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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0년 2월 16일 주일오전
성경낭독 : 신30:15-20; 마5:21-37
본문 : 갈2:11-14
제목 : “용기”
주일오전찬송
경배찬송 – 시95편 1,2,3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67편 2,3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59편 5,8
성경낭독 후 찬송 – 시52편 5,6(고정)
설교 후 찬송 - 시144편 4,5,6
성찬식 찬송 - 시63편 2(고정)
폐회찬송 - 시92편 4,6(고정)
용기
신구약 중간기 역사를 다루고 있고, 천주교에서는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마카비서 상권 1장에 보면 당시 안티오쿠스의 박해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은 또 사신들을 예루살렘과 유다의 여러 도시에 보내어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유대인들은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를 것
성소 안에서 번제를 드리거나, 희생제물을 드리거나, 술을 봉헌하는 따위의 예식을 하지 말 것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성소와 성직자들을 모독할 것
이교의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돼지와 부정한 동물들을 희생제물로 잡아 바칠 것
사내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
온갖 종류의 음란과 모독의 행위로 스스로를 더럽힐 것
이렇게 하여 율법을 저버리고 모든 규칙을 바꿀 것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44-50절)
그리고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그 뒤에 나와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버리고 그들에게 가담하여 방방곡곡에서 나쁜 짓이 마구 저질러졌다. 그 밖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숨을 곳을 찾아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다......매달 이십 오 일에는 옛 제단 위에 새로 세운 제단에 희생제물을 바쳤다. 자기 아이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여자들은 법령에 따라서 사형에 처하고 그 젖먹이들도 목을 매달아 죽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그 아이들에게 할례를 베푼 사람까지 모두 죽였다. 그러나 이에 꺾이지 않고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스라엘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어서 몸을 더럽히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달게 받기로 결심하였고, 사실 그들은 그렇게 죽어 갔다. 크고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52절, 59-64절)
한 주석가는 마카비 시대 이후로 유대교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지를 세 가지로 말하면서 이것들이 유대인의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했는데, 그 세 가지가 바로 할례와 안식일과 음식법이었습니다.
B.C 2세기 작품인 희년서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나의 아들 야곱아, 너희는 나의 말을 기억하고 선조 아브라함의 계명을 지키라. 너희는 스스로 이방인들로부터 분리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지 말라. 그리고 그들의 행위를 따르지 말고 그들과 교제하지 말라. 그들의 행위는 더럽고, 그들의 삶은 오염되고, 비열하며,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은 자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귀신에게 절한다. 그들은 무덤 안에서조차 음식을 먹는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무가치하고 헛되다.”
우리는 1세기의 사람들도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음식법에 대한 규례를 과소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우리로서는 이것이 얼마나 큰 장벽인지 실감하기가 사실 어렵습니다. 아마 제가 생각하기로는, 우리가 최대한 비슷하게 생각해 보려면, 조선 시대 때 예수를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부모에게 제사 지내기를 포기하게 되는 것과 좀 대비해보면 어떨까 정도입니다. 21세기의 한국 사람들인 우리가 1세기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음식법에 있어서 얼마나 큰 갈등을 겪었을까를 상상하는 것은 어쨌거나 쉬운 일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극복
하지만 우리가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게 되는 바는, 베드로는 바로 이 음식법으로부터 탈출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을 한 번 보십시오. 12절 말씀은 베드로가 원래 “이방 사람들과 함께 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밥을 먹을 때 ‘누구와 먹었냐’의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문제가 얼마나 중대하게 율법을 범하는 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조금 전에 읽어드렸던 희년서를 들으셨기 때문에 아실 수 있겠지만, 1세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들과의 식사는 첫째, 이방인들과 식사한다는 문제, 둘째, 이방인들이 먹는 음식을 먹는다는 문제, 두 문제 모두에게 있어서 매우 심각하게 율법을 어기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은, 베드로는 이미 그 문제를 넘어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도 보십시오. 14절에서 바울 사도는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베드로의 행동이 어떤 것이었다고 바울 사도께서 평가하고 있습니까?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는” 행동이었다고 했습니다. 이제까지 산 대로 전통적 유대인들의 삶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삶을 옹호하는, ‘마치 이방인들처럼 사는’ 그런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베드로는 이렇게 될 수 있었나요? 이것은 우리가 이전에 사도행전을 통해 들은 내용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개인적으로는 고넬료 집안에서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제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을 여셨다는 표시로서 ‘부정한 짐승들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렇게 했을 뿐 아니라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공회를 통해서는 이 사실을 함께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이 문제를 완전히 극복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적 갈등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이제 음식의 문제는 정결의 참 본질의 문제가 아니었고, 따라서 유대인으로서도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는 문제에 있어 전혀 고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바로 이런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함께 12절 말씀을 다시 보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베드로는 스스로의 내적 문제에 있어서는 이방인들과 먹는 문제에 있어서 갈등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그것을 극복했고, 따라서 이방인들과 먹는 것이 비록 과거 유대인들이 고수해왔던 전통에는 어긋날지 몰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라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방인들과 섞여서 식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먹고 있었을 때, 유대인들이 찾아왔다는 데 있습니다. 베드로는 개인적으로는 이방인들과 섞여 먹는 데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지만, 자신이 그렇게 먹는다는 것을 유대인들이 안다고 생각했을 때, 곧 자기가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모습이 할례자들에게 발각되는 상황이 오자, 그 자리를 피해 숨었습니다. 즉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것을 떳떳이 밝히는 길 대신, 숨기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문제가 들어 있는가?
자, 그러면 여기에는 어떤 문제가 들어 있을까요?
우선 우리는 전체 사도들 중 가장 든든하고 강직한 사도라고 볼 수 있는 베드로조차 ‘연약한 인간일 뿐’이었음을 여기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12절 말씀에는 베드로가 이렇게 행동한 동기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 동기가 무엇입니까? 왜 베드로는 할례자들이 오니까 이방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도망쳤습니까?
성경은 이 이유를 “두려움”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 사건을 우리의 신앙과 관련지으면서 ‘두려움’이라는 주제를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1. 베드로가 당시 처한 정황의 성격
우리는 12절이 말씀하고 있는 정황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습니다. 갈라디아서도 그렇고 사도행전도 그렇고, 당시의 교회들의 상황,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과의 관계 같은 것들이 아주 면밀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정황이 어떤 것인지를 아주 확연하게 알 수는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정황을’ 생각하면서 이 부분을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먼저 ‘야고보’가 사람들을 보냈을 때, 예루살렘 교회와 일단의 사도들은 이 이방인들과의 식사에 대해서는 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고려점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공회가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관습을 강제하지 않도록 한 결정을 내렸음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공회의 마지막 부분은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라.”(행15:19-20)입니다. 즉 야고보를 비롯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방인들에 대해 유대인의 관습을 강제하지 않는 것에 대해 합의적 동의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즉 이 결정은 ‘유대인들도 역시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공회를 전후로 하여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의 풍습을 강요하지 않는 것에는 분명한 동의를 보냈다는 것은 사도행전 15장을 통해서도 그렇고(베드로가 이야기했을 때 동의의 이야기를 한 사람이 야고보이다), 갈라디아서 2장 9절에서도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방인들이 유대인처럼 될 필요는 없다는 결정이지, “그렇다면 이제 유대인들도 역시 동일하게 유대의 관습을 포기해도 좋다”라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차이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유대인들이 일괄적으로 자신들이 고수해왔던 신앙적 전통을 한순간에 포기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고보가 사람들을 보냈을 때, 당시 이방인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 베드로나 바울 같은 이들이 이방인들처럼 행하고 있다는 것, 즉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동일하게 음식법에 대해서 완전히 열린 입장을 가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완전히 수긍한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야고보나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들의 관습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고 결정한 것까지는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베드로는 비록 자기 스스로 내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해결이 된 사항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들에게까지 자기와 똑같은 마음을 요구할 수는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2) 그리고 여기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문제도 함께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12절의 “할례자들”을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방식으로 읽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베드로의 “두려움”이 그 의미가 사뭇 달라집니다.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린 야고보나 예루살렘 교회의 관점에서의 “할례자들”이란, 그리스도를 믿고 기독교회 안에 들어왔지만 여전히 유대의 관습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12절의 “할례자들”을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의 할례자들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 “할례자들”, 즉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때의 베드로의 두려움은 전혀 다른 종류의 성격이 됩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두려워한 것은, 새롭게 생긴 신흥종교인 이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회가 유대인들로부터 당할 핍박과 관련한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당시에 사도 바울도 회심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들은 기독교회를 격렬하게 배척하고 있던 상황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예수만 믿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음식법과 할례와 같은(서론의 세 가지 제일 중요한 요소를 기억하십시오) 민감한 문제를 폐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더욱 격렬한 핍박이 있을 것이 불보듯 뻔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가 메시아다”라는 주장과는 또 궤가 전혀 다른 굉장히 민감한 사항에 불을 붙이는 꼴이 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자신의 작은 행동 하나 때문에 격렬한 핍박의 사안을 제공하게 되지는 않을지 두려워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여러분, 베드로에게는 아마도 이 두 종류의 문제가 한꺼번에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 “할례자들”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어느 쪽이 답이 되건 상관없이,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문제’가 유대인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제가 방금 말씀드린 문제 둘을 ‘모두 촉발하는’ 상황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중 가장 중요한 사도였던 베드로에게 있어서, 첫째, 비록 이방인들에게는 유대의 관습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모든 교회들이 결정을 내렸더라도 그 결정이 유대인들 역시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 중요한 사도인 베드로가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교회 안에서 어쩌면 논란의 폭풍을 만들 수 있는 행동이 됩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동시에 베드로가 이렇게 이방인들의 풍속을 좇고 유대인들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버린다면, 당시 기독교를 핍박하던 유대인들에게는 더 강력한 핍박을 해야만 하는 동기를 제공해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약간 행동을 숨기는 것을 통해서 불필요한 핍박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 될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삶의 현장 : 복음을 들은 신자의 삶은 동화가 아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의 행동의 동기가 되었던 이 ‘두려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잘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의 삶에 그것을 집어넣어 잘 읽어지십니까?
가벼운 예를 통해서 이 문제를 조금 더 우리의 삶에 밀착시켜보겠습니다.
지난주에 TV에서 요즘 유행하고 있는 “낭만닥터 김사부”라는 드라마를 잠깐 보았습니다. 제가 본 장면에 남자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젊은 의사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의사의 오빠가 의료 과실을 덮으려고 한 정황을 알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갈등을 하는 상황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갈등 과정에, 이전에 자기가 ‘내부고발자’가 되었던 상황이 함께 오버랩됩니다. 이 주인공 남자 의사는 과거에 자기와 가장 친한 형이었던 의사가 대리수술을 시키는 정황을 알고는 그것을 고발하여 그 사람이 의사직을 그만두고 병원이 망하게 만들었고, 그 바람에 그 사람은 이제 의사도 못 하고 다른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시 만나 싸우는 상황이 나옵니다. 고발당해서 밥줄을 잃은 의사는 이 주인공에게 소리칩니다. “네가 그렇게 하는 바람에 나는 내 가족, 내 명성, 내 삶의 기반을 다 잃었다.” “아들 하나 의사 만들겠다고 평생 뒷바라지 한 아버지, 퇴직금으로 산 18평 아파트까지 그 병원에 올인했는데, 너 때문에 모두 잃었다.” 그래서 주인공이 “그러면 더 잘했어야지, 아버지 재산까지 다 털어넣었으면 더 잘했어야지”하니까 이 사람이 “그렇게 안하면, 언제 은행이자 갚고, 언제 장비값 다 뽑아!”라고 응수합니다.
드라마 상에서 이 말다툼은 고스란히 이 남자 주인공이 현재 처해있는 상황과 연결됩니다. 똑같은 상황이 그 주인공 남자 의사의 삶에 다시 한 번 더 일어난 것이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여의사의 오빠가 저지른 의료과실을 덮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 앞에서 과거의 일이 겹쳐지는 것입니다. ‘내부고발’을 해서라도 정의로운 의사가 될 것이냐, 아니면 문제를 크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눈을 감아주어야 하느냐? 이 문제는 상대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의사의 오빠라는 점에서도 갈등을 부추기지만, 드라마는 내내 이 남자 주인공이 ‘정의를 지킨다는 것이 과연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라고 갈등을 하게 만듭니다. 한편에는 ‘의료 사고’나 ‘의료 과실’이라는 면이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고발할 때 동료 의사에게 칼을 꽂는 일이 된다는 갈등의 문제가 거기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정의를 지켰기 때문에 한 사람이 몰락하게 되는 일이 배경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은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주로 어느 쪽을 선택하는 쪽입니까? 여러분은 정의를 위해 매정한 편을 선택합니까, 정의가 있더라도 사람을 봐 주는 쪽을 선택합니까?
이런 문제는 사회정의를 다루는 세상 학문에서도 아주 많이 다루고 있는 문제지요. 예를 들어 정의에 대한 유명한 강의에 보면, “멀쩡한 한 사람의 장기를 적출하면 다섯 명의 사람을 살릴 수 있을 때 어떻게 하는 쪽이 정의로운가? 한 사람을 희생하지 않아 다섯 명이 죽는 것이 정의로운가, 한 사람이 죽어서 다섯 명을 살리는 것이 정의로운가?”라는 문제나, “갈림길의 철도에서 원래의 노선에는 여러 사람이 탄 버스가 놓여 있고, 철도 노선을 변경시키면 한 아이가 희생된다면 원래 가던 길을 그대로 가야 정의로운가, 노선을 바꾸어 적은 수의 사람의 희생시키는 것이 정의로운가?”같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지요.
이것은 우리의 신앙 안에 들어왔을 때, 신앙의 결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양상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보통 ‘악’을 상상할 때 단순하게 ‘선의 반대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생은 매우 쉽고 단순합니다. 선을 좇고 악을 버리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는 문제들은 지극히 간단하게, 단지 ‘나의 성실성’에만 문제가 달려 있게 됩니다. ‘악인 줄 알고도 행하지만 않으면’, 즉 내가 유혹되어서 선을 포기하고 악을 선택하지만 않으면, 언제나 삶의 문제는 매우 단순하게 정답에 표착이 찍히게 되어 있습니다. 답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고, 단지 내가 그것을 따라 사는 어려움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문제는 답을 아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도 인생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입니다. 과연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도 인생이 그렇게 단순합니까? 정말 악은 항상 악의 모양만 갖고 있고, 선은 항상 선의 모양만 갖고 있습니까? 나쁜 것은 항상 나쁘던가요? 옳은 것은 항상 옳던가요? 여러분이 회사에서 신자로서 최선을 다하여 일을 했는데, 그것이 악한 기업주의 부당한 이익을 충족시켜 주면, 나는 악에 공헌한 것입니까, 성실했으니 잘한 것입니까? 여러분이 김사부의 의사처럼, 누군가를 향하여 정의로운 양심을 따라 바른 행동을 취하고 정의의 칼을 휘둘렀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사람 삶이 다 망가져 버려서 엉망이 되었다면, 그 행동은 정말 잘한 행동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나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대부분 악마가 아닙니다. 다들 무언가 이유가 있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고, 어쩔 수 없는 정황이 있는 게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동정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악한 일을 저지르는 이들에게도 다 사정이 있기 때문에 한없이 이해해주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합니까?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본문의 베드로로 돌아가 봅시다. 베드로는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에는 베드로가 행동한 것이 잘한 일입니까, 잘못한 일입니까? 아마 베드로의 행동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하나? 유대인들이 왔을 때, 잠깐 소나기만 피하고, 뒤에는 다시 원래 바르게 행하던 대로 하면 되지 않아?”, “아니, 오히려 거기서 곧이 곧대로 하는 것이 더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그거 잠깐 밥 같이 안 먹는 척하는 것을 안 하기 위해서, 교회 안에 분란 생기고, 교회 밖에서부터 핍박이 몰아치는 상황을 선택하는 길이 옳은 길이야?” 저는 20대 때 이 본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길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뭐 이런 이유들 때문에 교회는 언제나 죄를 죄라고 지적하지 않고, 악을 악이라고 지적하지 않고, 덮고, 이해하고, 넘어가주는 것이 언제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의 문제 또한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연 쉽게 베드로를 향해서,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지!”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뒤에 닥칠 일들에 대해서 과연 책임을 질 수 있을까요? 자기가 그냥 손해를 입으면 그나마 괜찮은데, 자기 결정 때문에 수많은 교회와 사람이 다치게 된다면, 이 또한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것이 옳은 길입니까? 우리는 비슷한 종류의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3. 그러므로 복음을 따라 사는 삶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구체적인 정황 속에서 “A에 대해서는 답이 B입니다.”라고 말씀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계속 말하고 있듯이, 이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무슨 초등학생 수학 문제를 풀 듯이 “답이 여기에 있다”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이 주제를 좀 정리하고 싶습니다. 먼저 사도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정리했는지를 통해 이 ‘제가 정리하고자 하는 방식’을 생각해 봅시다.
오늘 말씀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어떻게 내리고 있는지를 봅시다. 12절을 우리가 계속 보았는데, 13절을 보시면 그 결과입니다. 바울 사도는 베드로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결과로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조차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다”라고 합니다. 자, 그리고 14절입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아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바울 사도께서는 어떤 대답을 내렸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베드로의 행동을 무엇이라고 평가했습니까?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도께서는 ‘이 정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일의 문제’나, 혹은 ‘이 정황에서 이렇게 처리할 때 그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사람의 문제’에 매여 있는 우리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데리고 갑니다. 사도께서는 이 문제의 대답을 ‘복음 진리의 문제’로 데리고 갑니다!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앞에서 삶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살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복합적 상황 속에서 우리가 고려해야만 하는 여러 가지 정황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단순했을 때는 별 문제가 아니었는데, 여기에 고려점이 생기니까......어려워지는 것이죠. 처치하려는 대상이 악당일 때는 괜찮았는데, 그 대상이 알고 보니까 누구의 아빠이고, 누구의 남편이고, 이렇게 되니까 주저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악이다!’ 이렇게 하니까, 대적하기가 쉬웠는데, 고려사항이 많이 생기니까 어려워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께서는 이런 고려사항들 속에서 ‘내가 이 문제를 결정할 때 문제가 되는 일이 무엇일지’, ‘문제가 되는 사람이 누구일지’ 이런 것에 매여서 전혀 결정을 못하고 있는 우리들을 향하여, 고려의 차원을 바꿀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서 대답을 결정할 때, 그것이 복음 진리에 부합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고린도전서에서 바울 사도께서 우상숭배에 올려진 제사 제물을 먹을 것인지와 같은 문제나, 혼인의 문제, 기타 고린도 교회가 당시 사회적으로 겪고 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매우 세심한 배려 속에서 대답을 해주는 것을 목격합니다. 즉 사도께서는 ‘꽉 막힌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우리가 ‘꽉 막힌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황을 너무 고려하여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지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황을 고려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사람을 고려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도께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런 고려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의 중심에는 가장 핵심의 것이 ‘복음 진리에 부합하는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 베드로의 정황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고려해야 할 많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상황이 거기에 있고, 사람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저했습니다. 결국 그는 이런 정황들을 생각했기 때문에 ‘자리를 피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것을 보고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틀린 결정이었다!” 왜 그런가요? 베드로는 정황과 사람은 보았는지 몰라도, 자신의 그런 행동이 ‘복음 진리를 가린다는 것’은 그 순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교회 안으로 받아들이셨고, 따라서 이제 구약의 율법의 껍데기들이 복음의 빛 안에서는 아무 힘이 없어졌다는 것을 ‘드러내야 할’ 사도로서의 베드로가, 이 중심을 생각하는 대신, 다른 고려할 너무 많은 것들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자! 바로 그 때 베드로는 생각이 혼미해져 판단력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많은 갈등의 상황 속에서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매우 쉬운 결정들 속에서’ 혹은 ‘매우 당연한 결정들 속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전혀!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적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항상,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내리는 결정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용기’입니다!
상황과 환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 진리를 위하여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덕과 성품』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친구 교수의 어린 딸에게 용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진실한 사람이 되려면 용기가 필요하단다. 사람들은 흔히 용기라고 하면 극적이고 영웅적인 행위를 떠올리지. 한결같음을 유지하면서 삶의 변화를 헤쳐 가는 난제가 용기와 관련이 있다고 사람들은 잘 생각하지 못한단다. 그래서 용기는 일상의 덕이라고 말해 주고 싶구나......이런 습관들은 순교자들이 보여주는 인내와 일치한단다. 순교자들이 그랬듯 너도 진실을 타협하지 않으려면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될 거다. 다시 말해 용기에는 취약함을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야.”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친구의 어린 딸아이가 자라면서 만나게 될 수많은 갈등 상황에 대해 용기를 가질 것을 격려하면서 용기를 “한결같음을 유지하면서 삶의 변화를 헤쳐나가는 난제에 대하여 용기가 필요하다”라고 하였습니다. 빈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쉬운 상황이 아니라, 상황의 격변 속에서도, 혹은 고려해야 할 것이 많은 상황들 속에서도, “한결같음을 유지하는 것”이 용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중요한 말을 함께 했지요. 용기는 “취약함을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 말입니다. 하우어워스는 이 이야기 후에 자신이 ‘평화주의’를 선택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평화주의’는 힘과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물리적 폭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기를 생각할 때, 누군가가 때릴 때 그것에 대해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우어워스가 말하는 평화주의는 ‘맞고 있으면서도 물리적으로 저항하지 않는데에 용기가 필요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구체적인 대안의 답을 드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중요한 원리를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환경과 상황을 고려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환경과 상황을 고려하는 것이 ‘복음의 진리를 가리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우어워스가 말하는 ‘한결같음’을 결코 유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성경 단어 연구를 오래 해왔기 때문에, 전혀 그런 언급이 없었음에도 ‘한결같음’이라는 말을 들을 때 곧바로 헬라어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한결같음’이란 헬라어에서 ‘믿음’이라는 단어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신실하다’는 것이고 ‘한결같다’는 의미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약한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시오!”
권징 : 교회가 함께 있다
끝으로 한 가지 짧은 코멘트를 더하면서 설교를 맺겠습니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좀 더 길게 다루었어도 좋을 주제입니다.
우리는 14절을 ‘권력 싸움’의 문맥으로 보기 쉽습니다. 우리는 14절을 읽으면서 신입 사도인 바울이 고참 사도인 베드로를 책망한 것을 꽤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는 논조로 보기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주석가가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베드로를 거짓 형제로 보지는 않았다. 베드로는 단지 위선적으로 행동했을 뿐 신앙의 확신 때문에 행동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실수일 뿐이라는 뜻). 디도에게 할례를 강요했던 자들은 거짓 선생들이었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구원받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진정한 신자였다. 베드로가 회개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그를 2장 3-5절에 묘사된 자들 같은 거짓 형제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주석가는 뒷부분에 이런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만약 바울이 베드로를 거짓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보았다면 2장의 앞부분에 베드로와 야고보가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교제의 악수를 한 것에 대해 썼던 일이 쓸모없는 일이 되어버린다고 말입니다. 뒤에서 거짓을 행하는 이라고 말할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일을 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여러분에게 격려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보면서 “베드로도 실수를 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생각이 마치자마자 즉시 우리는 그 다음 단계를 깨닫습니다. 사도였던 베드로도 또 다른 사도였던 바울을 통해서 책망을 통한 권면을 받았다는 사실 말입니다. 말하자면 베드로는 바울을 통해서 ‘권징’을 받은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바울이 베드로를 언급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베드로가 회개했음을 유추할 수 있게 됩니다. 바울과 베드로는 이후에도 여전히 견고한 협력의 관계를 유지했음을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여러분들에게 ‘격려’가 됩니까!
베드로는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고, 그래서 잘못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에게 주변의 동료,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 있는 다른 사도인 바울이 옆에 없었다면, 그는 그 잘못된 결정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신앙에 대해 ‘완전하게’ 알고 있지 않습니다. 대답을 완벽하게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실수합니다. 정확하지 않은 답을 내리고, 때로는 연약에 의해 거짓을 택하거나 죄를 옹호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실에 대해 절망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홀로’ 세워놓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지체로서의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기시켜주는 형제, 자매로서의 바울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를 얻습니다. 우리는 상황과 사람 때문에 복음의 진리를 거스르는 결정을 내리기도 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릇된 결정을 내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교정받을 수’ 있습니다. 나 혼자 광야에 내버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광야에 내버려지는 일은 아사셀 염소이신 그리스도께서 다 담당하셨습니다. 홀로 되시는 것은 그분 하나로 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그 외로움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교회를 주시고, 형제와 자매들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잘못을 충고해주고 교정해줄 수 있는 형제와 자매들이 있습니다. 권징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릇될 수 있는 나를 향한, 그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이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얻어야 할 교훈은 이것입니다.
주께서 모든 성도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참된 깨달음과, 동시에 위로를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