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기 – 사념처 수행방법은 매우 많습니다
< 질문 >
안녕하세요. 사념처 명상의 세계를 읽고 궁금한 점이 있어 질문 드립니다.
1. 신념처 수념처가 잘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신념처도 몸에서 느낌을 보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럼 신념처랑 수념처는 차이점이 무엇인지요.
2. 염처의 설명에서 여러 가지 염처를 수행할 수도 있고 하나만 할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하나의 염처를 하는 것은 그 염처를 주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요? 신념처에서 호흡을 주 대상으로 삼아서 다른 염처를 보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심념처라면 마음을 주 대상으로 삼고 통증이 일면 통증을 보고 다시 마음으로 돌아오는 식으로요.
3. 이 부분은 좀 현학적인 질문입니다만. 아는 마음을 본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인데, 마음이 한 순간에 하나만 존재한다면 아는 마음도 보려는 순간 이미 사라지는 게 아닌가,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질문이 좀 많은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답변 >
부처님께서 평생 동안 가르침을 펴신 내용은 사념처 수행입니다. 그래서 사념처는 정법수행입니다. 사념처는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 수행에는 선정수행인 사마타 수행과 지혜수행인 위빠사나가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념처 안에 선정수행 방법은 얼마 되지 않고 거의가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념처의 구성은 몸, 느낌, 마음, 법입니다. 원래는 몸과 마음만 있으면 되지만 여기에 특별하게 느낌을 포함시켰습니다. 지혜수행인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몸과 마음에 있는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존재의 성품인 무상, 고, 무아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법을 포함시킨 것은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법은 대상이면서 진리입니다. 수행을 하려면 무엇이 되었거나 반드시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대상이 없으면 수행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몸, 느낌,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나중에 진리의 법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법이라고 할 때는 처음에는 대상이고 지혜가 나면 진리의 법을 발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념처 안에 법을 포함시켜 진리를 완성시켰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빠사나 수행은 네 가지 알아차릴 대상인 사념처가 동시에 작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수행이 성립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념처 수행은 모두 함께 작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특별하게 어느 염처 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때도 네 가지가 모두 작용해야 하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어느 염처 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얀마의 쉐우민에서는 사념처 수행을 하면서 특별하게 심념처 수행에 집중을 합니다. 파욱에서는 일정기간 선정수행을 한 뒤에 위빠사나 수행으로 넘어오는 수행을 합니다. 고엔카의 스승인 우바킹 수행방법은 3일 동안 선정수행을 한 뒤에 7일 동안 위빠사나 수행을 합니다. 마하시에서는 선정수행을 하지 않고 처음부터 위빠사나로 시작을 합니다. 이것은 순수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술룽에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순간순간 번갈아 가면서 합니다. 이 외에도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만 스승에 따라 과정이나 방법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사념처 수행을 하는 방법이 매우 다양합니다. 그래서 어느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수행이 달라집니다.
이렇게 위빠사나 수행은 사념처가 모두 포함되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예외적으로 염처별로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석서에서는 감성적이고 무딘 사람은 신념처를 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또 감성적이고 영민한 사람은 수념처를 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이성적이고 무딘 사람은 심념처 수행을 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성적이고 영민한 사람은 법념처를 하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수행자의 근기에 맞게 수행을 하는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말합니다. 만약 사념처 중에서 어느 하나의 염처 수행을 하려면 반드시 이런 수행을 지도하는 스승을 만나서 배워야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념처 수행에서 어떤 대상이 신념처이고, 수념처이고, 심념처이고 법념처인지 자세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신념처의 대상은 호흡, 행주좌와를 의미하는 네 가지 자세, 분명한 앎, 몸에 대한 부정관, 지수화풍인 4대, 묘지에서의 아홉 가지 알아차림입니다. 수념처의 대상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대상입니다. 심념처의 대상은 여덟 가지 마음은 다시 나눈 열여섯 가지 마음이 대상입니다. 법념처의 대상은 다섯 가지 장애인 오개, 오취온, 12처, 칠각지, 사성제입니다. 이처럼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행을 모두 할 수는 없으므로 지도하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서 자기에게 적합한 수행을 해야 합니다. 특히 위빠사나 수행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소멸시키는 수행이라서 전에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이라서 절대 혼자서 갈 수 없습니다. 혼자서 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부처님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스스로 깨달은 분이라고 합니다.
신념처와 수념처가 구별이 안 된다고 하셨는데 위에서 밝힌 염처별 내용을 보면 구별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 하나에서도 신념처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수념처 수행이 됩니다. 또 호흡을 전면의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리면 심념처 수행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호흡을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으로 보면 법념처 수행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대상을 어떤 염처로 알아차리느냐에 따라 염처별 수행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수행지도를 받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수행은 특별한 정신세계에 관한 것이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심념처 수행은 반드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경험한 지도자에게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비물질이라서 추론적인 영역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지도를 받아도 집중력이 없으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먼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집중력이 생겼을 때 심념처 수행을 하는 것이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저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네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먼저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 일어난 마음 알아차리기,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입니다.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는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는 전면의 마음자리에서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런 수행은 설명을 들어도 알기가 어려우므로 직접 지도를 받는 것이 좋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심념처고 통증을 알아차리는 것은 몸의 신념처로도 알아차릴 수 있고 수념처의 느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다가 통증을 알아차리는 것은 심념처 수행을 하다가 신념처 수행이나 수념처 수행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자유롭게 대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한 순간에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면 집중력이 있어야 합니다. 집중력이 생기면 마음이 똑같지 않고 빠르게 변한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마음에 대한 이해가 가능합니다. 이것이 찰나생 찰나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혜에 관한 것이라서 생각으로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수행을 열심히 하면 차츰 때가 되어 아는 지혜가 납니다. 이런 과정을 돕는 것이 집중력입니다. 궁금한 것은 그냥 궁금한 대로 남겨두십시오. 모든 것을 다 알고 갈 수는 없습니다. 조건이 성숙되어 때가 무르익으면 알 수 있습니다. 수행에 관한 것은 읽거나 들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묘원 올림
첫댓글 답변 감사드립니다. 올려주신 책 내용이 참 좋은 것 같았습니다. 추운데 건강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