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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콘텐츠 봉사자의 날 2일째 프로그램을 마치고, 북한이탈주민들과 함께 하는 통일축전에 온라인으로 참석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치고 두북수련원에서 문무대왕릉으로 향했습니다. 정토회에서 법륜 스님의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람들도 숙소에서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치고 아침식사를 한 후 문무대왕릉으로 이동했습니다.
8시에 모두 문무대왕릉 안내 표지판 앞에 모여 콘텐츠 봉사자의 날 2일째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이곳 문무대왕릉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660년 태종 무열왕 때 백제가 멸망했고, 661년에 태종 무열왕이 돌아가십니다. 문무대왕이 즉위한 뒤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합니다. 그리고 신라가 당나라와 8년 간 전쟁을 해서 676년에 삼국 통일을 이룹니다.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낸 뒤를 삼국 통일의 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 기간을 지휘한 사람이 문무대왕입니다. 그래서 신라 사람들은 문무대왕이 삼국 통일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여깁니다.
나라만 지킬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이 된들 어떠냐
신라를 위협한 나라가 백제와 고구려였는데 둘 다 멸망했고, 또 신라를 위협했던 당나라와는 우호 관계를 맺었고, 유일하게 남은 나라가 바다 건너 왜였습니다. 그래서 문무대왕이 죽을 때 ‘내가 죽어서 용이 되어 동해로부터 쳐들어오는 왜를 막겠다. 그러니 내 뼈를 동해에 묻어 달라’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한 스님이 ‘용이 아무리 힘이 있다 한들 사람보다 한 계급 낮은 짐승인데, 어떻게 짐승이 되려고 합니까. 대왕께서는 한 계급 높은 천상으로 가야 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문무대왕은 ‘나라만 지킬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이 된들 어떠냐’ 하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당시 신라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산이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이었습니다. 낭산 기슭에 문무대왕을 화장해서 유골은 동해에 묻고 화장한 자리에는 탑을 세웠는데, 그 탑이 능지탑입니다. 능을 안 만들고 불교식으로 탑을 세운 겁니다. 삼국유사의 내용이 단순히 전설처럼 알려져 오다가 고고학적 발굴을 하면서 대부분의 내용들이 사실로 밝혀진 겁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고 다 함께 해변을 걸어 문무대왕릉 가까이에 다가갔습니다.
“저기 보면 바위 사이로 물이 들어왔다가 나오는 모습이 보여요? 저기 바위 위에 하얀 건 뭐예요?”
“새똥이요.” (웃음)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세상 사람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부지런히 콘텐츠를 제작해 나갈 것을 다짐해 보았습니다. 희망의 기운을 각자의 자리에서 확산시켜 나가자는 의지를 다지며 팀별로 스님과 사진을 찍었습니다. “출판팀”, “영상팀”, “스님의하루팀” 각자 자신이 소속된 팀을 외치며 오늘 이 순간을 기념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바다를 바라보며 자유 시간을 가졌습니다. 늘 온라인 공간에서만 만나던 도반들과 함께 사진도 찍고 해변을 거닐며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파도 소리를 뒤로 하고 다시 차를 타고 감은사지로 향했습니다.
3층 석탑을 보러 올라가기 전에 스님이 이곳 감은사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감은사지입니다. 지금은 대종천이 저쪽 편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당시에는 이곳 감은사 쪽으로 흘렀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경지 정리를 할 때 논 밑을 파보았는데 대부분 자갈이었습니다. 그래서 동해에서 이곳 절까지 물이 들어오도록 했다고 합니다. 물길을 따라서 나라를 지키는 용이 절까지 오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법당 밑에도 수로를 만들었습니다.
문무대왕이 삼국을 통일한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을 담아 이 절의 이름을 ‘감은사’라고 했고, 왜구를 막기 위해 동해의 용이 되겠다고 유언을 남긴 문무대왕도 물길을 따라 이 절에 와서 법문을 들을 수 있게 만든 거죠.”
계단을 올라가자 중문이 나왔습니다. 양쪽에 동탑과 서탑이 쌍탑을 이루고 있고, 그다음에 금당 터가 있고, 맨 뒤에 강당 터가 있었습니다. 금당의 지하에는 정말로 물길이 들어왔을 법한 배수 시설이 되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스님의 안내에 따라 한 바퀴 둘러보았습니다.
강당 터에 도착하여 몸풀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별로 얼마나 공동체성이 강한지 재미있는 프로그램으로 겨루기를 해보았습니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몸풀기를 한 후 동탑과 서탑이 함께 보이는 자리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콘텐츠!”
다시 차를 타고 경주로 향했습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일화로 유명한 월정교에 내렸습니다.
월정교 앞에서 스님이 ‘원효대사의 깨달음과 수행’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원효대사는 신라의 화랑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출가해서 스님이 되었는데요. 원효대사는 젊은 시절에 글을 아주 잘 쓰고 불교에 대해 해박했는데 자신이 아는 것을 다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느끼고 승려의 지위를 버리고 재출가를 한 분입니다. 원효대사의 일생을 깊이 살펴보면 단순한 파계가 아니라 의도적 파계를 했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원효대사의 수행 과정을 자세하게 이야기한 후 어떻게 해서 파계를 하게 되었는지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중략) 원효대사가 깨닫고 보니 마땅히 구제받아야 할 중생은 천민들이 아니라 바로 원효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방울스님이 구제받아야 할 중생이 아니라 방울스님을 불쌍하게 본 원효의 어리석은 마음이 구제받아야 할 중생이었습니다.
구제받아야 할 중생은 나의 어리석은 마음이구나
본래 이 세상의 존재가 깨끗하고 더러움이 없다면 본래 구제할 것도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원효대사는 처음에 자신이 불쌍한 중생을 외면했다고 깨달았고, 그래서 보살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깨닫고 보니 세상은 본래 구제할 바가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마땅히 구제받아야 할 중생은 바로 나의 어리석은 마음이었어요. 나의 어리석은 마음을 깨치는 것이 구제라는 거죠. 그렇게 딱 깨닫고 보니 세상이 환해졌습니다. 그래서 천민 동네에 다시 들어갔습니다. 처음에 천민 동네에 갔다가 도망을 나와 다시 간다고 할 때는 ‘그 사람들도 외면하지 말고 다 구제해야 한다’ 하는 생각이었는데, 지금 깨닫고 나서는 구제하러 천민 마을에 들어가는 걸까요? 아니면 구제할 대상이 없는 걸까요?”
“구제할 대상이 없어졌습니다.”
“구제할 대상이 없으니 그곳 천민들과 친구가 되려고 그 마을에 다시 들어간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천민들이 유명한 원효대사가 오셨다고 해서 떠받들려고 할 뿐 친구가 되지 않는 거예요. 예전에 원효가 그들을 더럽다고 외면한 것은 본인의 책임이지만, 이번에 그들이 원효를 성스럽다고 떠받드는 것은 그들의 책임 아니겠어요.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어떡하겠어요? 그러나 원효는 이것마저도 나의 문제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원효는 지난번에는 더러움에 치우쳐 더러움을 버렸다면 이번에는 성스러움을 버립니다.
출가한 스님이 성스러움을 버리는 길이 뭘까요? 사람들이 ‘법륜스님’ 하며 좋아하다가 어떤 일을 저지르면 ‘저 미친놈’ 이럴까요? 그것이 바로 파계입니다. 여자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 그동안 지은 공로는 순식간에 없어져 버립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미쳤다’ 하면서 손가락질을 합니다. 감옥에 가거나 하는 정도로는 사람들이 ‘무슨 의도가 있겠지’ 하고 좋게 생각하는데, 여자 문제가 생기면 ‘그 중도 뭐 마찬가지네’ 하게 됩니다. 그래서 원효는 그 성스러움을 스스로 버려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성스러움을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성스러움마저 버리고 천민들과 친구가 된 원효대사
그 당시에 공주는 결혼하면 궁 안에 살지 못하고 궁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이 궁 밖에 왕의 여동생인 요석 공주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통일 전쟁에 나가 전사해 과부로 혼자 살고 있었어요. 때마침 원효가 남산을 다녀와서 이 월정교 다리를 건너며 달구경을 하다가 다리 난간에서 떨어져 옷이 다 젖었습니다. 물에 빠진 쥐 신세가 되니까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가까이에 살고 있는 요석공주가 그 모습을 봤나 봐요. 그래서 옷을 갈아입히러 원효를 집으로 데려갔는데 거기서 썸씽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원효대사가 파계를 했다고 소문이 나니까 주류사회 전체에서 다 내쳐져 버린 겁니다. 원효대사는 죽고 나서 500년 뒤에 복권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원효대사를 높이 보지만 당시에 원효대사는 그 일이 있고 나서 승려가 아니고 소승거사라는 이름을 갖고 살다가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모르고 흔적 없이 사라졌어요. 그런데 500년 뒤에 원효가 쓴 책이 중국에서 엄청나게 유명해져서 중국 사람들은 이 글을 쓴 사람을 보살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려시대에 대각국사 의천이 중국에 유학을 갔는데 중국에서 보니 원효가 성인이 되어 있었어요. 당시 고려에서는 원효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그래서 다시 원효를 복권시킨 겁니다. 원효의 기록이 삼국유사에 남아있는 이유는 고려시대에 삼국유사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원효가 복권이 된 뒤였어요.
원효가 파계를 하고 사람들이 다 원효를 내칠 때 원효는 다시 천민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천민들이 보기에 원효는 세상으로부터 비난받고 쫓겨 왔으니까 이제 떠받들 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금방 친구가 되었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원효가 천민들과 친구가 된 삶의 모습을 표현한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뱀 잡는 땅꾼이나 뽕따는 아낙네가 모두 천민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대장장이 아들 춘다’라는 말처럼요. 어느 날, 뱀 잡는 땅꾼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원효에게 ‘원효,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장례를 함께 치르자’라고 해서 따라갔습니다. 당시에 천민들은 관을 하지 않았어요. 시체를 그냥 갖다 버리니까요. 그래서 거적때기에 어머니 시체를 둘둘 말아서 아들은 어머니 머리를 어깨에 메고, 원효는 어머니 다리를 어깨에 메고 갔습니다. 그리고 구덩이를 파서 어머니를 땅에 묻으면서 친구가 원효에게 ‘야, 너는 옛날에 공부를 꽤나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우리 어머니를 위해서 염불 한 자락 해다오’ 하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원효대사가 쉬운 말로 ‘죽지 말지어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괴로움이요. 태어나지 말지어다. 다시 죽는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했습니다. 공이니 색이니 하며 어렵게 얘기하지 않고 쉽게 얘기했는데도 일자무식인 친구가 생각하기에 그 말도 너무 길었어요. 그래서 ‘야, 말이 너무 길다. 좀 짧게 해 봐라’라고 하니까 원효가 ‘생사고’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나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괴로움이다’ 하고 더 짧게 줄여서 말해 준 거죠. 그제야 친구가 수긍하고는 장례를 치렀어요. 그만큼 원효는 쉽고 친근하게 대중 속에 머물렀습니다.
천민들은 글자를 모르잖아요. 원효는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뭐라고 말을 해야 천민들이 관심을 가질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광대가 와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데 천민들이 웃고 난리인 거예요. 그 모습을 보고 힌트를 얻어서 ‘아, 저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고 자신도 부처님의 말씀을 노래로 지어 부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이것을 원효의 ‘무애무’와 ‘무애가’라고 합니다. 걸림이 없는 노래와 춤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반 민중들에게 그들의 문화로 불법을 전했습니다. 제법이 공하다는 얘기를 해봐야 사람들에게 안 통하니까요. 원효대사 이전에는 불교가 위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귀족사회에만 전래가 되었는데 원효대사 이후로는 불교가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생활적으로 전래가 되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월정교를 건너 경주 최부자댁으로 향했습니다. 향교를 둘러보고, 반월성으로 향했습니다.
반월성에 도착해 석빙고를 살펴보고 돌아와 다 함께 숲 속에 자리 잡고 앉았습니다.
1박 2일 동안의 콘텐츠 봉사자의 날 프로그램을 마무리하며 회향식을 했습니다. 스님은 매년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경주 일대를 안내합니다. 장소는 같지만 그 내용은 함께 하는 사람들의 상황에 맞게 조금씩 다릅니다. 오늘은 봉사하는 자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봉사자들은 스님에게 회향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콘텐츠 제작 봉사자들의 노고를 격려하면서 어떤 마음으로 봉사를 해야 수행이 깊어질 수 있는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1박 2일 동안 콧바람 좀 쐬었습니까?”
“네”
“그늘 속에서 살다가 햇살을 받고 기운을 좀 차렸습니까?”
“네”
“만 생명의 근원은 태양 빛입니다. 태양 에너지로 만 생명이 살아가고 있는데, 태양은 ‘내가 너희 생명의 근원이니라’ 하며 자랑하지 않습니다. 공기도 만 생명의 근원이고, 물도 만 생명의 근원이지만 자기를 뽐내지 않습니다. 만약에 벌과 나비가 없다면 이 세상의 많은 과일들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벌과 나비가 ‘우리가 없으면 과일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렇게 자랑하지 않죠. 그런데 유독 인간만이 좋은 일은 손톱만큼 해놓고 자랑은 태산만큼 하고, 나쁜 일은 태산같이 하고도 세상에는 손톱만큼만 내놓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괴롭지 않고 행복하게 살려고 해도 결과는 늘 괴로움에 빠지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왕들은 세상의 온갖 것을 다 뺏어가는 사람이에요. 여자도 예쁘면 다 데려가고, 물건도 좋으면 다 가져가고, 사람도 재주가 있으면 다 데려가고요. 늘 뺏어가는 사람이면서도 자기가 세상에 은혜를 베푸는 만백성의 어버이라고 포장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봉사를 해온 여러분께
부처님께서는 가진 것 하나 없이 밥은 얻어먹고, 옷은 주워 입고, 잠은 나무 밑에서 잤지만, 왕이나 부자에게 도와달라고 손 벌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괴로워하면 그들 또한 불쌍하게 여겨서 그들을 깨우치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에 이르도록 우리 삶에 있어서 중요하고 정말 귀중한 것들을 발견하고 만들어 낸 사람들은 대부분 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근래 와서 그런 사람 중에도 조금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 더 자연적으로 생각하고, 또 인류의 긴 역사를 생각하면, 본래 삶이라는 게 이름을 남기지 않고 살아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짧고 좁게 생각하면 우리는 어떻게든 자기의 공덕을 알리고, 인사를 듣고, 칭찬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괴로울 수밖에 없어요.
이런 시대에 여러분들이 10년을 봉사해도 법문 녹취를 누가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하나도 없고 ‘법륜스님이 말씀하셨다’ 이것만 남게 될 겁니다. 혹시 나중에 담당 책임자의 이름 정도는 남아 있을 수 있는데 여기 있는 여러분들은 이름이 남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내가 무엇이 되든 좋은 법이 세상에 전해져서 세상 사람들의 고뇌가 사라지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게 누구의 공덕이냐고 따질 게 뭐가 있는가?’ 하는 관점을 가져주셨기 때문에 이 일이 꾸준히 진행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예요. 위장, 대장, 소장, 간, 이런 내장은 비록 밖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이런 기관들에 의해서 생명이 유지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일을 손과 발이 합니다. 그러나 얼굴은 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를 상징하는 것은 얼굴이에요. 그래서 평소에는 다른 건 다 가리고 얼굴만 딱 내어놓고 있다가 수치스러운 일이 생기면 얼굴만 딱 가립니다. 재미있죠? 여러분들은 지금 몸을 다 가리고 얼굴만 내어놓고 있는데, 만약에 목욕탕에서 불이 났는데 수건이 한 장밖에 없다면 몸을 가릴까요? 얼굴을 가릴까요? 얼굴만 가리게 됩니다. 얼굴을 가리면 누군지 모르잖아요. 누군지 모르니 팔다리가 보이든 말든 상관을 안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몸도 특정한 역할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얼굴이 잘난척한다고 손발이 데모한 적이 없잖아요.
그것처럼 정토회는 법륜 스님이 주로 얼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법륜 스님이 특별히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역할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법문을 녹취하시죠?’, ‘즉문즉설 영상을 만드시죠?’, ‘스님의 하루를 쓰시죠?’ 이렇게 안 하잖아요. 전부 법륜 스님만 보고 ‘법륜 스님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얼굴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얼굴 역할이 좋아 보여도 실제로는 그렇게 좋지도 않아요.
여러분 덕분에 세상이 조금 더 행복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한 몸이라고 하면, 법륜 스님은 얼굴 역할을 하는 것이고, 사람들의 눈에 좀 보이는 손발 역할을 법사님들이나 책임자들이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옷에 가려져 있지만 신체의 중요한 부위예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묵묵히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덕분에 정토회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정토회가 우리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조금 힘들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일을 꾸준히 해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의 노력을 이용해서 정토회가 나쁜 일을 한다면 여러분도 봉사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토회가 해온 일들을 보면 나쁜 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죠?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 같지 않나요?”
“네.”
“그것도 확실히 믿을 건 못 되어요. 항상 매의 눈으로 감시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봉사를 오랫동안 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먹고 병이 나으면 되고, 마시고 목을 축이면 되고, 먹고 배가 부르면 되지, 꼭 누가 만들었다는 것을 내세울 필요가 있겠나’ 하는 넓은 마음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그 마음을 계속 내어주시길 바랍니다. 대신에 가끔가다 한 번씩은 햇살을 보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음지에 있었다고 해서 저도 1박 2일이나 시간을 낸 거니까 일상으로 돌아가시면 각자 맡은 소임을 더욱 열심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큰 박수와 함께 1박 2일 동안의 콘텐츠 봉사자의 날 프로그램을 모두 마쳤습니다. 스님은 집으로 향하는 봉사자들 한 명 한 명에게 악수를 건네며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수고해 주세요.”
스님은 곧바로 다음 일정을 위해 반월성을 걸어 나왔습니다.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온 스님은 오후 2시부터 북한이탈주민들과 함께하는 통일축전에 온라인으로 참석했습니다.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하자 한복을 입은 사회자가 인사말을 했습니다.
“전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들 안녕하십니까? 2024년 제21회 통일축전을 시작하겠습니다.”
통일축전은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병행하는 행사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역별로 22곳에서 800여 명이 함께 모여서 참여했습니다. 고려인들도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었습니다. 또 온라인으로 400여 명 참여해서 총 1200여 명이 함께한 가운데 먼저 합동차례 영상을 함께 보았습니다.
좋은벗들 인천경기서부 지역 활동가들이 임진각 망배단에 가서 추석 합동 차례를 지내며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을 새기고 왔습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은 영상을 보며 고향 생각에 눈물을 훔쳤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북한이탈주민들을 위해 격려의 말씀을 한 후 안양 지역을 시작으로 지역별 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누구~ 최강 짝짝 안양 짝짝 좋은 짝짝 친구 짝짝 좋은벗들 와~~~”
부천 지회에서는 ‘오! 필승코리아’를 개사하여 열띤 응원전을 보여주었습니다.
“오 통일 코리아(짝짝), 오오오오오(짝짝짝), 남북통일 평화 통일 자주 통일, 우리는 하나다!”
지역별 소개 시간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장기자랑이 펼쳐졌습니다.
남북 어린이가 함께 부르는 노래, 장구 연주, 피아노 연주, 트로트 노래 공연, 색소폰 연주 등 다양한 공연들이 이어졌습니다.
장기자랑의 열기가 점점 뜨거워지는 가운데 잠시 스님과 대화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두 명이 스님에게 인생 고민을 이야기하고 대화를 나눈 후 다시 장기자랑 시간을 이어갔습니다.
화성 지역에서는 통일축전을 위해 남북이 하나 되어 노래하면 좋을 것 같아서 윗동네 아랫동네 합창단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름은 남북새벗합창단이고, 2개월간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의상도 말끔하게 차려입고 ‘아름다운 나라’ 노래를 멋진 하모니로 불러 주어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장기자랑을 모두 마치고 다시 스님과의 즉문즉설 시간을 이어갔습니다. 한 분은 남한에 정착한 지 7년 되었는데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도 아닌 경계인으로 살아온 것 같다며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도 아닌 저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나요?
“저는 처음에 ‘남한에서 오래 살면 남한 사람이 되겠지’ 하고 남한 정착을 시작했는데, 정착한 지 7년 만에 남한 사람도 아니고, 북한 사람도 아닌 저의 정체성을 비로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점점 참개구리도 청개구리도 아닌 얼룩 개구리 같은 혼성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굉장히 많은 혼란을 느끼고 있습니다. 몸은 남한에 있는데 마음은 북한에 가 있고, 제가 살던 북한 자체가 부정당하는 이곳에서 매일 그런 뉴스를 보고 들으면서 산다는 게 저에게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요인이라는 것도 어느 순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정신분열증을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요? 분단구조가 해체된 상태에서 다시 원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가져보지만 그게 언제인지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분열 증상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요?”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북한에서 남한으로 왔기 때문에, 남한에서 북한으로 갔기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닙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살아도 생기는 문제이고, 캐나다나 유럽에 가서 살아도 생기는 문제예요. 이것은 다른 나라로 이주해서 가서 살면 누구나 다 생기는 문제입니다. 이주해서 생기는 문제 중에 제일 큰 것이 정체성 혼란이에요. ‘나는 호주에 가서 20년을 살았는데 한국 사람도 아니고 호주 사람도 아니다. 나는 도대체 뭐냐?’ 하는 이런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살아도 부모를 잘 돌보지 않을 거면서 외국에 살고 있어서 부모를 못 돌본다고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것은 이주민들이 갖는 가장 큰 특징입니다. 여러분들도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북한에 둔 부모님이나 가족들에 대해서 늘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도대체 남한 사람인지 북한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정체성 혼란도 느끼게 되고요.
태어나긴 북한에서 태어났지만 현재 살기는 한국에서 살고 있잖아요. 이것이 질문자의 정체성입니다. 태어나기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살기는 미국에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코리안 아메리칸’이라고 부릅니다. 한국계 미국 사람인 겁니다. 그럼 질문자는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북한계 한국인’ 또는 ‘조선계 대한민국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질문자의 정체성이에요. 그러니 자꾸 남한 사람과 자기가 똑같지 않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질문자는 남한 사람하고 똑같을 수가 없어요. 30년을 북한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남한에서만 산 사람하고 북한에서 살다가 남한에 온 사람하고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겠어요? 북한에만 계속 산 사람하고 북한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사는 질문자가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 자신을 남과 비교하면서 ‘내가 북한 사람이냐? 남한 사람이냐?’ 이렇게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나는 북한에서 태어나서 한국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자기 정체성이에요. 북한 사람보다는 자본주의 물이 좀 더 들었고, 남한 사람보다는 자본주의 물이 좀 덜 든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창의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이주민이 많다 보니까 해외여행을 가면 입국 카드를 쓸 때 항상 ‘너 태어난 곳이 어디니?’, ‘너 지금 어디에 사니?’, ‘너 국적이 뭐니?’ 이렇게 세 가지를 묻습니다. 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태어난 곳은 코리아, 사는 곳도 코리아, 국적도 코리아입니다. ‘왜 똑같은 걸 세 번이나 묻나?’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이 세상에는 태어난 데가 다르고, 국적이 다르고, 사는 데가 다른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세 가지를 묻는 거예요.
그렇다면 질문자는 태어난 곳이 노스 코리아입니다. 국적은 사우스 코리아입니다. 지금 어디서 살아요? 만약 일본에서 살면 재팬, 미국에서 살면 아메리카, 이렇게 쓰면 됩니다. 이것이 질문자의 새로운 정체성이에요. 자꾸 남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삼아서 ‘나는 남한 사람도 아니고, 나는 북한사람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북한계 한국인이다. 태어나기는 북한에서 태어나 자랐고, 현재 살기는 대한민국에 산다.’
이것이 질문자의 정체성이에요. 그래서 남한 사람보다는 북한에 대해서 많이 알고, 북한 사람보다는 남한에 대해서 많이 압니다. 서울말을 남한 사람보다는 못하지만, 북한 사람보다는 잘하고, 평양말을 북한 사람보다는 못하지만 남한 사람보다는 잘합니다. 나는 서울말과 평양말 두 가지를 다 할 줄 아는 것이 질문자의 정체성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예요. ‘크리스천 부디스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배경은 기독교이지만, 마음공부는 불교를 통해서 합니다. 이런 사람은 그냥 불자 하고는 달라요. 이걸 ‘크리스천 부디스트’라고 합니다. 자신의 종교를 버리지 않고 또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것처럼 질문자는 북한 출신 남한 사람인 겁니다.
이런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에서 두 번 생겨났습니다. 남북이 분단되고 6.25 전쟁 때 북쪽에서 오백만 명이 남쪽으로 내려왔어요. 남한에서 이걸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고 ‘이북내기’라고 그래요. 이 사람들이 남한에 와서 굉장히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남한에서 사는 사람은 다 자기 땅과 자기 집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북한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땅도 없고 집도 없었어요. 땅도 없고 집도 없으니까 장사밖에 할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장사가 하대 받을 때였어요. 그런데 남한 사회가 산업사회로 바뀌었습니다.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가 되니까 오히려 이북내기가 지금은 다 잘 살게 된 거예요. 농사짓는 사람은 점점 가난해진 반면 장사하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처음에 남한으로 내려와서 10년 정도는 불리했는데, 세상이 바뀌면서 이 사람들이 더 유리해져 버렸어요. 그래서 이북내기 중에 남한에서 가난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것처럼 요즘 남한의 젊은이들은 어떻습니까? 컴퓨터를 다루는 편한 직업만 하려고 하지, 기계를 수리하거나 힘든 일은 안 하려고 하잖아요. 지금 남한에서는 그런 일들을 외국인 노동자들이 다 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그런 일도 다 하고 살았잖아요. 앞으로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점점 없어지면 인건비가 훨씬 비싸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북한 출신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더 잘살게 되는 일이 벌어질 수가 있어요.
그러니 자기 정체성을 어디에 비교해서 ‘나는 이것도 아니고, 나는 저것도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북한에서 어려운 일을 다 겪어보고 나서 남한으로 왔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해도 북한에서 살 때와 비교하면 힘들지 않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남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자생력이 있습니다. 남한 사람이 미국에 이민을 가도 미국 사람보다 더 잘 살거든요. 아주 부자보다는 못 살지만 일반 서민보다는 잘 삽니다. 왜 그럴까요? 이민을 가서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고향을 절대로 숨기지 마세요. 일부러 자랑할 건 없지만요. ‘당신 말투 보니 어디 출신이에요? 연변 출신이에요?’ 하고 물으면 ‘아니요, 북한 출신입니다’ 하고 대답하면 됩니다. ‘고향이 어딘데요?’ 하고 물으면 평양이면 평양, 청진이면 청진, 이렇게 자랑스럽게 대답해야지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묻지도 않는데 내가 나서서 얘기할 건 없어요. 다만 묻는데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 북한에서 태어나 자란 것이 죄가 아니잖아요. 태어나보니 북한에 태어나 있었는데 그게 왜 죄에요? 태어나보니까 피부 빛깔이 노란 것은 죄가 아닙니다. 백인이 아니라고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태어나보니까 여자인데 이게 죄가 아니잖아요. 그런 것을 열등하게 생각하거나 숨기지 마세요. 그렇다고 자랑할 건 아니에요. 그러니 당당하게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북한계 한국인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으세요. 북한이라는 나라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굳이 문제를 말한다면, 북한의 정치 시스템과 정책이 문제지요. 그러니 내가 북한에서 태어나 자란 것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또 내가 남한에 간 것을 두고 나중에 북한에 가게 되었을 때 죄지은 것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한에 가서 좋은 것을 많이 배우고 공부했잖아요, 그 덕분에 나중에 여러분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북한에 사는 사람보다 훨씬 일을 잘할 겁니다.
월남전쟁이 끝나고 월남에서 4백만 명이 ‘보트피플’이라고 해서 바다로 도망을 갔거든요. 그래서 미국에 가서 살다가 베트남이 개방되니까 그 사람들이 미국에서 번 돈을 보내서 베트남의 초기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금 나쁜 게 나중에는 도움이 될 수 있어요. 북한이 앞으로 개방을 하게 되면 여러분들이 북한에 가서 제법 힘을 쓰게 될 거예요. 왜냐하면 고향 사람들에 비해 돈과 지식이 더 많으니까요. 고향에 살던 친구나 친척들이 질문자를 부러워하게 될 겁니다. 지금은 막 욕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러니 너무 기죽지 마세요. 남한에 정착을 잘해서 때를 기다리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즉문즉설까지 마친 후 장기자랑 시상식을 진행했습니다. 인기상, 장려상, 우수상을 차례대로 시상한 후 마지막으로 최우수상을 발표했습니다.
“최우수상은 아름다운 나라를 부른 화성 지역의 남북새벗 합창단입니다. 축하합니다.”
최우수상을 수상한 화성 지역 남북새벗 합창단의 노래를 다시 들으며 통일축전을 마쳤습니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고향에 돌아가실 그날까지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사회자의 닫는 인사를 끝으로 내년을 기약하며 생방송을 종료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에는 실내에서 업무를 본 후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방송·영화·연극·예술인들의 모임인 '길벗'에서 진행하는 즉문즉설 강연이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열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