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차 사연
학교에서 정기고사가 진행 중인 십이월 둘째 금요일이었다. 오전에 고사 감독 후 급식소에서 점심을 먹고 교정을 나섰다. 이웃 학교 카풀 지기와 몰아온 차에 동승해 연초면 명상마을로 향했다. 대금산 주막에 들려 전통 방식으로 빚은 농주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추석 무렵까지는 와실에서 곁들이는 반주로 삼고 창원의 친구와 지인에게 보낸 곡차였는데 근래 가질 못했다.
평소 술을 즐겨드는 나의 곡차 사랑은 남다르다. 여러 주종 가운데 나는 유난히 막걸리를 즐겨 마셨다. 더운 여름 산행에선 갈증 해소가 되는 청량제였다. 농사일을 거들 때는 열량이 확보되는 영양제였다. 벗과 마주해 담소를 나눌 때는 윤활제 역할을 했다. 기름진 안주를 필요로 하지 않아 두부나 콩나물로도 좋았다. 안주로 파전이나 부추전이라도 있으면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평소 이렇게 상복하다시피 하던 막걸리였는데 이번 가을부터 거리두기를 하고 지낸다. 몸에서 두 군데 탈이 나면서부터다. 첫째는 곡차를 오래도록 먹었으니 잇몸이 부실해졌고 치아 부식이 심해해 치과 진료를 자주 가야했다. 두 번째는 민감한 신체 부위에 염증이 생겨 치료해 놓으면 재발을 했다. 어느 날 부고환에 염증이 생겨 주치의 처방전 따라 한동안 약을 먹어 나았더랬다.
의사의 말에 고분고분 한 달 넘게 술을 금하고 약을 복용하며 염증은 치료되어 홀가분했다. 의사가 이제 더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조심스레 다시 불편해 질 수도 있느냐고 물어봤다. 나의 질문에 의사가 답하길 한 번 감기 걸려 나은 사람도 다시 걸리는 이치와 같다고 했다. 술과 염증은 어떤 관계냐고 하니 당연히 좋지 않다면서 당장 끊으십사고 해서 나는 무척 난감했다.
부환염이 낫고 나서 의사가 술을 금하라고 했지만 나는 그가 시킨 대로 하질 않았다. 재발할 때 재발하더라도 즐기던 술을 다시 이었다. 그것도 소주나 맥주가 아닌 막걸리였다. 주중 내가 머문 거제 대금산 꼭뒤 주막의 공 씨 할머니가 빚어 파는 전통 농주였다. 남편을 여의고 자녀들은 성혼 시켜 객지로 보낸 뒤 소일거리로 고두밥 쪄 누룩에 비벼 농주를 빚어 파는 할머니였다.
부고환염을 치료한 후 의사 말을 따르지 않고 곡차를 이었더니 얼마 뒤 다시 불편함이 느껴졌다. 주말에 복귀해 다녔던 창원의 비뇨기과는 자존심 때문에 가질 못하고 주중 머문 고현의 병원을 찾아갔다. 초기라 그런지 1주일 치 약을 먹었더니 상태가 좋아져 치료는 더 받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다시 술을 이으려니 멈칫해졌다. 호랑이 가죽은 탐이 나는데 발톱이 무서운 격이었다.
민감한 부위 염증이 낫고 나서 앞으로 술잔 앞에 어떻게 해야 할지 심사숙고했다. 즐기는 곡차를 다시 이어 염증이 재발해 진료실을 찾아감은 무모한 짓이지 싶었다. 그렇다고 즐겨왔던 술을 끊는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망설임 끝에 낸 결론은 주종을 막걸리에서 소주나 맥주로 바꾸어보는 길이었다. 그래서 꾸준하게 다녔던 대금산 주막을 두 달 넘게 찾아가질 못했더랬다.
주중 와실 반주는 캔 맥주에 맑은 술을 희석시켜 반주로 들었다. 주말에 창원으로 복귀하면 베란다에 둔 돌복숭 담금주를 시음했다. 막걸리가 염증에 좋지 않았던지 아직은 탈 없이 잘 지낸다. 이랬으니 카풀 지지가 운전한 승용차로 자주 가던 대금산 주막은 들릴 일이 없어졌다. 그와 함께 창원의 같은 아파트단지 초등 친구와 은퇴한 예전 동료도 즐기는 곡차를 맛보지 못했다.
대금산 주막을 찾았더니 할머니는 부재중이었다. 통화를 시도해도 연결되질 않아 2리터 생수병에 담아 숙성시켜둔 곡차를 4병 챙겼다. 술값은 냉장고에 두고 창원으로 왔다. 모처럼 친구와 퇴직 선배와 함께 아파트 건너편 상가에 앉았다. 나는 곡차 잔을 받지 못하고 맑은 술잔을 채웠다. 자리서 먼저 일어나면서 대금산 주막 할머니와 통화하니 낮에 마을회관에서 요가를 배웠단다. 21.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