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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5월 7일.
'아르헨티나'의 광활한 대초원 '팜파스'에서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팜파스'의 '로스톨도스'라는 마을에 '라우니온 목장'이 있었는데 그 목장이 갓난아기의 요람이었다.
목장의 주인은 미남이었고 갑부였으며 여자를 좋아했다.
그 목장에서 주인집 가족들과 손님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요리사로서 별 존재감 없이 살았던 여인이 있었다.
목장의 남자 주인과 가정부 여자 요리사.
신분과 처지가 맞지 않았지만 남자의 욕정 앞에선 세상의 신분이나 여건 따위가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렇게 혼외자로 태어났다.
태생적으로 꼬이고 굴절된 운명이었다.
그 아이의 미래도 순탄치 못할 터였다.
불을 보듯 뻔했다.
그때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였다.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종전됨)
전쟁은 끝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뒤숭숭했다.
그 여자 아이의 이름은 '에바'였다.
작고 귀여운 아기였다.
그러나 그 아이는 사생아로 태어난 탓에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가정부 요리사를 임신시켰던 목장주도 어린 '에바'를 돌보지 않았고 그녀의 성장과 인생에 별 관심이 없었다.
슬픈 일이었지만 당시의 시대상에선 그리 드문 케이스도 아니었다.
그 갓난 아이는 농장에서 멀리 떨어진 '후닌'이란 곳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불우했고 힘겨웠던 시기였다.
하지만 '에바'는 자신이 품고 있던 꿈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어렸지만 당당했고 어느 땐 당돌했다.
"이곳 깡촌을 벗어나 언젠가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리라. 가서 보란 듯이 성공하고야 말리라."
그렇게 야무진 꿈을 꾸면서 자신의 밝은 미래를 상상했다.
어느새 '에바'는 키 크고 예쁜 숙녀로 성장했다.
'에바'가 15세가 되었을 때 그녀는 나이트 클럽에서 댄서로 일했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노래하던 한 남자를 만났다.
그는 '탱고가수'였고 아름은 '마갈디'였다.
'마갈디'는 어리고 순수하며 예뻤던 '에바'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에바'도 바람기 가득했지만 노래도 잘하고 세상물정을 잘 아는
'마갈디'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고 싶었다.
'에바'의 마음 속엔 오로지 한 가지 소망이 자리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살고 싶은 곳은 후미진 변두리가 아니었다.
부귀영화, 찬란함, 기회가 널려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것, 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꿈이었다.
실제로 '에바'는 '마갈디'와 함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갔다.
그때가 1935년이었다.
'에바'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다.
대도시에서 '에바'는 '마갈디'와 함께 살았으나 그에겐 이미 결혼한 가정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미련 없이 그의 곁을 떠났다.
그 이후엔 클럽 댄서, 잡지 모델, 성우, 영화배우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과 커리어를 쌓았다.
불같은 집념이었다.
그녀에겐 남들이 갖고 있지 않았던 '뜨거운 열정'이 있었고 '뛰어난 미모'가 있었다.
하는 일과 집중하는 분야가 달라질 때마다 '에바'는 새로운 남자를 만났고 이내 사랑에 빠졌다.
사랑도 고팠지만 '에바'에게 더 필요했던 건 자신의 꿈을 이루는데 자양분이 될 수 있는 남자라는 존재였고, 그런 남자들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에바'에겐 미모와 꿈, 끼와 깡, 그리고 세상을 향한 진지한 도전과 열정이 있었다.
댄서, 모델, 배우, 성우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에바'는 과감한 변신과 탈피를 거듭했다.
각 분야마다 사귀는 남자들이 달랐다.
의도된 관계였다.
그렇게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진출한 지 5년 만에 다재다능한 연예인으로 등극하게 되었고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에바'는 우수에 찬 목소리로 남자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하지만 때에 따라선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웅변도 할 수 있었다.
각양각색의 표정, 진정성 있는 연기력, 다채로운 목소리로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1943년엔 라디오 방송에서 DJ를 한 적도 있었는데 목소리가 슬픈 듯 하면서도 호소력이 짙어서 꽤 많은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녀의 미모와 다감한 목소리는 훗날 정계에 진출한 이후에도 큰 도움이 됐다.
아리따운 미모와 뛰어난 연설로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아르헨티나' 정치권의 다크호스로 성장했다.
'에바'에겐 보고, 듣고, 말하고, 연기하는 모든 것들이 큰 자산으로 쌓여 갔고, 남들과는 확연하게 차별화되었던그녀만의 강력한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끝난 이후로 세계는 다시 짙은 전운이 감돌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이 촉발되었다.
1939년의 일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전황은 전쟁 초기와는 다르게 점점 연합군의 승리로 기울고 있었다.
그 즈음인 1944년 1월 15일, 아르헨티나 '산후안 지역'에서 큰 지진이 발생했다.
약 1만여 명이 사망했고 재산 피해도 엄청났다.
천문학적인 복구비용이 필요했다.
이재민을 돕기 위한 자선행사가 정부차원에서 크게 열렸다.
'에바'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연예인 중 한 사람으로서 열정적으로 행사에 참가했다.
그리고 국민들의 동참을 간절하게 호소했다.
그 행사가 마무리된 뒤, 갈라 모임에서 '노동부 장관'이었던 '후안 페론'을 처음으로 만났다.
두 사람의 운명은 그렇게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버전으로, 새롭게 엮여가고 있었다.
1938년, 첫번째 부인과 사별한 뒤 독신으로 살고 있던 '후안 페론'은 에바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고 둘은 뜨겁게 사랑했다.
24년이란 나이차도 둘의 사랑 앞에선 하등 문제될 게 없었다.
야망이 컸던 '에바'도 현직 고위 관료이자 장차 대권을 꿈꾸고 있었던 그를 놓칠 수 없었다.
'후안 페론'도 미모와 인기를 겸비하고 있던 '에바'를 절실하게 원했다.
15세 이후로 수많은 남자들을 만났고, 그들과 교제도 하고 동거도 하면서 자신의 꿈과 야망의 실현을 위해 그 남자들을 도약대로 삼았지만, 어쩌면 '후안 페론'은 모든 시냇물과 강물이 최종적으로 모여드는 바다 같은 남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불같은 사랑으로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갔다.
에바의 나이 25세 때였다.
그리고 동거 1년 후인 1945년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후안 페론'과의 결혼.
그것은 '에바'의 운명에서 가장 중차대한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에바' 인생에서 가장 놀라웠던 변곡점이었다.
그랬다.
어느 때보다도 더 치열하고 뜨겁게 그녀의 인생 캔버스에 '에바'의 운명이 야무지게 그려지고 있었다.
'후안'과의 결혼은 그녀 인생의 '화룡점정'이었다.
또한 자신의 스토리텔링을 위한 마지막 디딤돌이었다.
결혼 후에 '후안 페론'은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다.
'에바'는 모든 에너지와 정성을 쏟으며 남편의 선거를 도왔다.
본디 유명한 연예인이기도 했지만 남편을 향한 극진한 내조와 지극한 헌신으로 국민들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형성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젊은 그녀를 더욱 신뢰했고 좋아하게 되었다.
끝내 그녀는 국민들로부터 사랑스러운 애칭도 선물로 받았다.
국민들 모두가 애정을 담아 불렀던 그 이름, 바로 '에비타'의 탄생이었다.
1946년, '후안 페론'은 정식으로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에 취임했고 젊고 예쁜 '에비타'는 모두가 부러워했던 일국의 영부인이 되었다.
'퍼스트레이디'의 등극이었다.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27세의 세계 최연소 영부인이었다.
15세에 대도시로 나가 반드시 출세하고야 말겠다는 뜻을 세운 뒤 12년 만에 꿈을 이룬 전설적인 삶이었고 기적 같은 인생이었다.
'에비타'는 대통령 못지 않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찢어지게 가난했던 삶, 돈 없고 빽 없는 자들의 아픔과 고통, 그들의 상처와 좌절을 잘 알고 있었기에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각종 정책에 열정을 쏟았고 심혈을 기울였다.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빈자와 약자들을 적극 후원했다.
재단의 직원은 14,000여 명이었고 재단의 자산은 2억 달러 정도였다.
당시엔 어마어마한 거금이었다.
못 배우고 힘 없는 자들, 가난하고 아픈 자들, 노동자와 하층민들, 그리고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들을 집중적으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르헨티나 정치, 경제, 사회, 조세, 국방, 교육 등 국가 전반에서 절대다수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힘 없는 다수를 '데스카미사도(descamisado)'라고 불렀다.
기존의 기득권 세력들에겐 '에비타'가 눈엣가시였지만 '데스카미사도'에게 그녀는 '성녀'였고 어진 '마리아'였다.
또한 거룩한 '박애주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에비타'는 남편이자 대통령인 '후안 페론'보다 국민들로부터 더 크고 두터운 신망을 받았으며 유명세를 탔다.
그 덕분에 대통령의 지지율까지도 고공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후안 페론'도 '에비타'로부터 도움을 받는 입장으로 돌변했다.
세상엔 명과 암이 존재했다.
언제나 양면이 공존했다.
어느 일면만 횡행하는 세상은 없었다.
이른바 '페론주의'는 '데스카미사도'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대중의 인기를 권력의 유지에 적극 활용했던 '독재정치'이자 '인기 영합주의 정치'라는 낙인도 함께 받았다.
(오늘은 아르헨티나의 정치와 경제를 분석하거나 평가하는 글이 아니기에 더 이상 정치문제는 부연하지 않겠음)
또한 '에비타'는 성적으로 자유분방했고 어떤 경우엔 난잡했다.
제 아무리 자신의 꿈과 야망의 실현을 위한 도약대로 각계각층의 남자들을 이용했다고 하지만 기득권 세력들의 보수적인 관점에선 그녀의 '남성편력'에 대한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심지어 영부인이 된 이후에도 그녀의 자선사업이나 재단에 기부하겠다며 추파를 던졌던 세계의 갑부들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는 그리스의 선박왕인 '오나시스도' 그녀와 정사를 나눈 뒤에 당시로서는 거금인 10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루머가 아르헨티나의 정가에 퍼지기도 했었다.
그것이 바로 '오나시스, 에비타'의 '섹스 스캔들'이었지만 사실여부는 아무도 몰랐다.
국민의 절대 다수였던 '데스카미사도'는 그런 루머를 결코 믿지 않았다.
'후안 페론'의 집권 이전에 정치, 경제를 주름잡았던 기존 반대파들의 농간이자 사주라는 설도 파다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그런 스캔들의 추문과 공작을 반대파들의 사주로 생각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더 이상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본다. 오늘은 '에비타' 명암 중에서 주로 감동, 열정, 집념, 사랑과 헌신에 대한 얘기를 하고자 펜을 들었으니 그 부분에만 방점을 두자)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1950년(31세)에 이르자 '에비타'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자궁암'이었다.
그 당시 의료수준은 조악했고 열악했다.
대부분의 암은 치명적일 뿐만 아니라 한번 걸리면 대개 그것으로 끝이었다.
곧바로 죽음을 부르는 저승사자의 판결문으로 생각했다.
신은 한 인간에게 모든 축복을 다 허락하지 않으셨다.
'길흉화복'과 '생로병사'는 누구에게나 빠름과 늦음의 문제일 뿐 피해 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신은 공평하셨다.
그녀가 와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대중적 인기는 여전히 하늘을 찔렀다.
건강이 안 좋아 유세하기도 힘들었지만 '에비타'는 남편을 위해 늘 최선을 다했다.
그녀 덕분에 '후안 페론'은 대통령 재선에 다시 한번 성공했다(1951년 11월)
재선에 성공한 '후안'은 자신과 '데스카미사도'에게 모든 헌신을 다 바친 '에비타'를 '아르헨티나'의 영적 지도자로 추앙했다.
아내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그 정도였다.
둘 사이는 각별했고 따뜻했다.
그러나 그녀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어 1952년 7월 26일, 너무도 아까운 젊은 나이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향년 33세였다.
오랜 투병으로 몹시 야위었고 자궁암 말기엔 거의 먹지 못해 몸무게가 겨우 32㎏밖에 나가지 않았다.
수많은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이 '에비타'의 죽음에 진심으로 슬퍼했고 가슴을 치며 애도했다.
한순간 국가가 충격과 슬픔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또한 열흘간 국가의 공식적인 업무는 중단되었다.
모든 가게도 일시에 문을 닫았다.
단 한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전국적으로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바로 젊고 아름다웠던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 '에비타'였다.
광활한 '팜파스'의 어느 농장에서 주인집 식구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해 바치며 평생을 쥐 죽은 듯이 비루하게 살았던 여인과 그 여인의 몸속에서 태어나 어떤 축복이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정글 같은 세상에 알몸으로 내던져졌던 사생아, '에바'.
그 비천했던 신분에서 한 나라의 국모가 되기까지 수많은 난관과 역경을 극복하면서도 여자의 몸으로 세상을 끊임없이 부둥켜안았다.
그러면서 함께 웃었고, 함께 울었던 푸근한 여인이었다.
영부인의 장례식은 국가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추모객들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인산인해였다.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현재 '에비타'의 유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콜라타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지금도 성녀 '에비타'를 잊지 못하는 국민들의 추모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녀가 떠난 지 73년이 흘렀어도 하루 평균 15 - 20여 명의 추모객들이 꽃다발을 들고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묘역을 찾고 있을 정도다.
그러니 '에비타'가 '아르헨티나'에 남겼던 지대한 감동과 영향 그리고 박애와 사랑이 얼마나 뿌리 깊고 넓은 지를 능히 헤아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에비타'의 죽음은 세상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안겼지만 그 반대급부로 일부 사람들에겐 뇌리와 심장을 관통하는 깊은 영감도 주었다.
그녀의 짧은 생애, 강렬했던 인생, 파란만장했던 삶에 강한 전율과 감동을 느낀 자들도 많았다.
그 강한 울림과 인사이트 앞에서 그냥 멍한 상태로 있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뜻을 모았다.
뮤지컬 작곡분야의 거장인 '앤드루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와 뛰어난 작사가 '팀 라이스'(Tim Rice)가 머리를 맞대고 곡을 쓰고 작품을 만들어 세상에 선보였다.
그 걸출한 작품이 바로 뮤지컬 <에비타>였다.
그 작품을 감상하러 갔다.
기대하는 마음이 컸고 몹시 설렜다.
25년 12월 13일, 토요일. 오후 2시 공연이었다.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광림아트센터'에서 사랑하는 우리 형제들 네 부부, 총 여덟 명이 이 명작을 함께 관람했다.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웨버'는 <오페라의 유령>, <캣츠>를 작곡했던 뮤지컬계의 거장이었다.
작사가 '팀 라이스'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라이온 킹>의 작사를 담당했다.
둘은 자타가 공인하는 명콤비였다.
그래서 뮤지컬 <에비타>는 무엇보다도 음악적 완성도가 놓았고 각 무대의 디테일이 '어나더 레벨'이었다.
또한 두 사람의 수준 높은 음악과 예술성을 전 세계에 가슴 찡하게 알렸던 그들의 대표작이었다.
그리고 '토니 어워즈' 7관왕에 빛나는 최고의 뮤지컬로 통했다.
한국에선 2006년에 '초연'했고 2011년에 '재연'했던 작품이었다.
재연 이후 무려 14년 만에 드디어 '삼연'의 막이 올랐다.
이번엔 그 이전의 공연들보다 무대의 완성도, 멋진 의상, 무대 디자인, 수준 높은 음악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그리하여 2025년의 세모와 2026년의 세시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최고의 작품이었다.
그렇게 뮤지컬 <에비타>의 '삼연'이 서울의 신사동에서 성대하게 개막의 축복을 쏘아 올렸다.
11월 7일부터 내년 1월 11일까지 장장 63일간,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에 한 획을 긋고 있는 역작이었다.
인터미션 20분 포함 약 3시간 동안 나도 서너 번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진 환경 속에서도 절대로 꺾기지 않았던 한 사람의 의지와 진정성이 포효하듯 눈물 어린 열창으로 울려 퍼질 때, 바로 그 대목에서 울컥하는 뭔가가 관객들의 가슴속에서 사정없이 출렁거렸다.
'광림아트홀'을 찾았던 약 천여 명의 관객들 중 일부는 손수건을 꺼내 연방 자신의 눈가를 닦아내고 있었다.
뮤지컬 <에비타>는 일체의 대사가 없었다.
100% 노래와 음악으로만 공연을 이끌어가는 '성스루'(sung-through) 형식의 작품이었다.
관객들은 뮤지컬 배우들이 전달하는 노래 가사에 온전히 집중해야만 작품의 시놉시스를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런 구조였다.
'성스루' 작품의 장르적 한계도 있었지만 오히려 오감을 더욱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뮤지컬 <에비타>는 역동적인 안무, 섬세한 편곡, 드라마틱한 스토리, 휘황하며 강렬했던 조명, 세련된 무대 디자인이 돋보였던 작품이었다.
내가 감상했던 12월 13일(토) 오후 2시 공연에서는 '에비타' 역의 '김소현', '체 게바라'역의 '한지상', '후안 페론' 역의 '손준호', '마갈디' 역의 '김민철', '후안 애인' 역의 '김가현'이 열연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캐스팅이었다.
그 밖의 걸출한 뮤지컬 신예들의 파워풀하고 디테일한 연기와 노래에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뮤지컬 <에비타>의 대표 넘버는 너무나도 유명하고 친숙한 'Don't Cry for Me Argentina'다.
이 지구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 노래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을 성싶다.
이 곡은 암으로 죽어가는 '에비타'가 자국의 국민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간절한 당부였고 사랑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진솔한 감정을 담고 있는 가슴 절절한 노래였다.
감동적인 멜로디와 진정성 있는 가사로 듣는 이들을 눈물짓게 만드는 명곡이자 깊은 울림을 주는 노래였다.
특히 이 곡은 '클래식 발라드'와 '오케스트라 편곡'이 어우러져 웅장하면서도 모든 관객들의 심금을 울린 역작이었다.
서서히 죽어가는 '에비타'의 마지막 소망을 국민들께 간절한 마음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그래서 관객들은 이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사를 음미하며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에비타'는 이 노래를 통해 국민들에게 자신의 사랑과 헌신을 전하고 싶어 했다.
자신의 삶이 순탄치 않았음을 고백하면서도 국민들을 위해 노력했던 모든 순간들이 진심이었음을 강조했다.
한 줄 한 줄의 가사는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왔던 약속과 사랑과 헌신의 증표였다.
노래 전반에 걸쳐 흘렀던 '에비타'의 애잔하면서도 따뜻했던 정감이 관객들의 영혼에도 저릿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겨울밤이 깊어졌다.
뮤지컬 <에비타>의 대표곡 ' Don't Cry for Me Argentina'의 노래를 들으며, 에비타의 심정으로 다시 한번 가사를 음미해 본다.
건강 악화로 조금씩 스러져 갔던 33세의 젊고 아름다웠던 '에비타'의 그 슬픔, 그 간절함 그대로를 오롯이 느껴보고 싶다.
It won't be easy, you'll think it strange
When I try to explain how I feel
That I still need your love after all that I've done
You won't believe me
All you will see is a girl you once knew
Although she's dressed up to the nines
At sixes and sevens with you
I had to let it happen, I had to change
Couldn't stay all my life down at heel
Looking out of the window, staying out of the sun
So I chose freedom
Running around, trying everything new
But nothing impressed me at all
I never expected it to
Don't cry for me Argentina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All through my wild days
My mad existence
I kept my promise
Don't keep your distance
And as for fortune, and as for fame
I never invited them in
Though it seemed to the world they were all I desired
They are illusions
They're not the solutions they promised to be
The answer was here all the time
I love you and I hope you love me
Don't cry for me Argentina
Have I said too much?
There's nothing more I can think of to say to you
But all you have to do is look at me to know
That every word is true
원곡을 들으며 가사를 음미하는데 자꾸만 울컥했다.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데스카미사도'를 결코 저버린 적이 없다는 애절한 호소가 그랬고,
"I kept my promise. Don't keep your distance."
내가 떠나도 이 '에비타'를 잊지 말아 달라는 간곡한 당부, 이 대목이 그랬다.
"There's nothing more I can think of to say to you. But all you have to do is look at me to know. That every word is true."
죽어가는 '에비타'의 진솔한 고백, '아르헨티나 국민'을 뜨겁게 사랑했던 그 순결한 마음을 전달한 뒤, 그게 전부였고 진실이었음을 대통령궁 발코니에서 노래로 호소했을 때 구름같이 운집했던 '데스카미사도'는 울부짖었고, 관객들도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쳐내던 장면이 오버랩되며 나의 뇌리를 맴돌았다.
노래의 모든 선율과 가사, 그 행간 행간마다에 에비타의 눈물겨운 호소와 고백이 절절하게 묻어났다.
모든 문화예술 작품은 정치나 역사, 경제상황을 늘어놓거나 도식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도 아니고 그런 기법도 아니다.
꿈을 향한 인간의 열정과 노력, 그것으로 인한 감동과 눈물 그리고 가슴 뭉클한 서사가 각 예술 장르별로 고유한 캐릭터를 띠며 향기롭게 표출되는 것이다.
그것이 문화고 예술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바뀔지라도 사람들은 각 문화예술의 영역에서 여전히 자신의 깊은 내면을 발견하려 힘쓰고,
깊게 성찰하며 따스하게 위로받고 싶어 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아갈지라도 그런 일상 속에서도 음악 한 곡, 영화 한 편, 책 한 권, 사진 한 장, 그림 한 점을 가까이하려고 애쓰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리라.
문화와 예술이 인간에게 허락된 최고의 축복임을 다시 한번 고백하는 겨울밤이다.
사랑하는 모든 분들, 연말연시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기도한다.
사랑과 감사를 전하며.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