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수의 아들이 친구들을 목공소에 데려갔다. 아이들은 처음 접한 기계 톱 소리와 통나무가 잘려나가는 광경에 마음이 들떴다. 한 소년이 목수가 책상 위에 풀어놓은 손목시계를 만지다가 그만 톱밥 속에 떨어뜨렸다. 톱밥을 뒤졌으나 시계는 나오지 않았다. 소년들은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했다. 시계를 찾는 일은 뒷전으로 밀어둔 채 서로에 대한 공격에 핏대를 올렸다. 목수가 전기톱을 끄고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급할수록 마음을 가라앉혀라. 일단 무릎을 꿇어 보렴. 그리고 귀를 마룻바닥에 대 보아라. 무슨 소리가 들리니?” 목공소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뚫고 선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째깍 째깍” 오늘 우리 상황이 바로 이렇다. 모두가 목소리를 높여 외치는 바람에 진리의 시계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나라와 교회와 공동체를 위한 길 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자. 목소리를 낮추고, 침묵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자.
당신도 어떤 일의 해결을 위해서 성령안에서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구하는가?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 '주님의시선' 카페와 카페지기의 사역을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2. 코로나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만나 모두들 힘들어하고 있는데 속히 극복할 수 있도록 함께 중보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서두르지 맙시다.
본문 : 창세기 16:1-12
아브라함은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 질 것 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15장입니다.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아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갈으리라 그리 고 너희들은 약속의 이 가나안 땅에서 아주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제 하나닙과 아브라함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맹세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약속을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나이는 점점 많아지고 신체적으로 더이상 자손을 둘 수 없는 상태 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식을 얻을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약속하셨습 니디. 하나님은 약속 하는대로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렇데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답 답했겠습니까? 가나안 땅에 찾아와 살게 된지도 어언 10년이 되었습니다. l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그 아내사라도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세월이 다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 답답함 때문에 우리의 신앙을의심해 본적이 없습니까? 이것은 꼭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 지고 시작했던 일이 전혀 성취될 전망이 보이지 않을 때는 없으십 니까? 반드시 약속한대로 되리라는 보장을 받은 다음에 그 일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실현되지 않을 때 낙심을 경험하지 않았습니 까? 참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여야 할 하나님이 나에게 그 말씀을 응답해 주시지 아니할 때 우리는 얼마나 답답한 세월을 살아가게 텁니까? 아브라함의 가정이 바로 그런 형편이었습니다.초조해진 이 부부는 당시의 사회적 ?속대로 자식을 얻을 다른 궁리를 시작했습니 다, 하루는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로 제의를 했습니다. 여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는 데 반드시 주실 거예요 그런데 내 형편이 이제는 생산이 불가능해 요. 그래서 말인데요,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내 몸종 하갈을 통해 서 주실 것 같아요 내가 그 하갈을 당신께 맡길 터이니까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얻읍시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옛날 우리 사회에서도 자식이 없을 때 소위 씨받이를 통해서 자식올 받아오는 ?습이 있었습니다. 사라도 자식이 없는 것이 아무 래도 자기 책임인 것같다는 죄책감 때문에 이렇게 남펀에게 제안 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남편에 대한 애정과, 핏줄을 이어야 한다는 집안에 대한 층성심으로 자기의 종을 주어서 아기를 낳자고 하는 이 여인의 마음을 우리는 나쁜 동기로만 정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회적 풍토는 이런 일을 결코 부도덕한 일로 정죄하 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쓰여진 문서 하나가 얼마 전에 발견되어성서고고학계에 관심사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문서에 의하면 종을 통해서 자식을 얻는 것은 아주 합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아브라함의 결정이 잘못된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나름대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벌인 일이었지만 이것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바라는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소원이 이루어지고 숙제가 풀린 것이 아니라 더 일이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하갈을 통해 아들 이 스마엘을 낳게 되었습니다. 사라의 배려에 의해서 아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가 생기니까 하갈이 자기 억주인 사 라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눈치가 달라졌습니다. 대답하는 말의 톤이 달라졌습니다. 몸 움직임이 완전히 달라졌습 니다. 사라는 하갈이 자기의 종으로서 주인인 자기에게 이렇게까 지 나을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_ 사라의 마음은 터져오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한 남자를 둘러싼 삼각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심각해지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얻었지만 14년 후에 하 나님의 약속하신 대로 사라를 통해서 한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창세기 1s장 l6절 마지막 절에 보면 '하갈 이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 아브람이 86세였더라" 했습 니다. 그리고 17장 1절에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 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했습니다. 그러니까 l6장 마지막절과 l7장 첫절 사이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다시 말 하면 이스마엘을 낳은 후 l3년동안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완 전히 교통이 끊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시고, 다시 약속하시고, 아들 이삭 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과 이삭 사이에는 싱각한 갈등관 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비단 이스마엘과 이삭의 문제가 아 니었고 그 갈등은 민족적 싸움으로 발전되어 지금까지 계속 내려 오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의 그 복잡하고 미묘한 싸 움의 역사가 그것입니다. 이스마엘 때문에 사라와 하갈의 갈등이 생기게 되고 이삭과 이 스마엘의 갈등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도 정신적인 부담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은 아 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80세가 넘도록 별로 다투어 본 적도 없었고 사라가 아브라함의 사랑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 갈이 이스마엘을 낳고부터는 정신적인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습 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여전히 아니 그전보다 더 신경을 써서 대하노라고 했지만 사라 편에서는 아브라함이 하갈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같이 여겨졌습니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아들이긴 하지 만 80이 넘어 얻은 아들이니 얼마나 귀엽겠습니까. 그러나 사라를 의식해서 한번도 귀여운 아들을 안아주지도 못했습니다. 이스마엘 이 생김으로 인해서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 사이에 치러야 했던 정 신적인 아픔의 대가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실수였습니다. 이런 치명적인 실수를 왜 범했습니까? 결국 아브라함의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합의 실수에서 무엇을 배웁니까?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인간적으로는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때인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내셨습니다. 별을 세어보라 하시더니 네 자손이 그와 같을 것이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 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오래 지났는데도 그 약속이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혼들리기 시작했습니 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궁리하다가 하나님의 약속과 뜻에 상관없 이 여종을 통해서 아들을 얻었지만 그 결과는 고통뿐이었습니다. 창세기 l5장의 아브라함은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불가능한 가운데서는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그러나 l6장에 들어오면 아브라 합의 얼굴이 불신앙의 얼굴로 변합니다. 주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버리는 것을 봅니다. 어제의 신앙의 사람이 오늘의 불신앙의 사람 이 됩니다. 어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던 사 람이 오늘 그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럴 수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렇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의 실수는 곧 우리의 실수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실수를 통해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요?
1.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문제든지 너무 빨리 해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서두르다가 문제를 망쳐 놓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보고 있 습니까? 우리 한국 사람은 너무 서두르는 것이 홈입니다.외국 사람이 한국 사람에게서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무엇인지 아세요? '빨리 빨리'입니다.음식 빨리 안 가져온다고 독촉하는 사람이 한국 사람 입니다. 먹자마자 일어서는 것이 한국 사람입니다. 물에 밥을 말아 먹는 사람이 우리들입니다. 무엇을 해도 서두릅니다. 공사를 해도 서두릅니다. 다른 사람이 5년에 걸려서 할 공사를 우리는 1년에 끝냈다고 자랑합니다. 장사를 해도 한탕에 돈을 벌어야 됩니다. 현 대는 바쁘다는 것을 좋게 생각합니다. 움직여서 무엇인가라도 하 고 있으면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가만히 있는 것은 낭비나 비생산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와 정반대일 수가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바쁘게 가고 무엇을 위해서 인지도 모 르고 바쁘게 사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줄리안 헉슬리라는 유명한 학자가 한번은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학술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한 정거장에 도착했습니다. 기차가 연 착되는 바람에 예정했던 시간보다 늦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 둘러 마차를 타고 마부에게 '이보세_9, 제가 아주 중요한 학술회 의에 참석해야 하는데 시간이 늦었어요. 좀 빨리 달려주세요, 빨 리. 그래서 이 마부는 전속력을 다해서 빨리 달려갔습니다. 한참 달리다 보니까 이상한 곳으로 갑니다. '아니, 마부 양반 지금 어디 로 가는 겁니까?' 깜짝 놀라 물었더니 마부의 대답이 '선생님은 저더러 빨리만 달리라고 하셨지 어디로 가라고는 하지 않았습니 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땀흘리 며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바쁘게 삽니까?어디로 지금 가고 계십니까? 왜 그렇게 바쁘십니까? 내 삶을 바라 볼 수 있는 여유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경건의 시간이 있습니 까? 살아계셔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까? 오늘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내게 임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들으며 내 일을 살펴볼 수 있는 이 영혼의 공간이 우리 삶의 한복판에 준비되어 있습니까?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2.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어디서 좋은 소리가 들려오는 가 하고 본능적으로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 가 모두 우리에게 유익한 소리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위기에 처할 때 살 길을 구하게 되는 인간의 본능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궁지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실까?'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 아브라함이 아내 인 사라의 제의에 대하여 그것이 s`-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하고 검토한 흔적이 있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절에 뭐랬어요?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 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흑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며 아브 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라함이 주님의 말씀을 듣 지 아니하고 사래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에게 들려온 하나님의 음 성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이 살아 있습니까? 주 님의 음성을 들으십니까? 들려오는 복잡한 세상소리에만 귀를 열 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의 소리,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층고와 조언이 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할 때가 있습니 다. 내 사랑하는 친구가 내게 던져준 최선의 충고라고 해도 주님의 말씀 앞에 반드시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습니까?' 우리는 사람들의 여론에만 관심이 있었지 하니닙 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은 없고 여백도 없습니다. 이것은 비 극입니다. 시내산에 올라갔던 모세의 모습을 기억히십니까?모세가 왜 시 내산에 올라갔습니까? 주님의 음성을 들으러 올라갔습니다. 곤란 과 역경에 처한 민족의 앞길에 대한 하니님의 지시를 받기 위해서 그는 시내산을 올랐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 씀을 듣는 동안에 모세의 형 아론은 산 아래서 누구의 말을 들었 습니까? 백성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모세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이를 더이상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신을 세웁시다. 그래서 그의 지시를 받도록 합시다_' 이 백성들의 못난 소리. 이 백성들의 유익하지 못한 층고에 귀를 기울였던 아론이 어떻게 했습니까? '너희에게 있는 금붙이를 가져오라.'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무 엇을 만들었습니까?금송아지를 만들어 가지고 '이것이 너희를 인 도할 신이다.' 하고 선포함으로 큰 흔란과 반역이 생기지 않았습 니까? 이것은 실패요, 좌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흔자 시내산 높은 곳에서 하니?의 말씀을 들었던 모세 는 어떻게 내려왔습니까? 그는 하니님의 영광을 가지고 내려왔습 니다. 하나님의 대답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우리의 삶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는 하나님의 거룩한 지혜를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처방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 복잡하게 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바쁘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 시는 하니닙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3.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 해야 합니다. 사람이 수렁에 빠지게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살 길을 찾습니다. 우선 살고 보자고 합니다. 그러나 악한 수단은 결 코 선한 결과를 가져을 수가 없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는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윤리의 출발점입니다. 아무리 좋은 목 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잘못된 수단을 사용 할 때 그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가 없습니다. 지나간 군사정권이 역 사의 심판을 받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수단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결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거기에 정당한 수단을 사용해야 합니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가는 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얻은 행위는 그 목적이 어떻든 명백한 간음입니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학대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 식을 얻자마자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해결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만드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새로운 삶의 환경이 전개되기 시작했습니 다. 나중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약속의 아들과 종을 통해서 얻은 아들 사이에 생기기 시작하는 이 불협화음, 이 갈등, 이 고민, 잠을 이룰 수 없는 이 가정불화의 고 통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입니까? 물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용서하셨습니다. 사라도 용서하셨습 니다. 심지어 하갈도 용서하시고 이스마엘도 축복하셨습니다. 그 러나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사실과 용서받았다고 해서 내 행동 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셨 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그들은 그들이 뿌렸던 씨 에 대한 결과를 거두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스스로 속이지 맙시 다. 하나님을 속이려 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속지도 않으실 뿐더러속일 수도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들의 뿌린 씨에 대한 결과를 거두고 있습 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려고 생 각합니다. 그래서 이웃의 마음을 아프게도 하면서 내가 이익을 취 하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 경은 우리더러 수단 방법을 가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문제에 직면할 때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환경을 먼저 봅니다. 나의 모습을 봅니다. 한심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 어떻게 나에게 이런 상황을 주십니까? 왜 이런 사업의 어려움을 주십니까? 하나님, 왜 이렇게 나를 만드십니까?' 이것은 환경을 먼저 보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볼 때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을 먼저보고 환경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니떴의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을 찾으세요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을 찾으세요 그 리고 그 분의 음성을 들으세요 그 다음에 환경을 보세요 주님께 서 나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그럼으로써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쌔가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헤쳐 나갈 기회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입니까. 갈등입니까? 좌절입니까? 위기입니까? 실패입니까? 낙심입니까? 그러나 사실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 하는 것입니다. 시련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통해서 그 환경을 바라보세요.지혜를 구하세요. 시견이 기회로 변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의심과 절망 속에서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았더니 보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지혜를 얻어 이 문제에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흥해 앞에 왔을 때 그들은 앞을 다투어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셔서 이 바다에서 죽게 하십니까?' 그 때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영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닙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마음과 생?의 여유가 없습니다. 너무 바쁘게 쫓아다니기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쫓기는 사람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합니다. 쫓아가는 사람만이 성취할 수 있습니다.' 목표를 정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주님과 함께 그 목표를 향해서 가는 사람만이 성취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나 사이만 정상이면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는데, 하나님이 내 삶을 인도 하시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서두르지 마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려 여러분의 목표가 성취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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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샬롬~!!~ㅎㅎㅇㅇ
감사합니다
평안 장로님 존재 목사님 오늘도 함께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축복된 하루 되십시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