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고두현의 아침 시편』2024.01.12.
''닥터 지바고' 영화를 그대로 압축한 시’
겨울밤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눈보라가 휘몰아쳤지.
세상 끝에서 끝까지 휩쓸었지.
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이 타고 있었네.
여름날 날벌레 떼가
날개 치며 불꽃으로 달려들듯
밖에서는 눈송이들이 창을 두드리며
날아들고 있었네.
눈보라는 유리창 위에
둥근 원과 화살들을 만들었고
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 비친 천장에는
일그러진 그림자들
엇갈린 팔과 엇갈린 다리처럼
운명이 얽혔네.
그리고 장화 두 짝
바닥에 투둑 떨어지고
촛농이 눈물 되어 촛대서
옷 위로 방울져 떨어졌네.
그리고 모든 것은 눈안개 속에
희뿌옇게 사라져 갔고
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이 타고 있었네.
틈새로 들어온 바람에 촛불 날리고
유혹의 불꽃은
천사처럼 두 날개를 추켜올렸지.
십자가 형상으로.
눈보라는 2월 내내 휘몰아쳤지.
그리고 쉬임없이
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이 타고 있었네.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 :
러시아 시인이자 소설가.
소설과 영화로 유명한 <닥터 지바고>를 그대로 압축해놓은 듯하죠?
이 시 ‘겨울밤’의 배경은 암흑 속의 러시아 혁명기입니다. ‘눈보라’는 시베리아까지 휘몰아친 혁명의 소용돌이를 상징하지요. ‘촛불’은 시대의 광풍 앞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개인의 삶을 의미합니다.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엇갈리는 ‘운명의 그림자’는 소설 주인공인 유리와 라라를 닮았습니다.
△ 당국 압박에 노벨상도 거부해야 했던…
비운의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삶도 그랬지요. 그의 본업은 소설가라기보다는 시인이었습니다. <닥터 지바고>는 그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이죠. 혁명기 젊은이의 방황과 고독, 사랑을 서사적으로 그린 이 소설로 그는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됐지만, 소련 당국의 압박으로 수상을 거부해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