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식기반경제와 소프트웨어 산업
(2) 경제와 정치사회불안요소와의 관게
(3) 제3의 물결과 한국경제의 가능성
(4) 다양성과 균형성의 진화론적 의미
(5) 균형성과 선(禪)
1. 지식기반경제와 소프트웨어산업
지식기반경제’라는 말에 있어서 ‘지식’은 ‘인터넷이나 컴퓨터 등의 각종 유무선 통신망을 통하여 제공되는 각종 정보나 그 내용물.“을 뜻하는 말이라 할 것이다.
각종 유무선 통신망에 있어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유형적인 것을 하드웨어(hard·ware)라 한다면, 그 콘텐츠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무형적인 것을 소프트웨어(soft·ware)라고 말 할 수 있다.
네트워크의 세계화가 이루어진 21세기 지구촌에서 이 소프트웨어는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것으로써,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통로이며, 수단이며, 방법이 되어 있다 할 것이다.
이곳에서 ‘지식’은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는 소프트웨어의 콘텐츠로써 흔히 정보라 하는 것이 그 내용이 된다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지식기반경제사회’라는 말은 각종 유무선 통신의 네트워크의 세계화시대에 있어서 소프트웨어의 내용으로써 정보가 경제의 기반이 되어 있는 사회라는 뜻이 될 것이다.
정보( information, 情報)라는 말은, 예를 들면 벌이나 메뚜기 같은 곤충이 자신의 생존과 욕구의 추구를 위해서 외부의 주위 환경의 여러 가지 조건으로부터 지각한 인지내용을 신체의 각 부분에 전달하여 행동으로 움직이게 하는 곳에서 “외부로부터 지각한 인지내용”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 정보의 내용은 단순하게 생존과 본능적 충동이나 욕구를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으로써 매우 다차원적으로 복잡하고 광법위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쇼핑정보 등으로부터 골프장, 스키장, 낚시터, 음식점, 등산, 연극, 영화, 국내외여행 등의 레져정보나 입학정보, 금융투자정보, 건강정보, 등과 같이, 오늘 날의 시민은 의식주문화정치사회경제종교 등의 모든 방면에서 정보를 필요로 하고 있기때문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누군가 말했었던 것과 같이, 이 처럼 생활의 모든 방면에서 정보를 필요로 하고 있는데, 이 정보의 내용이 곧 ‘지식’이며, 이 ‘지식’이 오늘 날 연구와 발명과 생산과 유통과 소비의 모든 경제활동의 중요 기반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식기반경제’가 21세기지구촌사회전체의 흐름이라 하는 것이, 엘빈토플러가 주장하는 ‘제3의 물결’이라는 말의 뜻이 된다 할 것이다.
이 제3의 물결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정보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에 있어서 관련되는 항공기, 우주 개발, 전자, 원자력, 컴퓨터 따위 첨단적 기술을 중핵으로 하는 산업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첨단적인 기술, 서비스, 상품 따위를 결합한 복합 산업. 동식물 유전자 조작, 공업용 로봇 산업 등이 있다 할 것이다. 이곳에서 특히 ‘써비스’ 부문이 새로운 관점에서 부각되어 있고, 과학적 연구와 발명의 부문에서는 유전자학과 나노기술 등과 같은 첨단과학기술들이 경제적 창출성이 있는 유망한 지식의 내용으로써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할 것이다.
<To be continued....>
(2) 경제와 정치사회불안요소와의 관게
12월 넷째주 중간 즈음에 KBS TV에서 엘빈토플러의 강연과 토론이 방영되었었다.
이곳에서 토플러는 세계의 국가 중에서 머지 않아 중국이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하고, 그러나 제1의 농경생산에 종사하던 농민들을 제2의 산업사회를 위한 저임금노동자로 내몰면서 생긴 사회적 간격이 사회적불안의 요소가 되어서, 마래의 지식기반경제발전의 가능성에 장애요인이 될 수 있다 하였다.
또 정부의 제도권에서 자행되고 있는 몇 가지의 자유억압의 부분을 예로 들었었는데, 그 첫째는 자신의 출판한 책 내용에서 특정 부분의 글을 다른 내용으로 바꾸어 쓰고 있다는 것과, 농사를 짓다가 저임금노동자로 내 몰린 빈곤집단을 비롯하여 제도적 불평등에 대한 수많은 시위사례를 그 예로 들고 있는 것 처럼, 균형성을 중심으로 하는 완전한 자유법치 이외의 모든 강제적억압이나 집단적대립은 사회적안정보다는 오히려 시화적불안의 요소가 된다 할 것이다.
또 그 같은 다양한 사회적불만집단이 정치세력화하면서 앞으로 중국에는 어쩌면 춘추전국시대 같은 혼란을 초래하게 될 지도 알 수 없다 하였는데, 이 같은 사회적 불안요인이 중국경제의 세계최고의 부강 가능성에 장애요소가 된다 하였던 것이다.
또 일본경제의 예를 들어서 지나치게 전통적 관습이나 가치관에 입각한 사회적제도가 일본경제의 지식기반경제발전에 문제점이 된다 하고, 보다 더 평등성과 다양성이 사회화 할 수 있는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저야 한다 하였던 것이다.
사실 미국대통령 부시의 경우에도 힘이나 정책추진력이 없어서 미국국민으로부터 발목이 잡히고 그의 정책전환을 고려하게 된 것이 아닐 것이다. 이번에 미국국민의 뜻에 의해서 발목이 잡힌 부시정부의 비균형성이 미국의 상품에 대해 예를들면 반자연친화적상품과 유사한 좋치 않은 반감을 주게 한다든가, 또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곳에서 미국의 이니시어티브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더 근본적 문제점은 “지나치게 미국의 이익을 챙기고 타국에 대해 압박을 가하는 등의 모습...”으로 세계에 비춰진 부시의 대 이라크정책이나 대 테러정책의 비균형성 때문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계 각국으로부터 세계화를 주도하는 정신에 대하여 신뢰성을 상실하는 것으로부터 이번 미국국민의 뜻이 어느 정도는 그 신뢰성을 회복 할 수 있는 계기로써 기회를 만들어 주었지 않았나 하는 점이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21세기 제3의 물결로서 지식기반경제사회는 사회적 평등성과 함께 지식의 창의적 다양성이 가장 중요한 근본적 핵심으로 요구되는 성격을 가진다 할 것이지만, 이 같은 평등성과 다양성을 발전시키고 사화적불안요소를 없앨 수 있기 위해서는 사회전반의 제도적 개혁이 요구된다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제도를 개혁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될 것이다.
토플러는 이번 강연에서 창의적 다양성에 대하여 균형성이 있어야 한다는 간략한 말 이외에 구체적 해법을 언급한 내용이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21세기의 정치경제사회제도의 개선과 운영방안에 관해서 새로운 착안점은 사이버네틱스세계관에 입각한 “하드웨어 구조/소프트웨어 패턴/지식내용의 정보”라고 하는 시스템이 있다 할 것이다.
하드웨어는 사회적제도에, 소프트웨어는 코드에, 지식의 내용은 경제적 창의성에 각각 대비한다면, 하드웨어라는 사회체제 가운데에서 소프트웨어의 코드에 따르는 프로그램의 제어를 통해 통일되는 다양성의 실현이 가능한 사회적시스템의 논리가 성립 할 것 같기 때문이다.
문제의 근본적 핵심은 이곳에서 제어작용을 하는 ‘특정의 코드’가 미국의 부시 정부처럼 비균형성을 가지는가? 아니면 과연 다양성을 통일 할 수 있는 균형성을 가지는 것인가? 그리고 그 균형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에 있다 할 것이다. ‘특정 코드’라는 말의 개념의 균형성측면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의 <보기>에 신문논평 1을 첨부하였다.
이상의 싸이버네틱스세게관에 있어서 균형성에 대해서는 "상호규정성에 의한 영원한 동적과정" 이라는 정도일 뿐인 것으로써, 아직 학문적으로 명료하게 해명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피이드백의 원리와 진화론의 관점에 입각하여 ‘(4) 다양성과 균형성의 진화론적 의미’에서 좀더 간명하게 그 타당성의 논리를 살펴 보고자 한다.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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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인사가 문제라고? 코드가 문제지.
친북반미반역 전선에서 허수아비 노릇할 사람만을 찾기 때문에 문제
[2006-11-24 10:22:51]
노무현 대통령의 인사를 두고 ‘코드’인사라고 한다. 그 코드가 ‘줄’을 의미하는지 또는 ‘화음’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것이 줄을 의미하든 또는 화음을 의미하든 좋은 의미는 아니다. 인사의 원칙에 줄이나 화음이 들어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사의 원칙은 해당 업무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전문적 직업윤리를 갖춘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본이고 부차적으로 화합이나 인간성 등을 고려할 수 있겠다. 그런데 노무현 인사의 특징은 전문적 지식이나 직업윤리와는 상관 없이 오직 코드만을 고려하여 인사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여려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선 전문인을 쓰고 싶어도 전문인들이 노무현과 함께 일하기를 거부할 수 있다. 인사란 임명권자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 쓰기도 하겠지만 피임명자가 임명권자와 호흡이 맞는다고 판단해야 수락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노무현이 오직 자신의 의지에 따라 충복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만을 고르기 때문일 수 있다. 어쩌면 이 두 가지 이유 모두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코드인사가 국정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는데 있다. 지금은 사실 국민들이 어느 부서의 장관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서열파괴가 마치 개혁인양 내세우고 파격적인 인사를 하는 경우가 많아 국민이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임명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서열파괴는 오직 권력 유지를 위한 장치일뿐 개혁은 아니다.
그렇다면 코드인사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코드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씨메이저 코드를 원하나 노무현은 계속 에이마이너 코드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국민은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이끌 인재를 등용하기를 원하나 노무현은 오직 친북반미반역 전선에서 허수아비 노릇할 사람만을 찾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아무리 코드인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국민이 원하는 코드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노무현 코드가 국민의 희망과 배치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1994년 발표된 EU의 아시아신전략(New Asia Stratagy; NAS)에 의해서, 동아시아지역과의 체계적인 연결고리를 마련하여 미국의 영향력이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990년대 중반에 출범된 아시아-유럽 양 지역간 회의인 아쎔(ASEM : Asia-Europe Meeting)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다자적 정치경제협력협의체이다.
엘빈토플러는 1990년대 초반 이후, 동아시아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으로 인해 세계의 부와 권력의 중심축이 북미-EU-동아시아로 구성되는 이른바 삼극체제로 재편되고 있는 가운데에서 과연 한국과 같은 작은 국가가 살아 날 길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지식기반사회에서는 스케일(싸이즈)이 문제가 아니라 창의성(다양성)이 문제이다.”라고 하였다.
예를 들면 한국과 비슷한 크기의 핀란드에서, 1989년 헬싱키대학에 재학중이던 리누스 토르발스(Linus Torvalds)가 유닉스를 기반으로 개발한 공개용 오퍼레이팅시스템(OS)의 리눅스 [Linux]를 본보기로 들었다.
리눅스는 소스 코드를 완전 무료로 공개하여 전세계적으로 약 5백만 명이 넘는 프로그램 개발자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이들에 의해 단일 운영체제의 독점이 아닌 다수를 위한 공개라는 원칙하에 지속적인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지게 하고, 각종 주변기기에 따라 혹은 사용하는 시스템의 특성에 맞게 소스를 변경할 수 있으므로 다양한 변종이 출현하고 있는 것으로써, 유닉스와 거의 유사한 환경을 제공하면서도 무료라는 장점 때문에 프로그램 개발자 및 학교 등을 중심으로 급속히 사용이 확대되어 왔었다는 것이다.
리눅스의 의의는 경제적으로는 핀란드라는 작은 나라에 이름도 없었던 한 대학 재학생의 창의성에 의해서 고부가가치창출의 사례를 보여준다 하였었다면, 그것의 정치사회적시스템 측면에서의 의의는 공개용 오퍼레이팅시스템(OS)이라고 하는 공개시스템의 운영방식의 제시와 실용성의 실재적 검증에 있었다 할 것이다.
엘빈토플러는 911테러에 대하여 미국정부의 관료주의적인 피라미드형의 수직적인 시스템으로 대응하는 것에 대하여 테러리스트들의 공개적이고도 자율적인 시스템을 서로 비교하므로 하여금 두 시스템 사이의 다양성 및 창의성의 차이점을 설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정부구조도 개혁되어야 한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개혁의 모티브(mo·tive:動因)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라는 점에 대해서 종교와의 관계에서는 “정답이 없다.” 라고 하고, 다만 다양성이 필요하다 하였다.
교육과의 관계에서는 꼭 같은 물건의 대량복제생산공장과 같은 학교와 관료주의의 수직하향적 획일성의 정부와 구태의연한 산업경제기업애 대하여, 지식기반경제기업이 100km/h의 속도를 가진다면, 정부는 70km/h, 학교는 50km/h의 속도를 가진다는 것에 비유하면서, 이 3을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개혁이 필요하다 하였다.
엘빈토플러가 “미국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영화를 보러 갔었는데, 관중들이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서 환호성을 질러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하고, 2008년에는 흑인대통령의 선출 가능성도 있다 하였다.
한국의 경우에도 정부의 수직적 피라미드형의 관료주의와 학교의 대량복제생산공장과 같은 교육제도를 개혁해야만 지식기반경제사회체제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며, 교육시스템은 지식기반경제기업의 원하는 것에 창의성과 다양성과 복합성의 개발교육으로 부응 할 수 있도록 개혁하면 일본, 핀란드, 아일랜드, 싱가폴 등과 같은 나라에 못지 않은 경제부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앞에서 보기로 들었던 독립신문 칼럼에서 "코드 인사가 문제라고? 코드가 문제지... 친북반미반역 전선에서 <허수아비 노릇할 사람>만을 찾기 때문에 문제." 라고 말한 것과 같이, 허수아비 노릇하는 정치경제교육관료의 수직적 피라미드형의 최 상위층의 "얼굴없는 실세"라고 하는 폐쇄성을 한 점 남김없이 밝히고, 한국의 정치경제교육이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 날 수 있는 개혁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 얼굴없는 실세가 국민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현실에서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점에 봉착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이 같은 한국의 정치경제교육의 개혁을 하면 정말 모든 국민이 잘 살 수 있는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 개혁의 모티브(mo·tive:動因)인 즉, 다양성과 창의성과 국민의 뜻에 대한 근본적 과제는 과연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라는 점이리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다음의 '(4) 다양성과 균형성의 진화론적 의미'에서 언론의 사회적운영기능과 함께 그 근본적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To be continued....>
(4) 다양성과 균형성의 진화론적 의미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 하면 언론(言論)이 '시민교양의 기준'을 분명하게 제시해야만 그에 따라서 정치권이 국민의 신뢰 할 수 있는 바른 비젼을 제시 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또 그 정치권으로부터 노사관계의 적당한 타협점을 끌어 낼 수 있을 것이며, 그제서야 세계 속의 한국을 선진화 시킬 수 있는 알맞고도 바른 추진동력이 생겨나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시민교양이라 함은 예를 들면 고기잡는 어부는 고기잡는 일만 하고, 야채파는 야채상은 야채만 팔고, 28청춘의 젊은 이들은 사랑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예전에는 “공산주의는 싫어요!!” 라고 왜친 어린 학생의 절규처럼, 또는 도둑이나 깡패들도 “다른 것은 모두 봐 줄 수 있지만, 빨갱이는 절대 않된다.” 라고 했던 것 처럼, 우리 국민을 단합시키는 국민교양은 반공사상이였다.
그러나 21세기의 글로벌시대의 한국국민에 있어서는 국가발전의 통일적 비젼이 교양의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초등학생이나 청춘남녀나 깡패나 농부나 유흥업소종사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에 통하는 국가비젼이 국민적 신뢰성 위에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사실 참여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되었던 것은 국가비젼이 납득 할 수 있는 내용이 되지 못하고, 또 “서열파괴는 오직 권력 유지를 위한 장치일뿐 개혁은 아니다.” 라고 하는 것 처럼, 참여정부의 국가비젼의 입안과 집행은 국가의 장래 보다는 오직 권력유지릉 위한 편가르기와 갈등조작과 대립투쟁의 연속일 뿐인 것으로 비쳐 쳤던 때문이라고 본다.
이는 참여정부기간 동안에 언론계 역시 권력유지를 위한 목적 이외의 참으로 국가와 민족과 세계를 생각하는 알맞은 국가비젼에 대한 깊은 고민이나 성찰이나 자율적인 토론이나 논의가 없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아릴랜드의 국민소득1,500불에서 45,000불로 성장한 것이나, 일본의 저출산인구감소와 노령화시대에 접어 들었으면서도 오히려 2006년 이후 10년간 경제성장 2-2.5퍼센티지를 예상하게 된 것은 모두 국민이 납득 할 수 있는 국가비젼이 밝게 자율적으로 논의되거나 깊은 성찰과 고민의 언론활동을 통해서 그 나라의 시민교양의 통일적 기준이 확립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곳에서 문제의 핵심은 “그러면 과연 국민이 시민교양으로 납득 할 수 있는 국가비젼의 기준은 무엇을 근거로 성립하는가?” 라는 곳에 있다 할 것이다.
국가비젼의 근거는 엘빈토플러가 말 한 것 처럼 평등성과 다양성을 통일하는 <균형성>이라 할 것이다.
1948년 미국의 수학자 노바이트워너에 의해서 창안된 사이버네틱스세계관은 상호규정성에 의한 영원한 동적과정이라고 하는 피이드백원리의 토대 위에 구축된 세계관이다.
사이버네틱스응용기술은 오토메이션. 공학. 생물학. 우주개발기술. 통신. 정보. 언어이론. 게임이론. 전략결정론. 생산계획론. 사회과학론 등등으로써 근대과학과 현대과학을 구분하는 분기점이 되어 있는 것이다.
철학적으로는 인류 스스로가 스스로의 가치기준을 만드는 주체적인 인류로서의 자기 통어 능력 이외의 아무 것도 믿을 것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스스로의 가치기준”이라는 말은 진화론적 견지에서 볼 때에, 다양성을 알맞하게 통일 할 수 있는 통일성으로서의 균형성을 뜻한다 할 것이다.
인간을 그리스에서는 동물과 신의 중간적 존재라 하였다.
그러나 막상 인간을 인간답게 통일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현대인들에게 물어 보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치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먹고 살기 바쁘고, 싸우기 바쁘고, 탐욕을 추구하기에도 정신없기 때문인 것이 오늘 날의 민주시민의 현실적 실정이기 때문이다.”
신과 동물 사이의 인간적 특성을 ‘이성(理性)’의 측면에서 규명한 것은 I. 칸트가 대표적일 것이 겠지만 철학은 어렵고 머리가 아픈 것이다.
이를 알기 쉽게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자 하면, 모든 동물(생물)은 맹목적이고 한량없는 생존 욕구에 대하여 유전적 본능의 신체적 제한성을 가지고 자연선택에 적응하는데 대하여, 인간은 신체적 제한성을 벗어난 욕망을 무한정적으로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과, 이 같은 인간에게 있어서 과연 무엇이 진화의 자연선택적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하는 관점의 접근이라 할 것이다.
이곳에서 생물 뿐만 아니라 물질까지 아우를 수 있는 자연선택적 균형성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대두된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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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균형성과 선(禪)
우리나라는 여름철에 비가 많이 오면, 연강수량은 500∼1500㎜ 정도 된다고 한다. 이 이외에도 태풍이 오거나 할 때면 보통 하루에만 해도 200-700㎜ 까지 비가 내리기도 하는데, 이 정도의 물이 하늘 위를 날라서 왔다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보면 세계적으로 하루에만 해도 천문학적 수량의 물이 지금 이 시간에도 하늘을 떠다닌다는 것이 된다. 이 말은 흔히 일상생활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강이나 큰 호수뿐 만 아니라 하늘에도 그에 못지 않은 량의 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에는 유독 기상이변이 심한 것 같다. 알프스산에는 1300년 만에 눈이 오지 않아서 세계적인 스키경기를 취소했다 하고, 워싱턴에는 한 겨울에 꽃이 피어나서 봄이 일찍 오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반은 반갑기도 하고 반은 기상이변에 대하여 걱정하기도 한다 하였다.
기상이변이 심하여 마침내 북극과 남극이 바뀌고, 해수면이 30센티 이상 높아지는 일이 있어도 결코 지구는 그렇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다만 인류의 생존에 큰 타격을 주는 천재지변이 될 것이겠지만, 기상이변이라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지구가 정상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건강성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실 기상이변이라는 것은 지구가 균형성을 가지고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생겨나는 자연현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지구가 무엇에 대하여 균형성을 유지하려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 원인은 물론 온난화 한 가지 때문 만은 아닌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의 길이 5,800km. 유역면적 180만km2의 양자강을 막는 싼샤댐(三峽:삼협)은 최대 저수량 390억 톤의 세계 최대의 댐이다. 이렇게 흐르는 물을 한 곳에 모으게 되면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대하여 그 균형을 잡기 위해서 기상이변이 생겨나게 될 것이며, 또 그 거대한 호수 위에서 물이 증발하거나 수면의 기온의 변화에 대하여 그 공백을 매우기 위해 기상이변이 생겨날 것이라는 것과 같이, 이 같은 물의 흐름을 막는 이외에도 두바이 같은 인공섬이나 새만금 같은 해안매립이나 대량의 물류유통이나 천문학적인 석탄에너지체굴 또는 인공위성이 회전하면서 대기권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하여 지구가 균형을 잡기 위하여 기상이변을 일으킨다 할 수 있는데, 인간의 문명의 영향력이 크면 클 수록 지구는 균형을 잡기 위해서 보다 더 바쁘게 활동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므로, 보다 더 규모가 큰 기상이변이 다가 올 것이라 함을 예상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과 역사적발전의 경우에도 궁극적으로는 균형성이 중심이 됨으로써 역사를 만들어 가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극단에 치우쳐서 균형성이 무너지게 되면 자연과 인간이 함께 더 이상 성립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처럼 균형성사상은 사적유물론 [史的唯物論, historical materialism]이나 헤곌의 변증법(辨證法, dialectic) 또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등의 서구전통적사상의 흐름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는 것으로써, 그 논거(論據)에 있어서 <생성현상의 법칙(法則)>이 아니라 <생성의 통일성으로서 법성(法性)>이라고 하는 관점의 차이라 할 것이다.
변증법적사고방식의 근본적문제점은 인간의 정신과 물질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곳에 있다 할 것인데, 그 실에 있어서는 정신과 물질이 모두 다만 한 가지 마음의 균형성인 물자체성(物自體性)에 의해서 생기게 된다고 하는 관점을 서구인이나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런 관점의 차이를 만들게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엘빈토플러는 한국과 같은 작은 국가가 살아 날 길은 “지식기반사회에서는 스케일(싸이즈)이 문제가 아니라 창의성(다양성)과 평등성이 문제이다.”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같은 사회적문제를 변증법적으로 풀어 나가고자 한다면, 어떤 문제가 오류로 제기 될 수 있는가 하면,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또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 대립과 투쟁을 정당화하는 오류가 생겨 날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만약 창의성과 평등성에 균형성이 없다고 한 번 가정해 본다면... 그 사회가 어떻게 발전해 갈 것인가? 심하게 표현하자 하면 술에 만취한 사람이 걸어 가는 갈 지(之)자 같은 걸음걸이로 과연 집으로 정확하게 찾아가게나 될지 아니면 시골 논두락이나 도시의 골목길 어느 쯤에 드러누어버릴지도 알 수 없다는 것과 같다 할 것이며, 또는 창의성의 다양성의 통일이 아닌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서 오는 사회혼란의 폭을 극대화하는 것을 정당화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라 함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만약 이 같은 균형성을 간과한 변증법적 사고방식에 의해서 사회가 발전해 간다면 사회지도층이 그 사회를 어디로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인지 ... 현금의 인류문명의 조건을 생각해 본다면, 인류사회의 앞날을 우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실재로 오늘 날의 사회에서는 참으로 균형성을 갖이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 직장인이나 또는 정치입문자까지도 발을 들여 놓자마자 그 순수성을 보지(保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사회지도층이 음성적인 폭력이나 물리적 힘을 동반하는 경우에는 사회전체가 비인간적 대립과 갈등과 투쟁으로 휩쓸려 가게 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지식기반경제사회에서는 엘빈토플러가 아니라 그 보다 더한 학자가 무어라 하든 간에 균형성을 가진 국가가 창의성과 평등성을 바로 발휘 할 수 있음으로 하여금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게 될 것이라 함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그 실예로 우리는 핀란드나 일본 또는 아일란드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21세기의 지식기반세계경제사회체제에 있어서 대한민국을 안정 가운데에서 번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은, 그 근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자연적 및 역사적 균형성의 근거를 분명히 밝히고 그것을 사회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실재에 있어서는 그 어떤 분야 보다도 밝은 토론문화와 균형성있는 보도 그리고 균형성문화의 보장 및 권리의식을 비롯하여 언론계의 각성이 사회의 다른 분야 보다 더 우선적으로 실현 가능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불교 가운데에서 특히 <선(禪)>은 균형성을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부터 체험하여 분명하게 깨닫게하는 가르침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균형성은 물질과 정신의 생성에 대하여 영원불변의 중심이 되는 것임으로 끊임없이 생멸변화하고 있는 인생과 우주에서 불변성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집적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가르침이라 할 것이다.
만약 언론계나 사회지도층이나 또는 뜻있는 어떤 분들이 있어서 균형성실천의 이론과 방법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이 있으시다면, 본인의 게시글 <그림자관법, 해우소관법, 깨달음의 인연> 등의 몇 개의 게시글을 참조하므로 하여금 불교와 선의 균형성 실현에 관한 이해나 또는 입문에 얼마간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첫댓글 자세히 보기 위해 제 방으로 좀 모셨습니다. 늘 평안 하세요`!!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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