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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th Special Hospitality Story] 호텔이 걸어온 길, 그 역사를 따라서 ①해외편
출처 호텔앤레스토랑 NEWS : https://www.hotelrestaurant.co.kr/news/article.html?no=6504
노아윤 기자 기자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미래의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지나온 역사를 돌아보듯,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난 발자취를 훑어볼 필요가 있다. 호텔앤레스토랑에서는 올 한해의 메인 테마를 호텔업계가 양적 팽창에서 질적 성장이 이뤄질 수 있도록 ‘본질’과 ‘가치’에 뒀다. 이에 창간기념호를 맞아 호텔과 호스피탤리티에 보다 근본적인 접근을 하고자 호텔의 역사를 훑어봤다. 기원전 인류 최초의 관광에서 시작돼 순례자의 쉼터로, 당대 최상류층만 이용할 수 있었던 초호화 호텔의 모습과 대공황의 격변기를 맞은 호텔들의 흥망성쇠까지. 호텔업계 종사자라면 알고 있어야 할 호텔의 기원과 지금의 호텔업계가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그 흥미로운 이야기에 빠져보자.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Hospitality
‘환대’. 우리가 알고 있는 Hospitality의 사전적 의미다. 그렇다면 환대의 정확한 우리말 뜻은 무엇인가? 환대에 대해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함’이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단어들로 정의해 놓았다.
정확히 언제라고 콕 집어 이야기하기는 힘들지만, 호스피탤리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숙박과 외식은 기원전 500년부터, 그리고 이 두 가지 산업이 성장하는 데 중요 요소인 관광은 그보다 더 앞선 기원전 1480년부터 시작됐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집트의 한 성당 벽에 이집트 제18왕조의 하트셉수트(Hatshepsut) 여왕의 동아프리카의 푼트(Punt) 여행기로 보이는 벽화가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 디르 엘 바흐리(Deir el-Bahri) 성당 벽에 그려져 있는 하트셉수트(Hatshepsut), 여왕의 인류 최초의 여행, 이미지 출처_ wikimedia
이후 기록에 의하면 인류 최초의 올림픽이 기원전 776년부터 시작돼 스포츠가 관광의 주요 동기가 됐으며, 숙박의 개념은 기원전 500년 그리스에서 온천을 중심으로 등장, 로마인이 영국과 스위스, 중동 지역까지 보급하게 되면서 작은 ‘인(Inn, 여인숙)’이 탄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인숙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모습보다, 그저 밤이슬을 피할 수 있는 간이 시설 정도 수준이라는 것이 학계의 해석이다.
중세, Hospitality의 배경 Hospice의 등장
인류 최초의 관광, 숙박의 형태가 도입되고 Hospitality의 어원은 ‘호스피스(Hospice)’에서 파생됐다. 호스피스는 중세 유럽에서 여행 순례자들을 위한 작은 교회이자 숙박소다. 그런데 여행자가 병이나 건강상의 이유로 여행을 떠날 수 없게 된 경우 그곳에서 치료 및 간호를 받게 되면서, 호스피스라는 단어에 숙박과 함께 치료, 요양의 의미도 포함됐다. 때문에 호스피스에는 늘 아픈 순례자를 간호하는 성직자가 있었고 밤낮으로 순례자들을 보살피는 그들의 헌신과 환대를 Hospitality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러한 어원으로 봤을 때 환대는 악조건 속에서도 상대의 온전한 안위를 위한 ‘헌신’의 뜻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1658년에 그려진 Tavern 내부모습, 이미지 출처_ wikimedia
▲뉴욕 브로드웨이 시티호텔, 이미지 출처_ wikimedia
호스피스의 등장 이후 많은 유럽 국가에서 역 등의 교통 중심지를 중심으로 인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지속된 확장으로 1400년대 프랑스에서는 법적으로 호텔 등록을 요구, 영국에서는 인을 위한 규정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개인 객실, 식당, 회의실, 약간의 서비스 등의 부대시설이 제공되는,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호텔의 개념은 1600~1700년대에 유럽에서 도입됐다.
미국의 경우에는 ‘터번(Tavern, 선술집 개념의 여인숙)’의 형태로 숙박시설이 발달, 특히 터번은 시가지 내에 위치해 만남의 장소가 됐으며 산업혁명 이후 거의 모든 터번들이 호텔로 대체됐다. 근대적인 발전에 따라 1794년에 들어서는 호텔업을 목적으로 건축한 최초의 건물, 시티호텔(City Hotel)이 약 70개 객실 규모로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 오픈했다.
180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럭셔리호텔의 태동기
1800년대 들어서는 증기기관차 개발에 이어 철도가 속속들이 들어서면서 럭셔리호텔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1829년에는 세계 최초의 현대 호텔이자 당시 1급 호텔인 트레몬트 하우스(Tremont House)가 미국 보스턴에 세워졌다.
▲세계 최초의 럭셔리호텔 트레몬트 하우스. 트레몬트 하우스는 약 65년 간 호텔로서 영업이 이뤄졌다. 사진출처_wikimedia
▲트레몬트 하우스 내부모습, 이미지 출처_ wikimedia
트레몬트 하우스는 170개 객실의 대규모 호텔로, 최초로 싱글베드와 더블 룸 제공 이외에도 객실 내 화장실, 비누, 주전자, 객실 도어 잠금장치, 프론트 데스크, 벨 맨, 알라카르트 메뉴(이때 처음으로 프랑스 요리가 미국에 소개됐다고 한다) 등 당시의 숙박시설에서 보지 못했던 최고급 서비스를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호텔은 건축가 ‘아이제아 로저스(Isaiah Rogers)’가 설계한 건물로 호텔 건설의 권위를 인정받은 것은 물론, 그의 건축 양식은 이후 50여 년간 호텔 건축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 트레몬트 하우스의 개관으로 인해 호텔 분야에 있어 미국이 세계에서 우위성을 인정받았다 보는 이도 있을 정도. 이후 미국은 뉴욕을 중심으로 최초의 수하물 엘리베이터 설치, 객실 내 욕조 제공 등 호텔산업의 효시로서 거침없는 행보를 보여준다.
유럽의 럭셔리호텔은 1850년, 프랑스의 그랜드호텔(Grand Hotel)의 탄생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이후 미국 시카고에 세워진 파머 하우스(Palmer House)는 오픈 이래 현재까지 가장 오래 운영되고 있는 호텔로 3번의 리노베이션을 거쳐 현재는 힐튼에 인수, ‘파머 하우스 힐튼호텔 시카고(Palmer House a Hilton Hotel Chicago)’로 운영되고 있다. 오래된 역사성을 자랑하는 만큼 현재는 Historic Hotel of America*의 회원이라고 한다.
▲첫 번째 파머 하우스의 입구, 이미지 출처_ wikimedia
▲현재 파머 하우스의 로비, 이미지 출처_ wikimedia
▲트레몬트 하우스 알라카르트 메뉴, 이미지 출처_ wikimedia
▲최초의 리츠칼튼 호텔 모습, 이미지 출처_ Vogue
1880년대, 체인호텔의 서막, 그리고 호텔학교의 설립
메리어트 인터내셔널, 아코르, 힐튼, 윈덤호텔앤리조트 등의 체인호텔들의 시초는 언제일까? 많은 호텔리어들이 알고 있듯이 최초의 럭셔리호텔 체인은 리츠칼튼이다. 리츠칼튼의 창립자는 세자르 리츠(César Ritz)로 1898년 프랑스 파리에 ‘리츠호텔’을 개관했다. 당시 리츠호텔은 베르사유궁전과 같은 내부, 여인들의 드레스가 가장 아름답게 보일 수 있도록 설계했다는 로비의 계단, 호텔 역사상 최초로 객실 욕실마다 전화기와 붙박이장을 설치하는 등 럭셔리호텔계의 센세이션한 변화를 이끌었다.
▲리츠칼튼 호텔 창립자 세자르 리츠(César Ritz), 이미지 출처_ wikiwand
또한 완벽을 추구한 리츠의 섬세한 고객 응대방침에 따라 ‘리츠’라는 이름은 호텔경영에 있어 기본원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통용됐다. 리츠호텔이 럭셔리의 대명사가 돼 버린 덕분에 호화로운, 화려함을 뜻하는 ‘Ritzy’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고. 이렇듯 호텔의 성황이 계속되자 전문 인력 양성에 대한 사회적요구가 이어지고, 이에 따라 호텔리어 학교가 스위스에 설립됐다. 이는 현재까지도 호텔학교의 명성을 잇고 있는 스위스 로잔의 ‘로잔호텔스쿨(Ecole Hoteliere Lausanne)’. 로잔호텔스쿨은 1893년에 설립된 최초의 호스피탤리티 매니지먼트 학교로 현재는 관광, 레저산업 분야의 호텔자산 및 기업관리, 회계 관리, 마케팅까지 영역을 넓혀 전문 호텔리어들을 배출하고 있다.
1930년대, 세계 호텔업계의 격변기
럭셔리호텔과 체인호텔의 등장으로 호텔은 비단 상류층의 전유물인 듯 했지만 스타틀러 호텔(Statler Hotel)이 탄생하며 일반 대중들도 호텔에 드나들 수 있게 됐다. 그랜드 호텔시대의 호텔업을 근대산업의 위치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되는 스타틀러(Statler)는 1907년, ‘1달러 반으로 욕실 딸린 객실(A Room and A Bath For a Dollar and a Half)’을 캐치프레이즈로 미국 버펄로에 버펄로 스타틀러 호텔(Buffalo Statler Hotel)을 설립, 이때부터 호텔의 거품을 뺀 능률화를 위해 비품의 표준화, ‘방해금지(Don’t Disturb)’ 문고리, 실내 스위치 설치, 얼음물 공급기의 비치 등의 서비스를 도입했다. 스타틀러 호텔을 상용호텔의 효시로 만든 그는 1928년, 총 7개 호텔에 9050실을 소유한 대기업 경영자로 65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스타틀러 호텔 로비와 바, 이미지 출처_ hippostcard.com
▲스타틀러 호텔 로비와 바, 이미지 출처_ hippostcard.com
럭셔리호텔들의 성행 속에 강력한 상용호텔의 등장으로 새로운 형태의 호텔에 대한 니즈가 점점 늘어났다. 이에 1930년까지 약 20여 년간 장기 체류 호텔(Residential Hotel) 및 컨벤션 호텔(Convention Hotel)이 생기고, 세계 최초의 호텔 협회인 American Hotel Association이 결성됐다. 그러던 중 1929년, 탄탄대로인 듯 보였던 호텔업계는 세계경제대공황의 여파로 1930년에서 5년간 미국의 호텔 85%가 줄줄이 도산, 몇몇 거대 호텔을 중심으로 쌓아왔던 호텔 시장이 뚫리기 시작했고, 이때를 기점으로 체인호텔들이 급속도로 늘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1896년에 건축됐다 지진에 의해 붕괴됐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The Waldorf Astoria Hotel)이 뉴욕에 당시 최대 규모의 호텔로 재건설된다.
1950년대 이후, 현대의 모습을 갖춰가는 호텔들
대공황의 격변기를 지나 1946년에는 호텔의 위탁 경영 시스템이 인터컨티넨탈 호텔에 의해 최초 도입됐다. 1952년, 홀리데이인이 새롭게 환대산업 최대 기업으로 급부상, 1954년에는 힐튼호텔의 창시자 콘래드 힐튼(Conrad Hilton)이 스타틀러 호텔을 합병하며 힐튼 그룹의 몸집을 불리기 시작해 힐튼의 시대를 연다.
▲홀리데이인과 창시자 케몬스 윌슨(Kemmons Wilson), 이미지 출처_ kwilson.com
이후 포르투갈, 스칸디나비아, 그리스 등의 유럽 해안가를 중심으로 리조트, 중동으로는 풍부한 자원으로 대규모 호텔들이, 하와이의 마우이, 멕시코의 칸쿤을 중심으로 복합리조트단지가 발전하면서 호텔의 포트폴리오가 확장된다.
1950년대부터는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버젯호텔(Budget)들도 등장하고 인터내셔널 브랜드들이 공격적으로 성장하면서 이제 호텔은 관광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기원전부터 시작된 숙박은 오랜 역사 속에 갖은 부침을 겪으며 성장해왔다. 서비스경영론의 저자 영산대학교 호텔관광대학 외식경영학과 이준혁 교수는 “책을 집필하면 늘 가장 먼저 산업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다. 모든 산업은 역사적 배경이 있고 나서야 현재가 있는 것”이라며 “서양 호텔의 역사는 1800년대 초반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우리는 왜 늦었는지, 한국의 대불호텔은 어떻게 들어오게 됐는지, 홀리데이인이 어떻게 1950년대 호황기를 누릴 수 있었는지 등은 모든 이슈들은 시대적 흐름을 따라온 것들이기 때문에 뒤를 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역사 이해에 대한 필요성을 어필, 이어 “현재 국내에는 여러 형태의 숙박업들이 생기고 있는데, 호텔은 역사가 긴 만큼 숙박업계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다. 이제는 다른 숙박업들을 견제할 것이 아니라 우리 한국 호텔만의 서비스 프로세스를 정립해 나가할 때”라고 조언했다.
한국의 역사에서 호텔이 갖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역시 대불호텔과 손탁호텔,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내 호텔업계는 비교적 빠른 성장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서양에서부터 시작된 호텔의 문화가 국내에서는 어떤 역사 속에서 자리 잡히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이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빛명상
나의 연인, 호텔
나의 사회생활은 호텔에서 시작되어 총지배인으로 끝을 맺었다.
그 속에서 나는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의 첫 번째 사회생활은 호텔에서 시작
되었다. 그리고 호텔 생활을 마지막으로 직장생활을 청산했다.
내가 호텔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다른 인생의 목표가 있었고 호텔에서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었다.
어느 날 성당 신부님이 미사를 끝내고 돌아가려는 날 불러 세웠다.
“자네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구에서 처음으로 무궁화 4 호텔이 생긴다네. 한일호텔이라고, 아직 공사 중이지. 그 호텔 회장님이 우리 성당 신자 분이신데, 사람을 하나 추천해달라고 내게 부탁하더군.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한 모양일세. 그래서 내가 자네를 추천할까 하는데….”
그때까지 대구에는 1급 관광호텔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호텔이 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그 호텔 일에 나를 추천하신다니, 신부님 말씀이 얼른 납득되지 않았다.
“제가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합니까? 더구나 호텔이 완전히 지어진 것도 아닌데….”
“그렇기는 하지만, 그 회장은 지금부터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야. 최고급으로 짓느라 외국 자재도 많이 들어오고 생각보다 공사가 커지는 모양일세. 그러다 보니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더군…. 맏을 만한 사람을 골라 자재 관리도 맡기고 개업할 때를 대비해 미리 교육도 시키자는 생각이겠지.”
신부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난 내키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호텔은 일반인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곳이었다. 이제 20대 초반, 처음 시작하는 사회생활을 그런 곳에서 출발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나는 이미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지 마시고 다른 사람을 소개해주시죠. 저는 좀 그런데요….”
“왜? 싫은가? 그러지 말고 생각 좀 해보지 그러나, 나도 나지만 사실 회장님이 은근히 자넬 원하고 있거든? 아마 그동안 성당에 나오면서 자네를 유심히 보신 모양이야. 믿을 만한 사람을 소개해 달라기에 자네 이름을 댔더니 아주 반색을 하시더군. 어쩌면 자기하고 보는 눈이 그렇게 똑같냐고 하면서 말이야. 그런 판에 자네가 싫다고 하면 실망이 크실 텐데…. 나도 말씀 전하기가 민망하고 ….”
“죄송합니다.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성당에서 복사를 하고 있었던 나는 신부님의 말씀을 쉽게 거절할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호텔이라면 어쨌던 싫었다. 그만큼 호텔이라는 인상이 나에겐 부정적이었다.
“허허…, 그것 참! 좋아, 내 강요하지는 않을 테니 그럼 김 회장님을 한번 만나보는 건 어떻겠나?”
그것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신부님과 함께 김 회장이라는 분을 만나게 됐다.
“자네 기분은 충분히 알겠네만, 그건 틀린 생각이야. 호텔은 여관이 아니에요. 최고의 서비스 산업이라구. 굴뚝 없는 산업이란 말도 못 들어봤나? 호텔은 서비스 관광산업의 꽃이란 말일세.”
회장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는 입지적인 양반이었다. 양말 공장부터 시작해 건설업으로 가세를 일으켰고, 극장을 소유하고 고등학교 재단 이사장 등을 지내는 대단한 재력가였다. 고생을 해 본 사람답게 말투에서 막걸리같이 걸걸한 냄새가 풍겼다.
“내 월급은 두둑이 줌세. 1만 8천 원 정도면 되지 않겠나? 거기다가 플러스 알파를 더 얹어 주지.”
1만 8천 원이라니! 나는 귀가 솔깃해졌다. 당시 보통 월급쟁이들이 받는 돈이 6천 원에서 많아봐야 1만 원 안팎이었다. 거기에다 플러스 알파라니….
“난 회장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네. 호텔이라고 무조건 나쁘게만 볼 건 아니지. 열심히 하면 나름대로 보람도 찾을 수 있을 거야. 이런 것도 모두 천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네.”
신부님도 거들고 나섰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릴 때부터 난 큰 부자가 되어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인생 목표가 된 이상 나쁜 짓만 아니라면 어떤 일을 해서라도 그 뜻을 이루고 싶었다.
“자네가 정히 호텔이란 곳이 싫다면 내 오래 있으라는 소리 안하겠네. 와서 6개월 만이라도 좀 도와주게. 공사 기간만이라도 말이야. 그러다 호텔이 완공되면 그때 가서 또 생각해 볼 수도 있는 문제니까….”
내가 고민을 하자 회장은 한 발 물러섰다.
결국 나는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직장생활이란 게 꼭 내 입맛에 맞을 수는 없을 것이다. 호텔 아니라 그보다 더한 곳을 간다 해도 나만 열심히 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고 했는데, 1만 8천 원의 월급 자리라면 쉽게 얻을 수 없는 기회였다. 더구나 호텔 회장이 강력하게 나를 희망하고 있고 신부님도 권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눈 딱 감고 6개월 동안만 가서 일을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좋습니다. 일단 6개월 동안만 가서 일을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20년 동안 이어질 호텔 생활에 첫발을 내디뎠다. 가서 보니 정말 대단한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여태껏 보지 못했던 온갖 물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사용되는 자재는 정말 호화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자재의 관리와 출납을 담당했는데, 신부님과 회장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꼼꼼히 기록하고 관리해 나갔다.
공사가 완료되고 개관이 임박하자 회장은 다시 간곡히 말했다.
“호텔이 자리 잡을 때까지만 조금만 더 일해주게 공사 기간 동안 쭉 자네를 봐 왔네만, 내겐 자네같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내 간곡히 부탁함세.”
나 역시 그동안 높은 급료와 과외 수당을 받으면서 어느 정도 저축도 해 나가고 있던 터라 6개월 만 더 근무하면서 목표 저축액을 채우기로 했다.
그러나 나의 호텔 근무는 6개월, 6개월씩 자꾸만 연장되면서 3년이 넘게 계속되었다. 회장은 그동안 없는 직급도 만들고 급료도 올리고 하는 방법으로 끈질기게 나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애초 생각과는 달리 3년 넘게 호텔 생활을 하다 보니 이제는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회장에게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뜻을 강력히 밝혔다. 그러자 회장은 뜻밖의 제의를 해 왔다.
“내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가? 조만간 난 자네에게 이 호텔 총지배인 일을 맡길 생각이네. 생각해 보게, 일류호텔 총지배인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아무 때,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인 줄 아나? 그러니 딴 마음일랑 먹지 말게.”
그때 나이가 20대 후반, 파격적 제의가 아닐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전 경험도 부족하고 자격증도….”
“경험은 중요하지 않아. 요는 성실성과 능력이지. 자격증 문제도 내가 교통부에 선처를 해 놓았으니 어렵지 않을 거야.”
얼마 뒤 회장은 나를 교통부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일에서부터 내가 총지배인이 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세세하게 배려해줬다. 이렇게 해서 나의 20년간의 호텔 총지배인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행복을 주는 남자
초판 1쇄 인쇄일 2002년 6월 07일
초판 1쇄 발행일 2002년 6월 20일 P. 35-39
비야, 멈춰다오
아직도 내 젊은 날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호텔, 지금은 초광력超光力을 본격적으로
전하기 위해 그곳을 떠났지만 내게는 아직도 그곳이 삶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언제부턴가 영남지역 호텔 업계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호텔 업계가 아무리 불황이라도 정모라는 사람이 근무하는 호텔에는 언제나 손님이 차고 넘친다더라’ 하는 것이 소문의 내용이었다. 나는 소문이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거기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구는 물론 영남지역 일대에서 스카웃 제의가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물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우주의 마음이 작용한 때문이었지만, 나 스스로도 끊임없이 손님 유치를 위한 각종 이벤트를 기획하는 등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어느 해인가, 어린이날에 맞춰 미술대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이 행사도 일종의 손님 유치를 위한 기획 이벤트였다. 그러나 다른 직원들은 어린이 미술대회가 호텔 판촉에 무슨 득이 되겠냐며 극구 반대했다.
나는 대세에 꺾이지 않고 사장을 설득해 행사를 강행했다.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 차원에서라도 아이들에게 동심의 세계로 빠질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전통혼례, 윷놀이, 제기차기, 널뛰기, 연날리기, 팽이치기, 풍물놀이, 강강수월래 등의 민속축제를 곁들인다면 주민들에게 호텔의 이미지도 높일 수 있을 것이고 매출도 오를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공을 들여 행사를 기획했다. 그런데 행사 당일 아침이 되니 하늘에 햇빛은 없고 먹구름만 가득했다. 일기예보에서는 전국이 하루종일 비가 올 것이라고 했다. 이미 농악대 등 많은 행사 요원들을 불러 놓았고, 참가 신청자들도 많았다. 이런 상태에서 행사가 취소된다면 금전적으로나 신뢰 면으로나 호텔에 막대한 손해가 들어갈 판이었다.
“총지배인님, 오늘 행사 하냐고 묻는데요?”
참가 신청자들의 전화를 받고 직원이 내게 물었다. 행사 진행 여부를 묻는 문의 전화 때문에 전화통은 불이 났다.
“예정대로 한다고 그래.”
나는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순수하게 마음을 먹고 하늘의 처분을 기다린다면 일이 잘 풀리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런 행사시간이 임박해서 기어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오늘 행사가 성공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며 수군거렸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호텔 옥상으로 올라가 ‘주민과 아이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니 하늘이여 도우소서’ 라고 간절히 청원을 드렸다. 그러자 오던 비가 그치면서 구름이 밀려나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2시까지 시간을 주겠다’
내 마음속에서 우주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 되었다. 빗발은 자취를 감추고 사방에는 밝은 햇살이 내리쪼였다. 다른 곳에서는 모두 비가 내리고 있다고 했지만 행사장의 하늘은 화창하기만 했다.
1시 30분쯤이 되었다. 나는 직원들에게 그림을 거둬들이고 빨리 모든 참가자들을 실내로 이동시키도록 지시했다.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요.”
“다른 말 하지 말고 빨리 사람들 이동시켜.”
직원들은 무슨 변덕이냐는 듯 투덜거리며 마지못해 내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러나 정확히 오후 2시가 되자 하늘에서는 다시 비가 쏟아졌고, 직원들은 귀신을 본 것처럼 혀를 내둘렀다.
그날의 행사는 대성공으로 끝났다. 그에 힘입어 불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호텔은 호황기를 맞을 수 있었다.
이외에도 신혼부부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신혼여행 쿠폰제를 만든다든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일본풍 인테리어를 한국식으로 바꾼다든지 해서 호텔 일에 최선을 다했다.
20년 동안 나의 젊음을 바친 호텔, 지금은 초광력超光力을 본격적으로 전하기 위해 그곳을 떠났지만 내게는 아직도 그곳이 삶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돌아보면 그곳에는 아직도 내 젊은 날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행복을 주는 남자
초판 1쇄 인쇄일 2002년 6월 07일
초판 1쇄 발행일 2002년 6월 20일 P. 76-78
2천 년을 거쳐 대우주가 찾아낸 호텔맨 한 사람
생명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찾아 하늘 위의 하늘을 열고 ‘큰빛VIIT’을 찾았고, 이 세상 온갖 물방울과 물줄기를 마다 않고 모두 받아들이는 마음(海心)을 품어 안은 호텔맨 한 사람. 머리 위에 떠 있는 일월성신과 삼라만상의 이치를 이해 하였으며 한 순간 머물다 흩어져갈 육체에는 이 세상 부귀영화가 의미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 영원히 남을 마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는 사람, 그러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공경하고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사랑할 줄 아는 지극히 평범한 호텔맨 한 사람.
숱한 파란을 굽이굽이 겪기도 하였지만 그 과정들이 대우주의 섭리임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그 자신의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 사람. 산사의 다람쥐 한 마리의 재롱과 사무실 창가에 모여드는 참새들의 지저귐과 길거리의 이름 모를 풀 한 포기와 작은 조약돌 하나에서도 우주의 마음과 고요한 숨결을 듣고 어루만져줄 줄 아는 평범한 사람.
한 사형수의 눈언저리에서 진정한 통회와 아픔을, 그리고 우주의 진리까지도 볼 수 있었던 호텔맨 한 사람. 바람은 볼 수 없었지만 나뭇잎의 흔들림에서 한 점 착오 없이 우주 삼라만상을 통제해 나가는 마음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았고,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마음에서 절대자의 전지전능한 마음까지 스스로 깨쳐낼 수 있었던 한 사람.
어른이 된 지금도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그 마음만큼은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계산성당 제대(祭臺)에서 복사(服事) 서면서 호텔이란 별난 곳까지 극과 극의 환경에서 20년이란 시간에 머물렀던 한 사람…
대우주의 마음은 각계각층의 유명하다는 사람들을 다 제쳐 놓고 호텔이란 엉뚱한 곳에서 일하는 한 사람을 찾아내어,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를 준비하는 우주 최첨단 시대에 걸맞지 않는 초자연적인 ‘빛VIIT의 힘’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고 맑게 하여 창조의 마음, 인간 본래의 참마음으로 소생 시키고자 하시니…
‘눈도 코도 귀도 모습도 없는 진리시여, 오로지 당신 뜻에 맡깁니다’란 생각을 올렸을 땐, 하늘 위로 하늘이 열리고 황홀한 빛VIIT과 향기가 쏟아져 내렸다. 지금 이 글을 맺는 시각에도, 그 빛VIIT과 향기는 온 방 안을 감싸 내리고 있으며, 양손 언저리와 곁에 둔 난초 잎사귀에서도 금빛VIIT이 솟구쳐 오르고 있다. 이 시각, 어렵고 힘들어 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이 빛VIIT과 향기를 나눈다. 특히 먼 곳에서 거동이 불편해 찾아오지 못하고 애타하는 모든 병든 이에게도 이 빛VIIT과 힘을 보낸다. 또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 세상 어두운 곳에 있는 분들에게도 이 밝은 빛VIIT을 쏟아 보낸다.
출처 : 빛VIIT으로 오는 우주의 힘 초광력超光力
1996.07.10. 1판1쇄 P. 209~210 중
첫댓글 귀한문장 차분하게 살펴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운영진님 빛과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우주마음과 현존의 빛 학회장님께 무한 공경과 감사와 감사의 마음 올립니다.
2천년을 거쳐 대우주가 찾아낸 호텔맨 한사람,
무한 공경과 감사의 마음 올립니다 .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
우주마음과 학회장님께
존경과 감사올립니다
기적을 이루시는 우주마음과 어렵고 힘들어하는 모든 분들께 빛VIIT과 향기를 나누시고,
빛VIIT과 힘을 보내시는 학회장님께 무한한 감사와 공경의 마음 가득 올립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운영진님, 귀한 빛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순수하고 자애로우신 학회장님께 무한 감사드립니다.
빛의 선택을 받으시고 빛의 뜻에 따라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하여 건강과 행복을
되찾아주기 위해 한결같은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걸어오신 학회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빛으로 마음을 정화하여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에 우주마음님과 학회장님께
무한 감사와 공경의 마음을 올립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이집트 디느엘 바흐리 성당의 벽화가 하트셉수트 여왕의 인류 최초의 여행 .
너무 아름답습니다
감사합니다.
추천을 아무나 받는게 아니지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현존의 빛으로 오신
학회장님께 감사와 공경의 마음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우주마음님 학회장님 감사합니다
깊은공경의 마음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빛 의 글 볼수 있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빛의 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빛의 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