蘇州賈氏(소주가씨)
始 祖; 賈維鑰(가유약 )
集姓村; 忠南瑞山郡泰安邑
賈氏는 中國 武威:(只今의 甘肅省 甘良都)에 淵源)을 두고,明나라 神宗 때 樞密院使,兵部尙書, 太子少傅 文淵閣太學士 : 北京의 宮中안에 있던 藏書의 殿閣에 所屬된 官職)等을 지낸 賈維鑰(가유약): 字는 茂遍, 號는 知白堂)을 始組로 하고있다.
文獻에 依하면 賈維鑰(가유약):은 中國 蘇州사람으로서,1592年(宣祖25)壬辰倭亂 때 神宗의 命을 받들어 薊療按察使(계요안찰사)로 援兵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와서 安州等地의 싸움에 功을세우고 돌아갔다가, 丁酉再亂때 아들 祥과 孫子 琛(침)을 데리고 다시 朝鮮에 들어와 南原에서 倭軍을 크게 무찔렀으며,1600年(宣祖33) 釜山싸움에서 勇戰하다가 아들 祥과 함께 戰死하였다.
그의 孫子 琛(침) :兵部 從事官)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屍身을 거두어 慶南蔚山西生鎭都督洞)에 무덤을 만들고,戰爭이 끝난 後에 安東權氏 純의 딸과 婚姻하여 蔚山에 살면서 우리나라에 賈氏의 뿌리를 내렸다.
1647年(仁祖24) 琛(침)이 죽자 膝下에 아들 晟(성),昊(호),昺(병),遂(수) 4兄弟가 忠南瑞山으로 자리를 옮겨 家門이 크게 繁昌하였으며, 始組維鑰(유약)의 14世 孫 行健은 朝鮮 憲宗때 水軍兵馬僉節制使를 지냈으며, 天性이 어질어 道德君子라는 稱頌을 받았다.
----歷代主要人物----
1.賈祥 : 字는 必禎,1592年(宣祖25) 壬辰倭亂때 遊擊將軍(유격장군)으로 東萊에서 功勳을 세웠다.
2.賈琛 : 字는 元寶, 朝鮮 때 아버지 祥과 함께 東萊에서 싸웠다.祖父 維鑰(유약)과 아버지 祥의 3代 忠孝祠堂과 旌門이 王命에 依해 瑞山郡) 南面에 세워졌다.
3.賈琳 : 字는 釆文(변문), 朝鮮 때 武科에 及弟하여 訓鍊院判官을 歷任하였다.
4.賈勸民 : 字는 漢平,朝鮮 때 通訓大夫에 이르렀다.
5賈邦烈 : 朝鮮朝에 通政大夫의 品階에 이르렀다.
6.賈泰慶 : 號는 漁隱, 朝鮮 때 通訓大夫, 掌樂院正에 追贈되었다.
7.賈世喆 : 號는 竹窩(죽와), 朝鮮에서 通政大夫의 品階에 이르렀다.
8.賈行健 : 號는 石湖, 朝鮮 때 節制使를 지냈다.
9.賈中永 : 號는 定窩(정와), 朝鮮朝)에 五衛將을 지냈다.
---- 現. 近代 著名人士 ----
* 賈秉勳 漢學者 * 賈在南電氣通信公社中央建設局所長 * 賈在桓 判事,辯護士 *賈昌基 서울 南部地法判事,辯護士 *賈在亨 前韓國反共聯盟瑞山支部長 * 賈在契 宗親會長,瑞山 泰安國民學校長 *賈在昌 忠南大敎授 * 賈九鉉 忠南交通理事 * 賈甲孫골든벨(株)常務理事 *賈基贊大田農村指導所長 *武雄) 啓蒙社全南支社長 * 賈世魯 瑞山 南面國民學校長 * 賈在右宗親會總務 * 賈在郁 鳳安農協長 * 賈治魯 宗親會副會長 * 賈在春 世信化學社長, 京畿道藥士會長 * 賈仁燮南楊州市壽東初等學校長 *賈烈 國民銀行支店長 * 賈昶鉉 前 水原警察署長 * 賈光洙 韓國銀行課長 * 賈在模電氣通信公社課長 (無順位)
출처 성씨의 고향
소주가씨(蘇州賈氏)
소주 가(賈)씨는 중국 요(堯) 임금의 둘째 아들인 공명(公明)이 가(賈)에 봉해지면서 가씨 성이 나오게 되었다. 가씨의 발상지는 중국 산서성 양분현이다.
주로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은 감숙성 무위시과 섬서성 한성시 당가촌이다. 전한(前漢)의 가의(賈誼)는 낙양(洛陽) 사람인데, 나이 18세에 시경(詩經)과 서경(西經)을 잘 외웠고 글을 지었으므로 군(郡) 안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하남 태수 오공(吳公)이 그 때어난 재능을 듣고 초빙하여 문하에 두었고, 정위(廷尉)가 됨에 이르러서 비로소 말하였다. “가의는 연소하지만 자못 제자백가의 글에 통달하였다” 황제가 가의를 불러서 博士로 삼았다.
그는 조서나 법령의 심의 하면 될 때마다 여러 노선생이 미처 발하기도 전에 모든 것을 대신하였는데, 그것은 사람들 저마다의 뜻과 같았다.
그러므로 여러 유가(儒家)는 그의 재능을 인정하였다. 황제가 이를 기뻐하여 1년 만에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승진시켰다. 가의는 ‘한나라가 중흥하려면 마땅히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색(服色) 제도를 바꾸며, 관명(官名)을 정하고 예악(禮樂)을 제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초안을 갖추어 예법에 이르도록 하여, 황제는 아직 그럴 겨를이 없다며 사양하였으나 여러 법령의 경정(更正)은 모두 가의가 발의한 것이다. 황제는 가의에게 공경(公卿)의 지위를 임명하였다.
그런데 강후 주발과 관영(灌嬰)의; 무리가 이것을 음해하자 이윽고 상께서도 이를 소홀히 하여 그 건의를 쓰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장사왕(長沙王)의 太傅로 좌천시켰다. 당가촌은 한성시 동북쪽으로 9km에 있으며, 일반적으로 ‘동방 인류의 활화석(活化石)’이라고 말한다.
그곳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가씨의 시조 사당이 있고, 족보가 잘 보존되었다. 호남성 장사시 해방로에 한나라 시대의 정론가로 유명한 가의(賈誼) 기념관이 있다. BC 177~174년에 그가 이곳에서 살았으며, 현존하는 건물은 1999년에 새로 건축한 것이다.
우리나라 소주 가(賈)씨의 시조는 임진왜란 때 북경과 요녕성 일대 계료도찰사를 맡고 있는 가유약(賈維鑰)장군이다. 그의 고향은 강소성 소주(蘇州) 사람으로 임진왜란 때 원병을 끌고, 안주(安州)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무공을 세운 후 명나라에 귀국하였다.
그는 명나라에서 조선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고, 명나라 조정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가진 관료였으며, 명문가 출신으로 알려졌다.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아들 가상(賈祥)과 함께 들어와 남원 등지에서 수군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왜병을 격파하고, 부산전투에서 아들 가상과 함께 전사하였다.
가유약은 명나라 신종(神宗) 때 추밀원사, 병부상서와 문연간태학사를 역임했다. 그때 아들 가상과 손자 가침도 함께 왔는데, 가침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전사하자, 울산 도독동에 장사한 후 귀화하고, 시묘(侍墓)하면서부터 가씨가 정착하게 되었다.
소주 가씨의 귀화조인 가침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그가 죽은 뒤 충남 서산으로 터를 옮겨 정착했다. 송시열선생은 가씨의 3대의 숭고한 충절을 극찬했는데, 철종도 이들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사당(祠堂)과 정문(旌門)을 건립하였다.
조선말 철종은 이들 3대의 충효를 기리는 사당과 정문을 서산에 세웠는데, 가씨들은 이후 서산일대를 중심으로 충효의 가통을 이어왔다. 가행건은 시조의 14세손으로 천성이 어질어 도덕군자의 칭송이 높았다.
헌종 때 수군병마첨절제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가일영은 철종 때 울진현령에 올랐다. 프랑스 함대의 강화도 점령 때 의병을 일으킨 가익건과 구한말의 청백리 가정로도 알려진 인물들이다.
자료 : 소주가씨 종친회
자료: 소주가씨 종친회
자료 : 소주가씨 종친회
출처 소주가씨 삽교 종친회
[출처] 蘇州賈氏(소주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