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들려오는 비트에 맞춰 킵 고잉 (외 1편)
김혜순
있잖아, 앞서가는 사람은 모두 뒷모습. 나는 그 뒷모습으로도 누군지 다 알아. 나무도 뒷모습. 사슴도 뒷모습. 달도 뒷모습. 돌아가신 우리 엄마도 뒷모습. 그래도 우리. 걸을까? 이곳에선 목발들이 다리가 세 개. 하나는 달의 것. 달에선 불면증 낙진이 쏟아져. 체르노빌의 다리 위에서 불구경하던 사람들은 다 죽었어.
불면증 자궁에서 불면증 태아가 만들어진다 불면증 태아는 당연히 자라서 불면증 할머니가 된다
나는 정말 지금 선생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불면증 선생은 불면증 시신이 된다
생명이라는 말 자꾸 하지 마. 생명은 장차 죽는 것. 불면증 인간의 어깨에 날개가 돋는다. 날개가 돋으니 어깨가 한정없이 넓다. 불면증 인간은 말을 더듬는다. 이봐. 이봐. 이봐. 부르기만 할 뿐. 정작 용건은 없는 불면증 언어. 돌아봐도 돌아봐도 뒷모습인 앞서가는 사람들. 여기는 나를 태운 재로 그린 풍경 속일까. 나는 흑백사진 속에서 걷는 걸까. 자기 모습의 천사와 싸우며 가느다란 팔을 번갈아 휘적이는 사람들. 타고남은 재의 뒷모습. 자, 그림자를 그려보자. 사실 나는 눈을 다 뜨고 사는 게 아닐지도 몰라. 그래도 나는 걸어가야만 해. 세 개가 한 쌍인 목발을 짚고, 하나는 달의 것 두 개는 내 다리의 것.
홑이불을 쓰고 유령처럼 트렁크를 끌고 집을 떠난다. 안녕히 계세요. 달과 불면증 유령, 둘 사이를 오가며 진동하는 긴 은빛 선분 하나. 머나먼 거울의 바다에 비치는 내 뒤통수 하나. 파도치는 수면 위에 달처럼 외로운 뒤통수 하나. 자세히 봐, 더 자세히 봐. 저 뒤통수의 빈혈을 봐. 빈혈은 바닥이 없어.
내가 겪은 모든 슬픔이 다 소용없다니 내가 겪은 슬픔으로는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니 저 나무는 겨울을 겪은 다음 꽃을 매달았는데
몸에서 꽃이 나올 때 더 아팠을까 몸에서 꽃이 떨어져 갈 때 더 아플까
내가 겪은 슬픔이 다 불면의 것이라니
흑마의 검은 얼굴 저 입술에 검은 장갑을 끼워줘. 검은 입술이 내 뒤통수를 핥는다. 휙 뒤돌아보면 저녁의 흑마 대가리. 머리숱 검고 눈 코 입 검은 흑마의 얼굴, 내리깐 눈, 속눈썹은 너무 길어요. 검은 갈기가 흩날려요. 유령도 찾지 못할 만큼 까만, 그믐보다 더 까만, 내 얼굴을 한 번 싸고 두 번 싸고, 백 번 싼 검은 보따리 속에서 눈을 뜨면, 흑연의 정면, 흑마의 얼굴, 내 눈동자 빛 내 얼굴. 죽었군요, 벌써, 내가. 보따리 예술가 김수자의 알록달록 보따리 안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늘 궁금했는데. 동생과 나는 엄마가 숨을 거두자 엄마를 길다란 보따리에 싸서 병실을 떠났는데. 내 몸뚱이, 숨길 秘 빽빽할 密. 으슥한 나무. 뿌리처럼 엉긴 피. 젖은 벼루 같은 아스팔트. 비바람에 떠오르는 찢어진 휴지 같은 꽃잎. 푹 젖은 생리대. 이 세상에는 몇 가지 빨강이 있을까. 신부님들, 주교님들, 추기경님들의 빨간 옷. 어둠 속에서 보면 까만, 번들번들하고 거대한 옷들이 가득한 방. 커피를 마시면 커피 속에 그 숲. 숨은 숲. 노래를 부르면 노래 속에 그 숲. 숨은 숲. 악몽을 기르는 숲. 숨길 秘빽빽할 密. A 양이 되고, B 양이 되어 적은 것. 여자에 관한 것. 내 아이는, 내 친구는, 내 장례식의 조문객은 이해해주지 않을 거야. 어른이 되었어도 그 숲. 회오리치는 숲. 빽빽한 숲. 낙태아가 담긴 보따리를 풀면, 보따리 속에 그 숲. 왜 아무한테도 말 안했니? 말 안했니? 말 안했니? 사운드 클라우드를 뒤적이며 걸어가요. 노래의 전주만 천개를 들었어요. 내 얼굴처럼 내 가까이 있었는데 나조차도 돌아보지 않았어요. 암술만 남겨놓고 꽃잎 다 떨어진 내 심장 천 개를 추기경님 발아래 우르르. 깜깜한 숲속에 깜깜한 내 얼굴. 내 아기의 망자로 산다는 것. 사과를 깎는 것처럼 빛의 껍질을 벗긴다. 과육처럼 달이 뜨면 이가 시리고, 꽃밭의 꽃은 모두 같은 색, 색깔을 빼앗긴 색. 오늘 밤, 이 자비로운 재앙. 들추는 곳마다 나방 같은 독한 꽃잎. 조용히 하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곤충들. 조용히 해, 조용히 해. 그 말만 하는 이명의 곤충들. 번들번들한 옷을 입은 바퀴벌레도 곤충인가요? 바퀴벌레처럼 번들거리는 검은 자동차 안에서 네가 감히 나에게! 가야 해. 가야 해. 검은 보따리에 싸놓은 내 얼굴. 얘야. 휙 돌아보면 다시 흑마의 검은 얼굴.
―격월간 《현대시학》 2022년 7-8월호 --------------------- 김혜순 /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한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 『피어라 돼지』 『죽음의 자서전』 『날개 환상통』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