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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아버지 마음/룻 1:6-18
6.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
8.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11.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12.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찌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13.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15.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18.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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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류영모목사
I. 위험한 모험을 마다 않는 황제 펭귄처럼
선생님이 남극에 사는 동물 셋을 적어 오라고 했습니다. 덩달이는 “펭귄 세 마리”라고 적어 왔습니다. 그만큼 펭귄은 남극의 대표적 동물입니다.
프랑스 최고의 다큐멘터리 제작사 ‘본 피오슈’가 제작한 뤽자케(Luc Jacquet) 감독의 (펭귄 - 위대한 모험)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4년 이상의 제작기간동안 무려 370일을 모든 스텝들이 남극의 혹한 속에서 펭귄과 동고동락하며 촬영했다고 합니다. 남극의 황제 펭귄 가족들이 생명을 탄생시키고 펭귄 가족을 만들어 가기 위해 위험한 모험을 떠나는 이 얘기는 펭귄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교회의 모습이요 특별히 셀교회의 진정한 모습처럼 보입니다.
남극에 서식하는 황제 펭귄들은 짝짓기 시기인 겨울이 올 무렵 그들은 각자 바다에서 나와 조상 대대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켜온 ‘오모크’라는 신비한 장소를 찾아 갑니다. 몇 날 며칠을 길고 긴 대상의 무리를 이루며 그들만의 은밀한 짝짓기 장소로 여행을 시작합니다. 마법에 이끌린 듯 신기하게도 같은 날 같은 장소에 전부 집합한 황제 펭귄들, 암컷과 수컷은 곧 1부 1처로 짝짓기를 한 후 귀한 알을 낳습니다.
알을 낳느라 지친 어미는 알을 조심스럽게 수컷에게 맡깁니다. 알이 조금이라도 빙하에 닿으면 그대로 얼어버리기 때문에 암컷이 비밀스럽게 알을 수컷에게 전달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영양 보충과 태어날 새끼에게 먹일 먹이를 구하러 다시 바다로 떠납니다.
수컷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3-4개월 동안 굶주리며 동면상태로 알을 품습니다. 그때 수컷은 자기 체중이 반으로 줄어드는 고통을 감수합니다. 마침내 알이 부화하면 수컷은 새끼를 위해 자신 안에 남아 있는 거의 마지막 음식을 토해 내서 새끼에게 먹입니다. 그 무렵 엄마 펭귄은 음식을 몸에 지닌 채 돌아와서 새끼에게 음식을 토해 내어 줍니다. 엄마 펭귄이 돌아오면 수컷은 음식을 먹기 위해 급히 바다로 떠납니다. 급히 수컷이 바다로 떠나야 하는 이유는 알을 부화하기까지 소모된 체중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조금만 더 지체하면 탈진해서 바다까지 나가지 못한 채 지쳐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 제가 펭귄에게서 배운 지혜 가운데 가장 소중한 지혜가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펭귄은 항상 떼를 지어 움직입니다. 펭귄 한 마리가 무리에서 떨어지게 되면 외로워서 죽고, 추워서 죽게 됩니다.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죽게 됩니다. 영화에 나오는 한 마리 펭귄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후에 외롭게 죽어갑니다. 펭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저히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펭귄은 그 추운 겨울, 수 개월 동안 밤이 계속되고 혹독한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 그 추위를 견디기 위해 서로 몸을 맞대어 체온을 유지합니다. 펭귄은 본능적으로 그래야 산다는 걸 압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셀교회의 공동체성입니다. 춥고 험한 세상 모여야 삽니다. 혼자서는 신앙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춥고 외로워서 죽습니다.
그리고 가족 하나를 만들기 위해 그 엄청난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펭귄을 통해 진정한 아버지의 마음을 봅니다. 우리 또한 천국 가족을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당당히 댓가를 지불해야 함을 배웁니다. 한 영혼을 구할 수 있다면 어떤 댓가라도 지불할 수 있는 용기 말입니다.
펭귄이 알을 낳은 후에 그 알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모습, 그 새끼를 조심스럽게 먹여키우는 모습에서 어머니의 양육의 지혜,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저는 이 “펭귄”이라는 영화를 통해 “아버지 마음” 결론편 내지는 종합편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마음 씨리즈 설교를 하면서 제겐 몇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심을 새롭게 확인하고 그 아버지의 마음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둘째 아버지 마음 설교는 먼저 저 자신에게 하는 설교였습니다.
나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 내게 진정 아버지 마음이 있는가를 묻고 싶었습니다.
셋째 우리 성도님들께 행복한 가정의 그림을 그려주고 싶었습니다.
가정의 행복을 앗아간 아버지 상처를 치료하고 아버지다운 아버지, 어머니다운 어머니, 자녀다운 자녀로의 회복을 보고 싶었습니다.
네 번째 마지막 목적은 고집스럽게 교회가 가족임을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 교회의 모든 리더는 아버지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아버지 마음으로 대해야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비전이나 열정만 가지고는 주님의 심장속에 있는 그 본래의 교회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성품이 따라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가 계속되는 동안 온 교회 안에 아버지 마음이 기름 부어지듯 부어져 모든 성도들에게 아버지 마음이 흘러 넘치길 소원했습니다.
II. 본문의 배경과 내용
오늘 본문은 구약 룻기서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이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 절기 때에 읽는 메기로스(megilloth)라 불리우는 두루마리 책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가서, 애가서, 전도서, 에스더서 그리고 룻기서 등 다섯 권의 책입니다. 이처럼 룻기는 유대인들에게 사랑받는 책이었습니다.
메기로스 다섯 권 중에서 에스더서와 룻기서는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책입니다. 그 중에서도 룻기서는 이방인을 주인공으로 다룬 독특한 책입니다. 이방 여인 룻이 다윗 왕의 할머니가 되고 나아가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됩니다.
룻기는 지금으로부터 3100년전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당시 이스라엘은 아직 왕이 없었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소위 무정부 혼돈의 시대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흉년이 들어 먹고 살기 위해 모두가 고향 땅을 버리고 먼 이방 땅으로 이민을 떠나곤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멜렉이라는 사람도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 오늘날의 요르단 지역인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엘리멜렉은 이방 땅에서 일찍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아내 나오미는 어렵사리 키운 두 아들을 모압 여인들과 결혼을 시키지만 두 아들 역시 차례대로 세상을 떠납니다. 모압 땅에서 이민 생활을 시작한지 10년 만에 남편과 두 아들을 읽고 나오미는 두 자부를 데리고 살아야 하는 한 지붕 세 과부신세가 되었습니다.
여기 룻기서의 메시지는 남편 잃은 세 여인이 불쌍하게 살았더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물론 감당하기 어려운 커다란 상처임에는 분명합니다. 외관상으로만 보면 결코 행복한 가정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가난하고 슬프고 외로운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기는 이 불행한 가정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불행한 환경속에서 결코 불행하지 않았던 이 가정의 비밀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 엄청난 상처와 비극과 불행 가운데서도 이 가정을 복되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첫째는 나오미에게 아버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며느리 룻의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는, 아버지의 비전과 함께 살고 죽겠다는 아름다운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버지 마음 그 아홉 번째 시간 메시지는 「아버지 비전과 함께, 살고 죽겠습니다」하는 제목입니다.
III. 오르바처럼 이별의 키스를 하려느냐?
아버지 학교에서는 아버지가 가정에서 가져야 할 권세 네 가지를 가르칩니다. 축복의 권세,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칠 권세,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를 양육하고 훈련할 권세, 신앙을 전수하는 권세입니다. 이에 한 가지 권세를 더한다고 하면 아니 위의 네 가지 권세까지 모두 포함하는 한 가지 권세를 말한다면 바로 비전을 나누는 권세, 비전을 전수할 권세입니다.
유대 속담에 “어리석은 자는 재산을 남기고, 학식 있는 자는 지식을 남기고, 지혜로운 자는 신앙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비전의 기름 부으심이 흐르는 가정 - 그곳이 하나님의 가정입니다.
목사의 가장 큰 축복은 예수님의 비전을 자신의 비전으로 품는 것입니다. 교회의 리더들의 가장 큰 행복은 주님의 비전, 목사님의 비전, 교회의 비전을 자신의 비전으로 품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교인은 방황하지 않습니다. 행복한 신앙생활이 가능해 집니다. 하나님은 비전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사람을 공동체의 가장 자리, 축복의 가장 자리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버지의 비전을 이어받은 룻의 삶을 펼쳐가기 전에 먼저 아버지의 비전을 받지 못해 버림받은 길을 가야 했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르바라고 하는 나오미의 첫째 며느리입니다.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남편 잃은 두 자부를 불러 친정으로 돌아가라 시집가서 남편 사랑 받고 잘 살라고 거듭 말합니다. 이때 오르바는 이별의 눈물을 닦고 자기 길로 갑니다.
14절 보십시다.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맞추었다” 이별의 키스를 했다는 말입니다. 그는 모압으로 돌아갔습니다. 택함 받지 못한 자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축복을 모릅니다. 영적 기대감이 없습니다. 신령한 비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비전의 땅을 떠나게 됩니다. 비전의 기름 부으심이 없는 사람은 쓰임받지 못합니다.
교회 나온다고 하지만 하늘의 소망이 없는 자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언제 하나님을 버리고 떠날지 모릅니다. 택함 받지 못한 자는 하늘의 비전을 갖지 못해 언제 어디로 버림받을지 모릅니다. 오르바는 나오미와 한 집에 살면서도 나오미의 신앙을 이어받지 못했습니다. 나오미의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결국 그는 나오미의 가족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 교회의 비전이 여러분의 비전이 되었다면 여러분은 우리교회의 진정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교회의 비전이 한소망 가족 모두에게 부어지길 축복합니다.
주님이 주신 우리교회의 비전, 우리교회의 가치, 우리교회의 목표를 가지지 못했다면 오르바처럼 이별의 키스를 하고 떠나야 할까요? 기도하고 비전을 받으셔야지요. 그것이 모든 성도가 가져야할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중에 그 누구도 평생 오르바의 키스, 이별의 키스가 없기를 바랍니다.
IV. 아버지 비전이 나의 비전입니다.
이제 본문의 주인공 룻을 살펴보십시다. 대단히 불행했던 가정에서 마냥 행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유대사회에서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던 기적 같은 일이 룻이란 여인을 통해 일어납니다. 벌레처럼 취급받던 이방인, 그것도 사람의 숫자에도 계산되지 않던 한 여인이 다윗 왕조의 조상이 됩니다. 나아가 메시아 족보의 한 어머니 이름으로 당당히 기록됩니다.
이토록 엄청난 영광과 복을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비전을 나의 비전으로 품고 영적 지도자와 교회의 비전을 내 삶의 비전으로 품고 당당히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되어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 비결, 바로 룻의 결단이 본문 룻기서 1:16-17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 첫째 아버지의 삶의 목표, 아버지의 비전을 나의 비전으로 받아들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겠습니다”
한 가정 안에서 남편이 생각하는 행복의 꿈이 다르고 아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꿈이 다르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아버지의 삶의 철학이 다르고 자녀들의 삶의 철학이 다르다면 어찌되겠습니까? 분명 아버지가 가는 그 길이 바른 길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라면 마땅히 온 가족이 함께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머니가 그 길 가기를 거부하고 자식들이 다른 길로 가겠다고 고집하면 그 가정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아버지의 비전의 길을 나도 가겠습니다」이것이 가족이요 교회입니다.
교회엔 온 성도들이 함께 바라보아야 할 분명한 촛점이 있습니다. 함께 땀흘리며 이루어가야 할 분명한 과제가 있습니다. 내 시간과 물질과 은사와 열정을 송두리째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는 공동의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비전, 아버지의 비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붙들고 이 비전, 이 사명을 이룰 수 있다면 내 생명을 조금도 아까와 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룻이 쓰임 받을 수 있었던 첫 번째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겠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겠습니다.
목사님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겠습니다.
교회가 가는 곳에 나도 가겠습니다.”
왜요? 아버지의 비전이 바로 나의 비전이기 때문입니다.
2. 둘째, 행복한 공동체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룻은 어머니와 함께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습니다” 개역 번역에서는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습니다”라고 되어 있지요. 이 말은 어머니와 함께 삶을 나누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기쁨이 나의 기쁨입니다. 아버지의 슬픔은 곧 나의 슬픔입니다. 셀가족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입니다. 교회의 약점이 곧 나의 약점입니다. 교회의 짐이 곧 나의 짐입니다. 이 고백이 룻의 고백이요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짤막한 본문 속에서 “함께”라는 단어가 4-5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갑작스런 환란과 고통이 닥쳤을 때 가족 간에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고 그 원인을 다른 가족에게 돌리기가 쉽상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세 여인만 남았습니다. 이방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구박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죄 값으로 멀쩡한 우리까지 고생한다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남편 잃은 여인들의 마음은 이미 피멍이 들어있습니다. 상처난 마음엔 무슨 얘기를 해도 섭섭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험한 인생길 어떻게 헤쳐나가나 싶으면 거추장스런 모든 것 떨쳐 버리고 싶은 겁니다. 바늘 하나도 짐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요. 그 약점과 상처 그리고 인생의 짐을 룻은 가슴에 끌어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삶을 나누겠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고통을 나누겠습니다.”
내 아버지의 고통을 끌어안아 버리는 자식의 마음.
내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 버리는 자식의 마음.
내 지도자의 약점을 품어 주는 교인, 셀 가족의 마음.
- 그것이 바로 아버지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있었길래 룻은 다윗 왕가의 조상이 될 수 있었고 메시아 왕국의 가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마음이 천국 가족, 셀 가족의 마음입니다. 교회의 비전을 가슴에 품고 사는 아버지의 마음 - 이것이 왕족의 마음입니다.
어릴 때 소 싸움시키던 추억이 있어서 이번에 전국 소싸움 대회를 중계하길래 잠깐 보았습니다. 준결승전에서 ‘승리’라는 소와 ‘달이’라는 소가 붙었습니다. ‘달이’라는 소가 패하여 도망을 가는데 응원하던 주인이 넘어져 그 밑에 깔렸습니다. 그리고 그 위를 뒤 따라 가던 ‘승리’라는 소가 달려지나갔습니다. 크게 다쳤겠구나 싶었는데 조금 있으니까 툴툴 먼지를 털고 일어납니다. 슬로우 비디오로 다시 중계를 하는데 두 마리 소가 사람을 밟지 않고 지나가는 겁니다. 그 급박한 상황속에서 말입니다.
걸핏하면 가족을 아프게 하고 리더도 밟고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인간세계를 생각하면 인간이 짐승만도 못하구나 싶었습니다.
자식은 아버지를 밟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 밟는 자식은 불효자식입니다. 진정한 셀공동체를 이루어 가려면 조금 못나 보여도 나의 리더를 밟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운 교역자 그리고 장로님들이 조금 못나 보여도 밟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리더들에게 뿐만 아니라 자녀들, 교우들, 셀가족들에게 정말 필요한 성품이 아버지 마음입니다.
3. 셋째 룻은 어머니 나오미가 붙들고 살던 바로 그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결단합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이다.”
룻은 모압의 신을 섬기던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와 함께 살아가는 짤막한 기간동안 나오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나오미와 자부들간의 대화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 7-8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내 어머니 나오미가 고난과 좌절속에서도 전혀 비굴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을 수 있는 저 힘이 무엇일까? 인생의 성공속에서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온유하고 겸손할 수 있는 저 힘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렇다. 바로 하나님이다. 우리의 남편은 죽었으나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그렇다면 내 어머니 나오미가 붙들고 사는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나도 그분을 붙들고 살리라 결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4. 넷째 룻은 어머니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고 결단합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입니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난다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죽음 이외에 그 무엇도 우리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족입니다. 이것이 셀가족, G12 셀가족입니다. 가족이 운명 공동체이듯 셀공동체 - 비전공동체 또한 운명 공동체입니다.
저는 한소망교회의 영적 아버지로서 분명한 사명, 분명한 비전이 있습니다.
한소망교회를 주님의 가슴속에 있던 그 본래의 교회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소망교회를 통해 한국교회를 깨우고 한민족을 살리는 비전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한소망교회 모든 교역자,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 그리고 셀리더는 이 비전을 자신의 비전으로 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사는 겁니다. 이것을 위해 시간을 쓰고 이것을 위해 돈을 벌고 이것을 위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 비전과 함께 살고 죽을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전을 붙들고, 아버지 비전과 함께 살고, 아버지 비전과 함께 죽을 수 있는 사람이 한소망의 리더요 가족입니다.
V. 자식들아 네가 아버지 마음을 아느냐?
사랑하는 한소망가족 여러분!
이제 “아버지 마음”이라는 주제로 상고했던 아홉 번에 걸친 설교를 마무리 해야 할 시간입니다.
“아버지 마음”을 알고 “아버지 마음”을 갖자고 피를 토하듯 외쳐왔지만 어쩌면 자식은 영원히 아버지 마음을 알지 못하고 인생을 마칠지도 모릅니다. 이 설교를 마치면서 자녀된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할 수 있다면 “니네들이 게맛을 알아”가 아니라 “자식들아 네가 아버지 마음을 아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병든 자식을 살리고 자신은 행복하게 죽을 수 있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 “가시고기”의 작가 조창인 씨가 쓴 또 다른 감동작 “등대지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 재우는 어려서부터 똑똑한 그의 형과는 엄청다른 차별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도무지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도 없고 그 차별대우를 이길 수도 없어 집을 나와 등대지기가 됩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형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동생 재우에게 맡겨놓고 이민을 떠나버립니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어머니를 맡아 섬긴다는 건 재우에게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태풍이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등대에 불이 나가서 불을 켜기 위해 나가게 됩니다. 누워 있던 어머니가 자식을 부릅니다. “재우야! 가지마. 재우야 가지마.” 하지만 재우는 어머님께 “어머니, 저는 가야 합니다. 여기 냉장고에 음식이 있습니다.”하고는 등대를 고치러 나갑니다.
등대에 올라가 끊어진 퓨즈를 갈아넣고, 전기를 다시 연결시키는 순간 재우는 감전되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맙니다. 의식을 찾았을 때 그의 내장은 타 들어가는 듯 몸은 오그라들고 있었습니다. ‘아! 이대로 죽겠구나!’ 생명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 시간 수 백 계단을 올라오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치매를 앓고 있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가 올라오면 분명 죽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머니 내려가세요.”소리쳐 보지만 그 목소리엔 힘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가까이 옵니다. 다가와 어머니가 하는 말 - “너 왜 밥 안주고 여기 있어. 밥 줘!” 그리고는 곧바로 “너 힘드니, 내가 너 살려줄게.” 그리곤 무릎에 아들을 눕힙니다. 빗물을 떠서 이 아들의 입에 넣어줍니다. 빗물이 들어갈 때 타들어 가는 속이 다 식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세요! 여기 있으면 죽어요. 어머니, 돌아가세요.” “아니야. 나는 네 곁에 있을 거야.” 치매에 걸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한 노인 안에서는 치매와 모성본능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옷을 벗습니다. 그 옷을 벗고 속옷을 빗물에 적셔 아들 입에 넣어 줍니다.
나흘 뒤에 구조대가 왔을 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을 살리고 어머니는 죽어갔던 겝니다. 하반신 마비가 되었던 아들 그러나 미처 깨닫지 못했던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느꼈기에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등대지기를 지키고 있었던 힘은 바로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 마음을 먹고 사는 겁니다. 아버지 마음을 먹어야 배가 부릅니다.
아버지 마음, 아버지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넋두리하지 맙시다. 아버지의 상처에 갇혀서 상처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으로 살아가시겠습니까? 이제 아버지의 상처를 벗어 던지고 당당하게 축복의 산에 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독생자를 아끼지 않았던 그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가슴에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 교회 안에서, 셀 안에서, 이 세상 한 복판에서, 아버지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식을 보고, 자식들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늙어 가는 내 아버지를 바라보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 공동체, 천국 가족의 진정한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