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씀, 김귀탁 옮김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당합니다.
만나, 2001년
신앙서적 중에서 기도처럼 많이 다루어진 주제도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가히 기도에 관한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만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어 출판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러나 이 책이 주장하는 기도의 의미가 우리나라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한국적 신앙의 토양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책은 저자가 강의한 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을 번역한 역자가 붙인 제목은 원래의 제목(원제는 그냥 ‘기도’임)이 아니라 본문에 나오는 한 구절로서, 너무 강인한 인상을 주는 것 같지만 사실 이 책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고 보여 진다.
제1장 ‘쉬지 말고 기도하는 법.’
저자는 기도가 하나님의 귀한 선물인데도 불구하고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에 대한 좌절감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나누는 기쁨의 대화로서의 기도가 지겨운 노동이나 형벌처럼 잘못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의무적인 철야기도나 시간을 재는 기도는 우리와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우리에게 기도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에 정반대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잘못된 기도를 4가지 유형으로 지적하고 그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소개한다.
첫째, 기도는 일이 아니라 자연스런 생활이라는 것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곧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는 것 같은 생활이지,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일이나 행사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의 삶, 즉 성령의 인도를 받음으로써 늘 주님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어떤 특별한 장소나 시간이 아니라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전체에서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시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끊임없이 의식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시간을 따로 갖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산이나 골방에서 주님과 깊은 기도의 교제를 나눌 필요도 있다. 이 두 가지는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도를 이렇게 말할 때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실까?”하는 것이다. 특별히 믿음이 좋거나 성경 전체를 읽어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이 그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그 성령께서 진리로 인도하심을 믿기만 하면 된다. 단순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느낌을 주신다는 말이 아니다. 확신대로 행하면 되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감각적이 되어서 감정과 양심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이 때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영적인 마음 곧 양심에 성경이 말씀하실 것이다.
때로는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단순하게 우리의 정직한 반응만을 원하시기도 하신다. 우리의 마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하여 변명이나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것에 대한 정직한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느낌은 아니다. 자신이 살아온 배경에 따라서 느낌과 양심의 소리가 혼동될 수 있기 때문에 양심의 소리가 언제나 정확 무오한 규칙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양심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양심에 말씀하시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제2장 ‘기도는 반복적이어야 하는가?’
두 번째 잘못된 기도는 하나님이 저 멀리 어디엔가 계신다고 생각하는 기도 자세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셔서 이미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다. 또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하나님은 귀가 먹은 분도 아니시고 지능이 낮은 분도 아니시다. “주여!” 라고 고함을 치지 않아도 되지만 굳이 그것이 우리의 기도에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 주님께 필요한 것은 아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기도는 반복적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안심이 안 되니까 그런 기도를 필요로 할 뿐이다. 영적으로 성장하면 그런 기도는 그만 두어야 한다. 그런 반복된 기도는 종교적 행위이지 ‘관계’가 아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구하는 자가 받을 것이라고 하지 않고 믿는 자가 받을 것이라고 한다. 기도했는데도 아무 것도 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이미 응답이 주어진 것이다. 만일 4달 안에 주시기로 결정하셨다면 우리는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주님의 비유는 누가복음 17장의 재림에 관한 말씀과 연관이 있다. 교회는 세상의 불의와 싸워 이겨 의를 지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가 실현되는 것은 주님이 재림하셔야 한다. 따라서 반복기도를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구하기 전에 미리 아신다. 또 누가복음 11장 5절 이하의 말씀에는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강청함을 인하여 그 필요한 것을 주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강청함이란 귀찮게 졸라댐에 가깝다. 이 상황은 한밤중 상황이고 그것은 우리와 주님 과의 관계가 엉망인 경우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에 “주여!” 하고 매달리는데, 그 때에 주님의 응답은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뻔뻔스러운 끈질김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응답이 있는 것이다. 이런 기도를 남용해선 안 된다.
넷째로 기도는 끊임없이 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구해야 할 것이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제3장 ‘기도는 요구나 간청이 아니다’
요구 밖에 모르는 것은 철없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요한복음 2장에서 마리아는 예수께 해결책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문제를 환기시켜줌으로써 그분 스스로 문제에 대해 결정하게 했다. 즉, 우리는 문제를 아뢰는 것뿐이며, 우리의 깨끗함 때문에 응답받는 것이 아니다. 응답이 있다면 오직 예수님의 이름 때문이다. 기도는 모든 문제들을 예수님께 맡기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염려없는 기도가 곧 믿음의 기도이며 평안함을 얻는 비결이다. 평강은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주님의 손으로 넘겨졌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기도는 회개나 요청이 아니다. 기도는 우리가 얼마나 울부짖고 노력하고 땀과 눈물을 많이 흘리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의 기도 응답의 유일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없이는 불가능하다.
금식기도를 마치 단식투쟁으로 활용하지 말아야 한다. 금식은 우리의 육신을 연약하게 함으로써 우리 영혼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보다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어야 한다. 우리는 종이고 그분이 주인이시다. 따라서 금식은 종이 주님에게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사용하는 방법이어서는 안 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간청의 주도권을 갖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해 주시기를 기도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은사인 두뇌의 활용을 통해서 일을 하는 것이 먼저이다. 우리가 주님께 쓰레기를 치워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쓰레기를 치우도록 손을 주셨음을 알고 실천해야 한다.
제4장 ‘기도의 참된 자세’
초대교회의 베드로와 같은 성도들의 기도는 제3자로서의 입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와 같이 선포였다. 베드로는 내면에서 성령님과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하나님 이렇게 해 주십시오.'라고 점잖게 하나님을 부려먹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내면적인 대화를 통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주님께 주도권을 드렸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는 “다비다야 일어나라”와 같이 선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능력이 없을 때에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도와줌으로써 기도가 응답받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주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의 의미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몸전체가 그리스도의 것이어야 한다. 오히려 우리가 책임질 대상자 명단을 먼저 작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기도하면 알려주실 것이다. 내게 있는 것으로 그들에게 주어야 한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하여 오해의 여지가 있을까봐 비교적 자세히 내용을 다루었다. 물론 본인은 이것이 기도에 대한 모든 내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기도의 핵심 부분을 포함하는 대부분이라고 확신한다. 일반적인 기도의 의미는 ‘간구’라고 추가로 붙이고 싶다. 주기도문의 중간에 나오는 간구의 내용들, 야고보서 1장에 지혜를 달라고 구하라고 하신 말씀 등 성경에 간구를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엇이 기도의 본질인가의 질문 앞에서 이 책의 내용은 그 핵심을 제시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기도의 평안과 능력과 비슷한 기도의 삶을 본인도 체험하던 차에 뒤늦게나마 이 책을 접하게 되어 참으로 감사하고 있다. 소그룹의 핵심을 영적 생명력에 둔다면 그것은 곧 기도로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잡게 된 책이 정말 매우 감격스럽다. 문제는 이런 기도의 핵심을 어떻게 교회 현장에서 성도들에게 이해시키고 훈련시킬 수 있을까? 본인을 인도하신 그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해본다.
성심교회 담임목사, 총신대 대학원 Ph.D., Cand.
<옮긴글>
[출처] 기도의 대부분은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당합니다 (은혜성서교회) | 작성자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