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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가는길에 바람
덕천강을 따라 오르는데 아담한 정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만고풍상을 겪음직한 버드나무와 강물이 어우러져 풍치가 그만이다.
어느새 오후 두시를 넘긴지라 우린 정자에 올라 앉아 간단한 요기를 하며 묵상에 젖는다.
빗발이 점차 굵어지자 웅혼한 천왕봉이 운해에 잠겨 신비를 더해간다.
여름의 끝자락에 비가 나리니 초목은 아연 활기가 돈다.
삿갓이나 두.백이면 시흥이 절로 날 터이다.
잠시 달려 내원사 계곡에 들어선다.
아직 떠나지 못한 행락객들이 서둘러 짐을 꾸리고 있다. 빗발도 아랑곳않는 텐트족들이 간간히 눈에 띈다.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사이로 만년 신비를 머금은 기암괴석들이 속살을 드러낸다.
수림은 점차 깊어진다. 차가 멈춘 곳은 내원사 주차장 앞이다.
석은 차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바람만이 우산을 들고 경내로 향한다.
낯선 방문객에 비구니 스님이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나그네에게 가볍게 합장한다.
가볍게 목례하고 비로전으로 향한다. 간략히 절간 내력을 살펴본다.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이다. 신라 말기에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창건하여 덕산사(德山寺)라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959년에 중건되어 내원사라고 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심우당(尋牛堂)·비로전(毘盧殿)·산신각·요사채 등이 있으나 건물의 규모는 한결같이 작다. 비로전 안에 봉안되어 있는 보물 제1021호인 석남암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1,2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석불은 이 절에서 30리 밖에 떨어져 있는 보선암에서 모셔왔다고 한다.
대좌 중대석에서 불상 조성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영태이년명 납석제 사리호(永泰二年銘蠟石製舍利壺)’가 발견되었다. 또한 보물 제1113호인 대웅전 앞 내원사삼층석탑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이다.
≪참고문헌≫ 名山古刹따라(李孤雲·朴雪山, 우진관광문화사, 1982)
천년의 미소를 머금은 비로자나 석불도 무심한 풍상에 이목구비조차 어렴풋이 흔적만 남아 있다. 중생이 아프니 부처도 아픔인가?
숙연한 마음으로 삼배를 올리니 바람에게 침묵으로 무언가 전하는 듯 싶다.
무정물 또한 어리석은 중생을 교화하니 처처불상이 아닐건가?
문득 한하운님의 싯구가 떠올라 여기에 옮겨본다
전라도 길 - 소록도로 가는 길
- 한하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먼 전라도 길.
생명(生命)의 노래
- 한하운
지나간 것도 아름답다
이제 문둥이 삶도 아름답다
또 오려는 문드러짐도 아름답다
모두가
꽃같이 아름답고
…… 꽃같이 서러워라
한 세상
한 세월
살고 살면서
난 보람
아라리
꿈이라 하오리
담장 밑엔 봉선화가 곱게 피어있다. 내원사 계곡물이 점차 불어난다.
차에 돌아오니 석은 깨어 떠날 채비를 한다. 우린 이 곳에서 가까운 대원사 계곡으로 향한다. 확 트인 시야가 내원사와는 대비된다.
아직도 비는 내리는데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피서객들이 북적인다.
흡사 강인양 폭이 넓고 웅혼한 계곡은 지리산이나 설악산 백담사에서만이 볼 수 있다
사시장철 긏지 않고 흐르는 물은 인간의 나약한 심성을 정화시켜준다
말없는 산천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음이다
어느새 대원사 주차장에 멈춰선다. 방장산대원사란 현판이 시원스레 들어온다
아마도 추사의 필체가 아닌가 싶다.
우린 계곡옆에 아스라이 위치한 솔향각이란 찻집에서 산채비빔밥을 들며 무릉도원을
말없이 바라보며 넋을 잃는다.
피라미 산천어 등이 하얀 비늘을 번뜩이며 거슬러 오른다. 원시의 숲과 비. 바람 그리고 계곡과 바위들이 어울어져 길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한 모퉁이엔 대여섯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차를 나누며 한담을 나눈다.
가볍게 목레하며 바라보니 하나 같이 미인들인데 무슨 사연 그리 많아 회색 장삼에 청춘을 감췄나 싶어 애잔한 사념에 잠긴다. 인간이 추구하는 구도일념과 자연의 본성을 바꿀만한 가치가 있는지 궁금하다.
이 또한 자연의 순리에 어긋남일진대, 인간 문명사는 욕망 억압사라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끊임없는 억압과 해방 그 언저리에 서 있는 게 우리의 현주소일 터이다.
바람 또한 여행을 통해 일탈을 꿈꾸지만 머지않아 평상으로 돌아오고 만다.
자유는 인간의 영원한 고향이지만 극소수만이 이따금 누릴 수 있는 향수와 같은 것일지 모른다. 대원사 관련 글이 있어 스크랩해 본다.
시름도 흘려 보낸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중봉과 하봉을 거쳐 쑥밭재와 새재, 왕등재, 밤머리재로 해서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산자락 곳곳에서 발원한 계류가 암석을 다듬으며 흘러 내리는 산청 대원사 계곡. 맑고 시원한 계류는 사시사철 쉼 없이 흘러 깊은 산중의 정적을 깨운다. 민초들의 애환이 골짜기마다 숨어 있는 곳이기에 안타까움이 더한 곳이다. 매표소를 지나 비구니들의 참선도량으로 알려져 있는 대원사, 지금은 그 이름이 사라진 가랑잎초교, 꿀맛으로 유명한 유평 사과, 하늘 아래 첫 동네 새재 마을까지 어느 한 곳도 버릴 것이 없는 대자연의 경이로움이 넘친다.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으면 세상만사 근심 걱정이 한순간 사라진다.
장마가 소강상태를 보인 틈을 타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는 계곡을 찾아 길을 나섰다. 경남에는 지리산 자락뿐만 아니라 밀양, 양산 등 이름 난 계곡이 어디 한 두 곳이랴. 유홍준 박사가 자신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남한 최고의 탁족처(濯足處)로 꼽은 산청 대원사 계곡을 목적지로 정했다. 출발에 앞서 계곡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며 더위를 식히고 있을 모습을 상상해보니 흥겨운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남명 조식 선생의 숨결이 살아있는 덕천강을 따라 오르다 그 맛이 하도 일품이어서 임금님께 진상했다는 곶감의 고장 덕산 삼거리를 거쳐 대원사 입구에 도달했다. 계곡 입구부터 맞이한 자연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맑은 물소리, 하늘을 가린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소리, 매미와 이름 모를 산새들의 소리가 한바탕 어우러진 대자연의 합창곡이 귓전을 때린다
계곡을 오를 요량으로 등산화에 배낭을 짊어지고 하늘 아래 첫 동네인 새재 마을까지 오르려던 당초 계획을 포기하고 말았다. 대원사 계곡 매표소에서 새재 마을까지는 무려 7.2㎞, 포장이 잘된 도로이지만 걸어서 간다면 줄잡아 두어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아 자연에게는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승용차로 오르기로 했다. 승용차로 오르는 길이지만 계곡의 풍경에 얼마 못 가서 차를 세워두고 계곡 바닥이 훤하게 보이는 물에 손과 발을 담그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30여 리에 걸쳐 흐르는 대원사 계곡의 맑은 물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중봉과 하봉을 거쳐 쑥밭재와 새재, 왕등재, 밤머리재로 해서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산자락 곳곳에서 발원한 계류가 암석을 다듬으며 흘러내린다. 그 많은 샘에서 출발한 물길이 낮은 곳을 향해 사시사철 쉼 없이 흘러 깊은 산중의 정적을 깨운다. 이 때문에 유홍준 박사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너럭바위에 앉아 계류에 발을 담그고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먼데 하늘을 쳐다보며 인생의 긴 여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이 보다 더한 행복이 있으랴’라고 말했다.
매표소를 지나 계곡과 산천을 바라보며 10분 정도 오르니 이곳이 대원사 계곡임을 알리는 ‘방장산 대원사(方丈山 大源寺)’현판이 적힌 일주문이 나왔다. 고풍스러운 맛은 없지만 그래도 절 경내에 들어왔음을 알리는 건축물이기에 차에서 내려 대원사까지 걸었다. 경남도 기념물 제114호로 지정된 대원사는 신라 진흥왕 9년인 548년에 연기(緣起) 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과 1948년 여·순 사건 때 화재로 폐허가 된 것을 1955년 법일(法一) 스님이 다시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는 사찰이다. 양산의 석남사와 충남 수덕사의 견성암과 더불어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參禪) 도량으로 알려진 대원사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밖에 원통보전(圓通寶殿)에서 산왕각(山王閣)에 이르는 돌계단과 절 뒤편의 차밭, 그리고 추사 김정희의 힘찬 글씨가 돋보이는 요사채의 단아한 모습은 대원사만이 간직한 정갈한 멋이다. 절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용이 100년간 살았다는 전설의 용소(龍沼)가 있는데 바위가 뚫려서 굴처럼 된 것으로 항아리 모양을 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대원사 계곡의 깊은 맛은 우리 민족의 현대사와 지리산을 바라보는 민초들의 심성에 숨어있다.
흔히들 ‘죽었다’는 뜻으로 쓰는‘골(계곡)로 갔다’라는 말의 유래가 이곳 대원사 계곡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 민족의 슬픈 현대사의 한 단면인 빨치산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토벌을 하기 위해 골짜기에 들어갔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빨치산이 되었건 골짜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살아서는 못 나왔기에 ‘죽는다’는 말이 ‘골짜기로 갔다’의 줄임말인‘골로 갔다’로 쓰고 있다.
골짜기가 깊다 보니 변환기 때마다 중요 피난처이자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한 대원사 계곡은 1862년 2월 산청군 단성면에서 시작해 진주로 이어지면서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한 농민항쟁에서부터 동학혁명에 이르기까지 변혁에 실패한 사람들끼리 모여 그들만의 세상을 꿈꾸며 화전을 일구며 살았던 곳이다. 또 일제시대에는 항일의병의 은신처가 되었고, 6·25전란에 이어 빨치산이 기승을 부릴 때는 낮에는 반역의 땅이 되고, 밤에는 해방구가 된 비극의 현장이기도 했다.
대원사를 나와 조금 오르면 가랑잎 초교로 유명한 옛 유평초교가 지금은 청소년 수련원으로 이름을 바꿔 그 자리에 있다. 길가에는 토종닭과 산채밥 등을 파는 민박집 20여 곳이 산행에 지친 등산객의 안식처가 된다. 이곳에서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까지는 10.7㎞로 대략 7~8시간을 잡아야 오를 수 있다. 계곡의 끝인 새재 마을까지는 삼거리 마을과 중땅 마을을 거쳐 외길로 오른다.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간판이 유독 눈에 띄는 새재 마을에서 천왕봉까지는 8.4㎞로 준비 안된 산행은 절대 금물이다. 대원사를 거쳐 한달음에 계곡의 끝까지 오른 편리함이 좋았으나 한 발씩 내디디며 계곡의 정취를 고스란히 담아오지 못한 서운함도 적지 않았다. 오르는 길 양편에는 옛 화전에 심은 유평 꿀사과가 올 가을 수확을 앞두고 토실 토실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대원사 계곡 전역이 국립공원지역으로 허가되지 않은 곳에서 취사를 하거나 야영을 하게 되면 벌금이 부과된다. 성수기는 어렵겠지만 지금쯤은 쉽게 민박집을 잡을 수 있다. 주민들이 직접 키우는 토종닭 백숙과 산채비빔밥의 맛은 대자연과 어울려 그 맛이 장난이 아니다. 휴가철을 대비해 미리 민박집 전화번호와 주소를 알아내 예약해두면 결코 후회하지 않는 휴가가 될 것으로 보인다.(문의는 산청군청 관광행정과 055-970-6421~3) -경남일보-
석은 차에서 휴식을 취하고 바람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대원사 경내에 들어선다.
심산유곡에서 수행하는 비구니 스님들이 간간히 눈에 띈다.
수덕사, 석남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비구니 사찰임이다.
별다른 특징은 없지만 천하 제일의 천왕봉 기슭에 자리잡아 주야장천 흐르는 계곡물따라
독경소리 울려퍼질 제 질기고 질긴 속진번뇌도 한올 한올 씿겨져나갈 터이다.
더욱이 근.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기에 나그네 발길은 무겁기만하다.
일주문에서 합장하고 차로 돌아오니 석은 벌써 삼매경에 빠져있다.
빗발은 점차 거세지고 마땅한 정처를 찾지 못해 우린 중산리 산장으로 향한다.
중산리는 천왕봉으로 향하는 베이스 캠프라 할 수 있다.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 시야에 들어온다. 검은 구름이 산정을 휘감고 우연이 감싸안으니
더욱 신비로운 영산의 위용을 드러낸다.
곳곳에 민박이며 음식점 탐방안내소등이 나그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지도 한 장 구입하고 천왕봉 등정길을 물으니 안내원이 8-9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말한다.
딱히 등산준비도 없어 영산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발길을 돌린다. 마침 빗발도 사그라든다.
떠나는 아쉬움에 우린 중산리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 천왕봉이 잘 보이는 분지에서 저녁준비를 한다. 석의 일품 요리 솜씨와 경이 챙겨준 밑반찬으로 천하 제일 명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화려한 만찬을 마치니 돌연 없던 용기가 솟는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지 말고 다시 한번 도전해 보라고 남명 선생이 호통을 치는듯
어느새 날도 저물어가니 우린 다시 중산리 산장으로 향한다.
지리산 용궁산장 신씨 아주머니가 우릴 반가이 맞아준다. 인심이 후해 보이고 아직은 고운티가 나니 동가홍상이라 하룻밤을 의탁하기로 마음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