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신륵사
서울의 아들네 집에서 일요일을 맞았다. 요즘 절집을 찾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들이 오늘은 날씨도 많이 풀렸으니 여주 신륵사를 다녀오자고 하였다.
신륵사는 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유명 사찰이었으나. 대구에서 너무 말고, 또 그 절을 들리는 답사팀을 만나지 못해서 여태까지 가보지 못했다. 나로서는 더 반가울 수가 없다. 일요일인데도 중학생인 맏손자와 손녀는 학원에도 가야하고, 하는 일이 있다면서 빠졌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맏내 손자만 따라 나선다.
여주로 가는 길에는 봄이 활짝 열려 있었다. 노란 개나리가 지천인 것을 보니 대구보다는 절기가 조금 늦은 듯도 하다. 신륵사는 남한강의 상류인 여강을 끼고 있어 예부터 풍광이 뻬어난 곳으로 소문이 났다.
절의 역사를 보면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의 꿈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서 이곳을 지정해주었다고 하였다. 원횯대사가 7일 동안 기도를 하였더니 9마리 용이 연못에서 나와서 승천했다. 또 하나의 전설은 고려 우왕 때 맞은 편의 강가에 마암(馬岩)이라는 바위가 있다. 바위 부근에서 용마가 나타나서 피해를 주므로 나옹선사가 말에 굴레를 쉬워 다스렸다고 한다. 앞 뒤 맥락으로 보아서는 불교적 설화라기보다는 우리의 토속신의 냄새가 더 강하다. 토속신앙지가 불교에 복속되어 불교 성지가 되었다는 것은 내가 절집을 찾아다니면서 수없이 겪었다. 이 절도 토속신앙터에 절을 세웠다고 믿는다.
더구나 용은 물을 다스리는 수신적 성격이 강하다. 여주의 너른 들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기우제를 지낸 곳이 마암이 아니었을까. 바위신앙도 우리의 토속신앙이다. 강물은 농경사회의 뿌리이다. 물과 관련이 있는 일에서 이 설화에 의하면 용은 악역을 맡는다. 이것은 한국적인 풍수설화에 의거한 비보신앙에서 온 것이리라. 용은 농경사회에서 비를 오게하는 선신인데 여기서는 악용이 되었고, 그 악용을 불교 스님이 제압했다는 것은 신륵사가 이 자리에 들어서게 된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고 믿는다.
조선의 유학자들도 여주는 물이 아름다운 땅이라고 했다. 신륵사에서 바라본 지금의 여강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고향 경주에서 최고의 명문세가를 이루는 양동이씨가 실은 여강이씨이다. 선조가 바로 이땅에 근거하여 살았던 사람인 것을 생각하니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신륵사를 설명하는 글이, 남한강의 상류인 여강의 물이 감싸 안고 흐르는 나지막한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았다 리고 하였다.
신륵사를 소개하는 사진에 자주 나타나는 것이 동쪽 언덕에 있는 전탑이다. 고려 때 쌓았다고 한다. 탑이 있는 언덕에 오르면 굽이치는 여강이 한 눈에 들어와서 아마도 가장 뻬어난 경치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조선 후기 1874년에 김병기가 쓴 중수기에 의하면 ‘신륵사는 고려 시대에 대덕이 머문 사찰이며, 경치가 아름다워 문인들이 시로서 칭송했다. 유학자들이라 절을 세울 수는 없다지만 어찌 폐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기록으로는 1379년에 전각을 신축-전수하였고, 1382년에는 대장각 안에 목은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서 만든 대장경을 봉안했다. 1469년에 세종대왕을 여주 땅에 모신 영릉의 원찰로 삼으면서 보은사라 했다. 조선은 국가 정책이 억불이었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불교를 가까이 했다. 신라 이래로 왕릉 부근에 원찰을 세우는 것은 하나의 전통이었다. 그래서 태조는 정비인 신덕왕비 강씨의 원찰로 흥천사를 세웠고 자신의 원찰로는 건원릉에 개경사를 세웠다.
불교의 부패를 역성혁명의 구실로 살았던 조선이었다. 태종은 이 때문에 원찰을 세우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세종은 내시를 시켜 밤중에 궁궐에 내불당을 두도록 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로 왕가에서는 질병으로, 또 일찍 죽는 등 나쁜 일이 연이어 일어나자 세종의 영릉이 있는 곳에 원찰을 세웠다고 하였다.
중종이 반정으로 즉위한 해에 유생들이 흥천사의 물건을 훔친다고 하여 왕실에서 내시를 보내 조사하게 했다. 유생은 내시를 때리고, 절을 불질렀다. 유생을 벌 주려 하자. 유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절은 왕실과 관계가 없는데 내시를 보내 일을 만드셨는가. 실수 하신 거다’ 그러면서 종사전복까지 말했다. 이에 놀란 중종이 ‘불이 이웃에 번지면 인명피해가 나는데, 이게 사사롭다고.(1512년 6월 15일 중종실록) 더 이상의 이야기거리가 많지만,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이 절을 보는 시각을 잘 보여준다.
신륵사의 현 주소는 대한 조계종 제2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혼자 따라온 막내 손자는 잘 앞의 상점에 들리고 싶어 하는데, 절집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어른들이 못마땅하여 얼굴은 짜증스럽고, 걸음걸이가 비틀거린다. 이녀석도 멀지 않아 어른들의 나들이에 따라오지 않으리라. 집사람은 법당에 들린다. 법당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보전이었다. 아미타의 협시보살이 관세음보살이니 관음도장이라는 절집 설명도 틀린 것은 아니다.
이 절에는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문화유산이 여럿이다. 앞에서 말한 동쪽 언덕의 전탑도 그 하나이다. 윗 부분은 최근에 보수한 듯하고, 아래부분에는 옛 탑이다. 여기서 바라보는 여강은 정말 좋았다. 우리 가족은 탑과 강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신륵사에는 보물 6점과 경기도 유형 문화재가 여러 점 있다. 그 중에도 여주 신륵사 다층 석탑은 유명하다. 고려시대의 탑이다. 다층 형식과 아름다운 조각상은 고려 말의 양식같은데, 이 탑을 두고, 이렇쿵 저렇쿵 해석이 많다. 조각의 내용은 잘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용을 상징한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나 같은 아마추어는 헷가리기만 한다.
이 절에는 나옹화상의 흔적이 많다. 고려 말의 유명한 스님인 나옹화상과의 관련성은 분명해 보인다. 목은이 쓴 비문에 의하면 나옹화상은 경상도 영해사람이다. 영해에는 목은의 유적지도 있다. 두 사람은 동향의 인연으로 맺어진 것은 아닌지.
경상도 지역의 사찰 답사를 가보면 거의 예외 없이 절의 창건은 신라시대이다. 이 절도 신라의 원효대사 이야기가 나오지만 고구려 사찰이 뿌리가 아닐까라도 한다. 나 또한 이 지역의 사찰은 답사를 다녀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또 하나는 내가 아는 분이 관음 33 성지 답사에 참여하면서 신륵사도 다녀왔다고 하였다. 관음 33 성지라는 말은 나에게 낯설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관음 신앙의 3대 성지로, 양양의 낙산사. 경남 남해의 보리사. 그리고 강화도의 보문사를 꼽는다. 보문사 대신에 여수 향일암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3대 성지의 특징이라면 모두 물가의 사찰이다. 관음보살의 주처가 인도의 보타 낙가산이며, 바닷가이다. 그래서 물가의 절이 신앙지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던 수월관음도의 보살상이 바로 물가의 관음보살을 그렸다. 신륵사는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는 사찰이고, 아미타 부처님의 협시보살 관음보살이니 관음성지라고 할 수도 있겠다.그러나------,
신륵사는 내가 사는 대구와는 너무 먼 곳이라서, 108사 답사 계획에 들어갈 수 없었을텐데, 이번 기회에 다녀온 것은 행운이라고 해야겠다.
집사람이 법당에 들어가고, 아들 내외는 둘이서 절집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다. 나는 절 마당에서 합장하고 삼배했다. 그리고 나옹선사의 시구절을 떠올려보았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첫댓글 선생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가보지 못한 곳이라 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나옹선사글도 거실에서 매일 보는 것이라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