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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벨라 밭 굴에 장사였더라
창 23:10-20
10 에브론이 헷 족속 중에 앉아 있더니 그가 헷 족속 곧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가 듣는 데서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11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에게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에게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에게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12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히고
13 그 땅의 백성이 듣는 데서 에브론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하건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14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15 내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16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17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18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19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20 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
아브라함은 사라의 매장지로 막벨라 굴과 주변 토지를 정당하게 값을 지불하고 자신의 소유지로 확정합니다.
토지 매매 계약을 하는 아브라함(10-16) 에브론이 헷 족속 중에 재판소와 같은 자리인 성문에 앉아 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충분한 대가를 주고 매장할 소유지로 원한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구한 것은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이었는데, 에브론은 굴을 포함하여 주변 밭과 숲까지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지만 그냥 줄 테니 아브라함에게 사용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무엇이든지 얻으려고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냥 얻지 않고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여 덕을 세웠습니다. 에브론도 돈 받을 마음이 없었다면 밭 값이 얼마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에브론이 원하는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막벨라 굴을 소유하게 됨(17-20) 처음에는 굴만 사서 사라를 매장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밭과 숲까지 매입합니다. 성문에 들어온 사람들로 증인을 삼아 소유이전에 대하여 확증까지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일을 정확하게 처리한 후에 사라의 장례를 치릅니다. 정작 장례 치르는 설명은 너무나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례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남아있는 사람에게 교훈이 되며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게 하고,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장례를 치루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소유가 된 막벨라 굴은 가나안을 얻게 되는 출발점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라는 것을 강조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신 땅, 마침내 규모는 작지만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 동굴은 시간이 흘러 아브라함, 이삭, 리브가, 레아, 야곱이 묻히는 가족묘지가 되었으며 라헬만 여기 묻히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날 계수함을 깨우치시기 위하여 내 주위의 한사람이 떠나가거나, 병들어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게 하십니다. 나도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항상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적용: 당신의 유익을 위해 정당하게 값을 지불하지 않고 얻은 것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 당신이 정당하게 해야 할 일에 기준은 무엇입니까?
어느 백발노인은 시간의 중요성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울고 웃던 시절에 시간은 기어가는 것처럼 지나갔고 내가 꿈을 꾸고 이야기하던 시절에는 걷는 것처럼 지나갔습니다.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는 뛰는 것처럼 지나갔고 장년이 되어 능력을 과시하며 활동할 때는 구름처럼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제 흰머리를 머리에 이고 완전한 노인이 되니 시간이 전부 지나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람과 같은 내 인생이 어느덧 막벨라 밭 굴 코앞까지 와 있습니다. 우리 모두 기억합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 설 교 >
존귀한 남자, 아브라람
창 23장 10~20절 / 지용수목사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 사라, 백여 년을 같이 살았던 사라, 존귀한 여인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이 충격을 받고 슬피 울며 애통해 합니다.
1995년, 제가 스위스에 있을 때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교회 장례식이 있어서 우산을 쓰고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장례식이 끝나면 시신을 깊이 파인 땅 속에 넣고 기계로 덮습니다. 그래서 두 세 명의 인부만 남고 다른 사람들은 다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 날, 모든 사람이 다 돌아간 후에도 한 중년 남자가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그 자리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제가 교회에 들어갔다가 늦게 나왔을 때도 계속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누구겠습니까? 남편입니다. 그분이 아내가 묻혀 있는 곳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부부가 함께 길이 길이 사는 것이 복입니다.
여러분 모두 장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장가가지 않고 시집가지 않은 사람들은 일찍 죽어도 괜찮을지 모르지만 장가가고 시집간 사람들은 오래 오래 살아야 됩니다.
그러나 죽음은 언젠가 한 번은 당하는 일입니다. 저도 당하고 여러분도 당하게 됩니다. 저도 김영숙 씨를 눕혀 놓고 울 때가 올 것입니다. 김영숙 씨가 저를 눕혀 놓고 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때가 옵니다.
그때 후회할 것입니다.
'내가 왜 잔소리를 했던고…. 내가 왜 그랬던고….'하며 후회를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러나 후회해도 그 때는, 죽은 후에는 쓸데없습니다. 살아 있을 때 잘 해야 합니다.
사라를 잃은 아브라함도 너무 슬퍼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럴 때가 아니구나. 내가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구나. 내 아내를 장사할 묘지도 없는데….'하며 동네 유지들이 모인 성문에 가서 어른들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입니다. 당신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사니 당신이 원하는 묘지를 누가 막겠습니까? 우리 묘지 중에서 제일 좋은 묘지를 택하십시오. 그래서 거기에 당신의 고인을 장사지내십시오."
"그렇다면 에브론 씨 밭에 있는 막벨라 굴을 제게 주셔서 제 아내를 장사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 밭 값은 제가 드리겠습니다. 어느 분이 중개인이 되셔서 에브론 씨에게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개인을 통해 땅을 팔고 사는 것처럼 그 당시에도 당사자들끼리 바로 거래하지 않고 중개인을 거쳐 거래를 했습니다. 증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말을 듣고 그 곳에 있었던 에브론이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여,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밭과 굴을 당신에게 드리겠으니 어서 당신 부인을 장사지내십시오."
이 말은 그 땅을 거저 주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 땅은 거저 줄 땅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32장에 보면, 밭 값이 대개 은 17세겔이었습니다. 은 한 세겔이 은 11. 1g인데 옛날에는 은이 귀했기 때문에 은 17세겔만 주어도 큰 밭 하나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브론의 밭 값은 은 400세겔이니 보통 밭 값의 23배나 되는 엄청나게 크고 좋은 밭인 것입니다. 에브론이 그 좋은 밭을 아브라함에게 그냥 주겠다고 했습니다.
에브론이 왜 그 밭을 아브라함에게 그냥 주겠다고 했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잘못하는 사람은 망하고 잘 하는 사람은 복을 받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경대로, 하나님 말씀대로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 3절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
하나님께서 지용수를 그렇게 하시면 지용수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시고 지용수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저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노 장로님을 그렇게 복 주시면 노 장로님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시고 노 장로님을 저주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저주하십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의 아브라함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아무도 우리를 건들지 못합니다. 왜입니까? 건들면 자기가 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 지키시는 아브라함 같은 사람을 건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죽이십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조심합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 부인을 건드렸다가 얼마나 혼이 났습니까? 아브라함이 많은 군대를 거느린 왕이 아닌 한 가정의 가장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뒤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한 것입니다.
에브론도 아브라함에게 잘 해주면 자기가 복을 받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좋은 땅, 그 큰 땅을 그냥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에브론 씨. 말씀만 들어도 고맙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찌 그 귀한 땅, 그 큰 땅을 그냥 받겠습니까? 제게도 삶의 원칙, 삶의 철학이 있습니다. 충분한 값을 치르고 그 땅을 사겠습니다."
"아브라함이여, 그 땅 값은 은 400세겔이지만 당신과 저 사이에 어찌 상거래를 하겠습니까? 제가 그냥 드릴 테니 고인을 장사지내십시오."
성경은 줄여서 기록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에브론 사이에 여러 번 말이 오갔겠지만, 아브라함은 끝까지 자기 원칙대로 은 400세겔을 주고 그 땅을 사서 사라를 장사지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떳떳합니까? 만일 그 땅을 거저 얻어 사라를 장사지냈다면 나중에 무덤에 한 번 가 보고 싶어도 미안해서 가기가 힘들었을 텐데, 돈을 다 주고 샀으니 얼마나 떳떳합니까? 그리고 나중에 자기도 그 무덤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들 이삭과 며느리 리브가도 거기에 장사되고 또 손자 야곱과 손부 레아도 거기에 장사됩니다. 자자손손 사용하는 무덤이 됩니다. 무덤 옆에는 나무가 많았는데 그 나무까지 아브라함의 것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사라가 여자 중 최고의 여자가 된 것처럼 아브라함도 남자 중 최고의 남자입니다. 그래서 그 지역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방백입니다. 하나님의 왕자 같은 사람입니다(You are a mighty prince)."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하나님 같은 사람이라고 인정하여 땅까지 거저 주려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는 묘지도 서로 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브라함을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지,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천국에 주인처럼 앉아서 나사로를 품고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아브라함이 주인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것을 늘 자랑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하며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귀하고 귀한 성경, 신약성경 첫 권 첫 장 첫 절에, 마태복음 1장 1절에 누구의 이름이 나옵니까? 아브라함이 나오고 다윗이 나오고 예수님이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성경에 아브라함이 얼마나 귀하게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는 왕도 아니요 장관도 아니요 귀족도 아니었지만 온 세상 사람이 다 그를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창대케 하신 줄로 믿습니다. 어디에서도 아브라함은 왕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모든 남자들이 아브라함처럼 존귀한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어떤 인물이었기에 하나님께서도 존귀히 여기시고 사람들도 귀히 여겼을까요?
해바라기가 해만 보듯이 해만 따라 움직이듯이, 아브라함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따라 움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아, 네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예."
"아브라함아, 일어나라."
"예."
"하늘을 보아라."
"예."
"무엇이 보이느냐?"
"별이 보입니다."
"그래, 네 자녀를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리라."
"아브라함아,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라. 네가 바라보는 땅을 네게 주리라."
아브라함이 동서남북을 바라봅니다.
"아브라함아, 네 아들을 내게 바쳐라."
"예."
아브라함은 바보처럼 하나님께서 하시라고 하는 대로 행했습니다. 큰 목축업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자기 일은 뒤로 제쳐 두고 언제나 '하나님, 하나님'했습니다. 어디를 가든 먼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존귀히 여기셨고, 사람들도 아브라함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이미지를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방백입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친구가 여러분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나타나고 여러분을 아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생각하면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라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오늘의 아브라함인 것입니다.
루터가 개를 사랑해서 하루는 무릎에 얹어 놓고 식사를 했답니다.
저는 개를 너무 가까이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개의 털에 균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또 개와 입을 맞추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개의 침이 얼마나 더럽습니까? 개에게 양치질을 시킨다고 하지만…. 우리 한국에도 1억 원씩 하는 개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1억 원을 주고 산 개라도 개는 개인 것입니다.
개를 아주 좋아하는 우리 교회 한 장로님 부인이 퇴근하시는 장로님을 보더니 개에게 "○○야, 너의 아빠 오신다."라고 하더랍니다. 우리 장로님이 "아니, 너의 아빠라니? 내가 개 아빠요?"하며 화를 내어 싸움이 붙었답니다. 선하시고 귀한 우리 장로님이 개 아빠라는 말을 듣고 참지 못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개는 개입니다. 개보다 사람을 더 귀히 여기면 안 됩니다. 개를 기르면 정서적으로는 좋답니다. 특별히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 좋답니다. 그래도 개는 개인 것입니다.
어쨌든 루터도 개를 좋아해서 개를 안고 식사를 했는데 개가 계속 빵만 쳐다보더랍니다. 잼을 바른다고 빵을 손에 들고 있으면 손을 보고, 빵을 뜯어 입에 넣으면 입을 보고, 계속해서 빵만 쳐다보는 개를 보고 루터가 감동을 받았답니다.
'개가 빵 조각만 보듯이 내가 하나님만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실까?'
루터가 감동을 받고 개에게 고기 조각을 주었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계속 하나님만 찾고 하나님만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빵 조각 같은 은혜도 주시고 고기 조각 같은 은혜도 주시고 모든 것을 다 주실 줄로 믿습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낄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주고 싶지 않지만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다 주고 싶은 것입니다. 아내가 나를 사랑할 때는 빚을 내어서라도 아내가 좋아하는 피아노를 사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나를 미워할 때는 사 준 피아노도 팔아버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아브라함은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함을 증거로 보여 드리기 위해 아들 이삭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됐다. 이삭을 죽이지 마라. 네가 내 시험을 통과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정말 하나님을 여러분 아들보다 더 사랑합니까?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까? 그러면 오늘의 아브라함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남의 신세를 지지 않았습니다.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그 밭과 그 굴을 당신께 그냥 드릴 테니 당신의 고인을 장사하세요."
"아니오. 제가 충분한 값을 치르고 사겠습니다"
"아니예요. 당신과 저 사이에 어떻게 거래를 하겠습니까? 그냥 가지세요."
"제게 삶의 원칙이 있습니다. 값을 치르고 밭을 사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에브론에게 밭 값을 주었습니다.
여러분, 공짜 좋아하지 마세요. 공짜 돈이 들어오면 좋아하는 사람은 망합니다. 자립심을 갖고 스스로 서는 사람, 남의 신세 지지 않고 오히려 남을 도와주며 살려는 사람이 큰 복을 받는 사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이 40이 넘고 50이 넘었으면서도 늙으신 부모님께 기대는 아들, 친정에 갈 때마다 친정 어머니한테 무엇을 받아 오려고 애쓰는 딸, 처가에 갈 때마다 무엇을 가져오려 애쓰는 사위는 좋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이 30, 40이 넘어서도 형님이나 동생에게 신세 지고 사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목회를 10년, 20년 하면서도 계속 신세만 지는 것도, 물론 사정이 있겠지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남의 신세를 지지 않고 스스로 사는 사람,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남의 신세나 지고 살았으면, 남의 땅이나 거저 받으며 살았으면 그 동네 사람들이 무어라 했겠습니까?
"아브라함, 그 사람 공짜 좋아하는구만. 아니, 그 땅이 보통 땅이야? 그 큰 밭과 묘지를 그냥 받아? 에브론이 준다고 그것을 그냥 받아?"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1원도 에누리하지 않고 달라는 대로 다 주고 그 밭을 사니 "역시 아브라함은 매력 있어. 정말 된 사람이야." 라고 한 것입니다.
제가 호주 멜버른 교회에서 집회를 할 때 교회가 얼마나 뜨겁고 열기가 있는지, 교회가 막 살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호주에서 희망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호주 이민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재산을 갖고 절을 지은 불교인이 그 교회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교회에 나와 은혜를 받고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는답니다. 제가 집회를 인도할 때도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 은혜를 받는 그분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능력이 흐르니 불교를 위해 그토록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 확 변하여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목사님이 아주 뜨겁게 목회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개척한 지 4년밖에 안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놀랐습니다. 4년 만에 그렇게 큰 교회가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처음 출발할 때부터 "우리는 다른 교회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우리가 받는다."라고 결단하고 다른 사람이나 기관의 도움을 받지 않았답니다. 서울에 있는 큰 교회에서 생활비를 주겠다고 해도 받지 않았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열심히 전도했답니다. "우리는 자립합니다."하는 정신으로 목회를 하니 4년 만에 호주의 희망찬 교회가 된 것입니다.
남을 의지하는 사람은 평생 거지 같이 살게 됩니다. 그러나 자립심이 강하고 떳떳하게 사는 사람은 사업을 해도 성공하고, 직장 생활을 해도 성공하고, 목회를 해도 성공하는 줄로 믿습니다.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남의 신세를 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자기 집의 종들을 풀어 연합군을 쫓아가게 합니다. 승리에 도취해 술을 마시고 취해 있는 연합군들을 아브라함의 종들이 치고 롯을 구해오는 것은 물론 전리품도 다 빼앗아 옵니다. 창세기 14장 21절에서 23절을 보면, 그때 소돔 왕이 나와서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아브라함, 고맙소. 사람만 돌려주시고 이 전리품은 당신이 다 가져가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니오. 당신에게 속한 것은 실 한 개, 신발 한 켤레도 갖지 않겠소."하며 다 돌려줍니다. 전리품은 거의 소돔 왕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물질에 정직하고 깨끗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어 높여 주시고 축복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도와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조카 롯이 아브라함에게 정말 미운 짓을 했습니다. 자기는 좋은 땅을 차지하고 삼촌 아브라함에게는 좋지 않은 땅을 준 욕심쟁이 조카 롯이었지만 연합군에게 끌려가자 아브라함은 롯을 구해 주었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살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양식 없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도와주고 선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 도시 주민들이 "아브라함, 아브라함."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무리 부자라도 자기만 먹고 남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는 구두쇠였다면 누가 그를 존경했겠습니까?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구두쇠입니다. 구두쇠가 도둑질을 합니까? 자기 것을 자기만 먹고 남에게는 나누어주지 않으니 구두쇠가 되는 것입니다. 구두쇠는 존경받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선해서 어려운 사람을 보면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그 도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이 수만 명이 되고 예산이 몇 백억 몇 천억이 되는 교회라도 농촌 교회 하나 도와주지 않고 선교사도 도와주지 않고 가난한 이웃도 도와주지 않고 자기 교회만 위한다면 그 교회는 구두쇠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 교회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양로원을 도와주고, 고아를 도와주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선교사님들을 도와주고, 농어촌 교회를 도와주고, 선한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을 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누가복음 6:38)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언 19:17)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 것을 다 챙기면 남에게 할 길이 없습니다. 내 아이들 것과 내 것을 다 챙기고 내가 저축할 것을 다 저축하고 나면 남을 돌아볼 수가 없습니다. 나의 희생 없이 남을 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며칠 간 돌면서 몇 분에게 작은 정성을 전했습니다. 커피 한 잔 사 마시는 것도 아끼면서 그렇게 하니 떳떳한 것입니다. 좋은 음식 다 먹고 좋은 것 다 누리면 남을 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길 가는 손님도 불러서 소를 잡아 대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큰 인물이 된 것입니다.
그릇이 커야 많이 담을 수 있습니다.
강원도의 한 군목 목사님께서 시간이 조금 나 양봉을 하셨답니다. 그 꿀을 팔기는 그렇고 해서 광고를 했답니다.
"제가 꿀을 많이 땄으니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그릇을 갖고 오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일에 모든 교인들이 그릇을 갖고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전자, 어떤 사람은 참기름 병, 어떤 사람은 박카스 병, 어떤 사람은 맥주 병, 어떤 사람은 말통을 갖고 왔습니다. 목사님께서 그 그릇대로 꿀을 부어 주시니 양심이 고와 박카스 병을 갖고 왔던 사람이 불평했습니다.
"목사님, 왜 사람 차별하십니까? 왜 저 사람에게는 말통으로 주고 저는 박카스 병에 주십니까?"
"당신이 갖고 온 그릇대로 준 것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이 몇 드럼만 있고 말겠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모자라서 우리에게 주지 못하실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 그릇이 작으니 크게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양곡교회도 그릇이 작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교회가 아직은 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릇이 크면 농촌 교회를 천 개 이상 도와주고, 선교사도 2000, 30000명씩 도와주고, 이웃의 많은 학교에 장학금도 주고, 어려운 고아들도 도와줄 수 있는 것입니다. 어서 우리 교회 그릇이 커져 우리 교회에서 고아들을 천 명 정도 도와주며 공부도 시켜 깃발을 날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좌우간 선한 일을 많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남의 신세 지지 않고 남을 돕는 오늘의 아브라함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정중하게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도시 유지들에게 가서 정중히 인사했습니다. 그들이 고마운 말을 하니 또 인사하고, 에브론이 밭을 주겠다고 하니 또 인사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유지들에게만 그렇게 정중히 대했겠습니까? 헤브론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거지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정중하게 예의를 지켰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브라함! 아브라함!"한 것입니다.
드리기 죄송한 말씀이지만, 합니다.
제가 전도사 때 어느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이 목회자를 얕잡아 보고 목회자에 대해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동네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동장님과 동네 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새로 부임한 전도사입니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어른들을 만나면 무조건 인사를 드렸습니다. 저는 누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동네 사람들은 제가 교회 전도사라는 것을 알지 않겠습니까?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도 사람이 오면 자전거를 세우고 자전거에서 내려 가지고 인사를 했습니다. 얼마가 지나니 마을 사람들도 저만 보면 아예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도 내려서 제게 인사를 했습니다. 어떤 아저씨는 경운기를 운전해 가다가 경운기를 끄고 내려서 인사를 하고 지나갔습니다.
제가 얼마나 인사를 많이 들었는지 아십니까? 그러니 전도가 되었습니다.
제가 그 교회를 떠나 우리 양곡교회로 올 때 예수님을 믿지 않는 마을 사람들까지 선물을 준비했다가 주었습니다. 동장님은 사과 한 짝을 사 주셨습니다.
예의를 지키지 않고 함부로 살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중히 지킬 때 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사의 도를 지켜야 됩니다.
교회에서도 선후배를 알아야 됩니다. 장로가 되어도 선배 장로님을 귀히 여길 줄 알아야 되고, 청년들은 어른들을 잘 섬길 줄 알아야 됩니다. 어른들이 청소하고 있으면 청년들이 달려가서 청소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집에 가면 칭찬해야 합니다.
남의 집에 가서 "아이고, 아파트가 좁아 보이네요. 청소하기는 쉽겠네요. 요즘엔 유명 메이커가 아니라도 물건을 잘 만드나 보네요…."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부부 싸움을 한 후 아이를 데리고 이웃집에 가서 아이가 말을 안 듣는다고 막 때리는 사람, 심지어 남의 집 아이의 버릇을 고친다고 남의 아이를 막 때리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대책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또 가난한 사람은 멸시하고 힘 있는 사람에게는 비굴한 사람도 매력 없는 인간입니다.
힘 있는 사람 앞에서도 당당하면서 정중하게 인사하고, 힘 없는 사람에게도 겸손히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저렇게 착하고 신사인 우리 김관수 장로님이 결혼 후 아내에게 너무나 무섭게 대해 천사처럼 착한 신부가 운다는 말을 듣고 제가 얼마나 부담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처음에 군기를 얼마나 잘 잡았는지, 우리 장로님이 그랬답니다. 제가 중매를 했는데 그런 말이 들려오니….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 얼굴은 두 얼굴이 되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한 얼굴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잘 하는 것처럼 집에 가서도 아내에게 잘 하고 아이들에게 잘 해야 됩니다.
부인들도 이웃집 아저씨에게는 상냥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하면서 자기 남편에게는 눈꼬리가 사납고, 그러면 안 됩니다. 남편에게 개밥을 주듯이 그렇게 밥상을 차려 주면 안 됩니다. 개는 깨진 그릇에 음식을 담아 발로 밀어주어도 먹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 대접을 받고 싶어하니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가정은 부인의 직장입니다. 직장에서 낮잠을 자면 쫓겨납니다. 가정 주부도 최소한 8시간은 일해야 됩니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조리하고 최소한 8시간은 일해야 가정 주부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청소도 하지 않고 빨래도 하지 않고 밥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부부의 재산은 반이다.'라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이 바로 서면 가정이 천국 같이 됩니다.
어디에서나 예의, 신사의 도를 지켜야 됩니다. 내가 있는 곳에 나 때문에 불쾌한 일이 있으면 안 됩니다. 나 때문에 살맛이 나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디에서나 예의를 지키니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기 부인을 아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가 죽었을 때 돌아서서 웃지 않고 울었습니다. 요즘에는 아내가 죽으면 돌아서서 웃는 사람 많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주 못된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훌륭한 남편이었습니다. 아내를 위해 애통해 했습니다. 아내의 가슴에 살아있는 감동을 준 사람이었습니다.
88 올림픽 때 프랜처라는 미국 할머니가 우리 나라에 왔습니다. 미군이었던 남편이 6.25 전쟁 때 한국에 와서 싸우다 전사하여 부산 UN 묘지에 묻혀 있답니다. 남편의 묘지에 와 보고 싶었지만 가난한 할머니라 올 수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88년에 올림픽이 한국에서 개최된다는 말을 듣고 성냥 공장에 취직하여 7년간 돈을 모아 여비를 마련했답니다.
미국에도 가난한 사람이 많습니다. 미국에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이 삼천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미국의 빈민촌에 가보면 아이들이 수박을 먹을 때 옛날에 우리가 먹듯이 파란 부분까지 다 긁어먹습니다.
프랜처 할머니도 가난하여 공장에서 7년간 일한 돈으로 비행기표를 사서 한국에 왔답니다. 한국에 와서도 값싼 여관에 들어가 아침저녁으로 컵 라면을 먹고살면서도 부산까지 가서 남편 무덤에 있는 흙 한 줌을 갖고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내 남편이 와서 싸우다 전사하여 묻혀 있는 이 땅에 얼마나 오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공장에서 7년간 일하여 모은 돈으로 이 땅에 오게 되어서 참 기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가장 큰 보배라며 고무신 한 켤레를 보여 주었습니다. 한국에 있던 남편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어 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고무신을 유리 상자에 넣어놓고 매일 밤 머리맡에 두고 잔답니다. 한국에 올 때 그것을 신고 싶었지만 아까워서 신지 못했답니다. 남편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어준 고무신을 신고, 남편 무덤의 흙 한 줌을 갖고 이 세상을 떠나가는 것이 자기 평생 소원이랍니다.
그 할머니가 왜 그런 소원을 갖고 살겠습니까?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너무나 잘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남편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남편이 비록 세상을 일찍 떠나셨지만 훌륭한 남편입니다.
아내를 괴롭히고 멸시하는 남편은 오늘의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그런 남편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지 않으십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 보면 남편들에게 아내를 귀히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내를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잘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존귀히 여겨 주실 줄로 믿습니다.
결국 한 마디로 말하면, 아브라함이 존귀하게 된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이 귀하게 살았고, 남에게 신세지지 않았고, 남을 도와주며 예의를 지켰고, 아내에게도 잘 한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남자분들 모두 존귀한 남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내들은 여러분의 남편이 아브라함처럼 존경받는 남자가 되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남편은 존귀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멋진 사람처럼 보여도 멋진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남편이라도 능력 있는 남편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잘 해 주어도 좋은 남편이 아닙니다. 존귀한 남자가 아닙니다. 가치가 없는 남자, 마네킹 같은 남자입니다.
우리 나라에 남편은 교회에 나오지 않고 아내만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사백만 명이랍니다. 결혼한 여성 사백만 명이 남편을 구원하지 못한 아내들입니다. 안타깝습니다. 남편을 구원해야 합니다.
남편을 구원하기 위한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남편의 영혼을 사로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잔소리를 하지 않고 남편의 장점을 메모해 두었다가 매일 남편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이 마음을 아내에게 다 주게 됩니다. 잔소리하는 아내를 사랑할 남편은 없습니다. 남편들이 자기 단점을 알지만, 단점을 고치라고 아내가 잔소리를 하는 줄을 알지만, 더 좋은 남편을 만들기 위해 아내가 잔소리하는 것을 알지만, 잔소리하는 아내를 사랑할 남자는 없는 것입니다. 다방에 가면 기분이 좋고 술집에 가면 기분이 좋은 것은 잔소리를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술집에도 다방에도 가지 않지만 가보지 않아도 훤히 압니다. 술집에 온 손님에게 "넥타이 바로 매세요."하는 여자는 없습니다. 술집이나 다방의 여자들은 그저 "사장님, 오장님, 회장님. 어쩌면 이렇게 매력이 있어요?"하며 좋은 말만 하지, 잔소리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집에 있는 아내는 잔소리나 하니 집에 가기 싫은 것입니다. 잔소리 듣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남편을 교회로 인도하는 첫 번째 길은 잔소리하지 않고 칭찬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방법은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정해 놓고 정기적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60이 되어도 아기 같아 좋은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아내가 자꾸 해주면 아내에게 마음이 가고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해를 향해 있는 해바라기처럼 남편을 향해 있는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출근할 때 대문까지 나와서 인사하고 차가 멀리 갈 때까지 서 있는 아내, 퇴근해 올 때 시간을 맞추어 대문 앞에 서 있다가 맞이해 주는 아내를 남편들은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의 옷, 특별히 속옷과 양말을 가지런히 정돈해 놓는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 남편이 회사에 가서 보니 양말이 짝짝입니다. 그러면 '아이고, 나는 처복도 없구나.'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서랍을 열었을 때 양말과 속옷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고, 출근하려고 나가 보니 구두가 반짝반짝하게 닦여 있고 자동차가 깨끗하게 닦여 있으면 남편이 '아내가 나에게 이렇게 마음을 쓰는구나.'하며 얼마나 고마워하겠습니까?
그런 아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을 남편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남편을 전도하는 비결이랍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귀한 전도 방법, 가장 귀한 전도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할렐루야!
기도하면 남편도 압니다.
'아내가 나를 예수 믿게 하려고 저렇게 애쓰는구나.'
그래서 교회에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하나님의 딸들 사백만 명이 남편을 전도해서 사백만 명의 남자만 교회에 와도 우리 나라 크리스천이 천 육백만, 천 칠백만 명이 되고, 그 사백만 명이 또 자기 친구 한 명씩만 데리고 와도 우리 크리스천이 이천만 명이 되어 직장이, 그리고 우리 나라가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존귀한 남자가 되고 존귀한 여자가 되는 길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바로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 땅의 모든 여인들과 남자들이 하나님을 바로 믿어서 우리 겨레 모두 존귀한 남자, 존귀한 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며
이수영목사 / 창 23:14~20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사랑하던 아내 사라가 죽자 그녀를 장사할 땅을 구하는 과정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고 가나안 땅 헤브론에서 죽었습니다(창23:1-2). 아브라함은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녀를 장사하기 위해서 그 땅의 토박이 헷 족속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23:4). 헷 족속은 구약성경에서 가나안의 원주민 가운데 한 무리를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은 헷 족속 주민들에게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말하기를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라 했습니다. 자기에게는 죽은 아내를 장사할 땅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나그네나 거류민은 지역주민의 동의 없이는 땅을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헷 족속 주민들에게 자기에게 땅을 팔아줄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대답하기를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창23:5-6) 했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을 부르기를 “내 주”라고 하고 또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고 한 것 보면 아브라함은 그들에게서 대단히 존귀히 여김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러나 거만하게 굴지 않았습니다. 일어나 그 땅 거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창23:7-9). 굴이 있는 막벨라 밭의 주인인 에브론이란 사람은 헷 족속 중에 앉아 있다가 성문에 들어온 모든 사람이 듣는 데서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창23:10)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에게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에게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에게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창23:11) 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법적인 상거래가 사람들이 제일 많이 오가는 성문 앞에서 이루어지곤 했습니다. 그러자 또 아브라함은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히고 그 땅의 백성이 듣는 데서 에브론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하건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했습니다(창23:12-13). 다시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했습니다: “내 주여, 내게 들으소서.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본문 15절) 아브라함은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고(본문 16절), 그렇게 해서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속지로 확정되었으며 그 후에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거기에 장사했습니다(본문 17-20절).
오늘날도 어디서나 그렇겠지만 아브라함의 시대는 더더욱 장례가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죽어서 제대로 장사되지 않는 것은 저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장례를 관행에 따라 잘 치러주는 것이 죽은 이에 대한 도리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관행에 어긋나지 않게 최선을 다해 아내를 장사했습니다. 그러나 사라를 장사한 일에는 관행을 잘 지키고 특히 평생 사랑한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지극한 정성을 다했다는 사실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라의 장례와 관련된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의 헤브론이라고도 하고 기럇 아르바라고도 하며 마므레라고도 하는 곳의 주민인 헷 족속이 그렇게 호의를 보이며 자기네 묘지 중에서 좋은 것으로 아무 것이나 택하여 그냥 쓰라고 하는 데도 불구하고 왜 굳이 돈을 주고 사서 사라를 장사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땅 주인인 헷 사람 에브론이 안 받아도 괜찮다는 듯 말하면서도 슬쩍 제시한 땅값은 사백 세겔이었습니다. 이것은 비록 꼭 그 값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흥정을 시작하기 위해서 처음 불러보는 값이라 해도 너무 과한 값이었습니다. 보통 적절한 값의 두 배를 부르면서 흥정을 시작하는 것이 상거래의 관행이었던데 비해 턱도 없이 높은 가격이었던 것입니다. 한 근로자의 일 년 평균 임금이 십 세겔이었고 예레미야 시대에 밭 하나를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준 것(렘32:9)을 생각하면 에브론은 아브라함에게 어마어마한 바가지를 씌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백 세겔은 한 사람이 사십 년 이상 평생 동안 일해서 모을 수 있는 돈에 해당하는 값입니다. 아브라함은 굴이 있는 밭 끄트머리 하나를 땅 주인이 처음 부른 값 사백 세겔에서 한 푼도 깎으려 하지 않고 그냥 산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첫째는, 훗날의 분쟁의 소지를 확실하게 없애려는 아브라함의 신중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헷 족속으로부터 존경받는 좋은 관계일 때는 문제가 없다 하드라도 서로가 잘 모르는 후손들 세대에 가서는 사정이 어떻게 변할지 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후손들 세대까지 가지 않아도 땅 주인이 후에 마음을 달리 먹고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말로는 굴을 거저 쓰라 하면서도 돈을 지불하겠다니까 땅 값을 말도 안 되게 높이 부른 에브론의 그 탐욕이 그로 하여금 무슨 변덕을 부릴게 할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엄청난 땅값을 만인이 보는 앞에서 지불하여 그들 모두를 그 거래의 증인으로 삼은 것입니다. 아내의 묘지가 자자손손 안전하게 보전되게 하기 위한 치밀한 대비책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엄청난 돈을 지불하면서 그의 죽은 아내 사라의 장지를 마련한 이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첫 조상입니다. 따라서 그의 아내 또한 아브라함과 함께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그녀의 태로부터 나왔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선민 중에서 제일 먼저 죽은 이를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장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 땅에 뿌리를 박는 대단히 상징성 높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일을 생각했을 것이고 그 일을 확실하게 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아무런 흥정 없이 사백 세겔이라는 거액을 아낌없이 내놓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창세기 21장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자기의 아내로 취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혼이 난 일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크게 호의를 베풀며 그에게 많은 짐승을 내주고 자기 땅에서 맘껏 짐승을 기르도록 허락도 한 바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들이 짐승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우물을 팠는데 아비멜렉의 종들이 주인들 사이의 이루어진 일을 모르고 아브라함의 종들이 판 우물을 빼앗은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 일에 대해 아비멜렉에게 항의했고, 그래서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은 양과 소를 가져다가 제물로 삼아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암양 일곱 마리를 따로 아비멜렉에게 주고는 그로 하여금 아브라함이 이 우물을 팠다고 증언하게 했던 것입니다. 거기가 브엘세바 즉 맹세의 우물입니다.
둘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려는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1-3) 하시는 말씀을 듣고 간 땅이고 하나님께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12:7) 약속하신 땅이며 그 이후에도 거듭 그 약속을 확인시켜주신 땅입니다(창13:14-17, 17:8). 비록 아직은 자기의 소유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자기와 자기의 자손들의 소유가 되게 하실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으로서는 그 땅은 사람에게서 받거나 빌릴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죽어서 장사를 지내야 했으므로 그냥 사람들의 호의를 빌어 묘지를 얻어 쓸 것이 아니라 기왕에 자기 소유의 땅이 필요하게 되었으니 돈을 주고 사서 완전한 자기의 소유로 만들음으로써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임을 분명히 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훗날 완전히 자기의 자손들이 차지하게 될 땅을 소유하기 시작하는 첫 걸음을 확실하게 내디딘 것입니다. 사라에 이어 아브라함 자신도(창25:9-10) 그의 아들 이삭도(창35:27-29) 이삭의 아내 리브가와 그들의 아들 야곱과 그의 아내 레아도 모두 그 땅의 굴에 장사되었습니다(창49:29-32, 50:12-13).
우리는 여기서 또 창세기 15장의 사건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비롯한 네 나라 왕들의 연합군이 소돔과 고모라 등 다섯 나라 연합군과 전쟁을 하여 이기고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갈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일가와 재물도 노략질을 당하자 아브라함이 가병들을 데리고 쫓아가 싸워 엘람왕의 연합군을 쳐부수고 조카 일가와 재물을 되찾아 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소돔 왕이 아브라함을 영접 나와 그에게 감사하며 사람은 자기에게 돌려보내되 물품은 전부 아브라함이 가지라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실오라기 하나도 받기를 거절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면 그 어떤 이득도 취하기를 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복 주실 뿐 아니라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된 사람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복 주심의 약속을 확신하며 세상으로부터 복 받기를 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는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고 하나님나라의 복된 삶을 약속받은 백성이라면 아브라함처럼 행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복 받고 세상적으로도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런 복도 제대로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하여 자기의 재산을 다 바치고 백성들도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드림으로써 성전건축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자 온 회중 앞에서 하나님을 송축하며 한 말이 무엇입니까? 대상29:11-12입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부귀영화와 성공과 출세가 다 만물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안다면 하나님 외의 다른 어떤 방법으로 복을 누리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복 주심의 약속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군데만 예를 들자면 시편 1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 시편기자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처럼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무릇 의인의 길을 가는 사람은 세상이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약속을 확신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고 영원히 복된 삶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외의 다른 어떤 원리를 따라 복되기를 바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복 주심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대표적인 것 하나만 든다면 팔복의 약속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소리와는 거리가 먼 말씀을 하셨지만 그 말씀은 하나님의 참된 복 주심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확신하며 그 말씀 따라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하는 복지 약속만이 거짓되고 헛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약속하는 복은 다 헛된 것입니다. 다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 거짓된 복을 좇아가느라 바람에 나는 겨 같은 인생 살다가 망하지 말고 빨리 하나님의 참된 복 주심의 약속에로 돌아와야 합니다. 요즈음 이 나라에 헛된 욕망을 따라 거짓된 세상의 방법으로 행하고 살면서 국민의 혈세를 탕진하고 거대기업들을 망하게 하며 나라경제를 기울게 하여 검찰의 수사를 받느라 전전긍긍하며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사회는 지금 곳곳에 부정과 비리가 없는 곳이 없고 경쟁하듯이 너도 나도 나라재산 실컷 뜯어먹다가 다 함께 망하기를 작정한 사회 같습니다. 이러다가는 정말 이 나라 망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나라 지키고 살리는 마지막 보루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되신 하나님의 참된 약속을 확신하며 사는 참으로 복된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복된 삶을 살아 온 나라와 국민을 복되게 하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