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천왕봉 바람
주린 배를 주먹밥으로 채우고 우린 제석봉에 들어선다.
석의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 저으기 안도한다.
평탄한 길이라 마주치는 야생화며, 운무가 피고 지는 연봉들이 정겹기만하다. 문득 한줄기 바람이 이마에 흐른 땀을 식혀준다.
갑자기 텅 비어버린 느낌이 드는 곳에서 발길을 딱 멈춰선다.
작은 구상나무와 전나무 사이로 군데 군데 보이는 천년 고사목의 잔해가 등골을 섬뜩케 한다. 흡사 서구 영화 한 장면인 듯 황량하고 을씨년스럽다.
벌써 50년이 지났건만 상흔의 아픔이 선연히 느껴진다.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무참히 짓밟혀 버린 고사목의 원귀가 구천을 떠돌고있음인가? 홀연 잿빛 하늘에 일어나는 일진광풍에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끝없이 이어지는 앙상한 고사목 등걸 사이에 끈질긴 생명은 이어진다.
생명은 결코 포기하지 않음이다. 아직은 작은 나무지만 언젠가 옛 영화를 재현할 것이다.
제석봉은 높이가 1,806m로 지리산에서 중봉 다음 세번째 높은 봉우리이다. 신령한 천왕봉은 동쪽에 중봉을, 서쪽에 제석봉을 나란히 거느리고 있다. 제석봉은 옛날 산신의 제단인 제석단이 있어 더 한층 유명 하다. 이 제단은 양지바른 곳에 자리했고 옆에는 맑고 시원한 물이 항시 콸콸 솟아나는 샘터가 있어 명당터임을 알 수가 있다.
제단 주변은 평탄한 공지여서 현재는 등산객들의 야영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제석봉 일대를 뒤덮고 있는 고사목군락이다. 10만여평의 완만한 비탈에 고사목들이 서 있고 바닥은 초원일 뿐이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이라고 무상의 세월을 말하는 이 고사목 군락지는 50년 전에는 숲이 울창하여 대낮에도 어두울 정도의 청년같은 푸르름을 간직했는데 도벌꾼들이 도벌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불을 질렀으며 그 불이 제석봉을 태워 나무들의 공동묘지로 만들었는데 현재까지도 자연파괴의 부끄러운 자취로 남아 있다.
그러나 고사목 들이 한 두 그루도 아니요, 10만여평에 걸쳐 듬성듬성 서 있는 모습은 그 자체가 장엄한 경관이 되고 있다. 이곳은 전나무 구상나무들의 고사목 군락지로 고사목 자체가 귀중한 자연경관이다. 그래서 고사목의 훼손과 야영 및 취사행위등은 할 수 없고, 등산로 이외의 지역은 출입도 금지한다. 하지만 고사목들은 해마다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누구의 소행 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방화로 한번 죽었던 나무들이 또 다시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곳의 고사목들은 해발 1,700m 이상의 높은 곳에서도 재질이 뛰어난 나무들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편 50년대의 지리산의 아픔을 50년째 묵언의 증언을 하고 있는 것에도 많은 뜻이 있다. 고사목들도 '살아 있는 자연경관'으로 잘 보전이 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끝간 데 모를 인간의 욕망에 절로 한숨이 나온다.
돈이 된다면 물불을 안 가리니 고금에 다름 아니다.
천수을 다하지 못한 고사목의 영령들에게 삼가 묵념하며 넋을 위로해 본다.
저 산마루 깊은 밤 산새들도 잠들고
우뚝 선 고목이 달빛 아래 외롭네
옛 사람 간 곳 없다, 올 리도 없지만은
만날 날 기다리며 오늘이 또 간다
가고 또 가면 기다린 그 날이
오늘일 것 같구나
저 산마루 깊은 밤 산새들도 잠들고
우뚝 선 고목이 달빛 아래 외롭네
옛 사람 간 곳 없다, 올 리도 없지만은
만날 날 기다리며 오늘이 또 간다
가고 또 가면 기다린 그 날이
오늘일 것 같구나
저 산마루 깊은 밤 산새들도 잠들고
우뚝 선 고목이 달빛 아래 외롭네
이따금 마주치는 전나무, 구상나무의 의연한 자태를 보면 천왕봉을 향해가는 마지막 관문인 제석봉 주변 경관이 얼마나 신비롭고 웅장 했을 것인가를 짐작키 어렵지 않다.
필시 천년 학이 둥지를 틀고 청룡 백호가 포효하며 천왕을 호위했을 것이다.
우린 통천문 앞에 서서 숨을 고른다.
누군가 바위에 휘갈겨 쓴 필채가 웅혼하다.
쉬이 신비지처를 드러내지 않는 마지막 관문에 서니 경외감과 설레임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동굴처럼 작은 협곡을 지키는 수문장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천룡과 백호가 천왕의 부름을 받아 기문둔갑으로 위장하고 잠시 자리를 비웠음인가?
하늘을 향해 열려있는 작은 길목, 이곳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날들이 흘러간 것인가?
무엇이 우릴 기다리고 있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오르고 또 오르길 욕망하는가? 한발 한발 조심스레 발길을 옮긴다.
갑자기 시야가 툭 트인다.
흡사 경복궁 광장에 들어선 듯 평퍼짐한 바위가 펼쳐져 있다.
만조백관을 호령하며 어전회의를 주재하는 천왕의 집무실임인가
바위를 조심스레 건너며 천왕이 주석할 법한 옥좌에 올라 천하를 굽어본다..
없다. 도대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절대 고독의 경지련가.
만학천봉이 내려보이는 이 곳엔 풀포기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 산신제를 지냈다는 제각이 흔적만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어느새 찾아온 나그네들만이 야단법석을 떤다.
“한국인의 기상 이곳에서 발원하다”가 씌여진 초라한 표지석만이
정상임을 말해줄 뿐이다.
숱한 인고의 광음을 벼르고 별러 찾아온 감회가 순간 허탈해지는 순간이다.
석은 이 순간을 찍으려 카메라를 들고 포즈를 취하는 데 때마침 부는
광풍에 밧데리가 웅덩이에 젖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래도 아쉬워 천왕좌에 눌러 앉아 숨을 고른다.
바람이 분다. 점차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에 삼복은 간데없고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래 이곳까지 바람이 따라왔구나.
아, 내 닉네임 또한 바람이 아니었더냐. 바람아, 너는 무엇을 말하려는가?
이 산의 주인은 바람일지 모를 일이다.
그 바람이 바로 나일진대 나를 위해 이 자리를 비워두고 있음인가?
돌연 만학천봉에서 운무가 춤추며 천룡이 비상하듯 나무들이 미친듯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인간사 영고성쇠야 부침을 거듭하지만, 절대무의 경지에서 노니는 대자유의 호탕함이 순간이나마 느껴진다.
그래서 남명이 산천재에서 시름을 달래며 천왕봉을 그토록 그리워한 것인가?
뉘라서 이 경지를 필설로 펼쳐 보일건가?
초의와 더불어 차 한잔 나누며 달 밝은 한 여름밤에 별을 헤고 싶구나.
그 달을 떠서 찻잔에 담고
어제밤에 뜬 보름달은
참으로 빛났다
그 달을 떠서 찻잔에 담고
은하수 국자로 찻물을 떠
차 한잔에 명상한다.
뉘라서 참다운 차(茶)맛을 알리요
달콤한 잎 우박과 싸우고
삼동(三冬)에도
청정(淸淨)한 흰 꽃은 서리를 맞아도
늦가을 경치를 빛나게 하나니.
선경(仙境)에 사는
신선(神仙)의 살빛 같이도 깨끗하고
염부단금(閻浮檀金)같이
향기롭고도 아름다워라.
ㅡ 초의선사 ㅡ
어느새 미시를 넘어가니 아쉬움을 담고 발길을 돌린다.
자꾸만 뒤돌아보는 제석봉, 장터목 나무들이 일제히 손을 흔든다.
아스라이 멀어지는 정겨운 풍경들을 마음의 영상에 담으며 우린 하산길을
서두른다. 팔월 열 사흗날 오후 세시 무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