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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과 거절
우리는 관계를 오래 맺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소개팅을 해서 마음에 들지 않아도 최소 세 번은 만나봐야 한다고 하질 않나, 연애를 해도 계절을 한 번씩 겪어야 한다며 1년은 사귀어야 진중하게 연애했다고 간주하질 않나, 어렸을 적 혹은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의 관계를 성인이 되어서도 잘 관리하면 인간성이 좋은 것처럼 생각한다.
왜 한 번 만나봐도 괴로운 사람을 두 번씩이나 더 만나서 스스로를 고문해야 하며, 왜 3개월 미만으로 끝나버린 연애에 대해선 죄책감을 느껴야 하며, 왜 공통의 관심사도 없는 옛날 친구들과의 모임에 억지로 나가야 할까.
이 모든 것은 불필요한 강박이다.
오래 알고 지냈다고 해서 그만큼 절친하다고 할 수도 없고, 안 지 얼마 되지 않아도 오래 만난 인연만큼 편한 사람도 있다.
예전에 아무리 절친했다 해도 현재 같이 있을 때 마음이 편하지 않다면 애써 절친이라는 간판을 유지할 이유도 없다.
'옛날에 친했던 친구'의 포지셔닝으로 충분하다.
사람은 누구나 변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래도 여전히 그 친구에 대해 좋아하는 부분이 남아 있다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관계를 지켜나갈 수 있지만, 그 친구에 대해서 좋아했던 점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면 이제 그만 놔줘야 할 때다.
인간관계도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기 때문에 그걸 거역하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것이 되레 어색한 일이다.
현재 내가 놓인 환경에서 마음이 맞는 새 친구가 생기기도 하고, 자연스레 멀어져가는 친구도 있다.
밀물과 썰물 사이에서 어느덧 내 곁을 여전히 자연스레 지키고 있는 그 사람을 우선적으로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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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한테 부탁하거나 기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미국인 학교에서는 '독립'에 대한 가치를 귀 아프게 들었고, 일본에 살 때는 '남에게 민폐를 깨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사회 분위기로 배웠다.
그래서 처음 한국에 돌아왔을 때 친구들끼리 서로에게 나른하게 의존하거나 스스럼없이 편하게 부탁하는 것을 더 정겹다고 봐주는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그 의존과 민폐의 긍정적 측면에 눈을 뜨게 되었다.
"나 이런 문제로 좀 힘들어" 라고 SOS를 치면 의외로 귀찮지도 않았고, 도움 준 것을 기억해놓았다가 되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이런 기분 좋은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부탁을 섬세하게 해야 한다.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는 게 고마운 만큼 상대가 그 부탁을 흔쾌히 '거절'할 수 있게도 해줘야 한다.
못 해서든, 하기 싫어서든, 거절하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한 거절 이유다.
부탁해서 거절당한 사람은 거절한 이유를 알거나 물어볼 권리가 없다. 더더군다나 토라지거나 화를 내거나 칼을 갈거나 '다시는 저 인간한테 부탁하나 봐라' 같은 앙심을 품어서도 안 된다. 그 누구도 미움받기를 원치 않기에 거절하고 싶어도 잘 거절하지 못한다.
상대 입장에서는 무척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거절한 것이고, 나는 부탁을 함으로써 상대에게 감정 노동을 시킨 것이다.
부탁이 부탁다우려면 몇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부탁이라는 것은, 그 사람 아니면 도저히 해결 방법이 없을 때, 아무런 다른 대안이 없을 때, 부탁한 데에 대한 그 이상의 대가를 치를 각오와 부담감을 가질 때 하는 것이다.
부탁에 대한 무게와 신중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의 부탁이라면 들어줄 생각이 들겠지만 상대방이 너무 쉽게 내게 부탁하면 뻔뻔하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하찮은 부탁'처럼 표현할 때는 기분도 상한다.
사람들은 '도와주고' 싶지, '이용당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이렇게 가까운 사이인데 이 정도 부탁도 안 들어줘?'처럼, 부탁하는 사람이 너무 당당하면 노력은 내가 하면서도 만만한 인간 취급받는 것 같다.
'이 정도 부탁은 당연히 들어주겠지?'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 부탁했다면 애초에 실수다. 사람들 사이의 상호 의존에 필요한 것은 섬세한 센스다.
역으로 거절을 할 때는 조금의 여지도 없이, 단칼에 거절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려면 'NO 반사 신경'을 단련시켜야 한다. 몇 가지 거절 멘트 버전을 챙겨놓고 반사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해본다.
"미안해, 힘들 것 같아."
"그건 좀 곤란해."
"안 돼"
자꾸 하다 보면 별거 아님이 점점 몸으로 익혀지면서 숨통이 트인다.
악질적인 부탁이면 상대를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냄새가 난다. 자꾸 찔러봐서 어디까지 찔러야 푹 들어갈까 잔인하게 시험한다. 본인들로서는 찔러봐서 밑져야 본전, 되면 좋고 아님 말고다.
이렇게 압박감이 느껴지는 부탁은 거절해야 마땅한 것임을 알아차리고 그럴 때일수록 뜸들이지 않고 뒤를 생각하지도 말고 당당히 거절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마 상대는 자신의 부탁이 거절당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며 당황해하며 언짢아할 것이다.
순간 '내가 너무 야박한가?' 싶겠지만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상대일수록 끝까지 거절해야만 하는 상대인 것이다.
친구 관계뿐만이 아니라 연애에 대해서도 거절을 잘할 줄 아는 것이 상대를 도와주는 것이다.
내 마음을 줄 수 없을 때 상대에게 희망 고문을 하지 않는 것, 나에게 마음을 주는 것에 기분이 우쭐해져 나도 모르게 상대에게 여지를 주고 있지 않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장에는 단칼에 잘라버린 그 상대의 잔인함에 치를 떨어도 속마음을 파악할 수 없는 태도로 오락가락 애매하게 희망 고문을 주는 그 사람이 훨씬 더 고약한 것이다.
아니다 싶으면 서로 확실한 NO를 말하고 오로지 내가 기꺼이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YES를 하는 것.
어른으로서 꼭 갖추고 싶은 습성이다.
태도에 관하여 중에서~~
임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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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람은 누구나 변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래도 여전히 그 친구에 대해
좋아하는 부분이 남아 있다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관계를 지켜나갈 수 있지만,
그 친구에 대해서 좋아했던 점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면 이제 그만 놔줘야 할 때다.
좋은 글 이기에 다시 한번 되뇌여 봅니다.
좋은책소개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