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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을 읽었다. 저자는 인류의 문명은 환경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주장한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13000년간 19세기까지 뉴기니와 같은 지역은 수십만년전에 시작된 석기와 수렵 채취경제에 머물렀지만 여러 지역에서 농경과 목축을 통해 고대 문명이 발생했고, 유라시아와 같은 지역은 5천년전에 청동기 문명이, 그리고 철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6 문명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선진문명에서는 살해당하는 위험이나 의료서비스를 더 잘 받을 수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교우관계나 대가족으로 부터 받을 수있는 사회적 지원은 훨씬 적기 때문이다. 24
13000년전은 지질학자들이 현세라고 부르는 시대와 남미까지 인류가 살기시작한 때와 일치한다. 인류가 유인원으로 부터 진화한 시점은 700만년전이다. 우선 고릴라가 분화했고 그리고 침팬지와 인류가 분화한 것이다. 세 종이 아프리카에 서식했기에 인류의 조상도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것으로 봐야 한다. 400만년전에 직립하게 된 인류는 250만년전에 신체가 커졌고 170만년전인 호모 에릭투스에 도달했다. 유라시아에는 100만년전에 진출했고 오스트렐리아에는 배가 필요했기에 4만년전에야 거주하게 되었으며 미주에는 14000년전에 도착하여 남미에 12000년전에 도달 한 것으로 보인다. 48
유럽에는 50만년전부터 거주했는데 최근 4만년전부터 13000년전까지 네안데르탈인이 살다가 멸종했다. 그들의 석기는 조잡하여 원거리 사냥이 불가능했고 물고기도 잡을 수없었기에 5만년전에 나타난 크로마뇽인과의 경쟁에서 도퇴되었다. 이 때에는 근세의 대향해시대와 비견되는 대약진시대로 인구밀도가 증가하면서 유라시아 각지로 인류가 이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크로마뇽인은 작살과 투창기는 물론 활과 화살까지 사용했기에 위험한 동물도 원거리에서 사냥할 수있었기에 인구밀도가 증가하는 시점에서 식량을 구하기 쉬웠고 이주할 때 추위에 견딜 수있는 능력이 배양되었기에 멸종을 면했다. 53
호주에는 대형 동물이 모두 멸종했는데 이는 도도새의 멸종과 유사한 이유 때문으로 저자는 주장한다. 유라시아의 대형 동물들은 수백년간 인류에게 적응하여 멸종을 면했지만 호주에서는 그러한 기간이 없었기에 인간이 다가가도 피하지 않고 먹이가 되버렸던 것이다. 이는 미주에서도 다시 반복된다. 55 미주에서 남쪽으로 천년동안 13천키로에 이르는 남미끝까지 이동한 것은 사실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수렵채집경제에서 인구밀도는 낮아서 1평방마일당 1명이상이 되면 먹이가 부족하게 된다.
인구증가율이 연1.1%만 되도 100명의 인구는 1천년이내에 1천만명이 되며 13000키로는 하루에 13키로면 충분이 이동할 수있는 거리다. 수렵 채집을 위해 먹이가 풍부한 곳으로 매일 이동했다면 당연한 결과다. 바운티호의 반란자들과 타이티 여인들이 이동한 핏케언 섬에서의 인구증가율은 3.4%에 달했기에 1.1%는 높은 증가율도 아니다. 62 마오리족과 모리오리족은 공통 조상을 가진 폴리네시아인이다. 하지만 마오리는 뉴질랜드 북섬에서 인구밀도가 높은 상태로 경쟁을 하면서 살았고 이를 피해 채텀제도로 이주했던 마오리는 모리오리족으로 추운 기후로 농경을 포기하고 수렵 채집경제로 회귀해야 했고 인구조절을 위해 남아를 거세하면서 경쟁없이 살았다.
500년후 마오리족에게 발견된 채텀제도는 우수한 무기와 조직을 갖추었지만 수적으로 열세였던 마오리족에게 점령되었고 모리오리족은 살해되거나 노예가 되었다. 우리가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라고 자랑하는데 일제가 침략하여 노예로 부렸던 것과 비슷한 운명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평화를 사랑하더라도 전쟁억지력은 보유해야 한다. 74 밀과 보리가 제일 먼저 재배된 이유는 건조기에 죽기에 목질을 생성하지 않고 종자를 크게 만들기에 인간에게 유용하기 때문이었다. 벼과 식물인 율무도 열매가 큰 상위 1%에 해당한다. 벼는 단백질이 적지만 밀은 13%에 달해서 콩 다음으로 식물성 단백질원이 된다. 아동에게 단백질이 부족하면 올챙이배가 된다. 222
아즈텍과 잉카는 물론 천연두는 미시시피 유역의 북미 인디언 문명을 95% 몰살시켰다. 차이는 스페인군이 가기도 전에 텅 빈 마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2천만명이었던 그들은 전염병에 의해 강 유역의 거대한 둑만 남기고 단 100만명으로 위축되었다. 308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발명은 우선 만들어지고 필요성을 찾는다. 에디슨의 축음기도 우선 발명되고 용도를 유언녹음, 맹인용 독서, 시간알림 등으로 용도를 기록했고 몇년후 에디슨은 축음기의 상업적 실패를 언급했지만 사무용 구술기계로서 판매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20년후에나 음악을 주요용도로 인정했다. 353
발명은 한명의 천재가 이루는 것이 아니다. 뉴튼이 언급했듯이 거인의 어깨에서 더 멀리 볼 수있는 것이다. 즉, 여러 선행 발명을 개선하거나 용도를 바꾸는 것이 본질이다. 와트가 끓는 주전자를 보고 증기기관을 발명했다는 것도 허구다. 1769년 그가 발명했다는 시점은 뉴커먼이 57년전에 이미 증기기관을 발명하여 100대 이상이 제조된 후였다. 그리고 뉴커먼도 1698년에 특허 받은 증기기관을 개선한 것이었고 그 것도 1680년에 프랑스에서 드니 파팽이 설계한 것을 영국에 도입한 것이였다. 물론 그 전에 네덜란드의 과학자가 아이디어를 낸 것이 기반이 되었기에 와트의 발명에 대한 반발이 크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뉴커먼도 발명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355
기술이 사회를 혁신하기도 하지만 사회의 반발을 받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타자기다. 1873년 쿼티타자기는 구식 기반으로 타자속도가 높으면 엉키는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왼손에 자주 사용하는 알파벳을 배정했었다. 더 효율적인 자판이 속도를 두배이상 향상하게 발명되었지만 기득권에 의해 아직까지도 도입되지 못하고 있다. 트랜지스터도 미국 웨스턴 일렉트릭에서 발명되었지만 발명권자가 진공관으로 매출을 올리고 있었기에 도입되지 않고 일본 소니에 팔렸다. 그리고 그 결과 일본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미국 시장은 물론 세계를 장악하게 되었다.
영국에서 1920년대까지 전기대신 가스조명을 사용했던 것도 비슷하다. 이미 많은 투자를 가스 가로등에 했던 도시들은 전기로의 교체를 달가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61 이미 보급된 기술이 버려지는 경우도 많다. 일본은 1600년에 세계 최고의 화승총 제조국이 되었다. 하지만 기득권자인 사무라에에게 배제되고 사라졌고 이는 미국 페리사령관이 군함에 대포를 가지고 개항을 요구하면서 다시 도입되었다. 일본의 총기 거부나 명나라까지 세계 최강이었던 중국의 해상 선박거부는 유명한 역사적 사례다. 375
뉴기니와 호주를 통해 지금까지 저자의 주장을 다시 설명한다. 뉴기니의 고지대는 농업이 발전했지만 저지대와 호주북부는 건조했기에 수렵 채집만이 가능했고 고지대는 협소했기에 인구가 증가하는데 한계가 있어 부족수쥰 이상으로 발전할 수없었다. 유럽인의 이주는 저지대와 호주북부에서는 말라리아로 좌절되었고 인니와의 접촉으로 항체를 형성한 뉴기니 원주민과는 달리 호주 원주민은 그런 기회가 없어 미주 원주민과 같은 운명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호주의 동남부는 유라시아의 작물에 적합했고 양의 목축도 가능했기에 유럽인들이 정착했지만 뉴기니는 쓸모가 없어 동부는 독립할 수있었다. 화란이 점유하던 서부는 비교적 적응이 가능했던 인니에게 넘겨졌다. 482
중국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황하와 양자강, 그리고 운하로 연결되었고 서부 산지에서 동부 해안으로 완만하게 하강하는 지형으로 인해 하나의 나라로 오래전부터 통일되었다. 비슷한 크기의 유럽은 산이 많고 강이 적어서 여러개의 나라로 분할 된 것과 대조적이다. 참고로 중국대운하(China's Grand Canal, 大运河, Da Yun He)는 중국의 동서 연결을 위한 거대한 수로로, 세계에서 가장 긴 인공 수로다. 이 운하는 약 1,794킬로미터에 달하며,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잇고 있다. 건설은 기원전 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여러 왕조에 걸쳐 확장되었다. 최초로 건설된 구간은 춘추전국시대(기원전 5세기 - 기원전 3세기) 동안 시작되었고, 이후 여러 왕조를 거쳐 점차적으로 확장되었다. 특히 수나라(581–618)와 당나라(618–907) 시대에 운하의 길이가 확장되었으며, 원나라(1271–1368)와 명나라(1368–1644)에서 거의 현재와 같은 형태로 완성되었다.
운하는 북쪽의 베이징에서 시작하여, 하얼빈, 장쑤성, 저장성, 강소성, 우한, 장시성 등을 거쳐, 저장성의 항저우에 이르기까지 연결된다. 이 운하는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고,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대운하는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운하는 고대 중국의 기술력과 인프라 발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수양제가 군사중심지 북경과 황하를 연결하는 영제거, 황하에서 정치중심지 장안을 연결하는 광통거, 그리고 황하에거 경제중심지 항주를 연결하는 통제거를 건설했지만 송나라가 금나라에게 패퇴하면서 파괴했다.
원나라때 바닷길을 활용하면서 건설을 재개했고 명나라시절 당나라 때 발명된 갑문을 사용하여 기존 경사를 따라야 했던 2,700키로에 이르는 운하대신 북경과 항주를 직결하는 1,794키로의 경항대운하를 완공했다. 결국 강남 곡창지대에서 북경으로 쌀의 수송규모가 원대의 40배로 증가했다. 청나라시절에도 철도가 개통하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수송수단으로 기능했다.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항복하게 된 이유도 해안봉쇄가 아닌 대운하의 기점인 난징함락이었을 정도다. 다만 내륙운송을 하면서 명나라가 왜구 등의 피해를 막기위해 해상 운항을 금지하면서 해외교역이 중지된 것은 옥의 티다. 494
오스트로네이아인은 남중국에서 우선 타이완으로 이동했고 거기서 아우트리거가 양쪽에 있는 돛을 단 카누를 타고 필리핀, 인니, 인도양을 거쳐 마다가스가르와 태평양의 대부분의 섬에 정착했다. 다만 이미 농업을 통해 경쟁력을 가지고 있던 뉴기니와 작물재배가 적합하지 않았던 호주 북부는 패스해서 유럽인이 동남부의 경작에 적합한 땅에 도착할 때까지 수렵채집 경제가 호주에서 유지되었다. 507 저자는 식량생산에 대한 이론을 아프리카에서 다시 재현한다. 사하라 이남의 서아프리카에서 농경을 시작한 반투족은 적도 아래의 적합한 땅을 찾아 원주민 코이산족을 몰아내면서 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까지 차지한다.
원래 중아프리카에 수렵으로 살던 피그미족은 이와중에 언어를 잃고 코이산족은 언어는 유지하지만 경작에 불리한 건조한 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반투족의 아프리카 작물에 부적합했던 남아프리카는 온대지역의 작물에 적합한 작물을 가지고 있던 유럽인이 도착해서 코이산족을 다시 몰아내고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결국 식량생산이 유리한 집단이 불리한 집단을 무기나 전염병으로 죽여 몰아내는 것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미주에 이어 다시 한번 인종과 어족을 활용하여 입증한 것이다. 559
15세기 명나라 시절 중국은 수백미터길이의 배로 선단을 구성하여 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유럽보다 훨씬 대규모이자 빨랐다. 하지만 환관과 대신간의 권력다툼에서 대신이 이기고 해외원정은 중단되고 조선소는 폐쇄되었다. 런던이 가스등을 고수하고 일본이 화승총을 포기했던 것과 유사하다. 규모의 경제는 너무 커지면 오히려 작아진다. 유럽과 같이 적정한 규모의 국가가 병립하면 경쟁에 의해 도퇴되나 중국은 그럴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한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없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상위권 10%국가의 평균이 적정규모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602
콜럼버스가 중국에 있었다면 한번의 거절로 그는 꿈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는 유럽에 있었고 이태리에서 태어나 프랑스, 폴투갈, 결국 스페인에서 꿈을 이룰 수있었다. 스페인이 막대한 식민지를 획득하자 주변 나라들도 따라 하게되었다. 그리고 후발주자들은 오랬동안 상대적 열세를 보이다가 일으킨 것이 1차세계대전이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한번이 아니다. 중국에서 14세기에 있었던 정교한 수력방적기포기, 세계적인 기계식 시계포기나 15세기 해외항해금지 등을 통해 15세기 후반부터는 전반적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20세기에도 문혁을 통해 5년간 모든 학교가 문을 닫았던 적도 있다. 605
눈토끼의 털은 갈색이었다가 눈이 오는 겨울이 되면 백색으로 변한다. 이러한 현상보다 그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학문에는 더 중요하다. 1815년의 전쟁과는 달리 1918년의 경우는 수십년후에 다시 전쟁이 발생한 이유를 알아야 이를 막을 수있기 때문이다. 616 일본원주민은 수렵채집을 하던 조몬족이었고 이들은 고구려에서 갈라진 백제 농경작민에게 밀려 현재는 홋카이도의 아이누족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고구려는 2300년전에 형성되었고 신라와는 같은 우랄알타이어계이기는 하지만 달랐다.
일본어와 한국어는 문법체계와 기본 어휘 15%정도를 공유하는데 이는 5천년전에 두 언어가 분리되었음을 시사한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가 2천년전에 분리된 것과 비교해보자. 참고로 아이누어와 일본어간에는 어떤 특별한 관계도 없다. 고구려인은 한반도 북부에서 나라를 형성했음은 물론 한반도 남부와 일본에 진출하여 백제와 일본이라는 나라도 형성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본 원주민을 미주 원주민들과 같이 몰아낸 것다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논문은 예상과는 달리 일본의 공격을 받지 못했는데 이는 일본 천황이 자신은 백제의 후손이라고 언급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반박할 근거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633
그런 측면에서 일본의 조선침공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한 보복이라고 볼 수도 있고 영국인이 미국으로의 이민을 통해 더 강력한 나라를 형성했다고도 볼 수있다. 일본은 여전히 한국보다 국력이 강하다. 인당 생산량과 인구수에서도 한국이상이고 노벨상과 같은 기본 역량도 훨씬 높다. 이 책의 기본 주장은 적절한 규모와 경쟁이 인류의 미래를 만드는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식품산업이나 독일의 맥주산업이 미국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는 이유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으니 우리도 생각해볼 일이다. 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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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특별서문_ 사랑하는 한국 독자들에게; 서문_ 왜 세계 역사는 양파와 같은가?; 프롤로그_ 얄리의 질문
1부 | 에덴에서 카하마르카까지
1장 출발선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
2장 역사의 자연 실험
3장 카하마르카에서의 충돌
2부 | 식량 생산의 기원과 확산
4장 농업의 힘
5장 역사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6장 농경, 선택의 기로
7장 아몬드를 재배하는 법
8장 사과가 문제였을까, 인디언이 문제였을까?
9장 얼룩말과 불행한 결혼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 법칙’
10장 드넓은 하늘과 기울어진 축
3부 | 식량에서 총, 균, 쇠로
11장 가축의 치명적 선물
12장 청사진과 차용한 문자
13장 필요의 어머니
14장 평등주의에서 도둑 정치로
4부 | 여섯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
15장 얄리의 종족
16장 어떻게 중국은 중국이 되었을까?
17장 폴리네시아로 빠르게
18장 반구의 충돌
19장 어떻게 아프리카는 흑인의 땅이 되었을까?
20장 일본인은 누구인가?
에필로그_ 과학으로서 인류사의 미래; 2017년 후기_ 《총, 균, 쇠》의 관점에서 본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 감사의 글; 옮긴이의 글; 해제; 참고문헌;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