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고픈 섬 '牛島'
섬에서 섬으로 드는 건 유배 가는 거다
유배를 즐기고파 그 섬의 둔덕을 오르니
소의 머리였다
그 소는 나날이 해 하나 건져 먹고
넙죽 업드려 대해를 꿀꺽 마셔댄다
육지가 그리운지 늘 기웃거린다
날씨 좋으면 백록담에
그렇고 그런 날엔 일출봉에
태평양이 끌어흔들어도
해풍이 놀러가자해도
육지가 오라 불러도 못 들은 척 하더니
내가 가니 있는 그대로 반긴다
나에게만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곳에 간다
자꾸 간다 사시사철 간다
유배가 그리운지
이 다음에 그럴 일이 생기면
해녀들의 물질휘파람에 파도가 들썩이는
우도로 또 갈란다.
나, 그 누구에게도 선뜻 내주는
脫세상 자율유배지
섬 속의 그 섬으로
글 / 동천
여기는 행정구역상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우도면
성산포항에서 배를 타고 우도로 가게 된다. 차량도 선적이 가능하다.
제주 성산포 일출봉 앞에 가면 건너다 보이는 섬이 바로 우도(牛島). 공중에서 보면 마치 소가 누운 형상이라 붙여졌단다.
서빈백사(西濱白沙)
우도 서쪽 서천진동과 상우목동의 경계가 되는 해안에 형성된 산호모래사장.
서빈백사에서 조금 해안을 따라 가다보면 드렁코지가 나온다.
이곳은 우도에 최초로 사람이 왕래한 저점이 된다. 조선 순조때인 1679년 당시 제주 목사가 말 150필을 우도에 하사하여
자연방목이 시작되었다 한다. 드렁코지란 '들어온 길목'이라고 해석된다.
'코지'는 제주방언으로 끝, 뾰족한 곳, 드나드는 길목이라는 뜻이다.
해변에 피어나는 꽃이다.
갯까치수영 꽃
서빈백사에서 일주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우도를 칭하여 '瑞山溶出'(=용암이 솟아 상서로운 산)이라는 기록을 담은 돌비석이 나온다.
이 기록대로라면 우도는 고려 목종 5년(서기 1004년) 6월에 화산폭발로 생겨난 섬이다.
해안도로변 곳곳에 가지런한 식당을 접할 수 있다. 성산포에서 보이는 쪽 해변지역만은.
후해석벽을 지난 다음엔 민가외엔 음식점도 머물 숙소도 찾기 어렵게 되니 유의하시길...
정갈한 반찬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아래 사진의 안테나 부분이 우도에서 가장 높은 지형인 쇠머리오름(해발132m)이다.
위 사진은 우도에서 가장 높은 지대 원경이다. 우도에는 마늘재배를 많이 하고 있었다. 5월의 곡식으로 밀도 심어 수확기였다.
다가서면 장관이다.
일출봉도 한 눈에 내려다 보이고 바다가 드넓게 시야에 들어온다. 승마도 가능하고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거니는 산책은 환상적이다.
우도 언덕에서 일출봉을 내려다 보고 있는데 큰 어선들이 경주를 벌인다. 해무에 흐릿한 일출봉은 헌구두를 바다에 띄운 듯
희끄무레하다.
위 사진은 어찌나 노래를 잘 하는지 이름 모를 새가 바위벼랑에 앉았다가 살짝 날아가길레 찍음.
아래사진은 후해석벽 (後海石壁)
위 사진이 제주도 쪽인 우측지형이라면 후해석벽은 그 반대인 좌측석벽지대이다. 해안단층 석벽이 특이하다.
후해석벽 곁에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는 백사장이 바로 '검멀레 해수욕장'이다.
지금부터는 후해석벽을 지나 섬을 돌아보자. 가다보면 이색적인 꽃이 고울 것이다.
염주괴불주머니. 모양과 달리 향기는 별로다. 5월의 꽃이기에 그저 그 계절을 닮아 좋아 보인다.
갯메꽃. 어릴 적에 장사해수욕장 귀퉁이에 널려 있던 꽃이다. 모래속에 줄기를 파묻었던 내 고향 그것과 사뭇 다르게
현무암 바위틈에 대고 생을 질기게 이어가고 있었다.
갯메꽃
갯바람 스치니
파도맛 간간하다
야트막 언덕에서
햇살과 도란도란
5월 해풍에
찢길 듯 사그라들 듯
빈 창공에 닿았네
분홍빛 그 입술
나는 나는 보았네
섬 속의 고운 순정
글 / 동천
가다보면 돌담도 많다.
아름다운 제주의 본질은 무엇일까 ?!!
제주에서는 돌담이 흔하다.
風多, 女多, 石多의 섬.
바람이야 태평양 그 벌판이니 당연할 것이고,
여성은 남성에 비해 많기에 붙여진 것이리라.
옛부터 남성들은 바다위의 삶이었으니 희생이 많이 따랐을 수밖에...
그러해서 슬픈 전설도 많이 생겨났을 수 있다.
숭숭 구멍이 많기에 건재할 수 있는 것이 제주의 돌담이다.
그 세찬 바람도 돌담을 밀쳐도 빈틈이 많으니 힘이 안 날 것이다.
풍선에다 바람을 불어넣는데 헛김이 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손가락으로 살짝 밀면 넘어갈 듯 생긴 돌담이 곳곳에 즐비하다.
그렇게라도 담을 만들지 않으면 곡식이 바람에 견뎌나지 못한다.
제주사람들은 돌을 딛고 살아간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다에 나갈 때나 들어 올 때나 저 검은 갯바위를 지나게 마련이다.
생김새는 스폰지같으나 천성이 습기를 머금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그러해서인지 돌담엔 그 어떤 이끼나 잡풀도 범접하지 못하고 만다.
육지처럼 흙을 발라 쌓은 담이 아니기에 군더더기가 끼지 않는다.
결국 저 검은 현무암의 독특한 성질 때문에 제주의 바닷물빛은
고운 원래 빛깔 그대로 유지가 가능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성 싶다.
뭐니뭐니해도 제주도에 가면 그 검은 돌에 대한 성질은 꼭 알아야 한다.
다른 돌과 달리 돌과 돌이 잘 연결되고, 서로 끈끈하고,
굵든 작든 성질도 같다. 본성이 같으니 각자인 듯 하면서 전체인 것이 된다.
저 검은 돌 때문에 섬 전체의 본질이 같아지고 만다.
한라산 백록담에 둘러선 것이나 해변에 깔린 것이나 수심에 잠긴 것이나
저 태평양 심해로 뻗은 그것이나 다 같은 본질이다.
보기보다 단단하고 갈라지지 않으며 흡색이나 탈색도 안 된다.
다른 것은 귀해도 돌은 흔한 곳.
이토록 현무암이 있기에 우리의 제주가 영원토록 아름다울 수 있으리.
삘기. 어린 새순이 돋는 이른 봄에 달큰한 맛이 나기에 어릴 적에 뽑아 먹은 추억이 있는 그 풀. 억새풀의 일종이다.
이 맛을 아는 이 또 누구 ??!! 칡뿌리 파고 소나무 햇가지껍질 질근거린 草根木皮의 아련한 가난의 추억이 여기서 되살아 나다니...
해녀들의 섬 비양도로 가는 다리다. 제주-우도-비양도, 우도에 붙은 섬이었건만 지금은 다리가 놓여 연결이 되어있다.
제주시 한림읍 비양도가 아닌 여기는 우도에 붙은 비양도이다. 나도 착각을 한 섬이다.
비양도 망대(望臺) 모습
비양도 망대 입간판에는
이 망대가 쌓아진 시기를 제주 4.3사건 (1948년) 당시로 우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 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용도는 주로 우리나라 남해안을 관찰하게 되어 있는 등으로 볼 때 적을 관측하기 위한 것과는 약간 다르다고 해석했다.
내가 봤을 때도 망대에 오르는 돌계단(아래 사진)이 바다 반대편이 아닌 측면이라는 것으로도 군사적 목적과는 약간 상이하다.
망대위에 올라봤다. 콘크리트 바닥이다.
비양도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자동차로 등대에 접근하려던 내 의도와 달리 흰모래가 쌓인 곳에서 차바퀴가 헛돌아
자칫 래커차를 부를 뻔 했다. 섬인지 바위둔덕인지 분간이 안 가는 그곳. 현무암엔 세월의 모래가 가득 담겨져 간간하다.
망대와 비양도 등대 사이에 육모로 된 목조정자가 나직하게 위치하고 있어 아늑하다.
내가 비양등대까지 가려고 차를 몰아 들어갔는데 사진상으로 등대 가기 직전 흰 색깔이 바로 고운 모래가 쌓여있어
차바퀴가 헛돌아 그냥 차를 돌려 나오는데도 애를 먹었다.
해녀들의 삶을 고스란히 간직한 섬이기에 자가용족을 거부했는 지도 모를 일이다.
비양도 망대에서 바라본 우도의 맨 높은 지대, 즉 등대쪽 쇠머리오름 원경이다.
우도를 떠나오려고 배에 올랐는데 저만치 바다에서 돌고래의 쇼가 시작되었다.
내 카메라 렌즈로 잡기엔 너무 먼 거리였다. 지구를 톱니바퀴로 돌리려는 듯 연신 보였다 잠겼다 했다.
우도를 떠나오는 배 뒷전의 모습이다.
가는 곳마다 검게 숭숭 구멍이 나서 엉성해 보여도 결코 그렇지 않은 화산이 낳은 현무암.
그 속속들이 바다 이야기, 해변의 사연, 파도에 흔들리는 섬의 사계와 섬자락의 애환을 담고 있어
이국적인 아름다움이 잔잔하게 깃든 우리의 섬. 그 환상의 섬 제주 곁에 의젓한 소가 누워 듬직하다.
우도가 있기에 외롭잖은 섬이 되고 있는 제주, '牛島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