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양대군이 주도한 계유정란과 그의 즉위는 조선의 정상적인 왕조체제를 붕괴시켰다. 사대부들 사이에서 국왕 세조가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되면서 소모적인 충역시비에 휘말렸고 수 많은 사대부들이 죽임을 당해야했다.국왕과 동지인 공신들은 훈구파로서 모든 정치.경제.사회적 특권을 독점했는데,법위에 존재하는 훈구파들의 부패는 많은 정상적인 삶을 몰락시켰다.훈구파는 급기야 향리에 은거한 사림파의 세력기반까지 침식해 들어갔고,이에 사람들은 훈구파에 대항해 싸우기로 결심한다. 아무도 공신으로 책봉되지 않았다.더이상왕위계승을위해 공을 세울 필요가 없는 까닭이었다. 문종의 어머니 소현왕후의 상사와 부왕세종의 병환과 상사때 지나치게 슬퍼한 것이 병을 낳았다.문종의 병세가 심해졌을때,세자 홍위(단종)의 나이 겨우 열두살이었는데,그에 비해 수양대군은 서른여섯,안평대군은 서른다섯으로 강성히니 우려를 낳았다.문종이 2년3개월의 짧은 재위끝에 세상을 떠났다. 고명을 남겼다. '분경'을 금지하는 조항을 삽입했다.그런데 수양대군이 이에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수양은 분경금지가 자신들을 겨낭한 것이라며 동생 안평대군을 끌여들여 의정부에 항의 서한을 보냈다.수양대군이 반발하자 의정부는 '대군집은 분경금지의 예외'로 후퇴했고 수양은 이를 이용해 세력을 끌어 모았다. 그는 단종 즉위년7월,친구 권남에게 수양대군을 만나라고 권고하는 것으로 '실록'에 처음 등장한다.이때 그의 직위는 긍지기였다.거듭되는 낙과 끝에 단종 즉위년에 38세에 음서로 경덕궁 궁지기가 되었던 것이다.한명회로부터 수양대군과 연결시켜줄 것을 부탁받은 권남은, 문종 즉위년 장원급제해 정7품 집현전 박사가 된 인물이다.하지만 그전까지는 그역시 한명회와 마찬가지로 낙과를 거듭했다.당시 그들은 자신들을 알아주지않는 세상의 형세를 잊자는 망형교를 맺고 전국의 명산대천을 돌아다니는 사이였다.사실 권남은 전시의 대책에서 4등이었으나,''옛날 중 하나가 고려 500년 왕업을 망쳤는데, 하물며 두 중이 되겠는가?''라며 당대의 명승 신미와 학열을 비난한 것이 유학자인 문종의 마음에 들어 장원으로 급제하였던 것이다.한명회의 부추김을 받은 권남이 수양대군을 찾아가자,수양대군은 그를 내실(침실)로 맞아들일 정도로 우대한다.이 자리에서 권남은,''명공(수양)께서는 대행왕의 영제(맏동생)요, 세종의 여러 아드님 중에서도 가장 연장자이시고 또 어지시니,만일 종사와 생민을 염려하지 않으신다면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부추기면서 한명회를 추천한다. 수양대군과한명회의만남은 왕위에뜻을둔 야심가와 권력에 목숨을건출세주의자의 만남이었다.그들의 만남은 34년간이어져온평화로운헌정질서가혼란속에돌입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수양의 모사간 한명회는 여러 부류의 인물들을 끌어모았다.신 숙주,강 곤, 홍 윤성등의 백두들이 그런 인물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