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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2사무 7,4-17
복 음 : 마르 4,1-2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다.
3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9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0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12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3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14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15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
16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17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18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19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0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하느님 중심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우연은 없습니다. 깨닫고 보면 모두가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제가 15년전 2001년 이맘때쯤, 11년 전 2005년 이맘때쯤 수녀원에 피정지도 차 건강한 몸으로 왔다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0년이 지난 2016년 오늘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수녀원에 와서
그리웠던 수녀님들의 한결같은 모습을 보니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기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새벽잠에서 깨어나자 문득 떠오른 고려말 문신 길재의 ‘오백년 도읍지를’ 이란 시조입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즉시 중간 구절을 바꿔 읽으니 그대로 통했습니다.
‘인걸은 의구하되 산천은 간데 없네.’
수녀님들은 그대로 인데 수도원 앞의 산천은 상전벽해 완전히 몰라보게 변했습니다.
예전에는 경부고속도로 건너편 우뚝 솟은 산에 일출 장면도 장관이었는데 이제 고층 아파트가 가리웠고,
‘아, 사라진 논과 밭의 자연은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되었구나.’하는 안타까운 생각에 마음이 시렸습니다.
하여 마음이 약간 굳어있었는데 수녀님들의 꽃 같은 환대에 활짝 펴졌습니다.
15년 전, 11년 전이나 변함없는 수녀님들의 모습에 어제 저녁식탁에서 어느 수녀님께 드린 덕담도 생각납니다.
“어, 수녀님 그대로네요. 그때나 변함이 없어요. 수녀님은 영원이십니다.”
곁에 있던 수녀님도 공감의 폭소를 터뜨렸습니다만,
이 또한 하느님의 기적이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 오셨음에 대한 증거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세월 흘러 나이 들어도 영혼은 영원한 청춘이라
모습에도 하느님의 영원이 반사되기 마련입니다.
제가 요셉수도원에 정주한지 1988년부터 2016년 지금까지 올해로 29년째가 됩니다.
놀라운 사실을 소개합니다.
29년전 아기 나무였던 소나무들이 이젠 숲의 아름드리나무가 되었습니다.
절집의 자산은 노목老木과 노승老僧이라 했는데 수도원의 사람들도 나무들도 큰 숲을 이룬 느낌입니다.
‘아, 나무의 외적성장은 사람의 내적성장을 상징하는구나’ 깨닫게 됩니다.
사실 함께 정주해온 도반 형제들의 모습에서 언뜻 거목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데
여기 와서 그리웠던 수녀님들의 그윽한 모습을 볼 때도 이와 똑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순종의 삶을 살아오셨음에 대한 생생한 증거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일컫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해설을 읽으며 위 말을 묵상했습니다.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만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바로 씨뿌리는 사람이 가리키는 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처럼 일희일비하지 않고 항구한 믿음과 희망으로 사는 것이 하느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얼마나 낙관적 긍정적 삶입니까?
하느님께 절대적 신뢰를 두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지 않으면 이렇게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수 없습니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현재만이 아닌 과거와 미래를 조망하는 넓고도 깊은 시야입니다.
길바닥이든 돌밭이든 가시 덤불밭이든 환경 탓하지 않고 개의치 않고 씨뿌리는 삶에 항구하니
급기야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놀라운 기적같은 수확입니다.
짧은 안목에는 실패인생인 듯 했는데 깨닫고 보니 성공인생이요,
전투에는 진 것 같은 삶이었는데 전쟁에는 이긴 삶이었습니다.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것이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복음의 전반부 비유의 중심이 씨뿌리는 사람이라면 후반부 해설의 중심은 토양입니다.
문제는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 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 밭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말씀의 씨들이 좋아도 내 마음 밭이 길바닥 같다면, 돌밭 같다면, 가시덤불 같다면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바로 이 자리가 항구한 수행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자리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타고난 마음 밭도 있지만 항구한 노력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박토의 마음밭도 순수한 마음의 옥토로 변할 수 있습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결과임을 다음 복음 말씀이 입증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
하느님 중심의 항구한 노력의 수행을 기울인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하느님은 나탄 예언자에게, 당신 눈에는 여전히 철부지인 다윗을 찾아 말씀을 전하게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이 주어가 된 문장들입니다.
바로 다윗을 통해 베풀어 주신 하느님 은혜를 상기시키며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자극합니다.
바로 이것이 삶의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다윗은 나탄을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기 삶의 문장들을
하느님을 주어로 삼아 렉시오 디비나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수도원에 보내 주셨다’
문장에서처럼 하느님을 주어로 삼을 때의 겸손과, ‘내가 수도원에 왔다.’
즉 나를 주어로 삼을 때의 교만은 실로 엄청난 차이입니다.
새삼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우리 영성생활에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에,
선행의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시며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르4,9)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언젠가 지갑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분명히 바지 뒷주머니에 넣은 것 같은데, 집에 와서 보니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것입니다.
얼른 카드 회사에 전화를 걸어 카드 분실신고를 한 뒤에 혹시나 몰라 집 안 전체를 뒤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지갑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잃어버린 돈도 아까웠고, 카드와 신분증을 재발급 받기 위해 할 수고를 생각하니 귀찮은 마음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아까움과 귀찮음을 모두 감수해야만 하겠지요.
다음 날 새벽이었습니다. 묵상을 하다가 새벽 묵상 글에 쓸 좋은 글귀가 생각난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묵상 글을 쓰려고 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글쎄 묵상을 통해 생각해 둔 좋은 글귀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불과 30분 전에 기억했던 것을 잊어버린 제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던 지요.
한참을 기억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다른 내용으로 묵상 글을 썼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전날에 잃어버렸던 지갑에 대해서는 아까워하면서, 잊어버린 좋은 묵상거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있더라는 것이지요.
비록 부족한 묵상이지만 이를 통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잃어버린 지갑의 가치보다 훨씬 값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갑은 아까워하면서도, 잊어버린 묵상은 더 값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까워하지 않고 있더라는 것이지요.
더 값진 것은 소홀히 하면서 별 것 아닌 것들에 연연하고 있었던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즉, 세상 것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은 하늘 나라의 씨앗이 자라나지 못하게 하는 길, 돌밭, 가시덤불과 같다고 하시지요.
사실 주님께서는 인간 영혼의 밭에 육화하시어 우리 인간 본성 안에 당신 말씀의 씨를 뿌리십니다.
문제는 그 씨를 받는 우리의 영혼의 밭이 어떠한가 입니다.
세상 것에 얽매여 있으면 그 좋은 씨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이 주님의 말씀보다 더 값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의 밭을 비옥하게 만들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내 영혼의 밭을 비옥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 주님의 계명인 사랑 이라는 비료를 통해서만 비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가장 값진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을 잃었다고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잃어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영혼의 밭을 잘 가꿀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주님을 신뢰하듯 주님께서 뿌리신 씨를
우리는 신뢰해야 합니다.
농부는 자신이 뿌린 씨가 무언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듯 씨앗은 땅으로 내려앉습니다.
과거의 것과 헤어지지 않고서는
결코 오늘의 새로운 새순의 마음이 될 순 없습니다.
말씀의 씨앗은 자신을 최대한 굽히며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앉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버리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씨앗을 뿌리신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씨앗을 받아들이는 데는 언제나 고통이 동반됩니다.
생명과 고통은 하느님께로 돌아갈 때까지
우리와 늘 함께하는 흙으로 빚어진 우리의 숨결입니다.
고통 한가운데서도 주님의 말씀으로
열매 맺고 행복해하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어두운 시간이 있기에 빛나는 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 속에서 열매 맺게 하시는
농부이신 주님을 신뢰합니다.
씨 뿌리는 주님께서 오늘도 가장 좋은 씨를
우리 일상 안에 뿌려주십니다.
말씀의 씨앗을 기쁘게 기쁘게 받아들이고 맞아들입니다.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 진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어떤 열매이든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정성껏 가꾸어야 합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거둘 수가 없습니다.
혹 씨를 뿌리더라도 아무 정성을 들이지 않는다면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더더욱 햇볕을 주시고 비를 주시는 하느님의 안배가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어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 살지 않으면 열매는 맺어질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희망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씨앗이 아무리 좋은들 그 씨앗이 떨어진 토양이 좋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또한 토양이 좋다고 해도 씨앗이 좋지 않으면 역시 기대하는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풍요롭고 능력이 있는 살아있는 좋은 씨앗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토양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만들고 숨을 불어넣어주었으니 더없이 좋은 밭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풍성히 맺어지길 희망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말씀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씨앗이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부와 권력, 쾌락을 추구하는 세상의 방식에 매달리기 때문에 자비와 용서,
나눔을 추구하는 하느님의 방식이 전혀 스며들지 못함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피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지만 말씀 안에 꾸준히 머무르면서 그 말씀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세상 다른 것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수능이나 혼사 등 어려운 일이 닥치면 점을 보러 가는 사람들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은 세상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에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온갖 종류의 가시덤불, 진학, 결혼, 명예, 더 좋은 것, 미래에 대한 여러 걱정 등
욕심의 가시덤불은 말씀을 따르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자기 욕심을 채우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때만 좋은 것으로 인정될 뿐입니다.
가시덤불은 걱정과 욕심,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지니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을 늘 최우선에 두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음, 희망, 사랑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등경위의 등불처럼 세상을 환히 비추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모든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더욱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깨닫게 되면 풍성한 열매를 맺어 자신과 다른 이에게 유익을 줍니다.
말씀의 열매를 맺는 삶이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결코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집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씨앗의 법칙 7가지
1. 먼저 뿌리고 나중에 거둔다. 거두려면 먼저 씨를 뿌려야 한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2. 뿌리기 전에 밭을 갈아야 한다. 씨가 뿌리를 내리려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상대에게 필요한 것과 제공시기 및 방법을 파악하라.
3. 시간이 지나야 거둘 수 있다. 곧바로 거둘 수 없다.
제공 했다고 해서 즉각 그 결과를 기대하지 마라.
4. 뿌린 씨 전부 열매가 될 수는 없다. 10개를 뿌렸다고 10개 모두를 수확할 수는 없다.
모든 일에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마라.
5. 뿌린 것보다 더 많이 거둔다. 모든 씨앗에서 수확을 못해도 결국 뿌린 것보다 많아 거둔다.
너무 이해타산에 급급하지 마라.
6.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 손해를, 이익을 주면 이익을 얻는다. 심는 대로 거둔다.
7. 종자는 남겨 두어야 한다. 수확한 씨앗 중 일부는 다시 뿌릴 수 있게 종자로 남겨 두어야 한다.
받았으면 다시 되갚아라.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다 사랑이신 하느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는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또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오늘 사무엘기의 얘기는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평안을 찾은 뒤
자기는 좋은 궁전에서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있으니
주님을 위해 성전을 잘 지어드려야겠다는 말씀에 대한 주님의 응답입니다.
어떻게 보면 공치사功致辭 같은데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공치사나 하는 분은 아니겠지요?
물론 그런 거 아니고, 분명 그런 거 아닐 것입니다.
요약을 하면 하느님께서는 지금까지 다윗에게 이렇게 해주셨고,
앞으로도 이렇게 해주실 것이라고 약속을 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것을 성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주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주시는 분이란 것이 무슨 뜻입니까?
안 주시는 분, 인색한 분이 아니라는 뜻이겠습니까?
받지는 않고 주시기만 하는 분이라는 뜻이겠습니까?
이런 뜻이 다 포함되어 있지만 제가 얘기하는 <주시는 하느님>은
주시는 것이 그분의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하느님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보면 여러분의 사랑과 비교할 때 저의 사랑이 아주 일천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비교하면 더더욱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천한데도
사랑으로 가득할 때는 그가 좋아하기만 하면 있는 것 다 주고 싶지요.
일천한 사랑의 저도 이러한데 하느님은 본질이 사랑이시니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이 일체 없는 완전한 사랑이시고
그러기에 주시는 것 말고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지요.
받자고 하시는 것 없고, 받자고 주시지도 않으십니다.
받는 것은 부족함이 있고, 필요한 것이 있는 존재가 받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하느님은 우리의 찬미도 받지 않으시고
기도나 제물도 받지 않으신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찬미를 드리면 하느님은 찬미를 받으시고,
우리가 제물을 바치면 하느님은 제물을 받으시고,
우리가 기도를 드리면 하느님은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찬미와 제물과 기도를 받으심은
부족을 채우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찬미와 제물과 기도를 소중히 여기시는 사랑 때문입니다.
교만하고 거만한 부잣집 주인은 고마움 때문에 손수 지은 감자를
촌부가 가져오면 더 좋은 것 천지이니 도로 가져가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자한 주인이 같은 감자를 마음과 정성을 생각하며
고맙게 받아주고 소중이 받아준다면 그것은 그 주인의 사랑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주시고,
사랑이시기에 우리가 사랑으로 드리는 것을 사랑으로 받아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일 경우에는 말 그대로 받는 것도 주는 것이고,
사랑일 경우에는 받는 것도 사랑입니다.
<받아준다>는 말은 받다+주다가 아닙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지금까지 주셨고, 지금도 주시고, 앞으로도 주실 하느님,
우리의 찬미와 기도와 감사를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오늘 깊이 묵상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씨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신학교에서 수업 평가서를 보내왔습니다.
제가 학교에 다닐 때는 학생들이 수업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았습니다.
강의를 하시는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신학교에서도 강의에 대한 평가를 학생들이 합니다.
강의 준비를 잘 했는지, 과제물을 적당했는지, 강의 내용은 효과적이었는지, 강의가 유익했는지에 대한 평가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지금은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강의록을 보완하기도 하고, 새로운 자료를 번역하기도 하고, 수업진행의 방식을 개선하기도 합니다.
제가 만나는 시간들은 학생들에게 소중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는 ‘맛집’을 소개하는 프로가 있습니다.
‘삼겹살, 곱창, 감자탕, 해물탕, 냉면, 설렁탕’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먹거리들을 소개합니다.
하지만 텔레비전에 나오는 맛집들의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식당의 주인들은 처음에는 실패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꾸준한 노력과 연구를 하였고, 다른 집과는 다른 맛을 개발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식당이 됩니다.
그리고 식당의 주인들이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자세하게 소개해 줍니다.
하지만 한 가지 자신들이 개발한 특별한 비법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육수에 넣는 특별한 재료, 자신들의 방법으로 만든 양념과 같은 것들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방송을 보면서 저도 한번쯤은 가서 먹으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주인의 뼈를 깎는 노력과 희생이 좋은 결실을 맺는다는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지난 월요일에는 동창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녁을 함께 하면서 열띤 토론을 하였습니다.
토론의 주제는 ‘사목에 대한 평가’였습니다. 평가를 하자는 신부님들은 몇 가지 이유를 이야기 했습니다.
첫째는 사목을 좀 더 열심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평가를 받으면 자신이 사목을 잘하고 있는지, 부족한 부분은 무엇인지,
스스로를 위한 자기 개발은 잘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본당과 신자 공동체를 위해서입니다.
열정과 신념을 갖춘 사제가 함께하는 본당 공동체는 더 많은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목적인 재능을 평가하면 특수사목과 같은 곳으로 파견하기도 좋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사제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평가를 받지 않으면 나태해질 수 있고, 현실에 안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와 본당 공동체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뼈를 깎는 노력과 각성이 필요합니다. 사목에 대한 평가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사제는 온전히 교회를 위해서, 복음 선포를 위해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목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우려를 하는 신부님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평가를 할 수 있는지를 걱정하였습니다.
사목에 대한 평가는 주교님들의 몫이고, 주교님들께서 하실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제와 본당 공동체의 인격적인 만남을 어떻게 구체적인 수치로 정할 수 있는가를 걱정하였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목자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걱정하기도 하였습니다.
평가 받는 것에 대한 압박감과 두려움도 이야기 하였습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라는 생각을 하지만 교계제도는 피라미드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목을 평가한다는 것은 권위에 대한 도전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열띤 토론은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어느 입장에서 이야기를 했을까요?
다음 동창모임에는 어떤 주제로 토론을 할지 기대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열매를 맺는 농부를 이야기 하시는 것 같습니다.
농부가 자갈밭을 옥토로 바꿀 수 있다면, 가시덤불을 뽑아낼 수 있다면,
길가를 밭으로 만들 수 있다면 분명 씨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씨는 그 안에 생명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들 마음의 밭에 뿌려졌습니다.
말씀이 결실을 맺고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들 마음의 밭이 비옥해야 합니다.
우리들 마음의 밭에 기도의 비료를 뿌려야 합니다. 사랑의 물을 주어야 합니다.
친절과 온유, 겸손과 나눔의 하우스를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 말씀은 우리들 마음의 밭에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수십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나와 가족은 물론 이웃과 세상을 환하게 밝혀줄 수 있는 말씀의 열매들이 전해 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내 마음의 밭을 가꾸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씨 뿌리는 그리스도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
주님께서 복음의 씨를 뿌리십니다.
좋은 땅만이 아니라, 길 위에, 돌밭에, 가시덤불 사이까지 귀중한 씨앗을
아낌없이 뿌리시기에,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어리석게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자그마한 씨앗이 품은 강인한 생명력을 볼 수 있는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주님은 좋은 땅, 나쁜 땅 가르지 않고, 비록 그것이 아주 보잘것없다 해도
모든 땅이 지닌 소출의 가능성을 믿는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주님은 어느 땅에선가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열매가 맺어져
그동안의 땀과 눈물이 기쁨으로 바뀔 것을 믿는 인내와 희망을 지니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닮은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믿음 사랑 희망 가득한 복음의 씨를 온 세상에 아낌없이 뿌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 같은 경쟁, 억압, 차별이 난무하는 세상이
결코 죽일 수 없는 복음의 강인한 생명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씨를 품을 온 세상을 소중히 보듬는 따뜻하고 넉넉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이기심과 탐욕에 물든 사람들이 나눔과 섬김의 기쁜 소식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재물과 권력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복음이 주는 자유와 해방의 길이 아니라
노예의 길을 걸어간다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젠가 누군가에게서 사랑과 믿음과 희망이 용솟음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져 풍성한 열매를 맺으리라 믿기에, 가슴 벅찬 내일을 희망하며
오늘도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복음을 선포하는 인내와 희망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힘차게 복음의 씨를 온 세상 곳곳에 뿌리실 믿음의 벗님들,
여러분은 자랑스러운 그리스도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