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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루넷 기사에 실린 기사입니다.
저 아래에 있는 기사는 s군이 송승헌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뒷바침 해 준 네이버의 예전 기사입니다.
<톱스타 S군...원로 영화배우의 숨겨진 아들? >
몇년 전부터 떠돌던 톱스타 S군과 원로 영화배우 트위스트 김에 대한 소문이 실체를 찾아가고 있어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트위스트 김은 신성일씨와 '맨발의 청춘'에 출연하는 등 70년대 많은 인기를 누렸던 원로 영화배우이며, 톱스타 S군은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청춘 스타 입니다.
그런 S군과 원로 배우 트위스트 김과 관련된 소문은 두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것.
이런 소문은 몇년전부터 계속되어 왔기에 네티즌들 입에서 떠도는 단순한 풍문으로 치부되어 오던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트위스트 김은 충격적인 고백을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모 일간지 보도에 따르면 트위스트 김(본명 김한섭 67)이 최근 자신의 자서전에서 70년대 중반 한 여자를 만나 한달동안 서로에게 빠져들었으나 그 여인은 "나는 자기 애 낳아서 잘 기를 거야"라고 말했다고.
그 후 여자는 자신의 애를 가진채 갑자기 떠났는데, S군과 자신이 부자사이라는 소문의 출처를 확인해보니 놀랍게도 S군 어머니의 옛날 친구였다고 트위스트 김은 밝히면서 "한시절 무책임하게 살았던 것에 대한 죄값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게 이 보도의 요지.
그러나 의혹만 있을 뿐 증명 된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팬들은 물론이거니와 당사자인 S군에게도 큰 충격.
S군과 트위스트 김이 부자사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친자 확인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이는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기 때문에 이같은 논란 역시 의혹만을 가득 안긴채 세월속에 사그라들것으로 예상됩니다.
네티즌들은 "예전부터 있어왔던 얘기"라며 그다지 놀라지 않는 눈치입니다.
어느 네티즌은 "예전에 이런 소문이 꽤 나돌았지만 사람들이 거의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 당시에는 가만히 있다가 지금와서 S군과의 관계를 아리송하게 풀이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과거 김희선도 '친부설'에 휘말리다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나는 등 톱스타 출생에 관한 루머는 끊이질 않았으나, 이번 경우는 원로 영화배우 트위스트 김이 직접 톱스타 S군에 대한 관계에 '?'를 던져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루넷 편집국)
릴레이 인터뷰6] 트위스트 김
[연예오락] 2001년 08월 16일 (목) 10:35
지난 4월 악극 ‘아빠의 청춘’에서 보여준 트위스트 김의 저력은 대단했다.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타고난 재주도 그만이었지만 함께한 배우들 중 가장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그 열정만은 십대의 그것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깡마른 몸에 작은 키, 바람불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호리호리함 속에 어떻게 그 큰 에너지를 담고 있는지 의아스러울 정도다.
최근엔 10대들의 러브콜 세례에 더욱 분주해졌다. 연예계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그룹 ‘클릭B’의 ‘아주 오래된 연인들’뮤직비디오에 출연하는가 하면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 학생들이 만드는 단편영화 ‘수사반장 트위스트 김’에 주인공으로 캐스팅 돼 촬영을 마친 상태다.
“애들과 같이 동해바다에서 촬영을 하는데 내 열여덟 열아홉 시절 생각이 나더군요. 잔머리 굴리지 않고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클릭B’ 녀석들의 모습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라며 감회가 새로웠던 작업이라고 그는 회고한다. 이 작업에서 그는 60년대 영화 ‘맨발의 청춘’을 배경으로 한 뮤직비디오에 간간이 원경으로만 등장하다 맨 마지막에 확실한 클로즈업을 받는다. 청소년 시청자들 입에서 “웬 아저씨?”라는소리가 나올 만하다. 뿐인가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 학생들이 만드는 영화 ‘수사반장 트위스트 김’에서“학생들이 시나리오를 아주 잘 썼고영화를 사랑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며 출연료조차 마다하고 오직 연기자로 영화에 몰입해 주었다.
‘연예계 생활 47년’인 지난 지금까지 늘 달고 다니는 별명 ‘한국 연예계 청바지1호’. 청바지에 스포티한 셔츠 차림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패션은 세미 수트에 60,70년대 록큰롤, 트위스트와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알큰 선글라스 차림이었다. “아휴, 너무 청바지만 입고 다녔더니 사람들이 질려하는 것 같아서요. 오늘은 일부러 이렇게 입고 왔는데, 안 좋은가요?”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혹 촬영에 지장이라도 있을까 우려하는 모습이 바래지 않는 열정으로 비춰진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그를 젊은 프로젝트에 초대받을 수 있게 해주는 비결인 모양이다.
<>“ 나의 잊지못할 첫사랑은 영화”<>
“사람들은 흔히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기자에게 오히려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된 영화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사뭇 진지함을 넘어서 47년 연기인생을 회고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그게 사랑이죠” 자신의 영화에 대한 생각이 부모의 자식 사랑처럼 영원하기를 원한다는 그는 두 가지 덕목을늘 가슴에 아로새긴다고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책임’과 ‘희생’이다. 때문에 개런티 한푼 받지 않고도 후배들과의 작업에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었으리라.
“한번 영화를 사랑했다면 그건 영원해야 합니다. 흔히 무대 위에서 죽을 때까지, 카메라 앞에서 죽을 때까지 연기하겠다던 사람들도 어느새 뒤돌아보면 다른 사업을 하고 있곤 하죠. 하지만 난 예순 다섯인 지금까지 관객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연예계에 나오는 신세대들 중에는 돈을 벌기 위해 연예인이 된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디다. 하지만 1950년대 우리 같은 배우들이야 어디 돈벌기 위해 배우가 된 사람이 있습니까?”
배우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만인에게 보여주고 그 대가로 사랑을받는 사람이라고 그는 정의한다. 지금처럼 TV가 흔했던 것도 아니고 오직 영화와 무대 밖에는 없었던 그 시절 하지만 배우는 다른 직업과는 달라서 자신의 경험이 가장 큰 재산이라고 말하며 감회의 미소를 짓는다.
언젠가부터 대중매체를 통해 그를 만날 기회가 적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하루밤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기백만원에 달하는 몸값을 받는 인기인이다. “돈이라는 게 찾아간다고 오는 게 아닙니다.
그냥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 연락이 오죠. 돈이 ‘형님 나 형님한테 갈랍니다’ 저도 그렇게 돈벌었습니다.” 농을 섞어가며 하는 말이지만 그안에 담긴 삶의 철학은 우리네 모두가 배워야 하는 여유이자 프로의식이아닐까. “나는 프롭니다. 돈을 받아야 할 곳에서는 당당하게 많이 받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돈을 많이 받는 것이 프로는 아닙니다. 개런티 한푼 받지 못하는 일이라 해도 그 일에 의미가 있다면 과감히 자신을 희생해야 겠죠.”
<>엔터테이너의 원조 트위스트 김<>
사실 트위스트 김은 영화배우로 널리 알려진 엔터테이너다. 신상옥 감독의 ‘맨발의 청춘’으로 스타덤에 올라선 이후 무려 2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해 왔고 짬짬이 가수로도 활동, 67년 아세아레코드에서 ‘폭발1초 전’을 낸 이후 70년 역시 아세아레코드에서 ‘오발탄 사나이’, 80년 히트레코드에서 ‘사나이 참사랑’, 그리고 최근엔 태성음반 민태성 회장과 의기투합해 ‘`중장년 층에겐 젊음을, 젊은 세대들에겐 좋은 본보기가 되는 음반’을 만들기로 약속, ‘새옹지마’라는 4번째 앨범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가 연기 초년병 시절 신필름에서 3년 넘게 연수생으로 있었던 적이 있었다. 한날 단역으로 출연하는 그를 본 허장강 선생이 그를 조용히 불러놓고 이르는 말이 “야 임마 너 다재다능한 배우가 되라”였다. 요샛말로 한다면 엔터테이너가 되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말도 탈줄 알고, 춤 연습도 계속하고 노래도 배워라 그러시더라구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힘도 돈도 빽도 없고 얼굴도 못생기고 체격도 안 좋은 놈이 배우로 살아남기 위해선 그 방법 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렇게 자신을 다잡은 그는 열정 하나로 모든 것을 밀어붙였다.
그 첫 결실은 ‘연예인 경마대회’였다. “다들 트위스트 김 저놈은 말 못 탄다고 했어요.” 하지만 내심 자신있었던 그는 당시 결혼 전이었던 지금의 부인과 운전기사에게 자신의 마권을 사라고 귀띔했고 우승한 덕분에 6.5배가 넘는 배당을 그들에게 안겨주었다. 그 후 연이은 결실이 맺어지기 시작했다. 철인삼종 우승도 그 중 하나. 고교시절 수영선수로 전국체전에까지 참가했고, 사이클 클럽 활동도 꾸준히 해왔던 터라 마라톤만 연습하면 충분히 도전할만하다고 여겨 시작한 일이었다. 당시 국내최초의 경기인지라 TV생중계까지 됐던 이 경기에서 우승을 거머쥐었고 또 한번의 국제대회까지 참가, 우승했다.
“당시 쇄골골절 부상까지 당하며 얻은 우승이라 그 감회는 정말 짜릿한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원한 것은 우승트로피도 상금도 아니었다.
오직 연기를 하기 위한 기초체력과 다재다능함을 연마하기 위한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이 소중한 것이었다. 요즘도 30분, 1시간씩 춤 연습과 연기 공부를 하는 것도 그에게는 같은 이유 때문인 것이다.
<>못생긴 사람도 바람 필 수 있다?<>
트위스트 김의 바람기에 대해선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다. ‘맨발의 청춘’으로 스타가 된 이후로 마흔 다섯까지 수많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눴다. 하지만 그의 바람기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여자 밝힘증’과는 좀 다른 구석이 있다.
“반항이었죠. 나처럼 못생긴 사람도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그러나 만인에게 드러나 버린 자신의 콤플렉스를 이기기 위한 방법으로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너무도 큰 상처를 남긴 일이기에 지금은 무척 후회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고통(?)으로 꽤나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신성일 씨랑 짝이 돼서 열심히 바람 피웠죠. 한번은 울산으로 촬영을 갔는데 그날따라 둘 다 촬영이 없었어요. 신성일 씨가 여자 하나 꼬시러나가자더군요. 좋죠. 얼른 따라나가서는 각각 여자 하나씩 데리고 들어왔어요. 그리고는 한 방에서 잠이 들었죠.”
결국 이 사건이 모 일간지에 실리자 엄청 화가 난 엄앵란 씨가 당시 신성일 씨가 운영하던 사무실 집기를 완전히 부숴 버리는 소동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뿐인가.**** 바람 핀 전적 때문에 얼마 전에는 탤런트 송승헌이 트위스트 김아들이라는 말이 나와 또 한번의 소동이 벌어지고 말았다. “기자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화를 해서는 진위 여부를 묻는 거예요. 당연히 아니죠. 우리 집사람도 난리가 아니었어요. 그때 그렇게 번잡스럽게 놀아 이런 사단이 났다는 거죠. 할말이 있습니까?” ******
결국 주변의 끊임없는 추궁에 스스로 걱정이 된 그는 아는 사람을 시켜 실제로 송승헌 집안의 내력을 알아보는가 하면 20년 전까지 만났던 여자들을 모조리 하나둘 되새겨보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조폭 출신 배우 김한섭<>
그 엄청난 바람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까지 ‘조강지처 영옥씨’와 해로하고 있다. 사실 그의 부인은 지금은 고인이 된 여동생의 친구였다.
지병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전 남기신 유언을 받들어 이루어진 연이었다. “당시 전 무척 말썽을 많이 피웠죠.” 말썽 정도였으랴. 그는 실제로 당시 부산일대를 휘어잡는다던 칠성패(지금의 칠성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그들의 주 사업인 밀수 등에 개입하고 있었다. 제 아무리 친구의 오라버니라 해도 조폭을 남편감으로 생각하는 여자는 없는 법. 결국 그는 강제로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그 일로 결혼까지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을 제대로 꿔보기도 전 5.16군사혁명이 터지고 밀수 건과 관련돼 칠성패 두목이 사형을 당하자 그는 서울로의 도주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니 맘 변하면 죽는다. 내 알제. 내 성공하면 니 꼭 부른다.”
신파극에서나 봄직한 약속을 남기고 뒤돌아서는 남편을 기다리며 새색시는 3년을 독수공방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뒤바꾼 신필름 생활이 시작되었다. “3년 동안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생각나는 건 보리차 건더기 건져 먹으면서 살아온 세월. 절로 눈물이 나죠.” 수없이 많은 날들을 퉁퉁 불은 보리차 건더기를 건져먹으며 그는 의지를 다졌고 결국 ‘맨발의 청춘’으로 성공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부인을 불러 올려 신접살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신성일 엄앵란 트위스트 김 트리오의 인기가 급상승하며 ‘사랑의 앨범’ 지방 순회공연을 부산 제일극장으로 가게되었다.
“조폭이 유명배우가 돼서 내려왔다고 극장장이 그렇게 좋아하더라구요.
” 그러나 이틀계획으로 간 공연을 하루 남겨두고 급히 극장장의 부름을받은 그는 청천벽력이 무너지는 비통함에 휩싸이게 되었다.
“극장장이 느닷없이 ‘한섭이 도망가’라는 거예요. ‘와요’ 했더니 경찰이 잡으러 왔다는 거예요. 앞이 깜깜합디다. 하지만 도망을 어떻게 갑니까 이미 얼굴이 다 알려진 것을 앞이 노래져서 뒷문으로 나오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미 형사 두명이 대기하고 있더군요.
“한섭아 오랜만이다. 가자. 내 밥 사줄께”하는 거예요. ‘이렇게 교도소로 들어가는구나’ 싶은데 순간, 어떻게 이룬 인생인데 이렇게 무너지나 싶은 것이 가슴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듯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향원’이라는 일식집으로 갔어요. 요리사가 초밥을 말아 주는데 그게 먹을 정신이 있습니까? 형사가 “한섭아 무라 와 안묵노” 하는 거예요. 그냥 말 한마디 못하고 앉아 있었죠. 그러고 있는데 신성일 씨가 황급히 뛰어들어오며 “한섭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하는 거예요. 형사한명이 설명을 하더라구요. “아 한섭씨 지명수배잡니다.” 순간 신성일씨는 ‘아이구 이 사람이 살인이라도 한 모양이다’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꿍하고 떨어지더라는 거예요. 왜 안그랬겠습니까? 그러자 형사가 “신성일씨 이리 앉으소. 아 별건 아니고 밀수, 야 두목은 이미 죽었고 야는 수배 중이고 그런 겁니다. 내 봐줄께요. 앞으로 우리 한섭이 더 잘봐주이소”하는 거예요. 그 순간 초밥 위로 눈물이 떨어지는데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눈물 젖은 초밥을 꾸역꾸역 입안에 밀어 넣었죠.”
<>가릴 건 가리는 남자<>
“영화를 하자는 제의는 지금도 많이 들어옵니다. 하지만 아무거나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언젠가 그는 신성일 씨와 그런 약속을 했단다.
“한섭 씨 우리가 어떻게 배우가 됐는데 아무 역할이나 하지 맙시다.” “그렇죠, 우리 가릴 건 가리며 삽시다” 그 세월이 벌써 40년이다.
“사실 뿌리치기도 쉽지 않아요. 저도 계속 활동하고 싶죠. 배우가 영화안 찍고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십니까?. 하지만 그걸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직도 한국은 한국이라는 말을 종종 했다.
“한때 옷 벗는 영화가 성행한 적이 있었어요. 정말이지 아무리 유명 배우라 해도 벗는 연기 외에는 할 것이 없었던 시절이지요. 나도 사실 하고싶습디다. 그렇지만 참았죠. 그리고 밤무대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바람에 지금도 지방엔 일주일에 두 번씩 가곤 하죠.”
이제는 그런 자신이 스스로 뿌듯하단다. “지금도 저희 집사람은 그래요. 거봐 당신 요즘 케이블티브이에 나오는 거 봤죠. 이대근 씨 남궁원 씨며느리한테 안 창피하겠어요?” 그리고 아직도 자신은 남녀노소가 사랑하는 배우인 것이 자랑스럽단다. “밤무대에서 노래 하다보면 젊은 녀석들이 그럽니다. “오빠” 하구요. 그러면 제가 그러죠. “임마들아 내는오빠가 아니라 늙빠다”. 늙은 오빠라는 뜻이죠, 근데 그 녀석들 기특하게도 그럽니다. “응~ 늘 오빠라구” “전 그렇게 삽니다. 참 재미있는 인생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