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선 밑의 글 전문은 웹서핑중 퍼온 글입니다. 언론사 기사도 아니고 불펌제한도 없으므로 저작권 문제는 상관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여러가지 이유로 이성계가 화교이거나 혹은 화교, 한족정권과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지않나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한민족 고유의 사상을 이어온 정통성은 고려의 멸망으로 맥이 끊겼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조정권은 한민족을 우민화하고 엄청난 해악과 폐해를 낳았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나 이것은 저 개인의 생각일 뿐이므로 다른 분들에게 '이성계는 화교 아니면 화교와 관계있으니 믿어라'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화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은 그렇게 생각하시고 맞을거라고 생각하는 분은 그렇게 생각하시구요
'화교가 아니다, 이성계는 화교와 관계없다'라고 한다 해도 저는 아무런 할말이 없습니다. 각자 생각이 다른것이고
그런 것으로 갑론을박해봐야 소모성 논쟁만 될것이 뻔하고 누가 뭐라 해도 저는 제 생각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반박댓글에 대해서 댓글 달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다르고 당신 말은 틀린것 같다 하여
필요없는 비난성 글은 삼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민주사회에서 의견의 다양성은 당연히 인정받을 권리입니다.)
그냥 이점에 대해서 관심 있으신 분은 글 읽고 참고하시라고 글올립니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100% 확실한지는 모르겠으나 이성계가 전주 이씨라는데 원래 전주는 중국에 있었던
지명이고 그것을 나중에 전라도에 있던 완산주에 갖다 붙여서 완산주를 전주로 지명을 바꿨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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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후손 이성계?
[이조의 개국 대첩]
(명나라의 지시에 따른 이조개국과 고려 양민 20만 대살륙)
이성계부자가 이조를 개국한직후 전국에 고려왕씨를 모두 잡아 죽였는데 이사건이 이조개국대첩이라고 합니다.
그때 죽어간 숫자간 약20만명인데 우리의 교과서역사에서는 이 사실을 철처히 은폐하고 있다.
나찌의 유태인학살/박해와 같은 일이었다.
약 3년에 거쳐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왕족직계의 수급 (목을 벤 시체)은 쌀 두가마니
친사촌계열은 한가마니 외사촌은 반가마니의 포상을 지급했다.
이씨조선왕조실록 (1395년 4월 26일) 기록에 보면 왕씨(王氏)들은 모두 어머니의 성으로 바꾸도록 명령했다.
이를 볼때 얼마나 철저하게 왕씨를 박멸했는지 짐작할수있을것이다.
※ (새로 건국한 정권에서 기존 왕조의 세력을 약화하려 했다는 것은 잘잘못을 떠나 그들 입장에선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됨)
이조 정조때 왕씨로 다시 원래 성을 바꾸어 사용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왕씨의 본관을 옛 고려의 수도인
개성이라고 하고 왕원을 1세 조상이라고 명하였습니다.
허나 여전히 이러한 사실을 모른체 생활 하는 사람이 많았고 세월이 많이 흘러 자신의 혈통의 시조가 누군지는 알 수 없게 하였다.
[개성(開城) 왕씨(王氏) 유래]
개성왕씨의 시조 산해는 주신시대 신려(성주)이었는데, 후에 중국 황제 헌원씨가 되었고 헌원의 17세손
조명은 유누와 함께 동래하여 지금의 평양 일토산하에 정착하였다. 그후 조명의 후손 수극은 기자가 왕이 되었을 때
사사가 되었고 왕씨로 사성을 받았다. 그 후, 수극의 12세손 贄(지), 贄의 45세손인 염염의 13세손인
몽으로 이어져 왔는데 몽은 신라건국 초기에 시중을 지냈다.
당시 비결에 일토초가위왕이라 하였으므로 그 화가 미칠까 두려워 일곱째 아들 琳(임)을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10여년간 수도 이인의 가르침에 따라 전, 신, 차 등으로 세 번 변성하였고 무일이라 개명하였다 하며 차무일의
셋째 아들이 왕식시였고 그의 후손인 건(고려태조)이다.
그는 송악군(개성의 고호)사람으로 신라 말기에 사직의 위기와 민심이 신라에서 이탈됨을 깨닫고 901년 궁예가
신라에 반기를 들고 자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이 되었을 때 그를 도와 913년 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궁예의 횡포가 나롤 심해지자 민심이 궁예를 싫어하고 건을 추앙하게 되어 918년 6월에 례하장군등이
궁예에게 반기를 들고 원래 주신의 성주였던 가문의 건을 추재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왕씨 일가가 500여년 향국하였던 시원이다.
건은 국호를 구려를 계승한 뜻으로 고려라 하고 국기를 튼튼히 하여 마침내 신라 백제 려진을 통일하여 국위를 선양하고
민족문화를 후세에 전수하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따라서 왕씨일가의 세력도 크게 번성하였는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반역을 일으키고 이씨조선을 개국하여 대대적인 살륙을 가하니 산속깊이 숨어들은 일부는 옥(玉), 금(琴), 마(馬), 전(田), 전(全), 김(金)씨 등으로 변성하여 혈맥을 지속해 오다가 정조때에야 비로소 문헌을 조사하고 전국 각처로 수단이나 세보를
기록하게 되었으며 내주가 수도로 정한 송도(개성고호)를 연유하여 본관을 보성이라 하였다.
그리고 원(垣) (동양군)을 1세조로 함은 대부가 헌자를 할아버지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며 신종의
제2자서(양양공파)고종의 제2자(안경공파)충정왕자 제(시중공파)현종의 제4자 기(평양공파)등을 각각 파조로 하여 계세하고 있다.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조 태조 이성계는 명나라의 밀명으로 위화도 회군하여 정권을 잡은 후, 다시 명나라의 명에따라, 우왕과
실권자인 최영장군을 "중국을 정벌하려한 죄"귀양 보낸 후에 살해하고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옹립한 후에는 "중 신돈의 자손이라고
모략"하여 또 살해하고 고려의 왕손인 공양왕을 옹립 한 후에는 "정신이 이상하다"고 모략하여 폐위시킨 후에 강제로 왕위를
넘겨주게 한 후, 1392년에 역시 명나라의 명을 받아 이씨조선왕조를 창업을 한다.
고려의 장교였던 화교출신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왕조를 창업한 것이다.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왕조(조선) 를세운 이성계는 고려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재건움직임등에 직면하자
명나라로부터 대대적인 숙청을 실시하라는 명을 받게되자, 후일의 잡음등을 없애고저 전국적으로 고려의 신하들과
왕족들을 색출하여 살해하게 된다.
일례로 그 수법중의 하나를 소개하자면 개성의 왕씨들을 모두 체포하여 모았는데 그 수가 3만에 이르렀다.
이조왕실은 왕씨들을 각 섬에 귀양보낸다는 이유로 커다란 배 1600척을 만들게 한 다음, 저녁무렵에 일시에
배에 태워 바다로 나간후 심야에 이르자 배의 바닥을 뚫어 배를 침몰시켜 수장하는 수법을 썼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남은 일족들은 심산유곡 깊은곳으로 도망쳐 성을 바꾸어 살게 되었는데 성을 바꾼 내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王--玉(점을찍음) 全(갓을씀) 田(옆을막음) 등등하여 왕씨가아닌겄처럼 살며 생명을유지했는데 이전에 이러한 성씨는 없었다는
사실이 이 성씨들이 왕씨임을 증명한다.
또한, 고려의 지조있는 신하들은 강원도 정선의 두문동으로 숨어들어가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분들을(두문동출사105인, 杜門洞出仕105人) 이라고 하여 충절의 표본이 되었는 바. 그후로
5백년의 세월이 지나 이조가 왜에 멸망하자 본래의 성씨를 찾아 왕씨가 되었다. 오늘날 왕씨는 이러한 모진
풍파속에서 살아남아 전해져 온 수난의 성씨이다.(두문동출사72현 이라고 해서 원래 광덕산의 두문동에
들어가신 분중에 일부는 정선의 두문동으로 거처를 옮겨 은거하신것임)
우리가 이조개국의 진실을 알수 없었던 이유가, 그진실은 명 황실만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성계는 이조 개국 당시 명황실에 밀서를 보내 자신이 "화교후손" 임을 밝혔다고 합니다.
"진실은 밝혀지라고 있는겁니다."
전세계 한민족 커뮤니티의 중심 '한열사'
당신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마음대로 해석하고는 막말을 하는데 내 댓글들도 안 읽어봤나? 내가 언제 조선이 중국역사 일부라고 했나? 말을 해 보쇼? 언제 그랬냐고. 참 어이가 없는 사람이네... 이해력딸리고 막말하는걸로 봐선 당신이 정신분열증같으니 자진탈퇴하고 정신병원 가보구려 웃기지도 않아서 원
조선을 건국 하는 이성계는 고려를 건국 하는 왕건 처럼 그다지 포용력이 넓은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이성계의 5번째 아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보다 더 포용럭이 적은 인물 이구요. 아무리 자신의 아들을 내세워 권력을 잡아 남용 하려는 세력들 중에 외쳑 세력의 권력 남용과 부패와 발호를 막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너무 자신의 처남들과 아들의 장인과 처남들 즉 사돈 까지 제거 하려고 죄를 뒤집어 씌어 제거하는 처사는 너무 과한 숙청 입니다 차라리 법으로 외척은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최소 100년은 거론조차하지 못하게 막아놓으면 될것을 굳이 죽일필요 까지는 없었다고 생각 합니다
그게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법으로 막는다손 치더라도 대신들의 지지를 받는 외부세력이 들어서게 되면 또한 자기입맛으로 바꿀수있는것이 법입니다. 즉 사람이 무서운거지 법은 그 다음이지요. 그런점에서 그런 숙청이 가해졌다는것은 당시 반대세력 불안하게 하는 세력이 그만큼 많았던 시기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반대세력이 존재한다는것 즉, 그런 일을 할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었겠죠. 법은 왕이된 자와 뜻을 같이하는 대신들이 바꾸면 그만인거거든요. 고려의 왕과 법을 갈아엎은 얼마전의 이성계처럼... 그것도 당시 몇십년 전의 일이었을 뿐이죠. 당시는 법이 아니라 사람이 겁나는 시기라고 봅니다.
도데체 "명나라의 밀명으로"라는 근거는 어느 사서에서 나온거요? 왜 출처를 안적어놓지? 당신이 화교는 아닐지 몰라도 이성계가 중국인이라면 중국에서 조선까지 그들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지 않을까봐? 진짜 머리 나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