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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음력으로 8월 29일인 오늘은 용성조사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지 138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정토회에서는 매년 이날을 기념해 용성조사님의 삶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습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기념 법회가 열리는 아도모례원으로 가기 위해 아침 7시 30분에 두북 수련원을 출발했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1시간 30분 동안 달려 9시에 아도모례원에 도착했습니다. 곳곳에 많은 봉사자들이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입구에 들어서자, 모두가 열렬히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법당으로 이동해 먼저 1부 행사로 역대 전등 조사들을 기리는 다례재를 지냈습니다.
다례재를 마치고 구미 시의회 부의장님과 구미 도시공사 사장님, 도개면 이장님 등 지역 인사분들이 찾아와서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구미시에서는 이곳 부지에 불교문화역사관, 체험관, 스토리텔링관을 건립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많은 시민들이 이곳을 방문하게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스님은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10시 정각이 되어 기념 법회를 하기 위해 마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정토회 대구경북지부 회원들뿐만 아니라 부산울산지부, 경남지부, 대전충청지부에서도 버스를 대절해서 많은 분들이 참석했습니다. 총 620여 명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하며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용성조사님의 행장을 낭독한 후 구미 시의회 의장님의 기념 축사를 부의장님이 대독해 주었습니다. 정토회 회원들도 유튜브 생중계를 온라인으로 시청하며 기념행사에 함께했습니다.
다음은 용성조사 오도일을 기념하며 대구경북지부와 서울제주지부 회원들이 합심하여 노래극 공연을 선보였습니다.
1910년대 일제 침략으로 전통 불교가 강제로 일본화되어 왜색이 짙어져 갈 때, 용성조사님은 민중이 깨치지 못하면 조국 광복과 불교 중흥이 어렵다는 신념으로 불교 개혁을 통한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입적하기 전까지 30여 년간 불교의 지성화, 불교의 대중화, 불교의 생활화에 온몸을 바쳤는데요. 이 중 경전의 한글화 과정을 담은 노래극을 연극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이어서 온겨레의 노래를 다 함께 불렀습니다. 용성진종조사께서 작사하시고 불심도문 큰스님께서 정리하신 곡입니다. 민족 대표 33인을 상징하는 33인의 대구경북지부 합창단의 선창에 따라 다 함께 3절까지 힘차게 불렀습니다.
다음은 법륜 스님이 용성조사 오도일을 맞이하여 기념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법상 옆에 마련된 단상 앞에 서서 기념행사가 열리는 이곳 아도모례원의 역사적 의미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8월 29일, 용성조사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오도일입니다. 1886년 용성조사님의 나이 23세 때였으니 올해로 오도하신 지 138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용성조사님의 오도 제138주년 기념 법회를 하는 이 장소는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한 아도 화상이 머무르신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석가여래부촉법 제68세 용성조사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곳이기도 합니다. 날짜로는 용성조사님이 깨달음을 얻은 날이고, 장소로는 아도 화상이 신라에 처음으로 불법을 전한 곳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상북도와 구미시가 이 주위를 신라 초전법륜 성지로 잘 가꾸어 놓았습니다.
스님이 머슴살이를 하면서 불교를 전한 곳
당시 신라는 나라도 작았고 문명의 발전도 뒤떨어져 있었습니다. 지형적으로 백제와 고구려에 막혀서 중국의 발달된 문명이 신라에 도달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라는 외래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매우 보수적이었습니다. 아도 화상은 불교를 전하려고 고구려에서 신라로 넘어와 국경 변인 이곳 일선군(지금의 선산) 모례 장자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신라의 국경이 여기까지였습니다. 신라가 불교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도 화상은 승려라는 신분을 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승복을 벗고 머리를 기르고 모례 장자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갔습니다. 국경 변 촌장 집에서 머슴살이를 한 겁니다. 머슴이 되어 주로 했던 일은 가축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워낙 성실해서 머슴살이 3년 만에 가축을 늘려 모례 장자의 재산을 불려놨습니다. 신분이 낮은 종인데도 인품이 훌륭해서 모례 장자의 여동생이 그를 흠모할 정도였어요.
당시 중국은 남조의 송(宋), 제(齊)를 지나 양(梁)나라로 바뀔 때였습니다. 양나라는 불교를 굉장히 옹호한 나라입니다. 달마 대사가 왔을 때 법거량(法擧揚, 선문답)을 한 양무제라고 들어보셨죠? 양나라에서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불구(佛具), 즉 불상과 향을 전했습니다. 사신이 떠난 후 보니 선물 중에 향이 있었는데 신라 조정에서는 이 물건이 뭔지 알 수가 없었어요. 이것을 가지고 온 서라벌을 다니면서 ‘이 물건에 대해 아는 자가 있는가?’ 하고 묻고 다녀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 물건을 아는 사람을 찾아 국경변까지 온 거예요. 모례 장자의 집에 와서 ‘이것에 대해 혹시 아는가?’ 하고 물으니, 머슴이 ‘제가 압니다’ 하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주위에서 깜짝 놀랐어요. 신라의 귀족들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국경변 촌 동네의 머슴이 그 물건을 안다고 했으니까요. 서라벌에서 온 관리가 ‘이 물건이 무엇이냐?’ 물으니, 머슴이 ‘향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어서 ‘어디에 쓰는 것이냐?’ 하고 묻자 ‘기도할 때 향을 피우면 그 신령스러운 기운이 하늘에 닿아 영험한 가피가 있습니다’ 하고 답합니다. ‘너는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니 그제야 아도 화상은 자신의 신분을 밝혔습니다. ‘사실 저는 승려이며 신라에서 불교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기에 신분을 숨기고 여기서 머슴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관리는 당장 그에게 서라벌로 가자고 했습니다. 아도 화상은 머리를 깎고 숨겨두었던 승복을 갈아입고 왕궁으로 가서 왕을 만났습니다.
때마침 신라 왕실에서는 공주가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인 상황이었습니다. 왕은 ‘향에 그런 영험이 있다면 네가 한번 기도를 해보아라.’라고 했습니다. 아도 화상이 향불을 피우며 기도를 하자 공주의 병이 나았어요. 제가 볼 때는 기도만 한 게 아니라 선진국인 인도와 중국에서 가져온 약을 먹이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웃음) 어쨌든 결과는 공주의 병이 나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자 왕이 감동하여서 절을 지어주고 아도 화상이 머물도록 했습니다. 그게 바로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입니다. 하지만 신라 조정의 보수 세력은 이 일에 대해 반대가 굉장히 심했습니다. 왕의 결정이니 누구도 대놓고 반대를 못 했는데, 왕이 죽자 바로 태도를 바꾸어 절을 불 질러 버렸어요. 아도 화상은 도망을 쳐서 다시 모례 장자의 집으로 갔습니다. 모례 장자는 집 뒤에 땅굴을 파고 아도 화상을 숨겨 주었습니다. 아도 화상을 사모했던 장자의 여동생은 그의 법문을 듣고 출가하여 신라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는데, 이분을 사(史)씨 비구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라 초전법륜에 위대한 공덕을 지은 사람은 첫 번째가 아도 화상, 두 번째가 모례 장자, 세 번째가 사씨 비구니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 불교를 위해 순교한 이차돈까지 다섯 분을 성인으로 모십니다.
아도 화상이 온 후로 신라에서는 암암리에 불교가 퍼져 나갔습니다. 그가 죽었는지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동네 사람들은 얼굴이 시커먼 사람들이 그 이후에도 들락날락했다고 합니다. 얼굴이 시커먼 오랑캐를 한문으로 하면 묵호자(墨胡子)예요. 묵호자는 사람 이름이라기보다 얼굴이 검은 외국인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묵호자가 법을 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필요한 아도 화상의 개척 정신
이렇게 신라는 불교가 권력과 결탁하여 지배층으로부터 아래로 내려간 것이 아니고, 아래에서부터 위로 점점 번져 나갔습니다. 아도 화상의 생몰 연대가 정확하진 않지만 적어도 그로부터 100년에서 150년은 더 지난 후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신라에 불교가 공인됩니다. 이차돈이 죽으면서 기적이 일어나 불교를 공인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기록일 뿐이고, 그때 이미 신라 백성들은 거의 다 불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공인만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 공덕이 바로 아도 화상의 전법 정신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지금 전 세계로 나가서 가정부를 하든지 노동을 하면서 전법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가정부나 노동자가 되어서 주인의 신뢰를 먼저 얻은 다음 그 사람부터 교화하는 겁니다. (웃음)
기독교가 로마에 처음 전해질 때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로마인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서 주인 여자가 부부 갈등으로 힘들어하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보살펴 주면서 개종을 시켰습니다. 그다음에는 부인에 의해 남편이 교화되곤 했습니다. 특히 남편의 정치적 입지가 어려워질 때 교화가 잘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천주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주로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들이 천주교 신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아래에서부터 교화가 되면 그 사회에 아주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아도 화상의 전법 정신은 단지 불교의 전법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려 할 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돈과 권력을 가지고 위에서 명령을 내려 확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사람의 마음을 얻어 점점 확산시켜 나간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런 얼이 담긴 곳이 바로 아도모례원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도 이런 정신이 매우 필요합니다. 조금 살 만해지니까 개척 정신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뭐든지 챙겨주기만을 바란다면 나라가 쇠퇴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처음 법을 전한 사람만큼 어렵지는 않구나
오늘 용성조사 오도일을 맞이하여 ‘왜 조사께서는 많은 지역 중에 이곳에 와서 깨달음을 얻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용성조사님이 유훈으로 ‘초전법륜 성지를 잘 가꾸어라.’라고 말씀하신 그 의미가 무엇인지 한번 돌아봤으면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처음 법을 전한 사람만큼 어렵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그런 유훈을 남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오직 부처님 법을 전하기 위해서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이렇게 낯설고 물설은 곳까지 왔습니다. 용성조사님은 우리가 그들의 공덕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승해야 불교를 바로 세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라도 독립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열 가지 유훈 가운데 1, 2, 3, 4번이 바로 초전법륜 성지를 잘 가꾸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역사관이에요.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역사관이 있어야 하듯이 불교인으로서 가져야 할 역사관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불교가 왜 전법의 힘이 없어졌을까요? 역사의식 없이 그저 자기 개인의 복을 빌기에 바쁘기 때문입니다. 복을 구하는 사람은 부처님이든 하느님이든 산신령님이든 복만 주면 누구한테 비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른 신앙이라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제대로 된 신앙이라고 하려면 불교의 역사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탁 깨달으면 지팡이 들고 구름 타고 날아다닐 수 있다는 식으로 깨달음을 이해하는 것은 깨달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압니다. 하지만 관념의 큰 장벽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어서 보더라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듣더라도 있는 그대로 듣지 못합니다. 깨달음은 이 장벽이 확 걷혀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눈, 사실을 사실대로 듣는 귀가 생겨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황야에서 40일 금식을 하고 깨달음을 얻은 후에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이것을 거듭났다고 표현합니다. 부처님도 6년 고행 끝에 탁 깨닫고 보니 ‘내가 중생이 아니고 부처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자기 눈이 어두워서 자기가 중생인 줄 알고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다가 눈을 뜨고 보니 세상은 이미 밝아 있었습니다. 깨닫고 보면 이미 나는 괴로울 일이 없는 존재입니다. 실제로 괴로울 일이 있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괴로울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환상에 사로잡혀 괴로워했던 것입니다. 눈을 뜨니 환영이 사라지고 본래 괴로울 일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달음을 얻으면, 첫째, 내가 괴롭지 않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둘째, 중생의 신음 소리와 고통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것에 사로잡혀서 저렇게 괴로워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용성조사님은 단순히 불교 안에서 말하는 좁은 의미의 심리적인 깨달음을 넘어 붓다의 깨달음처럼 세상을 보는 눈이 함께 열렸습니다. 그는 본인의 깨달음에 기반을 두고 시대 상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후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항하여 외로운 싸움을 해왔는데, 1937년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자 조사께서는 중국에 건너가 조중 연합군을 만들어 함께 대응할 것을 주창했습니다. 국제 정세를 꿰뚫어 보고 뛰어난 외교적 식견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한 조사의 깨달음이 바로 이곳 아도모례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도모례원에서 우리가 되새겨야 할 것
오늘 아도모례원에서 우리는 아도 화상의 개척 정신과 용성조사님의 나라 사랑 정신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역할도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국내는 여야와 진보와 보수가 분열하여 대립이 극심한데, 대한민국의 국론 통합을 이끌어야 합니다. 남북의 대치 속에 일촉즉발의 전쟁 위험이 상존하는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북한 주민들이 지난여름 홍수 피해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데, 우리가 비록 정치와 군사적으로는 대립하더라도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하는 일에는 정치적 갈등을 떠나 자비의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요즘처럼 너무 극단적으로 흐르는 세상에서는 부처님의 중도 사상, 용성조사님의 나라 사랑 정신, 아도 화상의 전법 정신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그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지금은 아도모례원이 터만 남아 있지만 앞으로 이곳을 점점 가꿔 나갔으면 합니다. 여러분들의 봉사 덕분에 이곳이 아도 화상의 개척 정신, 그리고 용성조사님의 깨달음과 그분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념할 수 있는 곳으로 잘 유지되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봉사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용성조사님이 평생 행하신 나라의 독립과 불교 중흥의 원을 이어받아 오늘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정토회 회원 모두가 다 함께 노력할 것을 다짐하면서 사홍서원으로 기념식을 마쳤습니다.
스님은 참석한 내빈들과 점심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식사를 함께하며 이곳 아도모례원이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의미 있는 공간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공무원들이 어떤 관점을 갖고 어떻게 개발을 해나가면 좋을지 여러 가지 의견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대구경북지부 회원들은 삼삼오오 흩어져서 각자 싸 온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점심시간에는 곳곳에 아도화상과 모례장자, 용성조사님의 업적을 되새길 수 있는 다양한 부스가 마련되어 있어서 회원들 모두가 아도모례원을 한 바퀴 돌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후 1시 30분부터는 대구경북지부 회원의 날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신나는 풍물놀이가 시작되자 모두 어깨를 들썩거렸습니다. 꽹과리, 장구, 북, 징의 울림이 흥겹게 어우러지는 속에서, 상모가 원을 그리며 하늘을 수놓듯 아름다운 춤사위가 펼쳐졌습니다.
포항지회에서는 우쿨렐레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익어가는 감나무와 푸른 하늘,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 가을의 정취와 어우러진 아름다운 연주는 모두의 마음에 고요한 평온을 선사했습니다.
이어서 지회별 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경주, 구미, 달서, 동대구, 수성, 포항, 지회별로 열띤 구호와 노래로 자신들을 소개했습니다. 재미나게 준비한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회원의 날 행사를 힘차게 시작했습니다.
웃음과 박수를 뒤로하고 스님이 연단에 올라와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환한 웃음과 함께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온라인 정토회로 전환을 한 이후에는 오늘처럼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자리가 거의 없었습니다. 서로 마주 보고 체취를 느끼면서 공연도 하면서 만났던 게, 마치 오랜 옛날 일 같이 느껴집니다. 그나마 올해는 오프라인 행사로 613만인대법회를 열기는 했지만, 613만인대법회는 아무래도 내빈들을 초청하고 접대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참가하는 대중들이 흥을 느끼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더 자연스러운 분위기여서 참 좋네요.”
먼저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사람들부터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두 시간 동안 아홉 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남편이 너무 잘 삐져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며 오랫동안 안고 온 숙제를 이야기했습니다.
남편이 하도 잘 삐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남편과 열심히 싸우면서 살다가 정토회를 만나고 나서 남편과 덜 싸우고 부부 사이가 나아졌습니다. 남편은 해외 현장 책임자 업무를 합니다. 예전에는 남편이 해외에 나가면 울고, 집에 들어오면 싸우고 이랬는데, 요새는 남편이 집에 들어와도 좋고, 해외에 나가면 더 좋습니다. 그래서 남편도 제가 정토회 활동하는 걸 좋아하고, 저도 편안해졌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도 항상 똑같은 일에 걸려 넘어집니다. 남편이 한번 삐지면 6개월 정도 오랫동안 삐집니다. 해외에 나가는 기간에도 삐집니다. 남편이 왜 그러는지 궁금하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남편이 해외 현장 책임자로 다녀오고 난 이후로부터 저한테 굉장히 불만이 많고, 정말 크게 화를 내면서 싸웠습니다. 저한테 ‘너는 10년 동안 내 생일에 손수건 한 장이라도 사준 적 있냐?’ 하는 말을 했습니다. 늘 자기가 가족에게 사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고, 심지어 부엌살림도 자기가 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서 제가 뭘 사면 마음에 안 들어해서 제가 직접 사지 않고 보조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올 게 왔구나 싶었습니다. 또 남편이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그 회사에서 퇴직하고 다른 직장으로 이직하는 중에 또 저와 크게 다투었습니다.”
“왜 다투었습니까?”
“남편은 자기 말에 대꾸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합니다.”
“어떤 말에 대해 대꾸했습니까?”
“남편의 친구가 집에 저녁을 먹으러 온다고 했는데, 저는 너무 덥고 반찬도 없어서 어떡하냐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먹던 김치찌개 데우고, 갈치 구운 거 내면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먹던 음식을 내놓는 건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된다고 안 된다고 서로 옥신각신했습니다. 결국 남편이 김치찌개를 데우길래 제가 ‘이렇게 하면 우리도 다른 집에 가서 이런 대접을 받는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국자를 구겨버렸습니다. 그 모습에 저도 너무 화가 나서 ‘내가 내 의견을 말하는데 왜 화를 내냐?’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나는 너랑 같이 못 살겠다. 내 전 재산을 줄 테니까 나랑 헤어지자’ 하고 말했습니다. 전 재산이라고 해봐야 집 한 채입니다. 조금 있다가 전 재산이 아니라 집을 주겠다고 정정했습니다. 남편이 하도 잘 삐져서 조심하고 있었던 터라 제가 놀라는 척하면서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하고 말해서 일단락이 됐습니다. 지금 남편은 실직 상태입니다. 남편도 자기 갈 길을 찾아서 가겠다고 하고, 저도 제 할 일 하고 정진하면서 각자 지내고 있습니다. 남편은 라면과 햇반을 사다가 끼니는 자기가 해결하고 있고, 저는 저대로 밥을 해서 각자 먹고 있습니다. 남편이 화를 내는 정도가 좀 식어서 지금은 저녁 한 끼 정도는 같이 먹고 있습니다. 남편을 삐지게 안 하려고 노력을 해도 남편이 삐집니다. 저의 이 평생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관점을 잡고 수행해야 할까요?”
“남편이 같이 살기에는 괜찮아요? 아니면 같이 살기가 어려워요? 내 입장에서 이 남자하고 같이 사는 게 나아요? 아니면 ‘잘 됐다. 이번 기회에 안 사는 게 낫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게 헷갈리니까 지금 질문자가 복잡한 겁니다.”
“저는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됩니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입장이라면, 질문자가 말하는 태도를 고쳐야 합니다. 가령 남편의 친구가 온다는데 몸이 안 좋아서 음식을 준비하기 어렵다는 건 내 의견이니까 말해도 됩니다. 그런데 남편이 ‘먹던 김치찌개만 내도 된다’라고 하면 ‘그건 쉽다. 지금이라도 상을 차리겠다.’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남편의 성질을 안다면, 조금 부족하다 싶어도 ‘어떻게 김치찌개만 내나? 그렇게는 못 한다.’ 하고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김치찌개는 당장 내겠다고 말하고, ‘김치찌개는 좀 부족하지 않을까?’라고 했을 때 남편이 ‘먹던 갈치 있잖아? 그거 데워서 내면 안 되나?’ 이러면 ‘맞다. 그게 있네. 같이 낼게’ 이렇게 말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끝까지 토를 달잖아요? 안 그래도 남편이 한 성질 하는데, 거기에 기름을 부으니까 상황이 좋아질 리가 없죠. 저 같아도 저런 여자랑 살면 성질이 날 것 같아요. 남편에게 한두 번 말해보고 설득이 안 되면 그만두어야 합니다. 별일 아닌 걸로 계속 깐족거리니까 남편이 불같이 화를 내는 겁니다. 둘 사이에 무슨 큰일이 생긴 게 아니에요. 일단 질문자가 깐족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질문자는 의견을 말하는 게 아니고 깐족거리는 거예요. 남편 같은 사람에게는 두어 번 이야기해 보고, 그래도 하겠다고 하면 그러라고 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질문자가 말한 내용 중에 ‘우리도 다른 집에 가면 이런 대접받는다’ 하는 말은 치졸한 말입니다. 자기가 다른 집에 갔는데 그 집에서 먹던 김치찌개를 주면 어때요? 그냥 먹으면 되지요. 그렇게 잔머리를 굴려서 말하기 때문에 남편이 화가 나는 겁니다.
둘째, 남편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는 무릎을 탁 꿇고 ‘이혼만은 안 됩니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설령 나중에 이혼하더라도 그렇게 해야 해요. 금방 고개를 숙여줘야 합니다. 자기가 하도 깐족거리고 끝까지 대드니까 남편 입장에서는 큰 칼을 빼 든 겁니다. 아내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전 재산을 다 줄 테니 이혼하자는 말까지 한 거예요. 남편은 칼을 빼 들었는데, 질문자는 ‘한번 생각해 볼게’ 하고 말한 거거든요. 질문자가 정말 문제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 행동은 수행도 아니고, 남편의 화를 돋우는 행동에 불과합니다. 그럴 때는 사랑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무릎을 탁 꿇고 져주어야 합니다. 져주지 못하고 깐족거리는 습관대로 행동해서 큰일이 벌어졌다면 ‘여보,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이혼은 안 된다. 이혼 이야기만은 하지 마라’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전 재산이 문제가 아니야. 이혼은 안 돼. 이거 말고 다른 걸로 이야기하자’ 이렇게 져줘야 남자가 안심합니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한 번 생각해 볼게’ 하고 말하는 건 미련한 행동이에요. 질문자는 ‘남편이 자꾸 삐져서 못 살겠다.’ 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거예요. ‘이런 인간하고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있다 보니 져주는 말이 금방 안 나오는 겁니다.
남편이 햇반 사 와서 혼자 먹는다고 하면 햇반을 데워주기라도 해야죠. 지금은 저녁이라도 같이 먹는다고 하니 위기는 조금 넘어간 것 같네요. 다음에라도 남편을 좀 풀어주기 위해서는 상을 차려놓고 질문자가 한번 이야기해야 합니다.
‘사실은 당신 체면을 생각해서 먹던 김치찌개 내놓는 건 안 된다고 한 것이지, 당신의 생각에 반대하려고 한 건 아니다. 그런데 내 성격이 깐족거리는 게 있다 보니 당신을 속상하게 한 것 같다. 미안하다. 그리고 당신이 이혼 이야기를 했을 때 내가 생각해 보겠다고 했는데 전혀 이혼 생각은 없다. 그런데 나도 성질이 확 치미니까 지는 게 싫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잘못했다.’
이렇게 사과를 한 번 해보세요. 안 풀어지더라도 사과를 하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남편이 모든 걸 알아서 사니까 남편에게 선물을 따로 안 했다고 했지만, 남편은 ‘너 나한테 생일 선물 한 적 있나?’ 이렇게 따졌다고 했잖아요?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적으로라도 남편에게 사과를 해야 합니다. 생일 때 전화라도 한 통 하고, 문자라도 보내고, 간단하게 케이크라도 사주세요. 남편이 필요 없다고 말은 해도 속으로는 고마워합니다. ‘뭐 이런 걸 쓸데없이 사 오나?’ 이렇게 반응을 하지만 속은 다릅니다.
남편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록 아내한테 엄마의 역할을 기대합니다. 질문자는 지금 여자의 역할만 하고 있지 엄마의 역할은 안 하고 있어요. 남편이 질문자한테 아버지 역할을 하는 것처럼 질문자도 남편에게 엄마의 역할을 조금 해주어야 합니다. 남편을 남자로만 보면 일대일로 싸울 수가 있는데, 엄마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엄마는 아이하고 싸우면 안 됩니다. 등을 토닥여 주고, 위로도 해주는 게 필요해요. 그동안 남편이 잘난 척하고 살다가 요즘 위기에 처한 것 같아요. 그러니 깐족대지 말고 남편의 등을 두드려 주세요.”
“스님, 용기를 내어 질문을 했으니, 저를 위해 기도문도 하나 주세요.”
“지금 말한 대로 해봐요. 쓸데없이 기도문만 찾지 말고, 지금 말한 대로 하는 게 기도문이에요.”
“제가 워낙 어리석어서요. 매일 아침 기도할 때 새기려고요.”
“그러면 ‘내가 너의 엄마다.’ 이렇게 기도를 해보세요.”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웃고 손뼉 치고 공감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현장에서도 즉석 질문을 받고 대화를 나눈 후 오후 3시 30분에 즉문즉설을 마무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닫는 인사를 했습니다.
“대구경북지부 회원의 날 준비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다른 지부에서도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다른 지부도 이렇게 오프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큰 박수로 회원의 날 행사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오전 용성조사 오도일 기념 법회에 이어 대구경북지부 회원의 날까지 오랜만에 긴 시간 동안 야외에서 법회를 했습니다. 가을 날씨를 만끽하며 전법의 원을 다지고, 도반들과 화합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오후 4시에 아도모례원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했습니다. 창밖으로는 노랗게 물든 가을 들판이 계속해서 펼쳐졌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3시간 달려 저녁 7시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했습니다. 저녁에는 실내에서 업무를 보고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수행법회 생방송을 한 후 오후에는 선문대 아산 캠퍼스에서 초청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