 ‘안동 김씨’ 문중에서 쓰는 항렬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안동 김씨’ 문화연구회장인 명지대 사학과 김위현(金渭顯) 교수는 “당시는 족보를 호적보다 더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거의 누락되는 일이 없었다”며 “일제시대에 항일운동을 하러 외국에 나갔던 분들도 광복 후에는 족보를 제대로 정리했다.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족보에 아들 김두한(金斗漢)과 손녀 김을동(金乙東)을 어떻게 올려놓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한편, 김희선 의원이 주도하고 있는 ‘친일 진상 규명법’ 개정안은 조사대상을 ‘육군 중좌 이상’에서 ‘육군 소위 이상’으로 변경,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을 조사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김 의원이 작은 할아버지라고 하는 김학규 장군은 김구의 남북 협상 노선에 반대했고, 박 대통령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신경군관학교 2기 출신으로 열하성(熱河省)에 있는 만주군 보병 8단 부관(중위)로 근무하던 박정희는 광복직후 북경으로 가서 광복군 3지대 ‘평진대대’에 합류했다. 그때 제3지대장이 김학규 장군이었고, 박정희는 제2중대장이었다.
김학규 장군은 열병(熱病) 등의 신병으로 귀국하지 못하다가, 1948년 4월16일 영국 상선편으로 귀국했다. 김 장군은 곧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한독당(韓獨黨) 조직부장에 취임한다. 1949년 6월26일 현역군인이던 안두희가 김구 선생을 저격하자, 안두희의 한독당 입당을 주선했던 김 장군은 배후조종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50년 6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김학규 장군을 서대문 감옥에서 석방했다. 전쟁이 끝난 후 재수감된 김 장군은 4.19 직후 풀려나 1960년 한독당 대표최고위원에 취임한다.
1961년 5.16 이후 박정희는 옛 상사였던 김학규 장군을 보살폈다. 김 장군을 복권시키고, 1962년 김학규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토록 했다고 한다.
원로 한국학자인 최서면(崔書勉ㆍ78ㆍ일본거주)씨는 “김학규 장군이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을 못 할 때, 박 대통령이 내게 ‘입원시켜 드리고 돌봐 드리라’고 부탁해 내가 그분을 등에 없고 가서 국군 병원에 입원시켜 드렸다”면서 “김학규 장군은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했다”고 했다.
광복군 3지대 ‘평진 대대’ 대대장이었던 신현준(申鉉俊ㆍ88ㆍ미국 거주) 전 해병대 사령관은 “내 아래에서 중대장을 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김학규 장군을 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이 자신의 예전 상관을 깍듯하게 모셨다”면서 “두사람이 주고받은 정리(情理)를 생각하면, 세상을 ‘친일이다, 아니다’로 재단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알게 된다”고 했다.
1967년 9월20일 김 장군이 서울 마포구 망원동 자택에서 별세하자, 박정희 정부는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케 했다.
추적 金希宣 의원의 「독립군 家系 의혹」
金希宣 의원의 작은할아버지라는 金學奎 장군은 金九
노선에 반대했고, 朴正熙의 도움을 받았다
吳 東 龍 月刊朝鮮 기자
「의성 金씨」 종친회: 『金希宣 의원이 의성 金씨인지 모르겠다』
지난 8월9일, 기자는 서울 용산에 있는 「義城(의성) 金씨」 大宗會(대종회) 사무실을 찾았다. 열 평 남짓한 공간은 族譜(족보)로 가득했다. 金鎭春(김진춘) 총무부장은 『金希宣 의원이 의성 金씨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인되지 않는다』며 『金學奎(김학규) 장군이 원래 「의성 金씨」 핏줄이란 얘기를 듣긴 했지만, 실제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열린당 金希宣(김희선ㆍ61) 의원은 광복군 3지대장을 지낸 金學奎 장군의 손녀라고 주장해 왔다. 「金希宣 의원의 본관(義城 金씨)과 金學奎 장군의 본관(安東 金씨)이 다른데 어떻게 할아버지가 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자, 金의원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해명을 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金希宣 의원의 증조할머니(선우순씨)가 「의성 金씨」 집으로 시집을 가서, 金의원의 할아버지 김성범(1894년 출생)과 金學奎 장군(1900년 출생)을 낳았다. 증조할머니가 재가를 하는 과정에서 어린 金學奎 장군은 「안동 金씨」가 됐고, 金의원의 할아버지 김성범은 生父의 本貫을 따라 「의성 金씨」로 남았다>
金學奎 장군과 金希宣 의원의 할아버지 김성범씨가 本貫은 다르지만, 어머니가 같은 同腹(동복) 형제라는 주장이다. 『젊은이들도 本貫과 무슨 派를 아는데…』자신을 「의성 金씨」라고 주장해 온 金希宣 의원은 자신의 本貫에 대한 논란이 일자, 「의성 金씨」 대종회 사무실에 보좌관을 보내 자신의 本貫을 확인하려 했다. 자신을 「의성 金씨」라고 주장했지만, 그걸 뒷받침할 족보나 기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의성 金씨」 대종회의 金鎭春 총무부장은 『며칠 전에 金希宣 의원의 보좌관이 찾아와 家系圖(가계도)를 그려 가며, 金希宣 의원 一家가 「의성 金씨」가 맞는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했다.
金총무부장은 金의원의 보좌관이 내놓고 간 가계도를 기자에게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金希宣 의원은 족보가 없다는 얘기인가.
『그런 모양이다. 요즘 젊은이들도 자신의 本貫과 무슨 派(파)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데, 너무나 이상하다』
─金의원 일가가 의성 金씨 문중인지 확인이 됐나.
『1992년 280개派가 참여한 「의성 金씨」 大同譜(대동보)에 수록된 사람이 25만 명이다. 金의원이 몇 세손인지, 무슨 派인지를 알지 못해 확인이 불가능하다. 金希宣 의원은 자신이 무슨 派인지를 모르고 있다』
─金希宣 의원 보좌관이 그려 온 가계도에 아버지 형제들 이름, 윗대 할아버지들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오네요. 「의성 金씨」 行列(항렬)이 맞습니까.
『전혀 맞지 않습니다. 金의원의 부친 金一鍊(김일련)을 비롯해 一銑ㆍ一信ㆍ一鎬ㆍ一鍵ㆍ一龍 등 형제자매 항렬이 의성 金씨 항렬이 아닙니다. 의성 金씨들은 한일(一)字 항렬이 없습니다』
자신의 프로필 등에 광복군 3지대장 金學奎 장군의 손녀라고 밝혀 온 金希宣 의원은 「金學奎-金希宣」이란 연결고리를 「의성 金씨」 족보에서 찾아내지 못했다. 金의원은 지난 7월23일 가진 기자간담회와 인터넷에 올린 해명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金希宣 의원 할아버지의 抗日은 史料에 없어
<祖父인 김성범은 親父인 의성 金씨 호적에 올려졌다. 조부 김성범은 오병희와 결혼하여 슬하에 일선•일신•일련•일호•일건•일룡 5남1녀를 두었다. 숙부인 일건의 기억에 따르면 일건이 7세쯤이었던 1930년 초반 조부(김성범)와 조모(오병희)는 독립군 군자금을 모아 3개월에 한 번씩 방문하는 작은조모(오광심•金學奎의 처)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제 부친인 일련도 그 일을 도왔다고 한다. 1937~1938년경 김성범은 독립군 자금책인 것이 발각되어 일본군 헌병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집에 돌아온 후 앓다가 곧 사망했다고 한다. 제 조부 김성범은 현존 자료가 없어 독립사료에 오르지 못했다. 독립기념관 정보에서 나오는 1899년 평북 초산 출생 김성범은 제 조부와 동명이인이다>
金의원이 「독립운동가 가문」으로 자부할 수 있는 史實的(사실적) 근거는 작은할아버지라고 주장하는 金學奎 장군뿐이다. 金希宣 의원은 1943년생이다. 金의원은 『최근 숙부인 일건에게 고모 일신이 살아 생전 작성해 둔 가족의 독립운동사가 있다는 것을 들었다』고 주장했으나, 지금까지 그 자료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金鎭春 총무부장은 「의성 金씨」 대종회가 홈페이지에서 관리하고 있는 「독립운동 유공자」 리스트를 보여 주었다. 임시정부 의정원 부원장을 지낸 心山 金昌淑 선생, 서로군정서 참모장을 지낸 일송 金東三 선생 등 50명이다. 의성 金씨 대종회 홈페이지에는 金希宣 의원이 「의성 金씨」 출신 국회의원으로 올라가 있다.
金鎭春 총무부장은 『金希宣 의원이 「의성 金씨」라고 주장해 그 주장대로 이름을 홈페이지에 올린 것』이라며 『의성 金씨인지 확인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金부장은 『金學奎 장군이 광복군 제3지대장으로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우셨음에도, 의성 金씨란 것이 확인되지 않아 홈페이지 유공자란에 올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통상 국회의원들은 출마를 전후해 종친회에 지지를 부탁하는데 金의원의 경우는 어땠습니까.
『대종회에서 발행하는 宗報(종보)에 당선 프로필을 실은 적이 없습니다. 열린당 金洛淳(김낙순)•金元雄(김원웅) 의원 등과는 대조적이죠』
金의원은 「독립군의 후손」임을 앞세워 「親日진상규명 특별법」 개정에 앞장 서 왔다. 그러나 최근 열린당 내부에서조차 金希宣 의원의 발언에 제동을 걸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열린당 중앙상임위원회는 최근 金希宣 의원에게 『독립군 金學奎 장군 가족사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당에 이롭지 못하다』며 공개적으로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安東 金씨」 종친회: 『족보에 金學奎 장군 없다』
金希宣 의원의 주장대로라면 金學奎 장군은 「안동 金씨」 족보에 올라 있어야 한다. 「안동 金씨」 문화연구회장인 명지大 사학과 金渭顯(김위현) 교수는 『당시는 족보를 호적보다 더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거의 누락되는 일이 없었다』며 『일제 시대에 항일운동을 하러 외국에 나갔던 분들도 광복 후에는 족보를 제대로 정리했다』고 했다.
「안동 金씨」 종친회 金世漢(김세한) 사무국장은 『金學奎 장군이 安斗熙(안두희)를 金九 선생에게 소개한 분이라는 얘기가 있어, 족보 전체를 꼼꼼히 살펴봤는데 金學奎 장군의 이름을 족보에서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金사무국장은 『金學奎 장군 연배의 「안동 金씨」의 돌림자 항렬은 圭(규)•鎭(진)•漢(한)•東(동)으로, 金玉均(김옥균)이 甲申政變(갑신정변) 때 역적으로 몰리면서 高宗이 25세손 항렬자인 「均」을 「圭」로 대체해 사용하도록 했다』면서 『金學奎 장군의 奎(규)는 「별규」字로 「안동 金씨」 문중에서 쓰는 항렬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金사무국장은 『당시에는 항렬의 위계질서가 엄격해 함부로 다른 漢字를 이름에 쓰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金希宣 의원의 할아버지•아버지 세대가 항일운동에 투신하느라 호적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닌가요. 金의원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북 사람들은 다 호적이 없다. 朴正熙 前 대통령 시절 호적을 정리할 때 내가 일가를 창립했다』고 말했습니다. 金祐銓(김우전) 광복회장도 『단재 申采浩(신채호) 선생도 호적이 없고, 독립운동가 태반이 호적에 오류가 많다』고 했습니다.
『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을 한 金佐鎭(김좌진) 장군 가족은 어떻게 광복 이후 호적을 정리하고, 족보에 아들 金斗漢(김두한)과 손녀 金乙東(김을동)의 이름을 올렸겠습니까?』
金學奎 장군은 자신의 자서전인 「白波(백파) 자서전」(1988년 출간, 내용상 1960년 무렵에 쓴 것으로 추정)에서 자신의 본관을 밝히지 않았다. 백범 金九 선생은 「白凡일지」 도입부에 자신이 몰락한 安東 金씨 집안임을 밝혔다.
광복군 제3지대장과 중대장으로 만난 朴正熙와 金學奎열린당 金希宣 의원이 주도하고 있는 「親日진상규명법」 개정안은 朴正熙 前 대통령의 親日행적을 캐내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다. 개정안은 만주군 육군 중위였던 朴正熙 前 대통령을 조사대상으로 올리기 위해 「육군 중좌 이상」이었던 親日진상규명법上의 조사대상을 「육군 소위 이상」으로 변경시켰다.
金希宣 의원이 휘두르고 있는 「親日규명」의 칼날이 朴正熙 前 대통령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金希宣 의원이 「작은할아버지」라고 주장하고 있는, 金學奎 장군은 朴正熙 前 대통령과 광복 직후 광복군 제3지대에서 함께 근무했다.
朴 前 대통령은 1917년생으로 金學奎 장군보다 열일곱 살 아래다.평남 평원 출신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金學奎 장군은, 三源浦(삼원포)의 동명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40년 韓獨黨 결성에 참여하고 重慶(중경)에서 광복군 참모장으로 임명돼 抗日戰을 전개했다. 신경 군관학교 2기 출신으로 熱河省(열하성)에 있는 만주군 보병 8단 부관(중위)으로 근무하던 朴正熙는 광복 직후 北京으로 가서 광복군 제3지대 「平津대대」에 합류했다. 제3지대장이 金學奎 장군이었다.
金學奎 장군은 熱病(열병) 등의 신병으로 귀국하지 못하다가, 1948년 4월16일 영국 상선 편으로 귀국했다. 金學奎 장군은 곧 대동청년단 조직에 참여하고, 韓獨黨 조직부장에 취임한다. 1949년 6월26일, 현역 군인이었던 安斗熙가 金九 선생을 저격하자, 金學奎 장군은 배후조종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징역 15년刑을 선고받았다.金學奎, 金九의 남북협상 강력 비판金學奎 장군은 자서전에서 白凡이 남북협상을 위해 북한을 방문한 사실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들의 소위 남북협상의 결과는 아니나 다를까 共産黨徒(공산당도)에게 선전에 이용만 당하고, 하등의 효과도 없이 공수래공수거격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좀 당황하였다. 나는 이 기회에 한독당이 평양회담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새출발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金學奎 장군은 자신이 白凡 암살에 연루됐는지에 대해 애매하게 언급하고 있다. 자서전의 관련 부분이다.
<金九 선생이 왜 남북협상을 했을까? 金九 선생이 왜 테러분자에 의해 쓰러졌을까? 그 테러분자 배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나는 잘 알지도 못하려니와 안다손치더라도 현재 내 입장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일생을 두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倭敵(왜적)과 싸운 나로서 왜적이 놓고 간 감옥에서 썩게 된 것과, 일생을 두고 공산주의와 골똘히 싸운 나로서 공산주의를 다스리는 조항(국방경비법上의 이적행위)에 의하여 철창 생활을 하게 된 것에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1950년 6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金學奎 장군을 서대문 감옥에서 석방했다.金學奎 장군은 북한으로 가는 대신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했다. 金學奎 장군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나는 왜 3•8 이북으로 넘어가지 않았는가. 내가 가진 이념 때문이다. 그것은 곧 철두철미한 민족주의며 민주주의다. 생명은 끊을지언정 주의 이념은 변전할 수 없다. 나는 일평생을 통하여 공산주의자와 싸웠다.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들의 손에 많이 죽었고, 또 내 동지들이 그들의 손에 많이 죽었다. 내가 그들(북한 공산당)에게 용서를 받고 산다손치더라도 그들 손에 무참히 쓰러진 내 동지들의 영혼에 대하여 무엇으로 답변할까?>
金學奎 장군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再수감됐다.4•19 직후 풀려난 그는 1960년 4월 韓獨黨을 재건해 대표 최고위원에 취임했다. 1961년 5•16 이후 朴正熙 장군은 옛 상사였던 金學奎 장군을 보살폈다. 金장군을 복권시키고, 1962년 金學奎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朴正熙, 金學奎 장군을 국군병원에 입원•치료시켜원로 한국학자인 崔書勉(최서면•78•현재 일본 거주)씨는 朴正熙 대통령이 金學奎 장군을 도운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崔書勉씨는 연세大 정외과 출신으로, 韓獨黨 산하 대한학생연맹위원장으로 활동했다. 崔씨는 韓日 막후교섭에 관여하는 과정에서 朴正熙 대통령과 친분을 쌓게 됐다.
『1963년경 金學奎 장군이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을 못 할 때, 내가 그분을 등에 업고 가서 국군 병원에 입원시켜 드렸다. 朴대통령이 「입원을 시키고 돌봐 드리라」고 내게 부탁했다. 金學奎 장군은 病席(병석)에서 입버릇처럼 「朴正熙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했다. 朴正熙 대통령의 배려가 없었으면, 金學奎 장군은 국군병원에 입원할 수 없었다』
金學奎 장군의 광복군 제3지대 「平津대대」 대대장이었던 申鉉俊 前 해병대 사령관은 이렇게 증언했다.
『내 아래에서 중대장을 했던 朴正熙 前 대통령은 金學奎 장군을 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朴 前 대통령이 자신의 예전 상관을 깍듯하게 모셨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情理(정리)를 생각하면, 세상을 「親日이다, 아니다」로 재단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알게 된다』
金學奎 장군이 국군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은 金希宣 의원의 자서전 「원장님 빨리 담 넘어요」에 나온다.
<내가 직장을 갖기까지 솔직히 작은할아버지는 현실적으로 쌀 한 톨 도움을 준 적이 없는 분이라고, 집안 어른들에게 늘 듣고 있었다… 어느 날 큰댁에서 전갈이 왔다. 작은할아버지가 중풍으로 드러누워 오류동에 있는 군사원호처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까만 지프에 잡혀간 뒤로 9년 반이 지나 처음 접하는 소식이었다>
1967년 9월20일 金장군이 서울 마포구 망원동 자택에서 68세로 별세하자, 朴正熙 前 대통령은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소설가 李文烈(이문열)씨는 『독립지사 후손을 자처하려면 적어도 直系에다 같은 호적 안에 있는 자손은 돼야 하지 않겠느냐』며 『출가한 從孫女(종손녀)까지 독립지사 후손임을 무슨 훈장처럼 내세우고 설쳐대는 것은 아무리 이 나라에 독립지사 후손이 귀하다 해도 보기에 좀 민망스럽다』고 했다.
朴正熙 前 대통령의 부탁으로 金學奎 장군을 국군병원에 입원시켰던 崔書勉씨는 『朴正熙 대통령과 金學奎 장군의 인연을 안다면, 金學奎 장군의 손녀를 자처하는 金希宣 의원이 朴대통령에게 못질을 하려고 들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첫댓글 밝힐수 없다면. 선거법 위반아닌가? 검찰은 빨리 수사하기 바란다. 내가 만약 낌희선이라면 혀깨물고 죽었을것이다. 쪽팔려서 어디 나갈수가 있는가? 낌희선이 살아있는것이 신기한것이다. 신기남처럼.. 근데. 박정희 대통령은 역시나..대단한 인물이였군.진리인가?
여당 야당은 경제발전에 서로 얼굴을 맞대고 협력하여....아일랜드 처럼 국민소득이 3만불넘게 가도록 힘을 합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