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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사 원문보기 글쓴이: 신동현
만주 독립운동의 초석을 다진 이광민
채영국(안중근의사기념관건립위원회 전문위원)
한국 근대 시기 명문가로 칭송받을 수 있는 가문은 부를 축적한 가문, 높은 권력을 지닌 가문이 아니다. 조선후기 외세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구국활동을 펼쳤거나 일제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가문이 바로 명문가다. 가풍에 의한 당연한 일이겠으나 그 시기 가족 중 어느 누가 구국 또는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이 나오면 그 가문의 구성원은 대체적으로 모두 같은 길을 걸었다. 안중근일가, 김구일가, 이회영 일가가 그랬다.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이광민의 가문도 바로 그 대열에 설수 있는 명문가였다. 그의 작은할아버지 이승화(李承和)와 백부 이상룡(李相龍)을 비롯한 3형제, 그리고 자신과 3명의 사촌 및 조카 병화(炳華)까지 국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니 한국근대사에서 그의 가문을 빼놓고 어찌 명문가 운운할 수 있겠는가?
이광민은 1895년 예로부터 전통을 지키고 충절을 이어온 고장으로 이름 높은 경북 안동 임청각에서 아버지 봉의(鳳義)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을 수중에 넣기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지르며 날뛰던 해였다. 이 해 일제는 왕후인 민비를 시해하였으며, 단발령을 반포해 한민족의 민족혼을 차단시키고자했다. 이 같은 일제의 망동에 한민족은 의병을 일으켜 침략자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한편, 계몽운동을 펼쳐 민족의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 애국의 물결은 일제가 조선과 그 뒤를 이은 대한제국을 강압하면 할수록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이러한 구국의 대열에 이광민의 가문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일찍이 부친을 잃고 집안의 가장이 된 백부 이상룡은 병서를 연구해 무장항일의 기초를 닦은 후, 1905년 가야산에 의병기지를 구축했다. 이 일은 준비과정에서 일제에 발각되어 기지를 습격당하는 바람에 큰 활동을 벌이지는 못하였다. 의병항쟁이 어렵게 되자 이상룡은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위한 교육과 계몽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에는 민족학교인 협동학교를 세우는데 앞장섰고, 1909년에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해 활동했다. 물론 이 같은 활동에는 그의 첫째 동생인 상동(相東)과 광민의 부친이자 상룡의 막내 동생인 봉의, 두 형제들도 가담해 힘을 보탰다. 10대초반의 이광민도 이 협동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우고 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의 이 같은 애국활동을 보고 자란 이광민은 나라사랑 정신이 자연히 가슴깊이 박혔다.
그러나 이광민 가문의 애국활동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침략자 일제의 마수를 견디지 못하고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을 당하고 말았다. 이제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했던 한민족은 나라가 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다. 깊은 시름에 잠겨 망국의 현실을 고민하던 백부 이상룡은 가족을 모아 조국을 되찾기 위해 만주로 떠날 것임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나라를 잃고 맞는 첫 새해인 1911년 1월 6일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의 길을 나섰다. 물론 이 길에는 이제 막 16세가 된 이광민도 포함되었다.
이상룡 일가는 엄동설한에 추풍령을 넘고 서울을 거쳐 신의주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삼엄한 일본 경찰들의 검문과 감시를 받고 압록강을 넘어 서간도로 들어섰다. 이어 압록강변을 따라 집안현까지 도보로 걸어 훗날 서간도 독립군기지의 본산이 될 유하현(柳河縣)에 도착하였다. 이들 일행이 이동한 압록강변의 이 경로는 오늘날 차편으로 가기에도 만만치 않은 길이다. 하물며 16세의 어린 이광민이 그 차가운 추위를 견디며 도보로 이동했으니 그 고초가 얼마나 심했을 것인가는 짐작할 수 있다.
이상룡은 먼저 온 신민회 회원인 이동녕 · 이시영 등과 힘을 합해 1911년 봄 서간도 이주한인들의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였다. 경학사의 초대 사장은 이상룡이 되었다. 이 단체는 나라를 침략자들에게 빼앗기고 살길을 찾아 남의 나라 땅에까지 흘러온 이주한인들에게는 큰 구심점이 되었다. 경학사의 지도자들은 이상룡을 비롯해 이회영 · 이동녕 · 김창환 · 주진수 등이었다. 모두가 굳건한 민족정신을 지닌 애국지사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지도를 받은 이주한인들은 척박한 만주땅에서 좌절하지 않고 안정감을 가지며 어려운 삶을 꾸려 나갔다. 이광민은 아직은 소년의 몸이었지만 마치 비서처럼 따라다니며 백부 이상룡을 보필하며 그의 애국애족활동을 배웠다.
경학사는 이듬해 부민단(扶民團)으로 발전하여 보다 강력한 결집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 이상룡을 비롯한 서간도의 애국지사들은 한인사회 곳곳에 강습소를 만들어 한인 2세들을 교육시키는 한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많은 애국청년들이 이 무관학교에서 장차 전개될 독립전쟁을 대비해 민족교육과 군사훈련을 이수하였다. 소년에서 청년기로 접어든 이광민도 신흥무관학교의 생도가 되어 자신의 역량을 연마하였다. 그리고 무관학교를 수료하고 난 뒤, 1916년에는 부민단의 본부가 있는 통화현 삼도구(通化縣三道溝)에 설립된 동화학교(東華學校)의 교사가 되어 한인 2세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은 간악한 일제의 식민통치에 반발해 마침내 전민족적인 3·1만세 시위를 벌였다. 국내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전세계에 흩어져있는 한국인들에게 전달되어 소식을 접한 해외한인들 또한 자신들이 머물러 있는 지역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광민이 독립군으로서의 자질을 키우고 있는 서간도 독립군기지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서간도독립군기지의 독립운동지도자들과 이주한인들도 3월 12일부터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여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리고 그 해 4월 조국 독립을 실천할 기회가 도래했음을 간파한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서간도 각 지역에 흩어져있는 민족운동 단체를 하나로 통합해 한족회(韓族會)를 탄생시켰다.
한편 이 같은 한민족의 독립을 향한 열기에 힘을 얻은 민족운동지도자들은 1919년 4월 11일 상해에 조국의 독립운동을 총괄 지도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임시정부는 행정과 입법 및 사법기관을 조직하여 정부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리고 10 여 년간 독립전쟁을 준비해 온 서북간도의 독립운동계에 연락을 취해 그들을 임정산하의 군사세력으로 들어오도록 하였다. 따라서 임정과 협의한 서간도의 지도자들은 1919년 11월 17일 한족회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명칭을 바꾸고 임정산하의 무장세력임을 천명하였다. 서로군정서를 이끌 최고지도자인 독판에는 이광민의 백부인 이상룡이 선임되었고, 여준 · 이탁 · 김형식 · 양규열 · 지청천 · 김동삼 등 쟁쟁한 독립군지도자들이 간부가 되었다.
자신의 백부가 서간도 항일 무장세력을 이끌 최고지도자가 되자 그 누구보다 열혈한 애국심을 가진 이광민도 바빠졌다. 서로군정서 성립 초기 이광민은 조직내의 특별한 직책을 가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독판에 선임되던 그 시기 이미 이상룡은 60을 넘긴 고령이었다. 따라서 이광민은 자신이 하나의 고유 업무를 담당하기 보다는 막중한 업무를 감당해야 할 고령의 백부를 철저히 보필하고자 했던 것이다.
성립이후 서로군정서는 짜임새있는 독립군단으로 성장해 갔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중간간부가 되었고, 국내외에서 온 청년들을 독립군병사로 입대시켜 편제를 갖추었다. 대한제국 군대의 간부출신이거나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독립군 지도자들은 이들을 주야로 훈련시켜 능력있는 독립군요원으로 양성해 갔다. 또 러시아 연해주로 장정들을 파견해 이들이 항일전에 사용할 무기를 구입해 들였다. 이 모든 것은 이회영 · 이시영 일가가 지출한 자금과 독판 이상룡이 고향인 안동에 있는 자신의 전답을 처분해 마련한 자금으로 행해졌다. 독립운동 자금이 필요할 때마다 이상룡은 이광민의 사촌형이자 자신의 아들인 준형을 안동으로 보내 전답을 팔아오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준비를 거쳐 서로군정서는 소속 독립군들을 국내로 파견해 일제의 침략기관과 침략자들을 공격하는 유격전을 전개했다.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여러 독립군단들의 이 같은 국내진입전에 큰 피해를 입은 일제는 독립군들을 소멸시킬 목적으로 1920년 10월 초, 약 2만의 대규모 일본군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이 침략군을 맞아 서북간도의 독립군들은 힘을 합해 같은 해 10월 21일부터 약 10여회의 전투를 벌여 청산리대첩이라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대첩 후 독립군들은 일시적으로 일제와의 항전을 피하고 진영을 정비하기위해 북만주 또는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그런가하면 일부는 서북간도의 오지로 피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청산리에서 대대적으로 패한 일제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서북간도의 한인사회를 초토화시키는 ‘간도참변’을 단행하였다. 일제는 서북간도에 만들어진 모든 한인사회를 공격하였지만 특히 주대상으로 한 곳은 민족운동자들이 독립군기지로 건립한 지역이었다. 당연히 서로군정서의 독판으로 서간도지역 항일무장투쟁을 총지휘한 이상룡의 거주지는 일제의 첫 번째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에 그 때도 지극정성으로 유하현 삼원포(柳河縣三源浦)에서 백부의 곁을 지키고 있던 이광민은 신속히 이상룡을 산간오지의 깊숙하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 모셨다.
일제의 간도침략으로 10 여 년간 민족운동자들이 일군 서간도 독립군기지는 초토화되었다. 침략자 일본군들이 철수하고 난 뒤 산속 깊은 밀림으로 피해있던 한인들이 자신들의 마을로 돌아왔을 때 한인사회는 마치 전쟁이 끝난 자리와도 같았다. 그러나 한인들은 다시 힘을 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재건하였다. 20대 중반으로 이제 한인사회 내에서는 물론이고 독립운동계에서도 중추적 인물이 된 이광민도 동포들을 이끌고 한인사회 재건에 앞장섰다.
간도참변을 겪고 난 뒤 몇 년간 서간도 독립운동계는 보다 효율적인 항일투쟁을 위한 독립군 세력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중반에는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 독립군의 통합세력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성립하였다. 대한통의부는 김동삼을 비롯한 채상덕 · 고할신 · 현정경 · 김창환 등이 주축이 되어 이끌었다. 대한통의부의 총장인 김동삼은 이광민과 같은 안동인으로, 일찍이 고향에서 민족교육기관인 협동학교를 설립해 애국인재를 양성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협동학교 졸업생인 이광민에게 김동삼은 스승이 되는 인물이었다. 또한 김동삼은 이상룡과 뜻을 같이하는 동지이자 가장 아끼는 고향 후배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자신이 신뢰하는 김동삼이 대한통의부를 이끌어가자 이미 60대 중반의 고령이 된 이상룡은 조직에서 한 발 물러나 아무 직책도 맡지 않았다. 단지 항시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믿음직한 조카 광민을 통해 단체의 나갈 길을 제시해 주는 역할은 계속하였다.
그러나 남만주 독립운동계의 온 여망을 받고 성립한 대한통의부는 성립 후 채 일 년이 되지 않아 조직내부의 이념상의 문제로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즉 침략자 일제를 몰아낸 뒤 조국이 광복되면 왕조를 부활시키자는 복벽주의와 공화제 국가를 만들자는 공화주의자들로 나뉘게 된 것이었다. 이 같이 상반된 두 주장은 서로 타협점을 찾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복벽주의자들이 대한통의부를 떠나 애초에 남만주 독립운동계가 염원했던 독립운동 세력의 대동 통합이라는 목표가 상실되고 말았다. 그리고 1924년 초에는 채찬 · 김명봉 등 세력이 무장투쟁 제일주의를 주장하며 참의부(參議部)를 성립시켜 떨어져 나갔다.
효과적인 항일운동을 펼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계의 대동통합이 절실했건만 통합된 세력이 이 같이 분열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남아있던 대한통의부의 인사들은 1924년 중반 이후 또 다시 남만주 독립운동세력의 대동통합운동을 전개했다. 이 통합운동부터 이광민은 백부 이상룡의 곁을 떠나 독립운동계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상룡은 광민이 연륜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이제 자신을 떠나 독립운동계 전면에 나서 활동해야 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소년시기 자신을 따라 서간도로 와 반평생을 자신을 따라다니며 독립군기지에서 조국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상을 배운 조카였다. 이제 그만하면 30세인 이광민이 남만주 독립운동계를 이끌고 일제를 상대로 투쟁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광민은 서로군정서의 대표로 활약하며 통합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24년 7월부터 시작된 통합운동에는 최종적으로 대한통의부를 비롯해 서로군정서 · 광정단(光正團) · 의성단(義成團) ·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 고본계(固本稧) · 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 · 잡륜자치회(卡倫自治會) 등 8개 단체가 통합에 합의해 그 해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켰다. 참의부 · 신민부(新民府) 등과 함께 3부의 시대를 이끌며, 남만주 한인사회 및 항일무장투쟁을 이끌 정의부가 성립된 것이었다.
정의부는 하얼빈 이남 남만주의 광활한 지역 곳곳에 형성된 한인사회를 관할해 한인들의 자치를 지원하는 한편, 독립군들로 의용대를 편성해 무장투쟁을 실천한 군정부(軍政府)였다. 즉 조국을 떠나 이국땅에 삶의 터전을 잡은 민족의 생존을 도모하고, 그를 바탕으로 구축된 역량으로 무장력을 갖추어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정의부가 관할 대상으로 한 남만주지역 거주 한인은 15,300여 호에 76,800여 명이었다.
성립 초기 정의부의 조직은 중앙행정위원회 · 민사위원회 · 군사위원회 · 법무위원회 · 학무위원회 · 재무위원회 · 교통위원회 · 생계위원회 · 외무위원회 등의 행정기관과, 사법적 기능을 가진 중앙심판원, 입법기관인 중앙의회 등이 있었다. 그리고 무장투쟁을 수행할 사령부도 따로 구성되었다. 즉 영토와 주권을 가진 완전한 국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남만주지역 한인사회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자치활동을 펼치는 한편 조국독립운동을 수행할 준정부적 구조를 갖추었던 것이다.
성립초기 이광민은 민사위원회 소속 민사부의 서무과 주임위원에 선임되었다. 그가 맡은 서무과는 입법기관인 중앙의회 의원을 선거하는 업무와 지방자치를 시행해 이를 운영하는 업무를 주관하였다. 관할지역내의 이주한인의 가가호호를 조사해 호적을 작성하고, 그를 토대로 독립군요원을 징병하는 업무도 시행하였다. 그리고 남만지역 각 한인사회에 지방행정 조직망을 갖추어 거기에 소속된 한인들이 안전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업무까지 주관하였다. 민사부 서무과의 이 같은 업무는 이주 한인사회 구성원들 하나하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수행하기 어려운 업무들이었다. 따라서 1911년 이른 시기 서간도로 이주하여 이주한인사회 성립초기부터 10여년이 넘도록 한인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이광민에게 이 업무를 책임지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의부가 남만 한인사회를 이 같이 관할하며 독립운동을 수행하고 있던 1925년 5월 임시정부의 법무총장인 오영선과 내무총장인 이유필이 만주에 파견되었다. 이들 두 파견원들은 정의부 중앙간부들을 만나, 지금 임정이 상당히 어려운 처지이므로 임정의 최고책임자를 정의부측에서 추천해주기를 요구하였다. 이에 정의부 간부들은 행정기관인 중앙행정위원회에서 논의한 뒤, 중앙의회에 안을 상정하여 파견원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임정 최고책임자로는 그들이 언제나 스승과 어버이처럼 따르는 이상룡을 추천하기로 결의하였다.
중앙간부들의 보고를 받은 이상룡은 한동안 고민하였다. 지금 정의부의 아무 직책도 맡고 있지 않지만 그는 아직도 남만의 모든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지도자였다. 자신이 이곳을 떠나 상해로 가도 남만주의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 되어 갈 것인지 어쩔지를 고뇌하고 또 고뇌하였다. 그러다 결국 그는 나라 잃은 백성이 어디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던 효과적인 활동을 벌여 조국광복을 되찾으면 될 것 아닌가?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남만은 이제 정의부 지도자들이 어느 정도 효율적으로 한인들을 관할하며 독립운동을 실천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독립운동계의 최고 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는 임정이 혼란스럽다면 그 또한 침략자 일제만 좋게 만드는 일이라 생각하였다.
이 같은 결론을 내린 이상룡은 이제 독립운동계 지도자로서 제몫을 다하고 있는 조카 이광민을 대동하고 1925년 8월 하순 상해를 향해 출발하였다. 안동(지금의 단동시)에서 영국 선박 애인호를 타고 상해로 가는 배안에서 이상룡은 언제나 자신을 그림자처럼 보필하는 조카 광민을 보며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고향 안동에서 아무 걱정없이 책이나 보면서 한평생 편안히 살 수 있었을 텐데 망명이란 말이 무엇인지도 모를 10대의 어린나이에 큰아버지를 따라 이 척박한 서간도에 와서 모진 고생을 이겨낸 조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상해에 도착한 이상룡은 그 해 9월 24일 임정의 초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최고지도자가 된 이상룡은 노구를 이끌고 불철주야 임정의 정비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임정의 내부분란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게다가 정의부를 비롯해 신민부 · 참의부 등에 소속된 독립군지도자들로 임정의 내각을 조각했건만 임명받은 당사자들은 상해를 거부하고 오지 않았다. 이 같은 분란속에서는 결국 임정을 이끌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이상룡은 조카 광민을 데리고 1926년 2월 남만주 반석현 호란하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데 이광민은 정의부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미 같은 고향 출신의 동지인 김응섭과 1924년 11월 4일 반석현 부태하에서 한족노동당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성립초기부터 이광민은 한족노동당의 선전부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정의부보다 약 20일 빨리 조직된 이 단체는 서간도로 이주해 만주 독립운동계의 실정을 잘 알고 있는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것이었다. 따라서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의 젊은 인사들이 간부가 되어 한족노동당을 이끌었지만 만주독립운동계에서는 실질적인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광민을 비롯한 김응섭 · 김경달 · 박동초 등 이 단체의 간부들은 약 20일 늦게 성립된 남만의 통합군정부인 정의부의 주요 직책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정의부에 가담하면서도 한족노동당의 조직은 계속 유지하며 독립운동을 실천하였다.
임정내부의 어지러운 상황을 보고 돌아온 이광민은 만주보다 더 효율적으로 조국 독립운동을 실천할 곳은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그 같은 판단하에 정의부와 한족노동당의 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상해에서 돌아온 이광민은 새로 개편된 정의부 조직에 의해 재무위원장에 선임되었다. 독립운동단체의 재무위원장이란 인물의 명성이나 항일투쟁력만 가지고 맡겨지는 직책이 아니다. 그 조직의 살림은 물론이고 항일활동을 위한 무력을 갖추는 일까지 총괄해서 책임지는 직책이 재무위원장인 것이다. 거기에 정의부는 이주한인사회의 자치까지 관할해야하는 단체였기에, 다른 어느 직책보다 더 신망 받고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수행하기 어려운 직책이었던 것이다. 이 같이 막중한 직책을 맡은 이광민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집중해 재무위원장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의 사심없는 노력과 열정으로 정의부는 어려움 속에서도 관할 한인들을 지원하며, 항일무장활동을 훌륭히 전개해 나갔다.
그런데 1927년 초부터 만주 독립운동계에 민족유일당운동의 바람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상해와 북경 등에서 활동하던 홍진 · 안창호 등이 일으킨 것으로 만주의 독립운동계도 보다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민족유일당운동이란 독립운동에 참여한 모든 인물들이 자신의 이념과 사상을 고집하지 말고 대동단결하여 침략자 일제를 물리치자는 것이었다. 만주에서 이 운동이 전개되자 이광민은 처음부터 적극 참여하였다.
1927년 4월 15일부터 길림현 신안둔에서 개최된 만주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운동에 이광민은 김동삼 · 오동진 등 독립운동계 선배들과 정의부 대표로 참여하였다. 52명의 독립운동계 대표들이 참여해 4일간에 걸쳐 개최된 이 회의를 시초로 이후 만주 독립운동계의 유일당운동은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이 첫 회의에서 대표들은 민족유일당을 성립시키기 위한 강령과 서약문을 합의해 작성하였다. 그리고 유일당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시키기 위한 세부지침 연구기관인 시사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광민을 비롯한 독립운동계 지도자들에 의해 이후 만주지역 유일당운동은 활발히 전개되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서북간도를 포함한 남북만주 전지역에 흩어져 있는 한민족 독립운동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운동으로 상당한 진통을 겪어야 했다. 정의부 · 참의부 · 신민부 등 3부는 물론이고 만주 여기저기에 조직된 군소단체라 할지라도 이들 모두는 제각기 이념과 노선을 가졌기에 이를 하나로 통일시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1년이 넘게 각 단체의 대표자들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주 독립운동계는 전민족유일당촉성회와 전민족유일당협의회 등 두 파로 나뉘고 말았다. 촉성회의 주장은 독립운동계를 통합시킬 유일당에는 지금까지 가담했던 단체를 완전히 버리고 구성원 하나하나가 개인의 자격으로 유일당에 가담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협의회의 주장은 현재의 단체를 그대로 존속시켜 단체와 단체가 통합하자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안이 나온 뒤에도 만주독립운동계는 상당기간 방법의 차이를 없애고 유일당을 성립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끝내는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하였다. 남만지역 한인사회를 관할하며 자치와 군사적인 면에서 큰 세력을 가진 정의부는 협의회를 지지하였다. 그렇지만 재무위원장 이광민은 정의부의 논리가 옳지 않다고 판단해 흑룡강성에 본부를 둔 여족공의회(麗族公議會)의 대표가 되어 촉성회를 지지하였다. 이 두 파는 이후 촉성회는 북만주를 근거지로 해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을, 협의회는 남만주를 근거지로 해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성립시켜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갔다.
조국 독립운동전선에서 이광민이 이 같이 활약하고 있을 때 백부 이상룡이 위독하다는 전문이 왔다. 70대의 고령으로 활동이 어렵게 되자 이광민의 가족은 그를 일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오지인 길림성 서란현 소고전자에 모셨다. 그런데 그곳에서 기별이 온 것이다. 광민은 만사를 제쳐두고 백부께 달려갔다. 백부 이상룡은 오늘날 이광민이 독립운동계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게 한 스승이자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었다. 그가 도착하자 이상룡은 거의 운명직전이었다. 이후 며칠간의 병고를 겪은 이상룡은 자신의 아들이자 이광민의 사촌형인 이준형과 가솔들에게 “국토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내 유골을 고국에 싣고 가지 말고 우선 이곳에 묻어두고 기다리도록 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하였다. 이 때가 1932년 5월 12일로 이상룡의 나이 만 74세였다. 이준형과 광민 등은 유언대로 우선 그곳 소고전자에 가묘를 만들어 이상룡을 모셨다.
이상룡이 서거한 뒤 광민의 일가 대부분은 국내로 귀국하였다. 하지만 자신을 이끌어 준 백부 이상룡이 이 세상에 없다고 하여 광민은 만주에서의 독립투쟁을 그만 둘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끝까지 만주 땅을 떠나지 않고 동지들을 이끌고 항일전선에 앞장섰다. 어떤 면에서 16세 되던 해에 조국을 떠나 이곳 만주에서 잔뼈가 굳었으니 그에게는 만주가 고향과도 같이 여겨졌다. 하지만 그가 조국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결심하는 동안에도 침략자 일제는 세력을 키워 만주를 삼킨 후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중국 대륙을 향해 점점침략전을 확대해갔다. 이에 광민은 조국이 독립되려면 아직 시간이 더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1938년 하얼빈의 동취원창에 토지를 구입해 가족묘를 조성하고 이상룡의 유해를 이장하였다.
이 같이 고향 안동에서의 어린 시기를 빼고 한평생을 만주에서 조국독립운동에 몸바쳤던 이광민은 그 곳에서 조국 광복을 맞았다. 꿈에도 바랐던 해방을 맞아 단숨에 조국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그 척박한 땅에서 고생한 이광민은 그 기쁨의 순간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고대하던 이광민은 애석하게도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해방 후 약 두 달 만인 1945년 10월 18일 만주 땅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0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