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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넬리오 교황
고르넬리오 교황은 251년에 교황으로 뽑혀, 로마 박해 시대에 2년 동안의 짧은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배교를 선언했던 신자들을 용서하며 다시 교회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이단을 거슬러 교회를 지키다가 유배되어 253년에 순교하였습니다.
치프리아노 주교
치프리아노 주교는 고르넬리오 교황과 같은 시대의 목자로서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북아프리카 출신의 그는 늦은 나이에 개종하여 사제품을 받고 훗날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박해 속에서도 고르넬리오 교황을 도와 교회의 재건에 힘쓰다가 258년에 순교하였습니다.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신부님의 차를 탈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에 타자마자 신부님께서는 주유를 하고 가겠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리고 주유소를 찾아가는데 성당에서 한참 떨어진 곳을 가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주유소는 우리가 가야 하는 방향의 정반대이기도 했습니다.
왜 이 주유소를 찾았을까요?
다른 주유소보다 리터당 10원이 더 싸다는 이유더군요.
여기에 차 무게가 무거워서 기름을 많이 먹는다고 주유도 절반만 합니다.
기름도 나오지 않은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당연히 절약을 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솔직히 절약을 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30리터 정도 넣었으니 성당 앞 주유소보다 300원 절약했습니다.
그러나 이동한 거리를 생각해보면 300원 이상을 더 쓴 것 같습니다.
실제로 종종 이런 분들을 많은 것 같습니다.
본인은 절약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따지면 절약이 아니라 오히려 손해를 가져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신부님은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계속된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싼 주유소를 알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차를 통해 절약하는 방법을 많이 알고 계시더군요.
브레이크를 한 번 밟을 때마다 거의 50원씩 든다면서 가능한 한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에어컨 켜는 것도 기름이 많이 소비된다면서 에어컨을 켜지 않습니다.
그런데 창문을 열면 공기 저항이 생긴다며 창문도 열지 못하게 합니다.
누군가는 꼭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야 하느냐고 불편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끼며 사시는 신부님이기에 사목활동 안에서도 허투루 낭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돈만 모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필요할 때에는 아낌없이 쓰면서 참으로 많은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몇몇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에 대해 복음은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당시에는 여성의 지위를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대단한 행동을 해도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복음에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웬만한 남자들보다 훨씬 더 대단한 봉사와 나눔을 실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노력들이 주님의 활동을 도왔고,
주님의 기쁜 소식이 세상 끝까지 전파되는 데 커다란 힘이 된 것입니다.
앞서 신부님께서 낭비하지 않고 절약하면서 주님의 일을 해 나가고 있는 것처럼,
또한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노력들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은 누구 한 명의 노력만으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해야 가능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로자>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 두지 말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그에 걸맞는 응답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하게 되면 더 큰 감사를 할 기회가 옵니다.
빈첸시오 성인은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자유로워집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녀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쌓아 놓으면 쌓아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논리입니다.
사랑은 베풀면 베풀수록 풍요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셨는데 ,
제자들과 막달라 여자 마리아,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도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일찍이 악령과 질병에 시달린 사람도 있었는데 주님을 만나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악령과 고통이라는 시련을 통해서 주님을 만났고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했기에 모두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따름으로써 주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었고
나중에는 십자가 곁에도 설 수 있었고(루가23,49)
천사들로부터 주님 부활의 소식을 듣고 이를 사도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루가24,10).
여인들은 주님을 만남으로써 행복했고
자기의 것을 내놓음으로써 제자들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베풀었지만 보답을 바라지 않았고
자기네 재산을 바쳤지만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숨은 공로자들입니다.
그들은“은혜를 베푼 것은 모래밭에 새기고 은혜를 입은 것은 돌판에 새겼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도직 단체의 구성원이 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궂은일을 도맡아 합니다.
때로는 오해를 사고 무시당하는 일도 있지만 '하느님은 아시니까' 하면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숨은 공로자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
(1디모 6,8-9)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한 것이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화가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부자 되었다 해도, 그 가산이 늘었다 해도 너는 두려워하지 마라.
죽을 때면 아무것도 지니고 갈 수 없으며, 영화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하리라.”
(시편 49)
따라서 여인들이 자기네 재산을 주님의 일에 쓴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은총을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
(성 알퐁소)
그리할 때 우리 모두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로자가 됩니다.
지금 감사하십시오!
절대 미루지 마십시오!
그러면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만날 것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여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돕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루카 8,1-3)
여기서 ‘시중을 들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활동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일과 음식을 대접하는 일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루카 9,58)
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고,
또 복음서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는 이야기(마태 12,1),
빵이 한 개밖에 없다고 제자들이 걱정했다는 이야기(마르 8,14-16) 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여자들의 후원 덕분에 예수님과 사도들이 풍족한 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여자들은 각자 형편에 따라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예수님과 사도들을 도와드렸던 것 같은데,
그것이 항상 넉넉하고 충분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굶게 되는 상황에서는 여자들도 함께 굶지 않았을까?)
어떻든 루카복음서 저자가 복음서에 여자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은
‘여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다녔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혹시 이 내용에 대해서,
“사도들은 전부 남자인데, 시중을 드는 사람은 전부 여자다. 이것은 남녀 차별이 아닌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이 내용은 차별이 아니라 역할이 구분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사람마다 다른 탈렌트를 받는 것은 차별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공평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에 여자들이 시중드는 것을 남자인 사도들이 당연하게 생각했다면,
또 여자들을 아랫사람처럼 대하면서 자기들은 윗사람인 것처럼 행세했다면,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 22,27)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 주님이신 분입니다.
신앙인은 자기를 ‘섬기는 주님’이신 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윗사람도 없고 아랫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 섬기고 서로 시중을 들 뿐입니다.
(굳이 누가 더 높으냐고 묻는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섬기시니 섬기는 사람이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말은 남자와 여자의 역할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남존여비나 남녀차별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던 시절의 여자들의 역할과 사도들이 교회를 다스리던 시절의 ‘일곱 봉사자’의 역할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사도 6,2-3)
사도들의 말을 보면,
예수님과 함께 지내던 시절에 여자들이 했던 일을 기억해 내고 일곱 봉사자를 뽑은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복음 선포에 전념하고 여자들은 시중을 들던 모습과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 전념하고 일곱 봉사자는 식탁 봉사에 전념하는 모습이 많이 비슷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모두 한 지체로 되어 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고, 또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습니다.”
(1코린 12,18-21)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1코린 12,27)
또 교회 공동체를 건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에페 2,20-21)
‘몸’으로 표현하든지 ‘건물’로 표현하든지 간에
교회 공동체 안에는 필요 없는 사람도 없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필요하고, 모두가 다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시중을 들면서 따라다녔던 여자들도
공동체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한 일들도 중요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만큼이나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었다는 것.)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의 일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비하해도 안 되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도 안 됩니다.
작은 일들이 모여서 하느님 나라 건설이라는 큰 일이 이루어집니다.
- 전주교구 /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죽여도 죽지 않는 주님 부활을 믿는 신앙>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십니다(루카 8,1).
여자들도 자기들의 재산으로 시중들며 그분의 구원의 여정에 동행하였습니다(8,3).
이러한 그분의 전 생애는 결국 죽여도 결코 죽지 않는 부활의 기쁨을 모든 이에게 안겨주었습니다.
고르넬리오는 데치우스(Decius) 황제의 그리스도교 대박해(249-250)가 끝난 직후인 251년에 로마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는 성 치프리아노 주교를 지지하며,
교회가 배교자들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던 노바시아누스 이단을 거슬러 열렬히 투쟁하였습니다.
그의 제안으로 소집된 서방 주교들의 시노드는 노바시아누스 이단을 단죄하고, 교회에 평온을 가져왔습니다.
성 고르넬리오는 박해 동안에 배교를 선언했던 신자들에 대한 화해 정책을 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253년 갈로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재개되면서 첸툼첼레에 유배되었다가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치비타베키아 근처에서 순교하였습니다.
한편 치프리아노는 210년경 카르타고의 이교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246년경 개종하여 사제로 서품되어 249년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했으며,
데치우스 황제 박해 시대에 아무런 참회행위도 없이 배교자들을 받아들였던 노바시우스 이단에 단호히 대처하였습니다.
그는 흑사병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비난하고 거세게 항의하는 신자들을 오히려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스테파노 교종의 파문 위협에도 굽히지 않고
이단과 분리주의자들이 베푼 세례는 무효임을 주장하며 신앙을 옹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성직자들이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 예식에 참여하라는 황제의 칙서를 따르지 않아 유배를 당했고,
끝까지 이교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치기를 거부하다가 258년 9월 14일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1코린 15,14.19)
성 고르넬리오 교종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는
바로 주님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녔고, 그 믿음을 목숨바쳐 증명한 복된 분들입니다.
우리도 삶이 제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알아주는 이 없고 억울하고, 앞이 캄캄해지는 극한의 절망감이 엄습해올 때에도,
하느님 때문에 고난과 박해를 겪을 때에도,
‘죽여도 죽지 않고, 세상의 어떤 세력도 죽일 수 없는’ 예수님의 부활의 힘을 믿고 다시 일어나 영원한 행복을 찾아나서야겠습니다.
오늘도 가을 청명한 하늘에서 부서져 쏟아지는 빛을 보며,
빛이신 주님을 떠올리고, 일어서는 빛으로 희망을 퍼올리는 은총의 날이길 기도합니다.
- 작은형제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공동체의 신비>
신비 중의 신비가 공동체의 신비입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의 신비는 그대로 파스카의 신비와 직결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이 공동체의 중심이 되시며
우리 모두가 파스카의 주님의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파스카의 신비를 살고 있습니다.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평화를 살고 있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이 주신 선물이 바로 기쁨과 평화입니다.
부활신앙에 기초한 그리스도교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전제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일부 코린토 교회 신도들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강력히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 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 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 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아예 이 미사도 없습니다.
공동체도, 끊임없는 용서도 불가능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이 계시기에 미사도, 공동체도 가능합니다.
파스카의 주님의 계시지 않다면
우리는 영원히 허무와 무의미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음은 파스카의 믿음 때문입니다.
이어 계속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파스카의 주님이 우리의 구원이요 불멸의 희망입니다.
이런 파스카의 믿음이 있어 주님을 위한 순교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헛되고 덧없을 것이며 순교 역시 참으로 무의미한 일일 것입니다.
얼마 전 염 추기경이 자비의 특별 희년 선포 및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성극 ‘요셉 임치백’의 첫날 공연에 카메오로 출연,
포도대장의 갖은 회유에도 “내 양들을 저버릴 수 없다”고 외치며 포졸들에게 끌려가는 연기를 펼쳐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는 기사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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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대장역을 맡은 배우 유태균(토마스)씨가 극 중에 “네놈이 안성 출신의 파주 염씨 집안, 염수정 안드레아가 맞느냐?”고 묻자,
무릎을 꿇은 염 추기경은 “다 아는 얘길 왜 묻소?”라고 답해 웃음을 자아냈다.
포도대장은 “6대째 천주학쟁이로, 조상 중에 순교자가 나왔으며, 조선을 대표하는 세 번째 추기경이라 하여, 널 따르는 자가 구름떼처럼 많아, 나라님도 무서워하는 대물이라 들었다.”고 호령했고,
염 추기경은 “착각은 자유요, 내가 무슨 대물이요? 나는 천주님의 도구일 뿐이오.”하고 맞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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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 추기경 역시 잠시 연극에 출연하면서 부활신앙을 새로이 했을 것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신앙입니다.
이런 부활하신 주님께 기초한 파스카의 공동체가 진정 강한 공동체입니다.
매일 미사은총이 견고한 파스카의 공동체를 이루어 줍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공동체가 참으로 이상적 공동체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상호보완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 당대 이스라엘에서 여자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외적 활동에 전념하였으며,
많은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드는 내적활동에 전념하니
참 아름다운 상호보완, 섬김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공동체의 신비이자 자랑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이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기에 가능합니다.
상호경쟁이 아닌 상호보완, 상호협력의 형제적 공동체가 우리 믿는 이들의 파스카 공동체입니다.
각자 받은 은사대로 그리스도의 한몸 공동체의 지체가 되어
그 책임에 충실함으로써 끊임없이 성장, 성숙하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며칠 전 써놓은 ‘공동체의 신비’란 글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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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무엇도/판단하거나 비교하지 마라
모양/색깔/자리/높이/깊이/넓이/다 다르다
획일화/동일화/규격화/정형화 할 수 없다
하나하나/신비로운 고유의 존재들이다/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모두가/행복하고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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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카의 주님이 공동체의 중심이 자리잡고 계시기에 이런 이상적 상호보완,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파스카의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공동체를 당신 뜻에 맞는 사랑의 공동체로 새롭게 리모델링해 주십니다.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
(시편 17,8;15).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공염불에 불과하며 복음 선포의 원동력이 없어집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비슷하게 되며 천상 인간으로 변모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 하느님의 생명이 인류 안에 부어져 새롭게 창조되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시며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실 때 여인들이 뒷바라지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듣고 변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중에는 악령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구원받은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고,
자신들의 재산과 재능을 구원 사업을 위해 봉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의 헌신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교회 공동체 안에 여성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성 고르넬리오 교황님은 가톨릭 교회의 초기 박해 시대에 신앙을 저버린 신자들을 다시 교회에 받아들이고 화해시킨 분입니다.
초기 교회의 이단으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고 그리스도 안에 일치된 공동체를 이루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성 치프리아노 주교는 라틴 문학에 정통하였으며 성체성사 안에 하나로 일치한 교회의 모습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도 두 분을 본받아 교회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뒷바라지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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