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홀의 성에 이르러
창 24:10-16
10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11 그 낙타를 성 밖 우물 곁에 꿇렸으니 저녁 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때였더라
12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13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
14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15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16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로 내려가서 물을 그 물동이에 채워가지고 올라오는지라
창 24:10-16 / 아브라함의 재산을 모두 맡아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그 종은 낙타 열 마리를 이끌고 길을 떠나 나홀이 살고 있는 북부 메소보다미아의 한 성읍에 이르렀다. 11) 그 성읍에 도착하여 성읍 밖에 있는 우물가에서 살고 간 낙타를 쉬게 하였다. 때는 저녁쯤이라 동네 아낙들이 우물로 물을 길러 올 때였다. 12) 그 종은 거기서 여호와께 기도를 드렸다. `우리 주인님 아브라함이 섬겨 모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 이것이 이곳까지 찾아온 목적을 잘 이룰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우리 주인님께 하신 약속을 꼭 이루어 주소서.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13) 성읍에 살고 있는 아낙네들이 이제 이 우물로 물을 길러 나올 것입니다. 14) 그 가운데에서 한 처녀에게 이렇게 말하렵니다. `아가씨, 물항아리를 내려 내게 물을 마시게 해주시오.' 그때 그 아가씨가 `예, 어르신. 어르신의 낙타에게도 물을 먹이겠어요' 하고 말한다면 그 아가씨가 바로 우리 도련님 이삭의 짝으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아가씨인 줄 알겠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주인님께 은총을 베푸시어 약속을 들어주신 줄로 믿겠습니다.' 15) 그가 이런 기도를 채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어깨에 물항아리를 메고 우물가로 다가왔다.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과 그 아내 밀가 사이에서 태어난 브두엘의 딸이었다. 16) 그 아가씨는 매우 아리땁고 예쁜 처녀였다. 그녀는 우물로 내려가 항아리를 내려 놓고 물을 가득 채워서 다시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아브라함의 명을 쫓아 늙은 종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의 고향 땅 메소포타미아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브라함의 친동생인 나홀의 가문에 속한 브두엘의 딸 리브가를 만납니다.
노종의 기도(10-12) 아브라함의 노종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집에 있는 낙타 열 필과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메소포타미아의 나홀의 성에 도착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 사이의 고원이라는 뜻입니다. 이 지역은 유브라데와 티그리스 강 사이에 위치한 고원 지대입니다. 나홀의 성은 하란을 말합니다(28:10). 이는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이 거주한 데서 유래하는 명칭입니다. 엘리에셀이 나홀 성에 도착한 것은 해가 지는 저녁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종으로서 온전히 주인을 위해 간구하는 엘리에셀에게서 진정한 섬김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응답의 증표(13-14) 하란에 도착한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제일 먼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응답의 증표는 “물을 길러오는 한 소녀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하여 본인뿐 아니라, 그의 짐승들에게도 물을 마시게 하면 바로 그녀가 하나님께서 이삭의 배필로 정해주신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아내가 될 수 있는 조건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지혜로운 마음입니다(7).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했습니다. 이를 하나님의 인도하신 응답의 증표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15-16)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삭의 아내를 맞이할 모든 준비를 다 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노종 엘리에셀의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물을 길러 나오고 있었습니다. 브두엘의 딸이요 라반의 여동생인 리브가는 고리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그녀는 언약 혈통을 잇는 고리와 같은 역할을 한 지혜롭고 현숙한 여인이었습니다. 이처럼 무슨 일을 앞두고 먼저 기도하는 자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됩니다.
적용: 엘리에셀처럼 당신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확인 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당신도 기도로 하나님께 요구한 증표가 응답된 것이 있나요?
인정받기를 바란 나머지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는 타인의 기대를 따라 살게 되지. 즉 진정한 자신을 버리고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되는 거라네. 기억하게. 자네가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타인 역시 ‘자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걸세, 상대가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더라도 화를 내서는 안돼. 그것이 당연하지.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미움 받을 용기> 중에서
< 설 교 >
하나님의 사인 읽기
김영봉목사 / 창세기 24:10-14
이민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자녀의 결혼입니다. 결혼의 상대자를 한국 사람 중에서 찾으려는 고집을 가지고 있으면 문제는 더 심각해집니다. 하지만 어느 인종이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민자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도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민 1세대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고향을 떠난 이후 여러 가지 우여 곡절을 거쳐 가나안 땅에 정착한 그는 나이 백세에 아들을 하나 얻습니다. 아들 이삭은 청소년기에 모리아의 어느 산에서 아버지 손에 제물로 드려질뻔했으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살아남았고, 그 이후로 청년으로 그리고 장년으로 성장해 갑니다.
죽음의 문턱에 점점 가까와지고 있다고 느낀 아브라함은 이삭의 결혼에 대해 조바심이 생겼습니다. 전에도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이삭은 중년에 접어 들었고, 어머니 사라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는 의지할 곳이 없어 더욱 힘들어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를 두고 여러 날 고민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급하다고 해서 가나안 여인 중에서 며느리를 찾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혈통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면서 거룩한 민족을 일으켜야 하는 아브라함으로서는 아들을 가나안 여인과 결혼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가나안 민족에게 흡수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삭을 고향으로 보낼 수도 없다 싶었습니다. 이삭이 고향에 갔다가 그곳에 머물러 살겠다고 하면 자신을 불러내신 하나님의 계획이 무산될 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을만한 사람을 시켜 고향에서 신부감을 찾아오게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는 곳으로부터 하란까지는 500마일이 넘는 먼 거리였습니다. 거대한 캐러반 부대를 만들지 않으면 엄두도 내지 못할 먼 여행이었습니다. 여러 마리의 낙타와 돕는 종들을 딸려 보내야 했고, 오고 가는 일정에 드는 모든 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그 모든 것을 가지고 달아나 버릴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며느리감을 데리고 와야 합니다.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아브라함에게는 듬직한 종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종이라 하지만 실은 수 십 년을 함께 살아 온 아들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며느리 감을 찾기 위해 고향으로 보낼 사람이 누구인가 생각했을 때, 첫 번째로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그 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종을 불러 자신의 다리 사이에 손을 넣게 하고 맹세를 시킵니다. 다리 사이에 손을 넣는 것은 사안이 그렇게 엄중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종에게 자신의 고향에 가서 이삭의 아내감을 찾아 오라고 부탁합니다.
아브라함의 태도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는 종이 묻습니다. "며느님이 되실 여인이 저를 따라오지 않겠다고 거절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5절) 너무도 중요한 일인 것을 알았기에 그만큼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를 안심시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천사를 너의 앞에 보내셔서, 거기에서 내 아들의 아내 될 사람을 데려올 수 있도록 도와 주실 것이다. 그 여인이 너를 따라오려고 하지 않으면, 너는 나에게 한 이 맹세에서 풀려난다. (7-8절)
아브라함의 말에 안심한 종은 낙타 열마리로 캐러반을 꾸립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줍니다. 가나안에서 하란까지 차로 달리면 하루에 주파할 수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두 주일 이상의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 먼 거리를 걸어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성 바깥에 있는 우물가에서 짐을 풉니다. 저녁이 되어 여인들이 물을 길러 올 즈음이었습니다. 그 때, 종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오늘 일이 잘 되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십시오. (12절)
종은 주인인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배운 것처럼 그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기도로써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나안을 떠나 먼 길을 오는 동안에도 기도했겠지만, 이제 막 본격적인 일을 시작하려는 마당이었기에 더욱 절실하게 기도했습니다.
종은 기도 중에 이삭의 아내로 정해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있도록 사인을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이제 저녁이 되었으니 여인들이 물을 길러 우물로 모여들 터인데, 물을 떠 가는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청했을 때 자신에게 물을 마시게 해 줄 뿐 아니라 낙타들에게도 물을 먹이는 여인이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사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끝나기 무섭게 한 여인이 다가왔고, 종은 그에게 물을 마시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놀랍게도 여인은 종에게 물을 줄 뿐 아니라 낙타들에게도 물을 길어 마시게 해 줍니다. 종이 기대한 그대로 된 것입니다. 종은 그것을 하나님의 사인으로 받아들이고 여인에게 선물을 주고는 그의 집으로 갑니다. 종은 가족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자초지종을 말하여 허락을 받아냅니다. 종은 다음 날로 리브가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어머니를 잃고 수심에 차 있던 이삭은 마침내 아내를 얻고 위로를 얻습니다.
렉셔너리를 따라 읽은 창세기 24장에는 '이삭의 아내 찾기 미션'이 완성될 때까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단편 동화를 읽는 것도 같고, 아름다운 단편 영화를 보는 것도 같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처음으로 읽은 것이 중학교 3학년 때입니다. 그 때, 이 낭만적인 이야기를 읽으며 제 스스로 이삭이 되어 감미로운 상상을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언젠가 나에게도 리브가같은 여인이 나타나 주기를 소망했었습니다. 리브가는 제가 처음 마음에 품었던 여인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런 달콤한 상상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민자에게 며느리감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리브가 그리고 한 사람의 종이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인을 읽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세 사람 모두 서두르지 않고, 허둥대지 않고, 덜렁대지 않고, 주제 넘지 않고, 차분히, 조용히, 겸손히 그리고 진실하게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여 사소한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인을 읽어내고 그것을 따라 결정하고 선택하고 순종합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감미롭고 아름다운지요! 그 거룩한 습관에 진정한 행복의 열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거룩한 습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종을 먼 길로 보내면서 "주님께서 천사를 너의 앞에 보내셔서, 거기에서 내 아들의 아내 될 사람을 데려올 수 있도록 도와 주실 것이다"(7절)라고 말해 줍니다. 천사가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사인을 주시어 그의 길을 인도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향을 떠난 이후, 아브라함은 끊임 없이 크고 작은 사인들을 보아왔고 그 사인을 따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해 왔습니다. 종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맹신도 광신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믿음에는 여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종을 인도하여 좋은 며느리감을 찾아 올 것을 믿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종에게 "그 여인이 너를 따라오려고 하지 않으면, 너는 나에게 한 이 맹세에서 풀려난다"(8절)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바라는 일은 있지만 그분이 다른 것을 주셔도 기쁘게 받겠다는, 하나님의 선의에 대한 견고한 믿음이 그에게서 보입니다.
리브가도 그렇습니다. 낯선 종이 찾아와 하는 말과 행동을 유심히 보고는 하나님의 사인을 읽습니다.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한 사람에게 시집 가기 위해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을, 그것도 남자를 따라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리브가도 부인하지 못할 하나님의 사인을 읽고 그 손길에 자신을 맡기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의 사인을 읽고 따라가는 일에 있어서 가장 돋보이는 사람은 종입니다. 2절에 보면 그를 '늙은 종'이라고 부릅니다. '늙은'이라는 우리 번역은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영어 번역본들은 주로 NIV처럼 "the senior servant"라고 번역했는데, 그것이 원래의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경험이 많고 세상사를 보는 눈이 성숙한 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 전통에서는 '원로'라고 부릅니다.
그가 성숙한 사람이라는 증거는 여러 가지 면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주인의 삶을 지켜 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주의깊게 지켜 보면서 하나님이 분명히 주인과 함께 하신다고 믿게 되었고 그래서 자신도 주인의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아마도 그는 아브라함과 함께 지내면서 하나님의 사인을 읽는 법에 대해 배웠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중대한 과제를 받았을 때, 주인에게서 배운대로 하나님의 사인을 분별해 가며 그분의 손길을 따르기 위해 힘썼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리브가를 허락해 주셨음을 확인한 종은 하룻 밤을 지내고 지체없이 주인에게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습니다. 중동 지역에서 행하는 캐러반 여행은 피곤하기 짝이 없는 여행입니다. 종은 리브가의 집에서 며칠 푹 쉴 필요도 있었고 그럴 자격도 있었습니다. 리브가의 집 사람들도 그렇게 권했습니다. 그것이 그 종에게도 필요했고 영영 이별할지도 모를 리브가의 가족에게도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 종은 하룻 밤의 휴식 후에 돌아가기를 고집했고, 리브가도 그의 말을 따르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는 신중하지만 또한 민첩한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종이 본격적인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 드린 기도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겠습니다. 종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지정하신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도록 특정한 사인을 보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물을 길어 오는 여인 중에 물을 달라 했을 때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먹이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인을 받아 들이겠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기도가 끝나기 무섭게 리브가가 나타났고 종이 제안한 대로 리브가가 행동합니다.
이 대목을 읽고는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이 좋은 기도라고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실제로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기 위해 자기 멋대로 사인을 만들어 놓고 그대로 응답해 달라고 청합니다. 가령, 아이가 진학할 학교를 선택할 때, "전액 장학금을 제시하는 학교가 있으면 하나님이 그 학교에 가라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혹은 직장 인터뷰를 위해 공항으로 가면서 "비행기 시간을 놓치면 하나님이 막는 것으로 알겠습니다"라는 식입니다. 어떤 사람은 맞선을 보면서 "그 여인이 붉은 색 계통의 옷을 입고 나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인 줄로 알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보고는, 하나님이 그런 기도에 대해 응답하신다는 성서적 근거를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이런 식의 기도는 아주 예외적인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보더라도 몇 번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이 사인을 정해놓고 그대로 응답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불순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자주 혹은 가끔이라도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면 빨리 그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도들은 그럴만한 특수한 사정이 있습니다.
둘째, 종이 여기서 제시한 사인은 즉흥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깊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 나온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실만한 것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은 긴 여행길을 걸어 오는 동안 어떤 여인이 이삭에게 가장 어울릴까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기도로써 어떤 조건을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지를 하나님께 여쭈었을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며느리감을 골라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 클루도 없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합니까? 이삭의 아내 자리를 두고 미인 대회를 열어야 합니까?
종은 오래도록 숙고하고 기도한 끝에 답을 얻었을 것입니다. 주인의 집안 전통을 이어가려면 미모나 두뇌나 재력보다 성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성품 좋은 여인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렇게 고민할 때 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우물로 가자. 여성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 그곳이 아니던가? 그곳에 낙타들을 묶어 놓고 물을 길어 지나가는 여인에게 마실 물 좀 달라고 청하자. 그랬을 때 나에게만이 아니라 낙타들에게까지 물을 준다면, 그 여인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친절하고 희생할 줄 아는 좋은 성품의 사람일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짓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그 생각도 하나님이 주셨을 것이니, 그렇게 응답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만일 그 종이 생각이 짧은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자기의 기준에 따라 조건을 몇 가지로 정하고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아 다니지 않았겠습니까? 키는 170 센치 이상이 될 것, 몸매는 S 라인일 것, 얼굴은 V라인일 것, 최고의 교육을 받았을 것, 그리고 집안은 부자거나 권력자일 것 등등. 종은 그 조건에 맞는 여자를 찾기 위해 하란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혹은 최고 권력자의 집부터 찾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사람을 준비하여 그의 눈 앞에 들이밀어도 그는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친 낙타에게 흡족하도록 물을 먹이는 것은 여성으로서 하기에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열 마리나 되었으니, 리브가는 허리가 끊어지도록 물을 긷고 또 길었을 것입니다. 리브가는 좋은 성품도 가졌지만 힘도 센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 대목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노인은, 이번 여행길에서 주님께서 모든 일을 과연 잘 되게 하여 주시는 것인지를 알려고, 그 소녀를 말없이 지켜 보고 있었다. (21절)
이 표현에서 종의 사려 깊은 태도를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흔히 볼 수 있는 '기도꾼'들처럼 경솔하고 성급하게 "하나님이 응답하셨다"고 오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인을 분명히 보았다고 믿었지만 신중하게 확인 과정을 거쳤습니다. "말없이 지켜 보고 있었다"라는 표현에 종의 침착성과 신중함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창세기 24장을 묵상하면서 저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우리의 영적 생활에 대해 매우 귀중한 진리를 담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영적 생활의 원리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말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신다" 혹은 "하나님은 인간 역사를 다스리신다"고 인정하는 것도 필요합니다만,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나'의 삶 속에서 '매일' '실제로' 다스리신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머리로 인정하지만, 하나님을 경험해 가면서 점점 마음의 고백으로 발전합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진실로 그렇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말은 하나님의 사인을 읽는 것입니다. 기도로써 하나님을 사귀고 그분의 뜻을 구하며 살다 보면 하나님의 사인이 보입니다. 때로는 아주 명료하게, 때로는 알듯 말듯,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사건으로, 또 때로는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사인을 주시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향을 알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종처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없이 지켜 보면 어떤 것이 하나님의 사인인지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사인을 잘 못 읽기도 하고, 사인을 놓치기도 하고, 오인하기도 합니다. 그런 시행착오를 거쳐 믿음이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사인을 읽는 눈이 점점 밝아집니다. 셋째,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말은 하나님의 사인을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인을 통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향을 알았다면 순종해야 합니다. 야구 경기의 작전 중에 '희생 플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1루나 2루에 나가 있는 선수를 다음 루상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타자로 하여금 무조건 치게 만드는 작전입니다. 만일 감독이 배터리에 들어선 타자에게 희생 플라이를 치라고 사인을 보냈는데, 타자가 죽고 싶지 않아서 배트를 휘두르지 않았다면 그는 팀 전체를 패배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좋은 선수는 사인을 잘 읽을 뿐 아니라 사인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잠히 머물러 기도하고 말없이 지켜 보아 하나님의 사인인 것이 확인되면 민첩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매일, 실제로 여러분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사인을 읽을 눈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인이다 싶을 때 민첩하게 순종하십니까? 오늘의 이야기는 이렇게 살아갈 때 각자에게 가장 복된 일이 일어나고 또한 모두에게 행복한 세상이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부디, 이 증언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사는 삶은 우리 자신의 계획과 능력과 욕망을 따라 사는 것보다 더 불안해 보이고 가망 없어 보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망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배려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존중해야 합니다. 정신없이 허둥대지 않고 차분히 그리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제 뜻대로 살던 사람에게는 적잖이 불편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옥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
이제 휴가철이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가정들이 방학을 맞아 여행을 계획합니다. 이 계절에 놀고 쓰고 돌아다닐 계획만 세우지 말고 잠시 멈추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도 계획해 보시기 바랍니다. 뛰어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 보십시다. 무엇을 위해 달려 왔는지를 돌아 보십시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따라 왔는지를 생각해 보십시다. 과연 우리가 잡으려고 하는 그것이 우리의 인생보다 더 가치가 있는지를 물어 보십시다.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 과연 믿을만한 것인지 물어 보십시다. 나 혼자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 보십시다.
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분의 다스림을 인정하고 그분의 사인을 읽어가며 민첩하게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 오늘 본문에 나오는 종처럼 그렇게 우직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사는 것, 그것이 나를 구원하는 길이요 세상을 구원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그렇게 매일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주님, 주님의 다스림을 피하여 저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저희를 붙드셔서 주님의 다스림을 인정하게 하시고
주님께서 주시는 사인을 읽게 하시며 민첩하게 순종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희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선택받는 자의 합당한 삶
김철현목사 / 창세기 24:10∼27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의 감정 중에 좌절감이 있습니다. 뜻한 바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자신 감을 잃은 마음인데 그 감정은 참으로 큽니다. 그런데 그 원인은 크게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좌절감과 내부적인 요인에 의한 좌절감을 들 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요인이 있어서 심하게 좌절하는 것과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문제로 인해 생겨나는 좌절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외부요인적인 좌절감으로는 경제적 손실로부터 오는 좌절감이 있습니다. 가령 집에 화재가 나서 재산을 다 태웠다든가 승승장구하던 사업이 실패했습니다. 별 탈 없이 잘 다니던 직장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로인해 찾아오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래서 좌절하고 이 좌절이 지나쳐서 죽음에 이르게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내부요인적인 좌절감으로는 관계적 손실로부터 오는 좌절감이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 때만큼 심한 좌절감을 느끼는 때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관계의 단절입니다. 또한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때 사람은 깊은 좌절감에 빠집니다. 이것 또한 관계의 손실입니다. 그런가 하면 관심이 지나쳐서 집착이 될 때 사람이 싫어지고 미워지는데서 오는 좌절감 또한 문제입니다. 소위 스토커라고 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 억지로 됩니까? 다른 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좋아지는 경우가 있다고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억지로 하겠다고 대들면 피차가 상처를 받게 되고 이로써 오는 좌절감도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관심은 관심으로 끝나야지 스토커수준까지 가면 안 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인간은 관계적 동물입니다. 그래서 관계에 의해서 좌절도 하고, 관계에 따라서 소망도 가집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잘 유지해야 되는 겁니다. 언제나 서로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관계, 서로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가 될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관계 중에 누군가에게 내 존재를 인정받는 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더군다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내가 지명 받는 일은 더욱 기분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선택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선택이 의미하는 정말 소중한 한 가지는 이 선택의 뒤에는 반드시 따르는 혜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수많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삽니다만 서로 내 여자로, 내 남자로 선택하고 지명당하여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행복이라는 혜택을 누림과 동시에 함께 미래를 바라보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이 선택이라는 말이 얼마나 귀한 말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고, 지금 행복을 누리고, 확실히 보장 된 미래가 있어서 그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사실의 의미를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합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선택을 가볍게 여기거나, 계획 없는 중에 일어난 우연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선택 받는 자는 반드시 그럴만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는 줄을 알아야합니다.
미국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너무나 몸이 약하여 곧 죽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17세 때 그리고 22세 때 등 모두 세 번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뻔했습니다. 19세 때 천연두에, 20세 때 늑막염에 걸렸습니다. 35세 때에는 급성 이질에 걸려 죽을 고비를 또 넘겼습니다. 43세 때에 치아가 거의 못 쓰게 되어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주시고 항상 같이 하여 주시기에 사명이 있다.” 고 늘 자신을 믿어 주었습니다. 43세에 미국 혁명군의 총 사령관이 되어 독립군을 지휘하여 승리함으로써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습니다. 12년 후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죠지 워싱톤] 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해 주셨다는 확신이 믿음을 지키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도 바울] 은 자신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이방 선교사로 택하셨다는 선택의 역사를 깨닫는 순간부터 놀라운 사역자로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처럼 선택받은 삶은 자기를 바꾸어 놓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리브가] 라는 선택받은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하란 땅에서 태어나서 평범하게 자랐고, 평범한 삶을 생각하고 살아가던 처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녀의 삶이 완전히 바뀌고 맙니다. 그 일은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역사적인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 [아브라함] 의 가계를 잇는 족보에 선택된 것입니다. 역사의 변두리에서 중앙으로 삶의 무대가 옮겨지고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입니다.
선택 받는 주인공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혹은 무슨 일에 아니 하나님께 선택 받는 주인공이 된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선택을 받는 데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선택 받는 삶이란 과연 어떤 삶일까요? 오늘 아브라함의 가문에 중요한 인물로 선택 받게 하신 하나님은 리브가의 됨됨이를 우리도 유심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들이삭의 결혼문제였습니다. 결혼문제라는 게 그리 쉽지가 않은 것이거든요. 고민 끝에 아브라함은 자기의 집의 모든 소유를 맡아 관리하는 종 [엘리에셀] 을 부릅니다. 그리고는 자기고향으로 보내면서 며느리 감을 구해오라고 명령합니다. 이제 고민은 [아브라함] 에게서 [엘리에셀] 에게로 떠넘겨진 것이지요. 도대체 어떤 여자를 젊은 주인의 아내로 선택해야합니까? 그것도 자기의 고향이 아니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주인의 고향으로 가라니 막막할 따름입니다. 동네에 가면 처녀야 있겠지만 그 됨됨이를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누구를 믿고 골라야하느냐 말입니다. 고민하며 나홀의 성에 도착하니 저녁이 되었고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시간이었습니다. 엘리에셀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모종의 약조를 합니다. 그 내용이 12-14절까지입니다. 우물에 물을 길으러 나온 처녀들에게 시험문제를 내겠다는 것입니다. “물동이의 물을 좀 달라!” 는 것이 문제이고 그 문제에 엘리에셀에게만 물을 주는 사람은 불합격이고,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처녀가 있다면 합격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의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브가] 가 물을 길으러 나옵니다. 그리고 대답합니다. “내 주여, 마시소서.” 그리고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19절에 뭐라고 합니까?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서도 물을 길어 그것들로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띵똥땡 합격입니다. 하루 종일 일한 끝인 저녁시간에 지치고 짜증이 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한마디 불평 없이 엘리에셀 뿐만 아니라 낙타에게까지 물을 길어다가 먹이는 됨됨이가 보통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낙타 한 마리가 하루 종일 사막을 걸어 온 후 마시는 물의 양이 자그마치 한 드럼통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엘리에셀이 끌고 온 낙타가 모두 몇 마리입니까? 열 마리입니다. 20절을 보면 붓고 또 길어다가 붓고 하는 리브가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거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베푸는 것에 인색하지 않은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택하시는 하나님의 진리를 보게 됩니다.
일을 맡겨보면 그 일을 처리하는 유형이 다릅니다. 먼저는 시킨 일도 다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시킨 일만 하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한 마디만 하면 알아서 시키지 않은 부분까지 말끔하게 처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리브가] 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엘리에셀을 처음 만나는 순간 낙타에 짐이 실려 있고, 저녁에 도착한 것을 보니 먼 거리를 여행했다는 것을 파악했고, 그렇다면 사람뿐만 아니라 낙타도 지쳐있을 것까지 이해했습니다.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얼마나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 됨됨이가 리브가가 선택받는 중요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저 혼자만의 좀 짓궂은 상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성경에는 리브가를 아리땁다고 표현합니다만 그 아리땁다는 표현이 아마도 리브가의 외모가 건강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늘날 미의 기준은 좀 관능적이고 섹시한 것을 기준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34-24-36의 사이즈가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물동이를 들고 1등으로 뛸 수 있는 여자, 낙타 열 마리에 물을 줄 수 있는 여자, 그렇게 건강한 여자가 미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리브가] 는 그만큼 육체적으로 건강한 여인이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진 정신이 건강한 여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리브가로 하나님의 신앙의 가문인 아브라함의 족보에 선택되는 조건이 되었다는 사실이라면 오늘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의 사람 됨됨이,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나의 정신적인 건강상태는 어떠한지를....
사랑하는 여러분!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네 개의 C로 결정된다고 합니다. 캐럿(carat), 컷(cut), 컬러(color), 클래러티(clarity)입니다. 미국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것도 같은 순서입니다. 캐럿은 크기니까 사람의 소유의 크기로, 컷은 모양이니까 겉모습의 생김이나 옷, 자동차 등으로, 컬러는 색깔이니까 피부의 색깔로, 클래러티는 순결로 곧 도덕적인 행실로 평가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평가하는 데는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오직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무리 손길입니다. 그것은 다섯 번째 C인 그리스도(Christ)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용서 받고 날마다 새 사람으로 선택되는 길만이 나의 인생을 걸작품으로 남기는 일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로 살아가십니까?
아브라함과 그 종의 믿음
창 24장 10~15절 / 지용수목사
한 사람이 길을 가다 교회에서 들려오는 오르간 연주 소리에 끌려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 노인이 오르간 앞에서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어르신, 제가 한 번 연주해 볼까요?”
“아니,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이 귀한 오르간을 어떻게 맡깁니까?”
“그러지 말고 제게 연주할 기회를 한 번 주세요.”
“안 됩니다.”
“아,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좀 연주할 수 있게 해주세요.”
노인은 아주 싫은 인상을 보이면서 시큰둥하게 “해보시오.”라며 오르간을 내주었습니다. 나그네가 오르간 앞에 앉더니 연주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 연주가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하고 위대한지 온 교회 안이 감동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 음악은 평생 처음 듣는 노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저는 멘델스존입니다.”
“대음악가를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당대 최고의 음악가 멘델스존 그가 찬송가 126장도 지었습니다.
「천사 찬송하기를 거룩하신 구주께
영광 돌려보내세 구주 오늘 나셨네」
똑같은 오르간도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그 소리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악기와 같습니다. 우리 모두 오르간과 같습니다. 누가 나를 연주하느냐에 따라 삶의 칼라가, 모습이, 스타일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몸을 자기 본능에 맡기면 짐승같이 됩니다. 그러나 어떤 도덕규범, 혹은 삶의 원칙이나 철학을 정해 놓고 그에 따라 살면 신사의 삶, 반듯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허함을 느끼게 되며 세상 떠날 때는 비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주하셔야 우리의 삶에 축복이 넘쳐 아름답고 위대하고 장엄하고 행복이 넘치게 되고 죽음의 요단강도 행복하게 건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맡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 시간에도 여러분의 머리로 말씀을 받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 인격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주하시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실 줄 믿습니다.
어느 성탄절 전날, 청년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종교학과의 한 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와 부처의 가장 큰 차이가 뭘까?”
그 물음에 의상학과의 한 여학생이 “뭐니 뭐니 해도 헤어스타일이 가장 큰 차이겠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외형적인 차이일 뿐 실제의 차이는 아닙니다. 예수님과 부처의 차이는 생명과 사망,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을 섬기지 않는, 비 그리스도인이 섬기는 모든 대상은 우상입니다.
시편 115편 4절에서 9절에 말씀하십니다.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이사야 44장 9절에도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115편 10절에서 15절에 말씀하십니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희 곧 너희와 또 너희 자손을 더욱 번창케 하시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할렐루야!
시편 90편 2절에는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이 하나님께서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 가정을 세워 주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타락한 천사, 악한 마귀는 우리의 생명을 도적질하고, 우리의 명예와 기쁨과 행복과 가정을 파괴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우상의 차이를 아주 드라마틱하게 잘 보여주는 것이 갈멜산 사건입니다. 몇 년 전 우리 장로님들이 갈멜산 정상에 올라갔다 오셨는데 여러분들 중에서도 다녀오신 분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 정상에 몇 만, 몇 십만 명이 모일 수 있는 평지가 있는데 거기에 엘리야가 칼을 들고 있는 동상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갈멜산에서 우상을 섬기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 엘리야 한 사람이 450대 1로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400명의 아세라 선지자들이 보는 앞에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대결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제단을 쌓고 송아지를 잡아서 제물로 올린 다음 바알 선지자들과 엘리야가 기도하는데, 그때 하늘에서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신인 것입니다.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단을 쌓고 송아지를 얹은 다음 아침부터 정오까지 “바알이여, 바알이여! 불로 응답하소서. 불로 응답하소서.” 하고 기도했지만 아무런 징조가 없었습니다. 다급해진 그들이 제단을 빙글빙글 돌면서, 껑충껑충 뛰면서 미친 듯이 기도했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니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합니다.
“너희들 신이 혹 잠이 들었는지, 묵상하고 있는지, 산책하고 있는지 모르니 좀 더 크게 불러라.”
그들이 정말 큰 소리로 불러도 응답이 없으니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기까지 자기들의 몸을 해치면서 부르짖습니다. 그래도 응답이 없고, 해가 지는 시간까지 응답이 없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이제는 나의 차례요.” 하고는 돌로 제단을 쌓고 거기에 나무를 얹은 다음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습니다. 그리고 큰 물통 넷에 물을 채워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붓게 합니다.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까지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니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과 내가 하나님의 종이 된 것과 내가 지금 하나님 말씀에 따라 이렇게 하는 것을 알게 하소서. 여호와여! 응답하소서. 불로 응답하소서. 정말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과 하나님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키시는 분이심을 이 백성들로 믿게 하소서. 하나님! 응답하소서.”
그때 하늘에서 신비로운 성령의 불길이 떨어져 그 제물을 태우고, 나무를 태우고, 돌도 태우고, 물도 다 핥아버립니다.
그것을 보는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합니다. 그들의 믿음이 산같이 든든히 서게 된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뜨거운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지금도 성령의 불이 임해야 믿음이 살아나게 됩니다.
우리 양곡교회에 오시는 분마다 감동을 받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어서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성령을 내려 주시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교회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어느 기차역 대합실에서 경험한 일입니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새벽 1시 27분에 서울로 출발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 오토바이를 장로님 댁에 맡겨 놓고 12시 10분 전쯤에 대합실로 들어갔습니다. 통행금지가 있을 때라 12시 이후에 다니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합실에서 책을 읽다가 너무 추워서 주변을 살펴보니 난로가 세 개 있었습니다. 두 난로 옆에는 한 사람도 없고 매점 앞에 있는 한 난로에만 이삼십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왜 저 큰 두 난로 주위에는 사람들이 없고 저 난로에만 모여 있나?’
그래서 일부러 가 보았더니 두 난로는 불 꺼진, 싸늘한 난로였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 난로에만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으니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때 제가 크게 깨달았습니다.
‘아하! 교회를 아무리 아름답고 크게 지어도 성령의 불이 없으면 사람들이 모이지 않겠구나. 비록 교회가 크지 않고 좋지 않아도 성령의 불이 타오르면 사람들이 모이겠구나.’ 할렐루야! 그 때부터 ‘주여, 우리 교회가 성령의 불이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불을 내려 주시기 원합니다. 갈멜산의 성령의 불,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의 불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이 불같이 타오르고, 우리의 믿음이 반석같이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뿐 아니라 한국 모든 교회에 성령의 불을 내려 주시기 원합니다.
오늘도 교회마다 예배를 드리는데, 이 시간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을 한국 교회에 내려 주시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불길이 타오르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한국 교회가 살아날 줄 믿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이나 일본이나 중국이나 성령의 불이 임하면 교회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이제는 사람의 방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오로지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만 믿고 따릅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지혜로 살지 않고 아기처럼, 바보처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부 감을 구하러 자기의 신실한 종 엘리에셀을 보내면서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자기나 자기 아들이 가지 않아도, 신부 될 아가씨가 신랑을 보지 않고도 마음을 정하여 시집오게 될 줄을 믿었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시어 배필을 정해 주실 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신부 될 아가씨의 가족들이 모두 다 찬성해서 그 신부를 보낼 줄 것도 믿었기 때문에 약대 열 필에 예물을 싣고 가게 한 것입니다.
제가 신촌에서 살 때 함을 멘 신랑 친구들이 “함 사세요! 함.” 하며 신부 집을 아주 힘들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신랑 친구들이 쉽게 함(예물)을 내놓지 않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귀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귀한 것을 신붓감에게 다 주기 위해 열 마리의 약대에 가득 실어 보냅니다.
더구나 헤브론에서 메소포타미아 나홀의 성까지는 850km나 됩니다. 2000리가 넘는 그 길을 가다가 산적이나 강도, 어떤 군인의 습격을 받아 그 예물을 다 빼앗길 수 있지만 아브라함은 그 오가는 길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대로 엘리에셀이 무사히 갔고, 믿은 대로 하나님께서 이삭의 배필을 정해 주셨고, 믿은 대로 그 가족들이 찬성했고, 믿은 대로 신붓감이 예물을 받고, 믿은 대로 신붓감 리브가가 무사히 와서 아들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대 성전 설계도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설계도에서 2009년 6월이 되면 실상이 되어 나타날 대 성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소망하는 것인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얹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사실입니다. 사실 아닌 것을 믿는 것이 미신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사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믿는 것은 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3, 24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할렐루야!
마태복음 21장 22, 23절에도 마찬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놀랍습니다. 믿고 행하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실한 종 엘리에셀도 아브라함과 똑같았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 먼 길을 온 엘리에셀이 나홀의 성문 앞에 있는 우물 옆에 약대 열 마리를 쉬게 한 다음, 세상에! 아기처럼 기도를 합니다.
“오, 하나님! 내 주인의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이 성 사람들의 딸들이 물 길러 나올 것인데, 제가 어떤 소녀에게 ‘나에게 물 좀 마시게 하시오.’라고 하겠습니다. 그때 ‘예, 그러세요.’ 한 다음 ‘당신의 약대들에게도 먹이겠나이다.’ 하는 아가씨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내 도련님의 배필로 정한 아가씨로 믿겠습니다. 순적케 하소서.”
이 기도는 정상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요렇게 요렇게 해주세요.” 하는 기도는 위험합니다. 자기가 그림을 그려놓고 하나님께서 따라오게 만드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는 대로 기도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은 늙은 종인 엘리에셀이 아기처럼 순수하게 “하나님, 그렇게 해주세요. 믿습니다.” 하고 눈을 뜨니 심히 아리따운 아가씨가 물동이를 메고 왔습니다. 애굽 여자들과 아프리카 여자들, 한국 여자들은 물건을 머리에 이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유대의 여자들은 물건을 어깨에 멥니다. 한 아가씨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오는데 얼마나 아름답고 기품이 있는지, 엘리에셀이 보는 순간 ‘아! 저 아가씨가 우리 도련님의 색시가 되겠구나.’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가씨, 나에게 물을 좀 마시게 하세요.”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 아가씨가 “마시소서. 어르신네 약대들에게도 물을 먹이겠나이다.”라고 합니다.
약대가 물을 얼마나 먹는지 아십니까? 약대 한 마리가 한꺼번에 한 말을 먹습니다. 그래서 약대는 한 번 물을 먹으면 보름 간 물을 먹지 않아도 삽니다. 그렇게 물을 많이 먹는 약대 열 마리에게 물을 먹이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엘리에셀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리브가를 만나 자기 도련님의 아내감으로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의 믿음대로 된 줄 믿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살아라. 엘리에셀처럼 믿음으로 살아라.”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 따라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할렐루야!
아브라함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잘해 주시리라. 천사를 보내어 잘해 주시리라.’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따라 합시다.
“내 인생을 하나님께서 잘해 주시리라. 나의 미래는 잘 되리라.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하시리라.”
이것이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미래가 어떻게 될까 불안하고 초초해서 걱정 속에 살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잘 되리라.’라는 확신이 있으니 담대하게 삽니다.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앞으로도 인도하시리라. 그 말씀대로 되리라.”라는 확신에 거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 35절에 예수께서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천지는 실패해도 하나님 말씀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확실한 이 믿음 위에 서야 합니다.
엘리에셀은 이 믿음을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 곁에서 배웠습니다. 아침마다 아브라함에게 지시받고, 저녁마다 아브라함에게 보고하고, 아브라함의 가정사를 다 주관하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하나님!” 하는 것을 보고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나 많이 배웁니까? 아브라함에게 배우고, 엘리에셀에게 배우고, 다윗에게 배우고, 다니엘에게 배웁니다. 그러니 우리는 배운 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어느 대학에 물리학 강의를 하러 가면서 너무 피곤하여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수십 년간 아인슈타인을 섬긴 운전기사가 말했습니다.
“박사님, 그렇게 피곤하셔서 오늘 강의하시겠어요?”
“글쎄, 나도 걱정이네.”
“오늘은 쉬세요. 제가 대신할 테니까요.”
“자네가 물리학 강의를 한다고?”
“똑같은 강의를 수십 번 들었는데 못하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옷이나 바꿔 입읍시다.”
“정말인가?”
“걱정 마시고 옷이나 바꿔 입으세요.”
아인슈타인 박사와 그 운전기사의 얼굴이 비슷하답니다. 그래서 옷을 바꿔 입고 아인슈타인 박사가 운전기사의 자리에 앉고 운전기사가 박사처럼 앞에 나가 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운전기사의 강의가 얼마나 명 강의인지 학생들과 교수들이 감탄하며 우레 같은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놀란 사람은 아인슈타인 박사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의 기침 소리도 빠뜨리지 않고 운전기사가 그대로 하는데 탄복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한 교수가 질문을 했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아이쿠! 이것 탄로가 났구나. 이 망신을 어떡하나?’
그런데 운전기사의 배짱을 한 번 보십시오.
“아니, 교수님. 학생도 아닌 교수님께서 그 정도 수준의 질문밖에 못하십니까? 그 정도는 우리 운전기사도 답변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여보게! 올라와서 답변하게.”
그래서 그 문제를 잘 해결했다고 합니다.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운전기사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아인슈타인 박사 옆에서 몇 년 동안 똑같은 것을 들으니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엌 개 삼 년이면 라면을 끓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아브라함 옆에, 엘리에셀 옆에, 다윗 옆에 있습니다. 날마다 믿음의 사람들을 접하면서 아직도 그분들의 믿음을 흉내 내지 못하면 안 됩니다. 연극이라도 해야 합니다. 저는 자나 깨나 ‘디엘 무디는 어떻게 목회했을까? 웨슬리는 어떻게 설교 준비했을까? 스펄전은 어떻게 했을까?’ 하며 그분들의 흉내를 내면서 오늘까지 왔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흉내를 냅시다. 엘리에셀의 흉내를 냅시다.
말씀대로 믿는 것이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믿으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여인이 용하다는 의사는 수없이 찾아다녔지만 재산만 허비한 채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믿음이 불타오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도 내 병이 나으리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에워싸여 계십니다. 여인은 군중 속을 비집고 들어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그 순간 여인의 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시고 “네 믿음대로 되었다. 편안히 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한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합니다.
“주여, 제 부하를 불쌍히 여기소서. 중풍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가자. 내가 가서 치료해 주리라.”
“아닙니다. 주님께서 저희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도 남의 아래 있는 사람이고 제 아래에도 부하들이 있는데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주님께서 여기에서 말씀만 하셔도 제 부하가 나을 줄 믿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면서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내가 만나 보지 못했느니라. 가라. 네 믿음대로 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즉시 하인이 나았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말씀은 역사합니다.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파스칼이 말했습니다.
“어차피 믿음은 한 판 도박이다.”
도박할 때 꿈에도 소원이 풍 두 개가 들어오는 것, 장땡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귀한 예수님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을 잡고 도박 못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면 부모도 행복하지만 우리도 잘 되고 장수하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 하듯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면 회사도 잘되지만 나도 어느 사이에 회사에서 기둥이 되고 인정받는 사원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히지 않으면 아내도 행복하지만 어느 날 나도 아내에게 대접 받는 남편이 되어 있고, 내가 남편의 말에 순종하고 남편의 말이 맞지 않아도 복종하면 남편도 행복하고 의젓하지만 나도 벌써 왕비처럼 대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도 복을 주시고 장래에도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일은 찬양대원, 교사, 구역장, 차량 안내위원, 부엌 봉사위원과 같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고는 예수님을 믿다가 감옥에 가야 되고, 성전 건축해야 되고, 또 ‘이것 힘드네.’ 하는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도 잘하고 수고도 잘해야 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상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상이 있고, 하늘에서도 빛나는 저택과 면류관과 놀라운 다스림의 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일과 수고를 말씀 위에 서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불안한 일, 걱정해야 될 일, 스트레스 받을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고 스트레스 받는다고 일이 잘 됩니까?
한 학교 선생님이 위장병이 너무 심해 잠도 제대로 못잘 정도인데 병원에 가서 체크하니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신경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 것 같으니 편하게 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너무 신경을 쓰고, 한 아이 한 아이에게 너무 꼼꼼하게 신경을 쓰느라 한 번도 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겠지. 그래, 잘 되겠지.’ 하며 쉬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책상 위를 정리하면서 “이것은 휴지네. 이것은 낙서한 종이네.” 하며 버리다 보니 쓸 수 있는 종이는 몇 장뿐이었고, 책상이 단정해졌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깨달았습니다.
‘아하! 내가 쓸데없는 염려, 걱정, 근심을 이렇게 갖고 있었네. 책상 위의 쓰레기는 버리면서 내 마음의 쓰레기는 버리지 않았네.’
그래서 염려, 걱정, 근심을 툭툭 털어버렸더니 얼굴도 좋아지고 위장도 좋아져 새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심리학자들의 글에 의하면, 사람이 걱정하는 것들 중에서 40%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랍니다. 지금도 어떤 분은 ‘저 전구가 깨져 내 머리에 떨어지면 어떡하나?’라는 걱정을 하실지 모르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가 무너져서 죽으면 어떡하나?’라는 걱정을 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는데, 우리 교회는 지붕에 눈이 몇 미터 쌓여도 무너지지 않게 지어 놓았습니다.
따라 합시다.
“그런 일 없다.”
사람들이 끙끙 앓는 일들 중에서 40%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인데 그렇게 앓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걱정하는 것들 중에서 32%는 그 일이 생겨도 별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 그렇게 걱정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들 중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100가지 중 8가지뿐이랍니다. 그런데 그 8가지 중에서도 4가지는 사람이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일, 걱정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벼락이 떨어지는 것, 태풍이 부는 것, 지진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일은 우리가 걱정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들 중에서 자기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4%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 합시다.
“잘 되겠지. 대충 살자.”
이것이 중합니다.
우리의 마음만 긍정적으로 가져도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근대 이론과학의 선구자 뉴턴은 엄마 태에 있을 때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엄마가 재혼을 하여 할머니 품에서 외롭게 자랐습니다. 몹시 왜소하고 허약한 그는 어린 시절 늘 얻어맞았습니다. 학교 성적도 꼴찌에서 1, 2등이었습니다. 하루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뉴턴에게 잘못을 해서 뉴턴이 그 아이에게 “네가 잘못한 거야.”라고 하니 그 아이가 “공부도 못하는 게 말이야.”라며 뉴턴의 옆구리를 차서 뉴턴을 넘어뜨렸습니다. 뉴턴은 너무 분해서 그 아이와 붙어 싸웠는데 힘이 약하니 얻어맞기만 했습니다. 그날 밤에 뉴턴은 너무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형편없나? 나는 바보로 태어났나? 아니야, 최선을 다해보자. 이렇게 멸시를 받으면서는 살 수 없어.’
그는 비장한 각오로 그 때부터 열심히 운동하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성적도 죽죽 올라가고 건강해진 그가 마침내 세계적인 과학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생각만 바꿔도 미래가 달라진다. 마음만 바꿔도 운명이 달라진다.”
우리는 마음만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붙잡고 삽니다.
말씀은 그대로 됩니다. 말씀은 ‘몇 번 연습해 보고 되면 말씀대로 하지.’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 합시다.
“말씀은 연습이 필요 없다. 그대로 된다.”
어느 신학교에 너무 똑똑한 한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교수가 그 여학생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여자를 먼저 만들지 않으시고 남자를 먼저 만드셨을까?”
“그야 뭐라도 첫 작품은 서툴잖아요. 아담을 연습으로 만드신 후 이브를 만드셔서 이브가 예뻤잖아요. 아담은 이브를 보고 팔딱팔딱 뛰며 좋아했는데, 이브는 아무런 감동이 없었던 것이 그 증거잖아요.”
그럴 듯한 말 같지만,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연습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만 하셔도 그대로 됩니다. 확실히 믿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
오늘 새벽에도 저는 이 말씀을 읽다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이사야 43:1-3)
제 앞길에도 불 같은 길, 물 같은 시험의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우리는 담대해야 합니다.
‘아이고, 회사에서 해고당하면 어떡할까?’ 하며 고민하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인 우리는 ‘회사에서 내가 잘 되리라.’라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부자가 되는 책을 보면, 부자들은 사업을 벌여놓고 ‘이게 안 되면 어떡할까?’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답니다. 항상 ‘이 사업은 잘 된다. 돈을 너무 많이 벌어 감당을 못할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사업을 한답니다. 떼돈이 굴러 오는 것을 그리며 사업을 한답니다.
사업을 해도 미래를 밝게 보는 사람,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생각도 이렇게 중한데 우리는 막연하게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은 그대로 됩니다. 그러니 자신감 있게 말씀대로 나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즐거워해야 됩니다.
왜입니까?
말씀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밀알 씨에서 종달새 울음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밀알 하나를 심어 놓고 ‘지지배배 지지배배’ 하는 종달새 울음소리를 듣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지금 대 성전의 설계도를 보고 있지만, 성전이 다 된 것같이 즐거워해야 됩니다. 다 된 것같이 “야! 위대하구나. 굉장하구나.” 하고 즐거워해야 됩니다. 할렐루야!
우리 중에 부정적인 사람은 ‘교회를 짓다가 잘못되면 어떡하나?’라며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와! 다 된 거나 마찬가지네.” 하며 즐거워합니다. 할렐루야!
즐거워해야 됩니다.
천재를 이기는 자는 노력하는 자이고, 노력하는 자를 이기는 자는 즐겁게 일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천재는 어떤 일을 잘합니다. 그러나 천재라도 게으름을 부리면 노력하는 자를 당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노력만 하면 나중에 일에 권태가 오고 ‘아, 내가 일의 종이냐?’하게 됩니다. 그러나 즐겁게 일하는 자는 평생 일해도 즐겁습니다.
그래서 즐겁게 환자를 돌보는 의사가 성공하는 것입니다. 즐겁게 사업하는 사업가가 성공하는 것입니다. 즐겁게 직장 생활하는 직장인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즐겁게 목회하는 목사님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즐거워해야 됩니다.
왜입니까? 말씀대로 약속이 있어서 우리는 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따라 합시다.
“잘 되는 나, 잘 되는 내 가정, 잘 되는 내 교회, 잘 되는 내 나라.”
배짱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2절에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계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은 소화제 먹고 체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억울한 사람은 교회당 옆에 살면서 지옥 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억울한 사람은 내 집에 교인이 있었는데 지옥 간 사람입니다.
믿음의 길은 나만 가야 좋은 길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가도 복잡한 길이 아닙니다. 온 세계 만민 67억이 다 믿어도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니 내 주변의 사람들부터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길로 인도해야 됩니다.
참된 축복의 이유
창 24장 10~27절 / 이상호목사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그 종 엘리에셀을 메소보다미아로 보냈습니다. 약대 열 필에 많은 은금 보화를 싣고 며느리감을 구해 오라고 했습니다. 엘리에셀은 메소보다미아에 가서 우물가에 약대를 앉혀 놓고 "하나님 이 동네 처녀가 물을 길을 때에 '내가 물을 달라고 하면 당신도 물을 마시고 약대에게도 물을 마시우리이다' 하면 그 처녀가 하나님의 택한 이삭의 아내인 줄 알겠습니다"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리브가가 물동이를 메고 나왔습니다. 물을 긷는데 엘리에셀이 ‘물을 좀 주시오’라고 말을 건넸고 리브가는 ‘당신에게만 물을 드릴 뿐 아니라 약대에게도 물을 마시우리이다’라며 땀을 뻘뻘 흘리며 열 필의 약대에게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엘리에셀은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내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고 리브가의 집에 가서 약대에 싣고 온 은금 보화를 함께 나누고 리브가를 그 약대에 태워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있는 곳으로 왔다는 이야기가 본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거인들의 인생법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람들이 금메달감이지만 특히 모범이 되는 사람을 뽑아서 거인이라고 말을 하는데 그 중에 리브가가 들어 있습니다. 리브가가 생소한 인물은 아니지만 왜 리브가가 포함되었을까 잠시 의아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계속 대하다가 리브가가 영적인 거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제가 누렸던 은혜들을 함께 누리길 원합니다.
16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소녀가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에 내려가서 물을 그 물 항아리에 채워가지고 올라오는지라"
리브가의 첫 모습은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처녀입니다. 그리고 우물에 내려가서 물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가지고 올라오는 길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엘리에셀이었습니다. 먼저 '늙은 종'이라면 좋은 어감이 아니지만 성경의 용어라 그냥 씁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명령을 따라 메소보다미아 나홀의 성에 이릅니다. 아브라함이 있는 곳에서 이곳까지는 삼일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곳입니다. 엘리에셀은 약대 열 필을 가지고 이곳에 도착했기에 매우 피곤할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에셀은 물을 채워가지고 올라오는 리브가에게 마주 달려가 말을 합니다.
"청컨대 네 물 항아리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우라"
지금 늙은 종이라는 이름대로 나이는 좀 들었지만 리브가에게 달려와서 말을 할 정도라면 얼마든지 우물에 가서 물을 뜰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카이로에는 『요셉의 우물』이라는 곳이 옛날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우물 가에서 우물까지 가는데 폭 1. 8미터의 계단을 45미터 깊이까지 내려가야 되는 거리입니다. 요즘 아가씨라면 이렇게 말을 할 것입니다.
"할아버지 여기서 조금만 내려가면 우물이 있어요. 그 물을 떠서 드세요. 저도 고생해서 우물에 가서 물을 떠 가지고 간단 말이예요. 우물이 바로 저기예요"
그런데 리브가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18절에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가로되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 항아리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리브가는 먼저 말로 합니다. "주여 마시소서" 그리고 급하게 그 물 항아리를 손으로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물을 부어서 할아버지가 마실 수 있도록 하여 마시게 합니다. 이렇게 마시게 하는 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다른 것이 보입니다.
삼일 길 사막을 건너온 약대 열 마리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 약대 열 마리도 목이 말라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마시우기를 다하고 가로되 당신의 약대도 위하여 물을 길어 그것들로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그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행동을 합니다. 급히 물항아리에 든 물을 약대들의 물통에 쏟아 먼저 마시게 합니다. 그리고 우물로 다시 내려 달려갑니다. 그리고 모든 약대들을 위하여 물을 긷는 것입니다. 우물물을 길어서 약대를 위하여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약대 한 마리가 한번 마시는 물의 양이 보통 20리터라면 10마리의 약대이기에 200리터의 물을 떠야 합니다.
그 당시에 한번 뜨는 바가지의 용량이 5리터라면 40번의 물긷기를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보통 한번 물긷기를 할 때 드는 시간이 3분이라 할찌라도 120분, 2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또 항아리에 물을 넣어 가지고 가서 약대에게 주는 계속적인 수고를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에게 지혜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수고하였던 리브가에게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을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말하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리브가는 냉수 한 그릇이 뿐 아니라 낙타에게까지 필요한 냉수를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런 섬김을 통하여 보여 주었던 리브가의 삶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의 종은 나중에 자신의 신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온갖 금과 은 패물 의복을 자신만 받았을 뿐 아니라 온 가족에게도 선물을 받게 하였습니다. 관용을 베풀면 자신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까지 복을 누리게 됨을 말씀합니다.
또 이삭은 안온한 성품의 소유자이며 순종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이삭과 결혼을 하여 시아버지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축복들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또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에 동참하는 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축복은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는 축복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관용으로 채웠더니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전혀 상상치도 못하였던 방향으로 달라지게 하시고, 풍성한 상으로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뒤를 생각하지 않고 수고하였던 리브가의 삶 가운데 축복하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첫째, 관대한 마음
직장을 다니는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뿌리는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가급적 내게 주어진 것은 최소한만 하고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뽑아내야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런 마음이 신앙인들에게도 흘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해야 할 일 이상의 것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결과를 얻는 것이 경제의 원리이기에 이런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내가 요청받은 일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최선을 다해 살았던 생활이었습니다.
리브가는 물 항아리를 기울여 나그네에게 물을 마시게 하고 집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도 하지 않는 사회이기에 사람들은 칭찬할 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낙타에게까지 물을 주겠다고 말하기 전에, 분명 그녀는 그 일을 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지 속으로 계산을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브가는 낙타에게 물을 주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실천했습니다. 바로 그 행위가 우물가에 왔던 다른 처녀들과 차이점일 수 있습니다.
지금 한 걸음을 떼지 못하면 천리 길도 갈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못하지만 언젠가는 이런 좋고 위대한 일을 할꺼야."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이런 결심은 자신에게 위안은 되지만 나중에 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을 가지고 관용을 베풀지 못하는 사람이 멋 훗날 하루아침에 태도가 바뀌어서 베풀게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리브가는 자기가 부탁받은 것을 일단 먼저 실행하였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마실 물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친 후 낙타에게도 물을 주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머나먼 훗날에 하겠다고 마음을 먹을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처한 곳에서 즉시 남에게 베푸는 일을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화) 미국 어느 의과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가난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그가 보던 의학 교과서 몇 권을 들고 헌 책방으로 가지고 나갔습니다. 이곳저곳 다니며 팔려고 했지만 별로 값이 나가지 않아 팔지 못했습니다. 한 나절이 지나 교외 어느 조용한 농가를 찾아갔습니다. 그 집에는 한 부인이 가사 일을 하고 있다가 이 학생을 맞이했습니다. 학생은 부인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자기는 배가 매우 고프니 혹시 빵과 우유라도 있으면 달라고 했습니다.
부인은 처음에는 미더워 보이지 않았지만 안으로 들어가 잠시 후 빵과 우유를 마련해서 학생에게 주었습니다. 학생은 그것을 다 먹고, 자기는 돈이 없으니 대신 책으로 음식값을 치르겠다고 했습니다. 부인은 자기가 좋아서 한 것이기에 값을 치를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학생은 부인의 집 주소와 이름을 적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후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어느 의과대학 병원에서 중한 수술을 마친 부인이 퇴원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인과 그의 딸이 있는 병실에 한 장의 청구서가 배달되었습니다. 어머니와 딸이 청구서에 적힌 병원비용을 확인하기 위해 청구서를 들여다보았을 때, 거기에는 돈의 액수 대신 다음과 같은 간단한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빵과 우유 한잔으로 병원비용이 다 계산되었습니다."
딸이 그 사실을 확인해 보니 어머니를 수술한 담당의사가 몇 년 전 그의 집을 찾아 왔을 때 어머니가 그에게 빵과 우유를 준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소한 호의, 친절은 매우 아름답고 중요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둘째, 가정교육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 라는 시를 보면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수고하였던 주위의 것을 말합니다. 먼저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그렇게 울었다고 말합니다. 국화꽃은 가을에 피는데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또 그렇게 울었다고 말을 합니다. 4연에는 한 송이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밤사이에 그렇게 많은 비가 내렸고, 국화꽃이 피는 것을 기대하였던 서정주 시인은 밤에 잠도 들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 늙은 종이 누구의 딸이며 네 부친의 집에서 유숙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 때 리브가는 친절히 대답을 하였고,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오도록 합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리브가의 오라비 라반이 나옵니다. 29절 말씀입니다.
"리브가에게 오라비가 있어 이름은 라반이라. 그가 우물로 달려가 그 사람에게 이르니"
그 당시 종이라고 하면 노예와 같습니다. 특히 연세도 많은 늙은 종이기에 가볍게 취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리브가의 오라비인 라반은 늙은 종이 있는 우물가로 달려와서 만납니다. 반가운 사람들이 왔을 때 달려와서 맞이하는데 지금 라반의 모습은 반갑게 맞이합니다. 31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라반이 가로되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여 들어오소서 어찌 밖에 섰나이까 내가 방과 약대의 처소를 예비하였나이다"
지금 라반은 처음 만난 늙은 종에게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복을 받은 자라고 선포하며 들어오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늙은 종을 위하여 방을 준비하였고, 먼 여행으로 지쳐있는 약대를 위하여 처소도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집으로 들어갈 때 라반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32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람이 집으로 들어가매 라반이 약대의 짐을 부리고 짚과 보리를 약대에게 주고 그 사람의 발과 그 종자의 발 씻을 물을 주고"
늙은 종이 집으로 들어올 때 라반이 직접 약대의 짐을 부립니다. 그리고 먹을 것이 필요한 약대를 위해 짚과 보리를 주어 먹게 합니다. 또 발 씻을 물을 주는데 늙은 종과 함께 온 종에게도 발 씻을 물을 주어 씻게 합니다. 그 후에 풍성한 식탁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화를 시작하려고 할 때 라반과 함께 아버지 브두엘도 참여합니다. 브두엘은 아들 라반을 시켜 늙은 종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정성을 다해 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연세드신 분들의 말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브두엘과 아들 라반은 늙은 종의 말씀을 끝까지 듣습니다. 사실 성경에 기록되는 말씀은 다 적을 수 없기에 중요한 것을 기록합니다. 오늘 늙은 종의 말은 34절부터 49절까지 15절을 할애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따지면 더 길 수 있는데 많이 줄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말들을 라반과 아버지 브두엘은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오빠의 섬김의 모습을 보았던 리브가가 그것을 그대로 닮았기 때문에 그 축복이 그 가정에 넘치게 된 것입니다. 부모님의 하는 것을 보고 배웠던 리브가였기 때문에 믿음의 가정에 시집을 가게 되었고, 영적인 축복뿐 아니라 물질적인 축복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저는 국민일보에서 재미난 기사를 대한 적이 있었습니다. 재미교포가 하버드대학의 의과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면접만 하면 됩니다. 그 때 면접을 보는 사람이 헌혈증서가 하나도 없는 것을 알고 불합격 처리를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헌혈을 한번도 안 해본 사람이 의사로써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책임질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자녀들이 영어단어 하나라도 더 외워 좋은 대학을 가고 출세하고 돈을 잘 벌길 원하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잘 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나그네 대접하기를 힘썼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나그네 세명이 지나가고 있을 때 아브라함은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들입니다. 그리고 발을 씻게 하고, 나무 그늘 아래서 쉬게 하며, 떡과 짐승을 잡아서 먹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아브라함에 대해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히브리서 13: 1- 2절 말씀입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도 있었느니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최선을 다하여 섬겼을 때 나중에 그 사람들이 천사였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부지중 대접하였을 때 그 나그네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말씀합니다.
"네 아내 사래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 10)"
고 말씀을 하였고, 사라는 그 뒤 장막문에서 이 나그네가 하는 말을 듣고 장막 뒤에서 웃으면서 "내가 나이도 많고 경수도 끊어졌으며, 아브라함도 늙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으리요" 라고 말을 할 때 나그네가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사람에게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 14)"
나그네의 그 말대로 다음 년도에 사라는 아들을 낳게 되었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의 이름을 '이삭'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아들 이삭도 순종의 아들로, 아버지의 믿음의 결단을 그대로 따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순종의 자녀이었기에 아름다운 여인 리브가를 만나게 되었고, 아름다운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이삭과 리브가를 통해서 야곱과 에서가 태어났고, 또 야곱을 통해 12명의 아들이 태어났으며, 그 열 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족장이 되고, 그 아들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이루고 되고, 이스라엘로 인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얻는 축복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에게 세상을 풍성하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고 싶으면 먼저 남을 대접하길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자녀들은 배움을 통해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 더 놀라운 교육을 받게 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대한 순종
한 명이 믿음으로 바로 서는 것은 가정의 역할이 제일 중요합니다. 먼저 50- 51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그대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대로 그로 그대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리브가의 아버지 브두엘과 오라비 라반은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에리에셀을 말을 듣고 나서 하는 말입니다. 늙은 종의 말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고, 응답하셨는지 말씀을 할 때 여호와의 말씀이라면 순종하겠다고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딸을 그렇게 시집을 보내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엘리에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기도하는 자였고, 순종하는 자였습니다. 12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지금 이삭의 아내를 만나기 위해 가는 늙은 종 엘리에셀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순적히 만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4: 63절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약대들이 오더라"
지금 이삭의 모습은 들에 나가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를 위해서 들에 나가서 기도하는 이삭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이런 현숙한 여인을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리브가는 자신이 물을 먹였던 그 약대를 타고 신랑 이삭에게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가지 시련이 결국은 우리들을 신랑 예수님에게 인도하는 약대가 되는 것입니다.
시험과 환난이 축복을 싣고 오는 것이지 평안한 삶이 축복을 싣고 오는 것은 아닙니다. 신령한 축복도 실어 오고 물질적인 환경적인 축복도 싣고 와서 삶을 풍성하고 부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임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부활의 영광이 다가옵니다. 약대에 물을 먹이는 고난을 통해야 보화가 쏟아지고 환경이 축복을 받고 나중에는 시련을 통해서 얻은 믿음을 타고 우리는 천국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의 기도
창 24:12~15 / 최건호목사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일생동안 종노릇한 늙은 충직한 종 엘리에셀이 주인 아브라함을 위하여 기도한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엘리에셀의 기도는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기도하기 보다는 주인이 맡긴 귀중한 일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나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서로 기도하는 것을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엘리에셀의 중보기도를 살피면서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의 봉사와 사역을 훈련받는데 유익한 교훈과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추진하는데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아들 이삭의 신부를 택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이것은 독자 이삭의 삶의 미래와 행복을 결정하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는 아브라함의 소유나 제산을 맡기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이 출발하기 전에 환도뼈 밑에 엘리에셀의 손을 넣고 함께 하나님 앞에 서약과 맹세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에셀은 이 일을 맡았을 때 기도하면서 출발했습니다.
둘째, 작은 것 까지 세세히 계획하고 기도하며 출발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하다가 안되는 일을 기도하는 것이지 내 힘과 상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작고 보잘것없는 세세한 일까지 기도해야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은 큰일도 될 수 있고 작은 일도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큰 일이 우리에게 작은 일이 될 수도 있고 우리에게 큰 일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작은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일 같은 것들이 언젠가는 큰일을 망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일부터 큰일까지 평범한 일이나 사소한 일부터 중대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까지 엘리에셀과 같이 신중한 기도로 나를 위해서나 자녀를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셋째, 선택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기도했습니다. 엘리에셀은 나홀 성에 도착해서 처음 우물가에 나오고, 물을 대접하고, 약대에게 까지 물을 주는 처녀가 나타나면 그가 하나님이 보낸 이삭의 신부감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에 도착해서 기도하고 머리를 들자마자 그 기도에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기도한 대로의 대상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충하는 기도가 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마치 전쟁터에 가는 군인이 작전계획을 세우듯이 기도해야합니다.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확실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응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하는 모든 일에 있어 먼저 기도로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엘리에셀과 같이 군인이 작전계획을 세우듯이 작은 일에 까지 세세하게 구체적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럴 때 엘리에셀이 나홀 성에 도착해서 기도하고 머리를 들자마자 기도에 응답을 받은 것처럼 성도여러분이 드리는 모든 기도가 즉각적인 응답받기를 축원합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이야기
창 24장 12~16절 / 이정익목사
저는 오늘 행복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행복하고 즐거운 이야기라고 붙였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말씀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이 아브라함은 참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대목을 보면 아브라함이 얼마나 신앙중심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려고 힘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아브라함이 종을 통해서 복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이 장성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를 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며느리를 구하는데 두 가지 전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순수 혈통을 유지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방인의 피가 섞이면 복잡해집니다. 이방인의 문화, 생각, 습관, 전통이 섞이면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며느리를 선택하는데 순수혈통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신앙의 순결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이방신앙을 가진 며느리가 집안에 들어오면 이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두 가지를 이루기 위해서 며느리를 꼭 동족에게서 얻으려 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세상을 살면서 이 중심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의 풍습을 존중하는 것은 좋습니다. 질서도 존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딸을 주고 며느리를 얻고 해야 합니다. 그런 삶에 누구는 안 되고 누구는 되고 하는 식의 삶의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신앙의 순결을 유지하는 일에 유념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문화와 사상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우리의 신앙이 유지되고 발전해 가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동족이 살고 있는 하란 땅으로 종을 보내서 며느리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며느리 간택권을 종에게 전적으로 위임해서 고향 땅으로 보냈습니다. 이 종이 주인으로부터 중책을 위임받고 하란으로 떠납니다. 그런데 이 종의 모습을 보게 되면 참 그 모습에서 행복함, 신실함, 충직함을 보게 됩니다. 보시면 여러분도 오늘 제목처럼 행복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유념해서 볼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당부”
24:2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종을 보내면서 종으로 하여금 서약을 시킵니다. 그 서약이 아브라함의 허벅지 밑에 손을 넣고 약속하라는 것입니다. 남자의 허벅지는 생명을 잉태시키는 근원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남자의 허벅지를 권위와 주권을 상징하는 곳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중요한 약속으로 알고 실행하라는 뜻입니다. 거기다 손을 넣고 세 가지 조건을 약속하라고 했습니다. 너는 “이방여자를 데려오지 말라”(3). 두 번째는 “반드시 하란의 여자를 택하라”(4). 세 번째는 “이삭을 데리고 가지 말라”(6)는 조건입니다. 지금 이삭은 촌놈입니다. 만일 데리고 갔다가 가는 길목에 위치한 세속도시 메소포타미아를 지나다가 혹시 환락의 도시를 보고 유혹받고 거기서 어떤 여자를 만나 정착을 고집하면 큰일입니다. 젊은이들은 그런 위험이 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신앙중심을 보게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돋보이는 신앙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이 두 사람은 참 진정한 성자였습니다. 그 외에 엘리야, 에녹, 다니엘, 노아 같은 위인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일생에서 한 부분만 성경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이 두 사람은 생애 전체가 나옵니다. 생애 전체를 봐서 그 정도면 완벽한 성자입니다. 특히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여기 나오는 이야기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힘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종에게 신신당부를 합니다. “반드시 하란으로 가서 그 딸 중에서 며느리를 선택하라.”
우리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세상을 살면서 이 중심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때로 상대의 조건도 중요합니다. 환경도 중요합니다. 외모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때로 신앙인들도 조건과 환경에 너무 치중해서 신앙의 바탕도 없는 사람들에게 딸을 보내고 아들을 보내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에서는 일말의 불안함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답하기를 안 믿는 사람이니 전도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 말은 스스로 안위 받으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한 가지 알 것은 세상에는 전도해서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이 신앙의 문제만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믿음을 가지고 사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이 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몰라서 그 멀리에서 며느리를 구하려 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가나안 여인들을 볼 때 완전히 세속에 물들고 타락하고 방종생활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의식이 다르고 풍습이 다르고 신앙이 달랐습니다. 그러니 그 딸들을 데려다가 순수한 혈통이나 순수한 신앙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반드시 하란으로 가서 며느리를 고르라고 다짐 시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신앙의 중심을 보게 됩니다.
“종의 출발”
드디어 이 종이 중책을 가지고 하란으로 출발을 합니다. 아마 그 길을 가는데 상당기간 세월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때 하란이면 오늘의 유프라테스 강 건너에 있는 이라크 땅을 말합니다. 가나안이면 오늘의 이스라엘 땅을 말하는데 거기서 오늘의 이라크 땅까지 가는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겠습니까. 그런데 이 종이 말없이 가고 있습니다. 가면서 고민도 많았을 것입니다. 가서 어떻게 처녀를 만나며 만났으면 그 처녀를 어떻게 설득해서 가나안까지 데리고 가는가 하고 참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 고민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종은 가면서 신중하게 기도합니다. 이 종이 기도하는 모습이 아주 감동적입니다.
이 종이 드디어 하란에 도착합니다. 하란 땅에 도착하자 이 종이 또 기도부터 합니다. 이 종의 기도를 들어보면 기도의 길, 기도의 방법을 배우게 되고 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그렇게 기도합니다. 얼마나 향기로운 기도입니까. 10-12절을 보면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그 낙타를 성밖 우물곁에 꿇렸으니 저녁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으려 나올 때였더라“.
이 종이 지금 어디에 멈추어 있는가 하면 동네 우물가에 쉬고 있습니다. 왜 우물가에서 지금 쉬고 있는 아십니까. 옛날 시골에서 살 때 보니까 이 우물가 여기가 밤새 일어난 모든 사건의 취재원입니다. 동네 소식과 통신이 가장 빨리 전해지는 곳이 이 우물가입니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동네처녀들, 아낙네들이 다 모여듭니다. 그곳에서 간밤에 일어난 모든 소식이 전 동네로 AP통신을 타고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그런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라는 노래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종은 우물가에서 기다려야 동네의 처녀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종이 거기 앉아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12절을 보면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이 종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우리 주인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입혀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신실한 종입니까.
오늘 이 시대는 종이 주인을 향해서 이렇게 기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종도 없고 부하도 없고 사원도 없습니다. 오늘은 모두 주인 앞에서는 충신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돌아서면 모두 주인을 욕합니다. 오늘은 배은망덕의 시대입니다. 은혜를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사람들이 복을 받지 못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은 자기 주인에게 하나님이 은혜와 복을 주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신실한 종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그가 가는 길을 아주 순조롭게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기도를 보면 “이것이 기도하는 법이구나”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의 기도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주인에 대한 사랑과 맡은 임무에 대한 충실한 모습이 배어 있습니다. 그는 13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성중 사람의 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곁에 서 있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며느릿감인 줄 알겠습니다”하고 기도합니다.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그 말은 “이제 기다리고 있으면 처녀들이 물을 길으러 올 것인데 그 처녀들에게 물 좀 달라할 것이니 그러면 기쁨으로 ‘마시세요.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물을 주리다’하고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처녀가 있으면 그 처녀가 하나님이 골라주신 이삭의 신붓감으로 알겠습니다“그 말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까 리브가라는 처녀가 물동이를 메고 물 길으러 왔습니다. 그래서 물 좀 달라 하니까 물을 주더니 당신의 약대에게도 물을 주겠다며 목이 갈한 낙타들에게 물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기도가 이렇게 딱 맞아 떨어질 수가 있습니까. 그 종은 그 순간 참 신기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기도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기도의 지름길, 응답받는 기도의 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때로 우리들이 기도하다가 보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여기 이 종의 기도를 들어보면 한 가지 힌트를 얻게 됩니다. 이 종의 기도는 아주 순박합니다. 그 순박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리브가를 순전하게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순박하고 전적으로 위임하는 기도를 한번 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루어주시는 가를 한번 깊이 눈여겨보십시오. 장래와 직결되어 있는 배우자를 선택할 때 상대에 대해서 매력과 키와 조건만 따지는 사람들은 이런 방법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신붓감을 소개해 달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원하느냐”고 물으니까 “장단지는 가늘고”라는 말부터 시작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젊은이 입니다. 응답되는 기도는 하나님께 위임된 기도를 말합니다. 위임된 기도는 그 결과에 순종하겠다는 순종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미에 가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
그때 이 종이 얼마나 신기했겠습니까. 그래서 이 종이 이렇게 말합니다. 23절을 보면 “이 종이 이르되 네가 누구의 딸이냐, 청하건대 내게 말하라, 네 아버지의 집에 유숙할 곳이 있느냐, 그 여자가 그에게 이르되 나는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니이다, 우리 집에 짚과 사료가 족하며 유숙할 곳도 있나이다“하고 대답합니다. 26절을 보면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하고 기도합니다. 이 종이 그때 상당히 놀랐을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이렇게 신비할 정도로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까. 참 신비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 이렇게 순리적으로 길이 풀려나갑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억지로 만들고 얽히고설키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면 일이 그 방향으로 잘 풀려나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종의 길을 얼마나 잘 인도하셨습니까. 그러니까 이 종도 감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종이 머리 숙여 하나님께 경배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너무 신앙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순수함이 없습니다. 나를 너무 내세웁니다. 계획을 짜 놓고 이렇게 이루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수고는 수고대로 하고 기도의 응답받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때로 금식도 하며 기도는 하는데 사실은 헛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 이 아브라함의 종처럼 한번 생각하면서 기도 생활했으면 합니다. 한번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참 신기하게도 이렇게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진로를 놓고 한번 기도해 보십시오. 진로문제가 얼마나 진지한 문제입니까. “나의 앞길을 인도해 주십시오, 나는 이런 재능이 있습니다.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겠습니다“. 또 오늘 배우자를 선택하는 경우 그 기도가 얼마나 진지합니까. 매력이나 키 큰 것만 따지지 말고 누가 하나님이 주시는 배우자인가를 먼저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나에게 이런 배우자를 주십시오. 신앙이 신실하고 무엇 보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 가진 것 없어도 무방합니다. 과묵하고 신앙적 배경을 가진 사람을 보내주십시오, 키는 170cm전후. 몸무게는 70kg 전후이면 좋겠습니다“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세하고 구체적입니까. 우리는 여기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를 통해서 기도는 이렇게 구체적이고 확신 있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당신 주인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이 종이 처녀를 따라서 브두엘의 집으로 갔습니다. 가서 지금까지 되어진 일을 그 부모에게 그대로 말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에서 떠날 때부터 여기 우물가에서 되어진 일들을 그대로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51절을 보면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그 부모들이 두말하지 않고 쾌히 승낙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인 것을 그들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두에게 이렇게 공감을 줍니다. 믿음을 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너도 나도 모두가 합당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모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고 믿어질 때 모두가 승복하게 됩니다. 얼마나 듣기에, 보기에, 아름답고 시원하고 행복한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기도 응답 받아보신 경험이 있습니까. 기도응답을 받아보면 그 순간 내 몸 안에서 기운이 약동합니다. 성령의 감화가 일어납니다. 신앙적 힘이 순간적으로 솟아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이 종이 우물가에서 신기하게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경험할 때 얼마나 그 발걸음이 신났겠습니까. 그 맛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행복하고 즐거운 삶입니다. 이런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