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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의 천년 그리고 지금
운문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한 신승이 창건하였다.
608년(진평왕 30)에 원광 국사가 제1차 중창하였다.
원광국사는 만년에 가슬갑사에 머물며 일생 좌우명을 묻는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고 한다.
제2차 중창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이 오갑사(五岬寺)를 중창하였다.
937년 고려 태조 왕건은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하고 전지(田地) 500결을 하사하였다.
제3차 중창은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가 송나라에서 천태교관을 배운뒤 귀국하여 운문사에 들어와 중창하고 전국 제2의 선찰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소실되었다.
1690년 (숙종 16) 설송(雪松)대사가 제4차 중창을 한 뒤 약간의 수보(修補)가 있어 왔다.
1835년 운악(雲岳)대사가 제5차 중창을, 1912년 긍파(肯坡)대사가 제6차 중창을 하였다.
1913년 고전(古典)선사가 제7차 수보하였고, 비구니 금광(金光)선사가 제8차 수보를 하였다.
1977에서 98년까지 명성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대웅보전과 범종루와 각 전각을 신축, 중수하는 등 경내의 면모를 한층 일신하였다.
현재는 30여 동의 전각이 있는 큰 사찰로서 규모를 갖추었다.
운문사는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개칭되어 승려 교육과 경전 연구기관으로 수많은 수도승을 배출하고 있다.
나말려초의 운문사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557년(진흥왕 18 년)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5갑사를 건립하였는데,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남쪽에 천문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창건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운문사와 대비사 뿐이다.
그후 600년 (신라 진평왕 22) 원광 국사가 중창하였다고 보나 다른 견해도 있다.
그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화랑도인 추항과 귀산에게 세속 오계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오갑사가 창건된 시기는 신라가 불교를 중흥하고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여 군비를 정비할 때였다.
이때 오갑사가 운문산 일대에 창건되고 화랑수련장이 만들어 진다. 그것은 곧 신라가 서남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가는 과정으로써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로서 당시 신라로서는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고려, 조선시대의 운문사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뒤 후삼국의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937년(태조 20년), 대작갑사에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 고 한다.
이 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개칭되었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 학일이 제3차 중창한 후 왕사로 책봉되었다.
원응국사는 1129년(인조 7) 부터 이 절에 머무르실 때 운문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무르셨다.
이 곳에서 일연은 『삼국유사』 의 집필을 착수하였다. 운문사의 절 동쪽에는 일연선사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조선시대인 18세기 중반, 운문사는 설송 연초대사가 제4차 중창할 때와 19세기 전반 헌종 년간에서 운문사의 사세는 상당했다. 운문사의 제5차 중창주인 운악화상은 1839년에 오백전을 중수하였다. 이듬해 응진전과 명부전, 미타전, 내원암, 북대암등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청신암을 창건하였고, 1842년 금당을 중건하였다.
근현대의 운문사
해방이후 제 1세 김상명 스님에서 제 4세 박상웅스님까지 잠시 대처승이 거주하였다.
1950년대 교단정화 이후 비구니 정금광 스님이 1955년 초대 주지로 취임하여 제 8차 보수.중창하였다.
이후 2.3대 유수인, 4대 배묘전 , 5대 이태구, 6대 안혜운, 7대 위혜안 스님을 거쳐 8대부터 12대까지(1977~1998) 전명성 스님이 운문사 주지와 학장을 겸임하면서 제9차 중창불사를 이룩, 대웅보전과 요사 등 29동을 신축하고, 만세루 등 기타 전각들을 중수하는 등 명실공히 대가람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어 1998년부터 제13대 주지로 송혜은 스님이 부임하면서 선원을 신축하여 교와 선을 아울러 익힐 수 있는 도량으로 가꾸었다. 2002년부터 제14대 주지는 흥륜강사스님이 소임을 사셨으며, 15대는 2010년까지 진성스님이 주지를 맡았다.
2014년까지 일진강사스님, 2018년까지 진광강사스님, 2022년까지 운산강사스님, 2022년부터 2024년 10월 소임만기를 앞둔 진성스님이 주지소임을 살고 은광강사스님이 차기주지소임으로 내정되어 있다.
1997년 비구니 강사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으로는 최초로 승가대학원이 개설되었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된 이래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명칭이 바뀌고 전문교과 과정과 교수진을 확보하여 승가대학의 명분에 걸맞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2024년 현재까지 60회, 209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2008년 설립한 "보현율원"은 11명, 2010년 교육원으로 부터 인가를 받은 "한문불전승가대학"은 6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곳에서 경학을 수학하고, 계율을 수지봉행하고 있으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 청규를 철저히 실천하고 있다.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와 학인수를 자랑하고 있다.
삼국유사 속 운문사
보양과 이목
승령 보양전에는 고향과 성씨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삼가 살피건데 청도군 사적에는 이러하다.
천복 8년 계묘(태조 즉위 제 26년임) 정월 일에 청도군 계리심사 대내말 순영과 수문등의 주첩공문에 보면, 운문사 선원 장생의 남쪽은 아니점이요, 동쪽은 가서현이라 하였고 동수삼강전 주인 보양화상, 원주 현회장로, 정좌 현양상좌, 직세 신장로, 정좌 현양상좌, 직세 신원선사라고 하였다.
(위의 공문은 청도군 도전 장전에 준한 것임)
또 개운 3년 병진의 운문사 선원의 장생표탑 공문 한 통에는 장생이 11인데, 아니점 가서현,무현,서북매현[면지촌으로도 되어 있음],북저족문 등이라고 하였다. 또 경인년 진양부첩에는 5도의 안찰사가 각 도의 선교사원을 처음으로 창건한 년월과 형지를 조사하여 장부를 만들 때 차사원이던 동경장서기 이선이 조사하여 기재한 것이라고 하였다.
정풍 6년 신사[대금의 연호로서 고려 의종 즉위 16년임] 9월의 군중 고적비보기에 따르면 청도군의 전 부호장 어모부위 이칙정의 호적에 옛사람의 소식 및 언전에는 기록하기를, 치사 상호장 김양신, 치사 호장 민육, 호장 동정 윤응전, 기인 진기 등과 당시 상호장 용성 등의 말이 있다. 그때 태수 이사로, 호장 양신의 나이는 60세 이상이었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운운하였는데 다음은 준하지 않았음).
신라시대 이래 이 군의 사원으로서 작갑사 이하 크고 작은 사원은 삼국이 난리로 인하여 망해갈 즈음 대작갑,소작갑,소보갑,천문갑,가서갑 등 5갑의 절이 모두 파괴되고, 5갑의 기둥을 합쳐서 대작갑사에 두었다. 조사 지식(知識: 위의 글에서는 보양이라고 하였음)이 대국에서 불법을 전수받고 돌아오다 서해 가운데 이르렀을 때 용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게 하고 금실로 수놓은 비단가사 한 벌을 주었다. 겸하여 한 아들 이목을 주어 받들어 모시고 뒤따라가게 하면서 부탁하기를, “지금 삼국이 소란하여 불법에 귀의한 군주가 없지만, 만약 내 아들과 더불어 본국의 작갑으로 가서 절을 짓고 거처하면 적병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몇 년 안에 반드시 불교를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 삼국을 안정시킬 것이요.”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서로 이별하고 돌아와서 이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스스로 원광이라고 일컫는 노승이 인궤(印櫃)를 안고 나타나서 전해 주고 사라졌다.
[살피건대 원광은 진나라 말기에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개황 연간에 동쪽으로 돌아와서 가서갑에 머무르다가 황룡사에서 죽었으니, 계산해 보면 청태 초에 이르기까지 무려 300년에 달함. 이제 여러 갑사가 모두 황폐한 것을 비탄하다가 보양이 와서 장차 일으키려고 한 것을 기뻐하여 고한 것이리라].
이에 보양이 황폐해진 절을 일으키려고 북령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뜰에 5층 황탑이 있었으므로 가서 찾아보았으나 자취가 없었다. 다시 올라가서 바라보자 여러 마리의 까마귀가 땅을 쪼고 있었다. 이에 바다의 용이 작갑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서 찾아 파보니 과연 무수한 벽돌이 남아 있었으므로 모아서 높이 쌓아 탑을 완성하자 남은 벽돌이 없었다.
이에 이곳이 전대의 절터였음을 깨닫고 절을 세워서 건주하며 인하여 작갑사라고 이름하였다. 얼마 후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였는데, 법사가 이곳에 절을 짓고 산다는 말을 듣고 5갑의 전답 500결을 합하여 이 절에 주고, 청태 4년 정유에 운문선사란 액호를 내렸으며 가사의 영음을 받들었다.
이목이 항상 절 옆에 작은 못에 살면서 불법의 교화를 도았는데, 어느 해 갑자기 가뭄으로 밭의 채소가 타게 되자 보양이 이목에게 명하여 비를 내리게 하였다.
그러자 한 경내에 흡족하게 비가 내렸는데, 천제가 자신도 모르게 하였다며 장차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이목이 법사에게 급히 고하였다. 법사가 이목을 상 아래에 숨겼는데, 얼마 후 하늘의 사자가 뜰에 이르러서 이목을 내놓으라고 청하니, 법삭 뜰 앞에 있는 배나무를 가르키자 벼락을 내리고 하늘로 올라갔다. 벼락을 맞은 배나무는 부려졌는데, 용이 어루만져주자 즉시 소생하였다(또는 보양이 주술로써 살렸다고 함). 그 나무가 근년에 쓰러지자 어떤 사람이 방망이를 만들어서 법당과 식당에 두었는데, 그 방망이 자루에 명(銘)이 있었다.
처음에 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먼저 추와의 봉성사에 머물렀는데, 마침 태조가 동쪽 지방을 정벌하여 청도 땅에 이르렀을 때 산적이 견성(犬城: 우뚝한 산봉우리가 물가에 있는데 오늘날 세인들이 그 이름을 좋지 않게 여겨서 견성으로 고쳤다고 함)에 모여서 교만하기 짝이 없었다. 태조가 산 아래에 이르러서 법사에게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술책을 물으니, 법사가 답하기를, “대저 개라는 동물은 밤에는 지키고 낮에는 지키지 않으며, 앞쪽은 지키지만 뒤쪽은 잊어버립니다. 그러니 마땅히 낮에 그 북쪽을 공격하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그 말대로 하여 과연 패배시키고 항복을 받았다.
이에 태조가 그 신모(神謀)를 가상하게 여기고 해마다 가까운 현의 조세 50석을 주어서 향화를 받들게 하였기 때문에, 절에 태조와 보양 두 성인의 진용을 안치하여 봉성사라고 이름하였다. 후에 법사가 작갑사로 옮겨서 크게 창건하고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법사의 행장은 고전에 실려 있지 않다. 속전에 말하기를, “석굴사 비허사[備虛師: 혹은 비허사(毗虛師)로도 되어 있음]와 형제가 되고, 봉성사,석굴사,운문사 세 절이 봉우리를 맞대고 나란히 있어 서로 왕래하였다.”라고 한다. 후세 사람이 신라의 <수이전>을 개작하면서 함부로 작탑과 이목의 일을 원광법사전에 기록하고 견성에 관계된 것을 비허전에 실은 것은 잘못이다. 또 <해동승전>을 지은 자가 그것을 따라 윤문함으로써 보양의 전이 없게 하여 후세 사람이 의혹을 품게 하였으니, 그 얼마나 무망한가.
운문사(雲門寺)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4 원광서학(圓光西學) 및 보양이목조(寶壤梨木條)에 원광법사와 운문사는 관련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적기 寺蹟記〉에 따르면 고려시대인 937년(태조 20) 중국 당(唐)나라에서 법을 전수받고 돌아온 보양국사(寶壤國師)가 까치떼의 도움으로 이 절을 짓고 작갑사(鵲岬寺)라 했으나, 943년 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보양국사가 절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많은 전답과 함께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105년(숙종 10)에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중창한 이후로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인 1690년(숙종 16) 설송(雪松)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 이 절에는 조계종 운문승가대학이 설치되어 많은 비구니들의 교육과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萬歲樓)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淸道 雲門寺 大雄寶殿)
보물 지정(등록)일 : 1985년 1월 8일
소재지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길 264, 운문사 (신원리)
시대 : 조선시대 17세기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불전
수량/면적 : 1동
신라시대에 세운 운문사는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는데 지금의 절은 조선 숙종 44년(1718)에 있었던 네 번째 보수 때의 것이다. 대웅보전도 이때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기둥 사이의 간격을 넓게 잡아서 같은 규모의 건물보다 크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다포계 건물들과는 달리 장식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앞면에는 꽃무늬를 넣은 문을 달았는데, 특히 가운데 칸은 넓어 5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안쪽은 큰 기둥을 하나만 세워 넓고 탁 트인 공간을 꾸미고 있다. 천장의 가운데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미고 화려하게 채색해 놓았다. 건물의 짜임이 조선 중기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청도 운문사 금당 앞 석등(淸道 雲門寺 金堂 앞 石燈)
청도 운문사 금당 앞 석등(淸道 雲門寺 金堂 앞 石燈)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사에 있는, 남북국 시대 신라의 석등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운문사 금당 앞에 놓여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바닥돌과 하나로 이루어진 아래받침돌에는 여덟 장의 잎을 새긴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 놓인 가운데기둥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으며, 윗받침돌에는 각 면마다 연꽃이 새겨져 있다. 화사석에는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마련해 두었다. 지붕돌은 경쾌한 모습이며, 꼭대기에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남아 있다.
각 부분이 잘 균형을 이룬 우아한 모습의 통일신라시대 석등이다.
청도 운문사 동호(淸道 雲門寺 銅壺)
보물 제208호. 높이 55cm, 입지름 19.5cm, 몸지름 31cm. 몸체의 어깨부분에 새겨진 명문인 "咸雍三年六月日改造童海重參拾斤都監大德成念"에 따르면 1067년(문종 21)에 개조되었고 무게는 30근이었다고 한다. 그 용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감로준이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어 절에서 사용했던 불구의 하나로 추측된다. 몸체는 원통형으로 뚜껑과 높은 굽이 달려 있으며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몸체의 좌우에는 여의두무늬 모양의 손잡이 고리가 붙어 있고 뚜껑은 중앙에 둥근 마디가 있는 기둥 위에 연판과 십자형의 화염무늬가 장식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의 꼭지가 달려 있다.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淸道 雲門寺 圓鷹國師碑)
보물 지정(등록)일 :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사길 264(운문면, 운문사)
시대 : 고려시대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면적 : 1기
운문사에 있는 이 탑비는 고려시대 중기의 승려 원응국사(1051∼1144)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응국사는 일찍 출가하여 송나라에 가서 화엄의 뜻을 전하고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워 귀국하였다. 1109년 선사(禪師)가 되었고, 인종 22년(1144) 운문사에서 93세로 입적하였다. 비는 비받침, 비몸, 머릿돌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받침돌과 머릿돌이 없어진 상태이다. 다만 세 쪽으로 잘린 비몸만 복원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그의 행적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비가 깨어져 알 수 없으나, 국사가 입적한 다음해에 인종이 국사로 명하고, 윤언이에게 글을 짓게 하였다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대략 1145년 이후로 짐작된다.
청도 운문사 석조여래좌상(淸道 雲門寺 石造如來坐像)
보물 지정(등록)일 :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길 264, 운문사 (신원리)
시대 : 고려시대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석조 / 불상
수량/면적 : 1구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에 모셔져 있는 높이 0.63m의 고려시대 석조여래좌상이다.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는 완전한 형태의 불상이지만, 호분이 두껍게 칠해져 세부표현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분명하다. 신체 비례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인데, 가는 눈썹·작은 눈·오똑한 코·작은 입 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평판적인 모습이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그 안에 비스듬히 표현된 내의이 보인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배꼽 부분에 놓여져 있는데, 손이 작고 표현이 섬세하지 못해 투박한 모습이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투박한 모양이며 가장자리에 형식적인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매우 특이한 양식으로 주목된다. 맨 윗부분은 평면 타원형으로 14개의 연꽃잎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는 6각형이며, 아랫부분은 긴 6각형에 18개의 연꽃잎이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겉옷 안에 표현된 속옷, 전반적으로 투박해진 표현기법 등에서 9세기 불상을 계승한 10세기 초의 불상으로 보인다.
청도 운문사 사천왕석주
보물 지정(등록)일 :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길 264, 운문사 (신원리)
시대 : 통일신라시대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기타
수량/면적 : 4기
이 석주는 원래의 위치를 알 수 없고 그 용도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각 상의 이름을 밝히기가 어렵다. 그러나 손에 들고 있는 지물에 의해 대체로 삼고저를 쥐고 있는 제1석주의 사천왕상은 남방의 증장천으로 생각되며, 제2석주는 탑을 든 북방의 다문천상, 제3석주는 불꽃[火峰] 또는 꽃가지를 든 서방의 광목천상, 제4석주는 양손으로 칼을 받치고 있는 동방의 지국천상으로 추정된다.
이 사천왕상은 모두 원형의 두광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무인형으로 악귀를 밟고 천의자락을 날리면서 서 있으며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다. 또한 신체는 장대하지만 대체로 조각적인 양감이 줄어들었고, 서 있는 다리의 자세가 엉거주춤하며 갑옷의 띠주름이 굵어지고 세부표현이 정교하지 못한 점 등은 9세기경의 통일신라 석탑이나 부도에 새겨진 사천왕상과 양식적으로 유사하다.
청도 운문사 삼층석탑
보물 제678호. 높이 540cm. 원래 기단부분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부 보수되었으며 특히 상층기단의 팔부중상에 새로운 석재가 첨가된 흔적이 남아 있다. 2기의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놓여진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형식으로, 크기나 양식 면에서 거의 동일한 특징을 보여준다.
하대석은 지대석과 붙어 있는데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2개씩 새겨져 있고 그 위를 넓고 편평한 갑석이 덮고 있다. 상층기단에는 각 면에 우주와 1개의 탱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 팔부중상을 1구씩 조각했다. 팔부중상은 손과 발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 좌우에는 천의가 날리고 있으며, 뒤에 부분적으로 보수되어 다소 어색한 느낌을 주는 상도 있다. 탑신부는 옥개석과 옥신석이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는데 전체 비례로 보아 1층 옥신이 조금 높은 편이다.
옥신석에는 각 층마다 우주가 표현되어 있고,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처마 끝이 수평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두 탑 모두 사각형의 받침대 위에 노반·복발·앙화가 놓여 있다.
청도 운문사 처진소나무
천연기념물 지정(등록)일 1966년 8월 25일
소재지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68-7번지
수량/면적 1주
운문사의 처진소나무는 가지가 밑으로 축 처진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매우 희귀하다. 운문사의 처진소나무는 운문사의 앞뜰에서 자라고 있으며 나무 높이 9.4m, 가슴높이 둘레 3.8m이다.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한때 반송(盤松:키가 작고 밑동부터 가지가 옆으로 퍼지는 소나무)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이 나무는 3m 정도의 높이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반송과는 다른 소나무로 본다. 운문사는 1,400년 전에 지었다고 하고 임진왜란(1592) 때 이 나무는 상당히 컸었다하니 나무의 나이는 약 400~5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 소나무는 고승(古僧)이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꺾어서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스님들은 매년 봄·가을에 뿌리 둘레에 막걸리를 물에 타서 뿌려주는 등 정성을 다하여 가꾸고 있다. 청도 운문사 소나무는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답고, 전형적인 처진 소나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며,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운문사 사리암
사리암(邪離庵)은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호거산에 위치한 운문사의 암자이다. 비구니 사찰이자,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나반존자 기도처이다. 3번 와서 기도하면 1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소문이 있다. 예전에 쌀이 나왔다는, 운문산 4굴 중의 하나인 사리굴이 있다.
사리암 연혁
조선시대 숙종 44년(1718년)에 저술된 경상도 청도군 동호거산 운문사 사적(慶尙道淸道郡東虎距山雲門寺事蹟)에 운문사와 부속암자들의 기록이 남아있다. 사리암 경내에 설치된 연혁판에서도 간단한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시대
930년 : 고려 초의 고승 보량국사가 초창하였다.
조선 시대
1845년(조선 헌종 11년) : 정암당 효원대사가 중창하였다.
일제 강점기
1924년 : 증축하였다.
1935년 : 중수하였다.
대한민국
1977년 : 혜은스님이 원주로 부임하였다.
1978년 : 전기불사를 시작했다.
1980년 : 전 부산 거사림 회장 이인희 거사의 후원으로 삼층요사를 신축하였다.
1983년 : 독실한 불자들의 동참으로 법당불사를 하였다.
1984년 : 여러 건물을 개축하여 기도처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주요 볼거리
사리굴
사리굴은 운문사 4굴 중의 하나이다. 예전에는 살고 있는 사람 만큼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더 많은 쌀을 나오게 하려고 욕심을 부려 구멍을 넓힌 후부터는 쌀이 나오지 않고 물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사리굴에 나반존자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에서도 전각처럼 기도를 할 수 있다.
사리암 관음전
관세음보살상과 탱화 그리고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예불 때마다 불자들이 비구니스님들과 함께 기도를 하는 곳이다.
천태각
천태각은 일명 독성각이라고 한다. 1845년(조선 헌종 11년)에 신파 대사가 초창하여 나반존자상을 봉안하였다. 나반존자상의 후면에는 1851년(조선 철종 2년)에 봉안한 독성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나반존자
나반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도를 닦아 깨달음을 증득하여 독성(獨聖)이라고도 불린다.
나반존자는 부처님의 제자 중 한 분인 빈두로존자이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력을 세운 분이시다.
항상 천태산 위에서 홀로 선정을 닦으며 열반에 들지 않고 계신다. 현재 말세의 복을 주는 밭이 되어주시기 때문이다.
산신각
1965년 경봉 화상이 점안한 산신탱화가 있다.
중수비
천태각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나와 왼쪽을 보면, 천태각이 있는 암석 아래에 비석이 하나 있다. 이 비석은 금호당 화상이 세운 중수비이다.
올라가는 길
절벽에 위치한 기도도량으로 937계단을 올라가면 된다. 케이블카가 있지만 화물용으로 사람이 탈수는 없다.
주말에는 기도를 하는 불자들로 항상 붐빈다.
[운문사&사리암]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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