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기 쉬운 '자유분방ㆍ감각적 색채' 탄성 대학 재학 중 道展 추천작가로 구상ㆍ비구상 혼재된 색상ㆍ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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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야기들. 1990. 162×130㎝. Oil on canvas.
최영훈은 오지호ㆍ임직순의 권유로 1965년 조선대학 문리과 대학 미술학과에 입학했다. 입학 이전부터 임직순과는 여러 차례 만남이 있었다. 62년 오지호 교수의 후임으로 임직순은 부임했고 그때 이미 오지호와 함께 영훈의 집에 인사차 들렀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영훈의 그림을 처음 보았던 임직순은 영훈의 재능을 발견했다. 또 부임 이후 조선대에서 주최한 전국학생미술실기대회에서 영훈은 우수상을 차지해 이미 임직순의 관심을 끌었다.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드는 미술학도 중에서도 영훈의 감각은 돋보였던 것이다.
뉴옥-배꽃, 민들레. 1996.98X98cm. Oil on canvas.
영훈의 입학 당시 조선대 미술학과는 전국에서 몰려든 재능 있는 학생들로 들끓었다. 의사가 돼 사회에 헌신하라는 조모의 뜻을 저버린 죄책감으로 영훈은 잠시 방황했다. 그때 고뇌하던 영훈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는 평생의 반려자가 된 같은 미술학과 여학생 손연자였다. 전남여고를 졸업한 그녀는 여학생으로는 드물게 조각을 지망해 순수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영훈은 그 순수한 모습에서 억눌렸던 미술에의 열망에 다시 불이 지펴지는 것을 느꼈다. 의업을 잇는 것은 이미 서울대 의대에 진학해 있는 형 진훈에게 맡기고 자신은 색채와 구도로써 세상을 밝혀나가기로 작정하게 된 것이다. 사랑과 예술의 열망에 눈뜬 영훈은 1학년 후반기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에 투신하기 시작했다.
임직순ㆍ황영성과 어울려 주말이면 어김없이 야외사생 작업을 다니며 그림에 몰두해나갔다.
당시 황영성은 4학년이었고, 해가 바뀌자 조교가 됐다. 그 무렵 영훈의 부친은 집 마당의 한구석에 4평짜리 작업실을 지어주었고, 영훈의 가슴은 열정으로 한껏 달아올랐다. 임직순ㆍ황영성 등과 어울려 방학 때면 몇 달간 사생여행을 떠나곤 했다. 캔버스를 분해해서 새끼줄로 묶고 이젤을 맨 채 여객버스 뒷좌석에서 흔들리는 사생여행은 일상이 되어갔다.
1974년 1월 내장사 사생여행 중. 왼쪽부터 황영성, 임직순, 최영훈.
영훈이 대학 1학년 때 처음 전라남도 미술대전이 시작됐다. 특선을 세 번 하면 추천작가가 되는 제도였다. 영훈은 2학년 때부터 출품해 거푸 2ㆍ3ㆍ4회 특선을 차지했다. 4학년의 세번째 특선을 마지막으로 도전의 최연소 추천작가가 된 것이다. 한편 영훈과 사랑을 나누던 손연자는 영훈이 추천작가가 되던 그해,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전남도전 조각부문 수석상을 수상했다. 같은 길을 가는 예술동지로서, 두 사람의 사랑은 예술세계의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영훈은 69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열흘 후에 입대했다. 곧바로 광주 상무대의 전교사에 배치됐다. 그곳에서도 그의 미술 실력은 어느새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그렇게 70년 12월 당시 송호림 사령관의 배려로 광주 Y싸롱에서 첫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Y싸롱은 광주문화계의 중심 전시공간이었고, 강렬한 꽃그림에 관객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강렬한 색채의 꽃그림 28점은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것이다. 그때 영훈의 나이 23살이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붓을 쥐었던 그는 72년 2월19일 제대하고 3월1일부로 조선대 미술학과로 출근을 했다. 미술대학 조교가 된 것이다. 그는 조교시절 몇 차례의 국전 입선과 76년 전매대상을 마지막으로 모든 공모전에서 떠남을 선언했다. 이미 손연자를 아내로 맞아 가정도 꾸렸고 청년기는 끝이 났다. 더 이상 공모전에 매달리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더 깊고 높이 구축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작가의 최근 모습.
당시 영훈의 최고 스승은 역시 색채의 달인 임직순이었다. 임직순의 영훈에 대한 지도법은 각별했다. 언제나 영훈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는 "저 색은 아직 끝까지 도달되지 않은 것 같아. 자신만의 색을 만들어야 하는 거야! 내 말 알겠지?"
이런 식이었다. 어떻게든 색채에 대한 자신의 안목을 전수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때 영훈은 자신만의 색채에 대한 그 무엇이 저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만의 색채. 그것은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영혼의 색을 말하는 것이었다. 영훈은 임직순과 늘 함께 하면서 화가로서의 자세를 배웠고, 자신만의 색채가 나올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 영혼의 색채를 길어 올리는 고뇌의 두레박을 가슴 깊은 곳으로 수없이 내던지곤 했던 것이다.
영훈은 마침내 70년대 후반 서울 롯데갤러리에서 첫 서울전시를 열었다. 서울 데뷔전이었다. 그때 영훈은 세상의 저 아득한 곳에서 아우성이 쏟아지는 소리를 들었다. 전시장은 관객들이 들끓었고, 대단한 관심을 내보였다.
"이건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색이다! 자유분방하고 감각적이다! 그런데도 전혀 어렵지 않다."
그림들은 순식간에 이렇게 서울 미술애호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됐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그동안 갈고 닦은 색채와 구도의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화면은 구상이며 색채는 비구상인 것. 구상과 비구상이 혼재된 색상과 구도.' 서울의 롯데전시 이후 영훈은 갑자기 인기작가로 떠올랐다. 전시 예약이 밀려들었고, 해마다 1~ 2회씩 서울전을 갖게 되면서 영훈은 연일 그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서울의 유명화랑에서 앞 다퉈 영훈에게 관심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화가로서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시인ㆍ문예비평가
<그때 그 순간> 최 인 선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 "제자 사랑 ㆍ 애정 듬뿍 인품 향기 가득한 화백"
일찍이 화가의 꿈을 키우던 저는 중 2때 TV에서 처음 최 교수님을 뵈었습니다. 그때 전매대상전에서 대상을 받고 인터뷰하는 장면이 제 눈에 크게 클로즈업 되었거든요. 작품 제작으로 인한 과로로 병원신세를 질만큼 그림에 몰입했다는 인터뷰 내용을 접한 나는 유명한 작가가 되는 법은 날을 새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때 저는 꼭 열심히 해서 최영훈 교수님처럼 되리라고 결심했지요.
그 후 한두 해 지난 추운 겨울날 증심사로 야외스케치를 갔을 때 개울가에 이젤을 펴고 앉아서 설경과 마주하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최 교수님이셨지요. 너무나도 선명히 TV에서 보았던 분이었지만 감히 말을 건네지도 못하고 그림도 그리지 못한 채, 쩔쩔매다가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그 후, 미술학도로 작가로 많은 세월을 서울에서 보내던 나는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 90년대에 광주시내의 한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게 됐습니다. 사람도 별로 없는 초라한 오프닝이었는데 최 교수님이 직접 찾아와 주셨어요. 최 교수님이 저를 광주 출신으로 서울화단에서 활동하는 젊고 유능한 작가로 인정해 주시는 것 같아 내심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리고는 그 두꺼비 같은 손으로 축의금을 살며시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시는 겁니다. 정말 저는 감격하고 말았지요. 이렇게 최 교수님과의 인연은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 화실을 방문했을 때 500호 정도 되는 작품 속에 빼곡히 쌓여가는 강렬한 색의 스트로크를 바라보면서 한참동안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빼어난 색채 감각과 자연의 유기적 형태를 순수하게 드러내는, 여과되지 않은 원초적, 원색적 회화 속에 숨겨져 있는 열정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손으로도 잘 표현하고 생각을 잘 드러내는 좋은 화가이지만 그 이전에 사람들을 잘 아끼고 이끌 줄 아는 인생의 선배이시며 더불어 사는 인생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이라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재능 있는 제자들을 발견하거나 유학을 가겠다는 제자들이 나타나면 본인이 자기 자식과도 같이 돌보고 아끼는 분입니다.
몇 해 전 급히 나를 찾는다고 해서 최 교수님 작업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때 어떤 젊은 미술학도를 소개하면서 자기가 아끼는 제자이니까 미국유학을 주선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만들고 가꾸는 데 다재다능함을 소유한 분이십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그의 손에 붙잡히면 빠져나가기가 힘들 만큼 애정과 사랑을 쏟으십니다.
누구든지 꺼리지 않고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생각되면 서로 소개를 하고 그 사람의 특성을 잘 살리기 위한 역할을 해내곤 합니다. 미술가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의 리더로서 가질 수 있는 특성을 소유한 분으로 생각되어 집니다.
항상 클래식을 좋아하는 최영훈, 그 뒷배경에는 남을 이해하고 아끼고 베풀었던 그의 부모들의 인생관과 인품이 배어 있는 듯 합니다. 호탕하고, 분위기를 잘 이끄시며, 술도 한술 하는 최 교수님은 아름답고 지혜롭게 인생을 연출해 가십니다.
작가로서, 교육자로서 그 바쁜 와중에도 색채 학에 관련된 몇 편의 책을 저술했고, 예술가로서 드물게 미국 국무성에서 주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두 번씩이나 뉴욕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지내신, 학구적 열의를 보이며 노력하는 분입니다. 근 시일 내에 많은 얘기 보따리를 준비하고 있을, 그 소탈하고 정 많은 최 교수님을 만날 생각을 하니 광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