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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지색(傾國之色) ~ 서시(西施). 스물여덟번째 이야기
"에이그, 며칠 좀 신경 쓰지 않았다고 이리 어질러 놓았으니, 이러니 이 물건을
내가 안심하고 어딜 보낼 수를 있나.."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며 뱀 허물 벗듯 벗어놓고 나간 옷가지들을 주우며 혀를 끌끌차는
이화 부인이었다. 진 대인이 병석에 누워있던 며칠과 샤오룬이 돌아오고 나서
기적적으로 회복한 진 대인의 쾌차를 축하하는 연회를 벌이던 최근 며칠 동안은
이화 부인과 그녀의 딸들에게는 무척이나 바쁜 나날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쩔수 없이
돌보지 못했던 집안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아침 저녁으로 간간이 쓸고 닦았던 부부의 방과 단이 머무는 손님방은 깔끔한
편이었지만 청소나 정리 정돈이라는 것은 어느 나라의 말인고? 기껏 잘 해봐야 이부자리나
정리하고 나름 성심껏 정리한 것이란게 대강 틈바구니에 맞추어 담 쌓듯 물건을 쌓아올린것이 전부인
륜의 방은 돼지 우리나 다름이 없었다. 밤에 입었던 옷가지는 아침에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가며
뱀 허물마냥 벗은 모양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물을 마시던 사발이라던지 빗이라던지
자잘한 것이 모두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당장에 귀를 잡아다가 끌고 와 야단을 쳤겠지만 오늘만큼은 그냥
넘겨줘야 겠다고 생각하며 이화 부인은 어질러진 방을 자신이 직접 치우기 시작했다.
샤오룬이 돌아오기 전에는 보고싶다고 비오는 날 강아지 마냥 기가 팍 죽어서 지내더니
이제는 꼴도 보기 싫다고 방구석에 처박혀서 허구한 날 매일 넋을 놓고 앉아있는 모습에
이화 부인은 부아가 나는 한편에도 어린 딸이 안쓰럽다.
처음 샤오룬이 돌아왔을 때 예인과 함게 온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 심통이 나 저러는
것인가 싶어 이화 부인은 몇 번 륜을 붙잡고 나무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륜은 어머니가
무어라 하든 꿀먹은 벙어리 마냥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이화 부인이 보기에 샤오룬의 정식 정혼자인 예인은 무척이나 경우가 바른, 참으로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비록 언질도 없이 나타난 그녀의 등장에 처음에는 무척이나 당황했던 이화 부인이지만
소흥에 도착한 이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 대인의 병수발을 지극정성으로 드는 그녀의 눈물어린
정성과 높은 신분으로 금지옥엽 키워졌을 것이 분명한 귀족 아가씨임에도 불구하고 사리분별이
정확하고 곱고 곧은 성격에 이화 부인은 점차 예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이화 부인이 예인에게 마음을 터게 된 계기는 바로 그녀의 성격이 반백년을 산 이화 부인의
눈이 보기에는 결코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대하거나 또는 다른 여인을 질시하여 해코지를 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예인이 그동안 륜을 직접 만나거나 언급한 적은 없었지만 종종 그녀는 륜의
어머니인 이화 부인에게 자신도 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했다며 샤오룬의 후처가 될 륜과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넌지시 내비쳤던 것이다.
세상에 말로야 못할 것이 없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처음과 끝이 한결 같을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화 부인은 내심 예인의 성정이 너그럽고 온화한 것에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하여 륜이 샤오룬이 돌아온 이후 집안에만 박혀 있는 것을 나무란 것인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이화 부인은
문제의 본질이 예인에 대한 륜의 악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문제는 바로 샤오룬이었던것 같다. 샤오룬이 돌아오고 나서 그 후에 둘이 자신 모르게 만나서 이야기를
한 것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륜도 샤오룬도 상대방을 먼저 만나러 가거나 혹은 상대방에 대한 언급 자체를
피하고 있었다. 륜과 샤오룬이 다투어서 하루 이틀 정도는 둘이 만나지 않는 것은 지난 세월 줄곧 있어왔던
일이었지만 이화 부인은 이번만큼은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지금까지는 일방적으로 륜이 화를 내고 샤오룬을 만나지 않고 샤오룬이 륜의 화가 풀릴 떄까지 기다리는
륜이 싸움의 주도권을 쥐고 샤오룬이 선처를 기다리는 형식이었지만 이번에는 양쪽 모두 다 주도권을
쥐고 어느 한 쪽도 지지 않으려 팽팽하게 맞선 꼴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승패의 윤곽이 점차 드러나는듯 하였고 승리는 샤오룬의 쪽으로 기우는 듯한
모습이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륜의 수심은 점차 깊어갔는데 그에 비해 샤오룬은 어쩌면, 지난 날 륜에게
그리도 목을 메던 샤오룬이 맞나 싶을 정도로 멀쩡한 모습에다 륜의 생각 따위는 아예 까마득히 잊어버린듯
가끔 누가 언급을 해야 아, 그런 사람이 있었나? 하고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어미의 입장에서 자식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무척이나 가슴아픈 일이었지만 이화 부인은 잠자코
입을 다물기로 하였다. 지금 한때는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잠깐의 고통은 훗날 륜에게 크나큰 교훈으로
돌아올 것이다. 올해가 지나고 내년 초에 샤오룬이 예인과 혼례를 올린 후 륜 또한 샤오룬과 정식으로
연을 맺게 되면 지난 날 샤오룬을 대하던 태도 따위는 모조리 버리고 새로운 예법을 익혀 하늘같은 남편으로서
샤오룬을 받들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기에 샤오룬이 기선을 잡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라고 이화 부인은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일부러 륜에게는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질러진 방의 침대 한 구석에 무언가가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진한 갈색의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보석함이었다.
이게 뭔가 싶어 열어보니 그동안 샤오룬이 륜에게 선물했던 온갖 보석들을 보관하는
보석함이었다. 물건은 무조건 클수록 그만큼 비싼줄로만 아는 륜으로서는 이 손톱만한
옥조각이나 보석들을 제가 심심할까봐 샤오룬이 소꿉놀이식으로 가지고 놀으라고
가져다 주는 싸구려 장식 정도로 알고 있었지만 언젠가 륜이 가지고 있는 보석중 하나가
회계에서 집 한 채 값과 맞먹는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는 이화 부인은 보석의 가치에
대해서 륜에게는 말하지는 않았지만 꼭 꼼꼼히 정리하고 관수하라 입이 닳도록 잔소리를
하였었는데 어찌 이게 이런데 놓여져 있는거지?
사다 준 사람의 성의도 있고 어머니의 잔소리가 싫기도 해서 륜은 보석함 정리만은
그나마 꼼꼼하게 색깔 별로 구분해서 몇 개가 있는지까지 다 세어놓고는 했었다.
그런데 며칠 새 샤오룬에 대한 미움을 이 보석들에 풀었는가 종류별 색상별로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던 이 보석함이 오늘은 뒤죽박죽 마구 섞인채 침대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까지가 이화 부인이 너그러워질 수 있는 한계였다.
"서이광! 당장 이리나와!"
드물게 이화 부인은 륜의 본명을 불렀다, 이 뜻은 그녀가 무척이나 화가 났다는
뜻이었고 난데없는 어머니의 불호령에 다른 방에서 조카 온유와 뒹굴고 있던 륜은
어리둥절해하며 나타났다.
"왜 그러세요?"
"이놈의 가시나, 아무리 철딱서니가 없어도 어찌 이 귀한 것들을 이리 내버려 두는게야?"
역정을 내며 이화부인은 침대 위에 올려둔 엉망진창의 보석함을 가리켰다.
"내 이것을 잘 관수하라 그리 말했거늘 어찌 그리도 말을 듣지를 않어?
아무리 사람이 밉다 하여도 어찌 그 사람의 정성을 이리도 무시할 수가 있는게냐?!!"
이화 부인이 가리키는 손끝을 보고 륜은 인상을 찌푸렸다.
색깔 크기 종류까지 맞춰서 정리해 놓았던 보석함이 뒤죽박죽으로 섞인채
버리는 물건같이 놓여져 있었다.
"엄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그리고 저게 왜 저기 나와있어요?"
"주인이 그걸 모르면 누가 어떻게 알아! 침대 구석에 처박아 놓은걸
방금 내가 끄집어 낸거다"
침대 구석에서 발견했다는 어머니의 말에 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벽장 속에 넣어두고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는데.."
더듬더듬 기억을 더듬던 륜은 얼마전 샤오룬에게 받은 흑진주를 넣으려 잠깐
꺼냈었던 것을 떠올리고는 아, 하며 무릎을 쳤다. 하지만 분명히 다시 제자리에
넣어놓았는데?
"죄송해요, 제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나봐요, 이리 주세요.
다시 넣어놓을게요"
륜은 몸을 움츠리며 저를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는 어머니의 손에서 보석함을
넘겨받고 다시 정리를 하기 위해 안에 든 것을 모두 이불 위에다 쏟았다.
이화 부인은 륜의 하는 행동을 끝까지 감시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인지 아예 팔짱을
끼고 옆에 지켜서있었다. 어머니의 매서운 눈초리에 숨소리까지 죽이며 보석들을
정리하던 륜은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늘 벽장 안에 있던 보석함이 어쩌다 자신이 깜빡하여 다른곳에 놓았다고는 치지만
왜 이리 어질러져 있었을까? 내가 밤에 어두워서 발로 치어 쏟은 것을 언니가 아침에
보고 대충 담아준 것이었을까? 왜 이리 엉망이지?
의아해 하면서도 륜은 빠르게 보석들을 분류해 나갔다.
옥은 백옥과 청옥과 홍옥등 색깔 별로 구분을 하고 금은 금대로 은은 은대로
또 진주는 진주대로...
"어?"
륜은 다시 한 번 살피고 또 살펴보았다.
하지만 없다.
"엄마, 혹시 엄마가 여기 손 대셨어요?"
"네가 스스로 정리하라고 놓였던 상태 그대로 놓았던 것이야,
쯧쯧 기집애가 칠칠맞아도 정도가 있지..."
중얼중얼거리며 이화 부인은 어쩔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륜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그게 어디 간거지?"
그때 마침 단이 방으로 들어왔다.
"세상에, 이 방 모양좀 봐! 륜아, 너 좀 너무 지저분한거 아니니?
좀 치우고 살아"
어머니와 같은 단의 말에 륜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다시 원래의
본론으로 돌아간다.
"언니, 혹시 언니가 내 보석에 손댄 적 있어?"
륜의 질문에 단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가 요새 네 방에 들어올 새가 어딨었니? 매일 같이 저택에 들어가서
일 거드느라 바빴지 게다가 온유 챙기느라 내 방 치울 정신도 없는데 왜 네 방에
들어가서 할일 없이 이것저것 뒤지고 있겠니? 왜, 뭐 없어진 거 있어?"
륜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응... 그런것 같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륜은 대답하며 어머니의 눈치를 살핀다.
"무엇인데?"
"저...까만 진주인데 위에 은으로 장식이 붙어있는 거에요,
아마 방 어딘가에 떨어졌나 봐요. 찾으면 나올 것 같은데.."
륜의 말을 듣자마자 이화 부인의 눈꼬리가 다시 한 번 사납게 치켜올라간다.
"어머, 흑진주? 그거 엄청 귀한것 아니야,
너 흑진주는 없지 않았어?"
속도 모르고 단이 호들갑을 떨자 륜은 씹다만 표정을 지으며 언니를 쳐다본다.
"이번에 받았어."
"뭐어? 이번에? 재빠르기도 하지, 언제 그런건 또 갖다 주셨대?
근데 너 그런거 받았다는 말 안했잖아."
"몰라, 아무튼 바닥에 떨어진 것 같은데.."
툴툴거리며 륜은 침대 아래를 살펴보기도 하는둥 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진주를 찾으려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어머니의 성난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도와줄게"
왠일인지 단도 돕겠다고 거들고 나섰다.
못마땅한듯 팔짱을 끼고서 자매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이화 부인도 이내 곧
진주 색출 작업에 동참한다.
손바닥만한 방에 가구도 얼마 없었으니 바닥을 훑어 진주를 찾는 일은 쉬울 것으로
예상 되었으나 아무리 몇 번을 살펴보아도 진주는 나오지 않았다.
바닥에서 진주를 찾지 못한 세 모녀는 이번에는 원래 보석함을 넣어두던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옷 하나하나를 펴서 털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서랍장이며 이불 사이며, 하여튼 방 안의 모든 틈이란
틈은 모조리 다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진주는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거야! 없잖아!"
한 시간에 걸친 헛된 노동에 단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고
륜의 얼굴은 사색에 질렸다 .
"그럴리가 없어, 내가 어제 아침에도 옷장에서 옷을 꺼낼 때 확인했었는데!"
"그럼 그게 어딜가, 아무데도 없잖아!"
"아니야, 분명히 봤다니까!"
"둘 다 그만해! 이게 뭣들하는 짓이야!"
두 자매의 설전을 보다못한 이화 부인이 참견을 하였다.
"륜이는 그 진주, 여기다 넣은 거 확실해?"
"그렇다니까요, 어제 아침에도 분명히 확인했어요!"
"그런데 그게 어딜가, 설사 다른데 두었다 쳐도 지금 방 안 전체를
털었는데도 안 나왔잖아!"
도와주겠다고 먼저 나서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이 금방 끝날 줄
알았던 때의 생각이었고, 단은 슬슬 이 헛된 노동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단이 그만해라,
진주는 원래 둥근 물건이니 다른 방으로 흘러 갔을 수도 있고 또 온유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웠을 수도 있어, 그러니 다른 방도 한 번 찾아보자"
단을 제지시킨 이화 부인은 차분하게 딸들을 달랜다.
어느새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륜은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단의 한숨에도 불구하고 세 모녀는 다른 방들도 륜의 방과 마찬가지로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느 방에도 진주는 없었다.
혹시라도 쓰레기 더미에 쓸려나가지 않았을까 싶어 집 주변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그것 역시 헛된 일이었다. 결국 낮부터 세 모녀는 헛 삽질만 계속 한 꼴이었다.
"이게 뭐야! 아유, 간만에 집에 일찍와서 쉬나 했더니.."
고된 수색 작업 끝에 의자에 축 늘어져 있던 단이 역정을 내었다. 이화 부인은
굳은 얼굴로 륜을 돌아보았다.
"륜이, 그 진주 정말 어디다 두었는지 기억 안나?"
"분명히 그 보석함에 두었다니까요!"
"그런데 그게 어디가 어딜, 집 안 어디에도 없고 쓰레기도 내다 버린 적도 없고
집 근처에도 없고 온유도 네 방에 들어간 일이 없는데, 그게 도대체 어디로 가?
진주에 발이라도 달렸니, 아니면 도둑이라도 들은거니"
단의 마지막 말에 륜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도둑?
그 말을 했던 단도 이화 부인도 모두 마지막 말에 잠깐 생각을 한 모양이지만
이내 곧 그들도 륜과 같은 결론을 내린듯 했다.
"도둑이라니, 우리 집에 뭐 가져갈 것이 있다고... 게다가 요 며칠 사이에
집에는 륜이가 있었잖아, 밤에도 문을 다 잠그고 잤었는데, 도둑 든 흔적도
없었고...다시 한 번 잘 찾아봐, 혹시라도 어디 흘리고 온 거 아니니?"
"아니에요, 분명 받은 그 날 이 안에다 집어넣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상해요. 분명 내가 그 진주를 이 안에 집어넣은 이후로
이걸 꺼낸 적이 없었는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여기 나온거지?"
륜이 변명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인상을 쓰던 이화 부인은 륜의 표정이나
말투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그녀의 얼굴 역시 굳어졌다.
진주는 잃어버린 것이 아닌듯 싶었다.
그건 도둑 맞은 것이었다.
영문은 알 수 없었으나 직감적으로 굉장히 나쁜 일이 벌어졌단 생각을 하던
륜과 확신은 할 수 없으나 심증조차 확실하지 않은 륜과 달리 무언가 의심이 가는
구석이 있던 이화 부인의 얼굴이 굳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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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또 한 주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 동안 진 대인은 드디어 의식을 되찾고 점차 기력을 회복하고 있던 중이었다.
집안을 감돌던 팽팽한 긴장감이 그제서야 풀어지고 사람들은 조금씩 무거운 집안 분위기에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펴기 시작했다. 집안에 다시 평상시와 다름없는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진 대인의
회복을 축하할 겸 또 샤오룬의 귀환과 그 동안 어려운 상황 때문에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던 예인을
환영한다는 잔치를 여는 것이 어떻겠냐고 저마다 입을 모았고, 그렇지 않아도 돌아온 줄곧 진 대인의 건강에
신경 쓰랴 회계의 일에 신경쓰랴, 개인적인 일에 신경쓰랴, 신경이 날카로워 져있던 샤오룬은 이렇게 한 숨
돌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잔치를 허락하고 잔치 준비에 쓰라며 곳간 하나를 내주었다.
집안 전체가 간만의 즐거운 놀이판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진 대인이 회복기에 접어든 데다가 참으로 화젯거리 없는 이 따분한 소흥에서 잔치라니, 예정에 없다
갑자기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부랴부랴 차리는 잔칫상이기에 일은 많고 고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춤을 추고 노래하는 것 만큼이나 즐거운 것이었다.하지만 단 한 사람, 륜만은 제외였다.
바느질 솜씨에서도 알 수 있듯이 륜은 집안일에는 그닥 재능이 없었다.
일을 망치기만 한다면 그냥 한 번 화를 내고 끝나겠지만 륜의 경우에는 일을 망치는 동시에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까지도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만, 그마안!!!
세 번째로 륜이 떡을 부치고 있던 솥뚜껑 안에서 불길이 치솟자 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꽥하고 고함을 질렀다.
주변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최대한 륜의 옆에서 멀찌감치 몸을 기울인체 륜을 쳐다보고 있었고
그런 륜의 앞머리에 불씨 하나가 옮겨 붙어 지직- 하는 소리를 내며 앞머리 몇 가닥을 태웠다.
겨우 부침떡 하나 부치는 것인데 도대체 무슨 재주인지 륜이 맡는 솥뚜껑에서는 족족 불길이 치솟아 올라
주변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단은 심호흡을 하며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 어금니를 꽉 깨문채 구석을 가르켰다.
"저 구석으로 가있어,"
"아, 앞으로 조심할...수도 있는데..."
실수를 한 것이 민망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 것에 미안한 지 륜은
손바닥을 비비며 말을 우물거렸다.하지만 단은 눈을 부라리며 매몰차게 턱끝으로 부엌 구석을 가리켰다.
륜은 의기소침하여 구석으로 가 수많은 음식재료가 담겨있는 포대자루 사이에 몸을
구겨넣고 쪼그려 앉았다. 앞에는 껍질을 벗긴 새하얀 양파 더미가 수북히 쌓여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풍로 여러개가 동시에 돌아가며 아낙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야채를 볶으며
맛난 향내를 풍기고 있었다.
커다란 솥에 연신 야채를 볶아대던 아낙이 양파를 집으려 하다 그릇에 양파가 빈 것을 보고 륜에게
소리쳤다.
"륜아, 그 양파 좀 썰어줘라"
벌써 몇 번째 일을 돕겠다고 나서다가 쫓겨난 것인지 의기소침하여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그슬린 앞머리를
뚝뚝 끊어내고 있던 륜은 귀가 쫑긋하여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낙이 주문한 대로 양파를 깍둑 모양으로 썰려고 하는데..
"이거.. 어떻게 써는거지?"
분명 양파는 동그란 모양인데 도대체 어떻게 네모나게 자르라는 것인지,
륜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옆 아낙들이 하는 모양을 따라 륜은 조심스레 양파에 칼을 대었다.
"반으로 먼저 자르고..."
양파를 반으로 먼저 자르고 끝을 삼각으로 잘라 뿌리 부분을 제거한 후
삼분의 이 정도만 가로 결 모양으로 자른 후 세로로 자른다.
륜이 한참 동안 옆 아낙들이 하는 모양을 지켜보며 정리한 내용은 이러했다.
하지만 막상 실천으로 옮기자니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칼이 왜 이렇게 안들지?"
실력 없는 목수가 도구 탓을 한다고 했나, 륜은 칼이 무뎌 양파가 잘 잘리지 않는다고
툴툴댄다. 실제로는 손에 쓸데 없는 힘이 너무 많이 실려 그런 것인데도,
옆의 아낙들은 서로 농담을 하고 웃어가면서도 힘 하나 안들이고 썩썩 잘만 자르는데
어찌 자신은 손목이 아프도록 힘을 주어도 잘 되지가 않는 것인지,
륜은 다시 옆의 아낙들을 관찰하며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아낙들은 모두 손목에 힘을 전혀 주지 않은 반동만으로 음을 타며
마치 두부를 베듯이 양파를 썰고 있었다.
륜은 고개는 그 아낙들 쪽으로 돌려 곁눈질을 하며 자신도 그렇게 칼을 놀리기 시작했다.
과연 너무 많이 힘을 싣지 않고 오히려 신경쓰지 않는듯 아무렇게나 자르는 것은 훨씬 더
효과가 있었다.
양파는 아까보다 훨씬 모양도 더 깨끗하고 빨리 잘렸다.
"앗 따가워..."
양파를 자르는데도 왜 눈이 안 따갑나 했더니 결국은 눈이 따끔거리기 시작했고
륜은 눈물을 찔끔거리면서도 한참 신이 난 칼질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러한 과욕은 결국 대참사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아 따가... 앗 따가워!!!!!!!"
처음에는 눈이 따갑다는 말이었으나 그 후는...
"어머, 저거... 어이구야, 륜이 손 벴네!!"
옆에서 같이 양파를 다듬던 아낙이 피가 철철 흘러 넘치는 륜의 손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달려왔다.
"어이구, 이거 아주 제대로 베었다, 세상에.."
날이 잘 선 칼에 작두를 타듯 신들린 칼질이었으니 손가락이 날아가지 않은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할 정도로 상처는 깊었다.
상처의 고통은 둘째치고 륜은 속의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이 벤 상처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아, 아줌마, 내 소, 손!!!"
"가만 있어봐라, 거기 누구 술 좀 갖고 온나!!
륜이가 손을 깊게 베였어!!"
소동에 한창 일을 하던 아낙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이가 많은 아낙들이 노련하게 륜의 상처입은 손가락의 아랫쪽을 묶어 지혈을 하였고
누군가 술에 적신 천을 가져오자 그것을 상처 부위에 칭칭 감았다.
륜은 독한 술이 상처의 표면에 닿자 자지러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이거 어떻게 해? 아무래도 꿰매야 할것 같은데..."
"소 의원님 아직 안 가셨나? 그러면 부탁해 봐, 저대로 두었다가는 큰일 나겄어,"
"그래. 누구 륜이 데리고 의원님한테 좀 가봐! 피가 너무 많이 나서 이대로 가다간
애 죽겠다!!"
하지만 연회가 바로 코앞인 터라 누구 하나 일손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괜찮아요, 저 혼자 갈게요. 그래봤자 윗층인데요, 뭐"
륜은 사람들이 곤란해 하는 기색을 눈치채고는 먼저 말을 했다.
상처의 깊이에 무척 놀라긴 했으나 그렇다고 혼자 못 걸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혼자 갈 수 있겠어?"
"괜찮아요, 겨우 손가락인데요 뭐.."
사실은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타는 듯한 통증이 팔 전체를 타고 흐르고 있는데다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지만 륜은 애써 괜찮다고 말하며 부엌을 빠져 나와 집 안 어딘가에
있을 소 의원을 찾아 윗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지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상처에서는 피가 계속해서 나고 있었다.
아픈 것은 둘째치고 태어나 이렇게 많은 양의 피, 그것도 자신의 피를 보는 두려움에
머리가 어질하고 구토증이 이는 것이 더욱 괴로웠다.
하지만 륜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속하게도 집안 어디에서도 소 의원은 콧뺴기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온 몸의 맥이 빠져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간신히 끝 층까지 올라가 복도에서 만난 하녀에게
물었는데 하늘도 야속하시지, 하필이면 오늘! 소 의원이 왕진을 갔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운도 지지리도 없다며 속으로 쓴 눈물을 삼키며 륜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피 좀 봐!! 륜아, 너 이러다 죽는 거 아니니?
뭐하다 이런거야?!"
"양파 썰다가.."
"양파?"
양파를 도대체 어떻게 썰었길래 손이 거의 날아간 거지?
하녀는 경악에 가득찬 얼굴로 륜을 쳐다보았고 진이 빠져 더 이상 대꾸할 힘도 없던
륜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소 의원님은 한참이나 있다 오실 텐데.. 어떻게 해!!
상처 좀 봐봐, 어디..."
륜의 상처를 본 하녀는 충격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지 말고 회계의 아씨께서 데리고 오신 그 의원님께 보이는 것은 어때?
그 분이라면 지금 어르신 방에 계시는데.."
하녀의 말에 륜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무의식 중에서도 알 수가 있었다.
해서 안 되는 일은 둘째치고 이런 꼴은 칠칠맞은 꼴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엄마한테 가서 직접 꿰매달라고 할래,"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륜은 샤오룬과 예인 앞에서 그 둘 앞에서
자신이 제 손 하나 제대로 놀리지 못해 이 사단을 만드는 어리석은 아이라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동정이나 동정에서 우러나오는 걱정이라면 더더욱.
"절대로 샤오룬 오라버니나 그 아씨, 누구한테 입도 뻥끗 하지마"
마지막으로 하녀에게 단단히 언질을 주고 머릿속으로 이화 부인이 어디에 있을지 생각하며
륜은 생각만 해도 까마득한 계단을 다시 내려가려 몸을 돌렸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륜은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어머나!!!"
바람에 울리는 은종처럼 맑고 낭랑한 목소리가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무슨 일이지? 왜 그래요!!"
마침 물을 떠서 방으로 돌아가던 예인은 모퉁이에서 맞닥뜨린 륜의 창백하다 못해 새파란
얼굴과 피투성이의 손을 보고는 기겁을 하였다.
젠장!
망아지처럼 골목을 뛰놀던 꼬마시절 이후로는 입에 담아본 적이 없던 욕설이 소리없이
터져나왔다. 갑작스레 나타난 륜의 무시무시한 몰골에 놀란 예인은 들고 있던 물병을 떨어뜨리고는
덥썩! 륜의 피투성이 손을 부여 잡았다.
"다친 거에요? 어디를 얼마나 다쳤길래 이래요!"
륜은 예인의 손과 옷자락이 자신의 피에 물드는 것을 보고 그녀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려
몸을 비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조금 다쳤을 뿐이에요"
"조금만 다치긴, 세상에 이 피 좀 보아요!! 어머!!"
비단 옷자락이 피에 물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륜의 손을 잡고 있던
예인은 손가락을 싸고 있던 천을 벗기자 드러난 상처에 다시 한 번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당장 치료를 받아야 겠어요,
조금만 기다려 봐요, 장 의원님이 방금 할아버님의 치료를 끝냈으니.."
"아니,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치료는 소 의원님께 받으면 돼요!"
필사적으로 예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는 륜의 절박한 몸짓에도 불구하고
신은 정녕 륜을 버린 것인건가?
륜은 다음 순간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샤오룬이 바깥의 소란에 무슨 일인지 싶어 방에서 나와본 것이었다.
"륜아!!"
바깥의 소란에 나와 보았는데 륜과 예인이 서로 손을 부여잡고 있는 것을 보고
한 번 놀라고 그 다음, 피범벅인 두 여인의 손에 더 놀란 샤오룬은 곧 그 피가 륜이 흘린 것임을
알고 경악한 표정을 지은 채 빠른 걸음으로 륜에게 다가왔다.
"왜 이런 거야, 어쩌다가..!"
샤오룬이 가까이 다가오자 륜은 온 힘을 다해 예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고는 쪽팔리더라도
이대로 도망이라도 가야 하는 걸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그런데, 륜은 결코 죽을 때까지 이 일을 샤오룬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남의 속도 모르는
하녀가 눈치없게 끼어들어 나불대는 것이 아닌가
"아랫층에서 양파를 썰다가 그랬대요!"
순간 륜은 할 수만 있다면 저 하녀의 입을 영원히 봉해버리고 싶었다.
"양파?"
샤오룬과 예인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륜은 제발 지금 이 순간만 신이 자신을 눈에 띄지 않는 벌레로라도 만들어 주었으면
하고 간곡히 기도했다.
하지만 야속한 신이 그런 말도 안되는 소원 따위를 들어줄 리가 없었고
신보다 더 야속한 하녀의 입은 그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불거리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사고나 안치는게 도와주는 애가 뭘 하겠다고 나섰다가 이 사단을 맞은건지..
아까도 아랫층에 내려가 보니 벌써 솥을 세 개나 태워 먹었더라구요, 참 재주도 용하죠.
떡 하나 굽는데 불기둥이 치솟았다니... 그나마 쉬운 일이라고 양파나 썰라고 한 모양인데 그것마저도.."
그만 말해도 난 이미 쪽팔려서 죽을 지경이거든?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창피함과 민망함의 정도를 넘자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얼굴이 새빨개졌어야 했겠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얼굴은
오히려 더욱 새파래졌고 그 모습을 보고 륜이 곧 기절이라도 할 것이라 생각한 예인은
다급히 샤오룬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샤오룬은 재빨리 륜을 안아올려 근처의 방으로 옮겼고 그 사이 예인은 진 대인을 치료하고
있던 장 의원을 데리고 왔다.
짧고 단정한 흰 수염을 기른 장 의원은 첫 눈에 륜의 상처를 살펴 보고는 흐음- 하는 깊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칼에 깊이 베였군, 어쩌다 이랬지?"
륜은 순간 방 안에서 구경을 하던 하녀가 다시 참견을 하려 하였지만 그것을
저지해 준 샤오룬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아, 요... 요리를 하다가.."
하지만 이것 역시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에 심히 민망한 대답이었다.
륜은 슬그머니 샤오룬과 예인의 얼굴을 살폈다. 륜의 성격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예인은
마냥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륜을 아는 샤오룬은 걱정이 된다는 한편에
또 천방지축으로 날뛰다 그랬나 보군, 하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의사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이 상황에 불만이 많던 륜은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처럼 생긴 장 의원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처를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곧장 치료를 시작했다.
한 때 주나라 황제의 어의였다던 장 의원은 과연 소문난 명의답게 그의 치료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속전속결한 것이었다.
재빠르게 상처 부위를 마취하고 륜이 구역질을 느낄 사이도 없이 상처를 꿰맨 장 의원은
눈 깜짝할 사이에 붕대까지 감아놓았다.
륜은 그렇게 빠르면서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그의 치료에 진심으로 감탄을
하다 자신을 보고 미소를 짓고 있는 예인의 얼굴을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장 의원은 작은 종이에다 그의 인상만큼이나 깔끔한 필체로 처방전을 써준 후
그곳에 적힌 약초를 구해다 달여먹으라 간단명료한 지시를 내리고는 방에서 나갔다.
치료가 끝나자 장 의원이 륜의 손을 봉합하는 동안 뒤에 가까이 다가와 있던 샤오룬은 오히려
멀찌감치 떨어졌고 예인이 다가와 륜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아직도 아파요?"
예인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 하며 륜의 어깨에 깃털처럼 가벼운 손을 얹었다.
어색해 하며 륜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륜의 모습에 예인은 생긋 웃는다.
"우리 초면은 아니지요?
게다가 만나기 전에 난 당신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어요, 그동안 상황이 여의치 않아
통성명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인사하게 되었군요, 반가워요. 황씨 가문의 예인이에요"
륜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예인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상냥한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샤오룬과 같은 고위 귀족이었기에 륜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이 샤오룬을 대하는 것처럼 하면 안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 예를 갖추어 절이라도 해야하는 것일까?
예인은 륜의 혼란을 읽은 듯 너그럽게 웃었다.
"괜찮아요, 앞으로 형님 아우할 사이인데,
게다가 환자인 사람에게 절을 받을수는 없지... 손은 괜찮아요?
다른데가 불편하지는 않아요?"
예인은 상냥하게 웃으며 륜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분명 륜은 아직도 예인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처음보다는 훨씬 더 그녀에 대한
경계심이 허물어 졌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예인, 아무래도 내가 이 아이를 집에 데려다 주고 와야 할것 같습니다."
순간 륜이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이 아이'?
샤오룬이 방금 자신을 이 아이... 라고 불렀다.
예인은 미소짓는 얼굴을 샤오룬에게로 돌렸다.
"그렇겠습니다, 손은 당분간 쓰지 않는게 좋을테고 또 오늘은 많이
놀랐을 테니 쉬는 것이 좋겠지요"
예인은 직접 샤오룬을 도와 륜을 부축해주지는 않았지만 방문앞까지 나와
륜을 배웅했다.
"조심해요, 그리고 당분간 요리는 하지 말아요"
예인은 륜을 배웅하며 우스갯 소리로 끝마디를 덧붙혔다.
륜은 샤오룬에게 안기다시피 하여 걸어가면서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예인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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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걸어갈 수도 있어,"
륜은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꽉 끌어안아(단 둘이 남게 되자 더욱 세게)
거의 자신을 옆구리에 끼어 들다시피 하고있는 샤오룬에게 항의 하였다.
하지만 샤오룬은 들은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륜의 허리에 휘감은 팔에 더 세게
힘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꽉 조이고 있었는데 허리의 압박이 더욱 심해지자 륜은
낮은 비명을 내질렀다.
"뭐하는 거야! 내려달라고 하잖아!"
지난 밤 숲속에서 만난 이후로 거의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 생각보다 오래가는 륜의
분노에 어찌할 줄을 몰랐던 샤오룬은 오늘 륜의 상처를 보고 역시, 륜은 륜이구나, 칠칠맞게 저런 사고나
치고 다니는 내가 아는 륜이가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은근슬쩍 장난을 치며 이번 상황도 넘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일부러 내려달라는 륜의 말도 무시하고 장난으로 들어올린 거였는데
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륜의 화난 음성에 샤오룬의 팔에 힘이 풀렸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샤오룬은 순식간에 인형마냥
옆구리에 들고 가고있던 륜의 다리를 다른 한 손으로 들었다.
샤오룬이 눈 깜짝할 새에 다리를 들자 순간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지려던 륜의 상체를 샤오룬의 다른 팔이
안아들었고 갑자기 일어난 일에 륜은 기겁을 하였다.
"뭐하는 거야?!!"
"계단이잖아, 다리를 그렇게 떨면서 어떻게 이 계단을 다 내려가?"
무뚝뚝하게 대답을 하는 샤오룬의 얼굴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띄고 있었으나 륜은 그 순간
정말로 샤오룬에게 그나마 남아있던 정이란 것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륜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륜의 화가 어느정도 풀린것이라 보았는지
샤오룬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것봐, 륜이는 륜이라니까, 늘 화를 내도 이렇게 안아주면 금새
화를 푸는... 내 작은 륜이라니까.
혹시라도 륜이 계속해서 화를 낼까 마음 한 구석은 조마조마했던 샤오룬은 그제서야 편안하게
참으로 오래간만에 륜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샤오룬이 보기에 화는 풀린것 같았지만 무언가 여전히 불만이 남아있는 듯 눈을 내리깔자 흰 얼굴 위로
길고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복숭아처럼 솜털이 보송한 뺨은 분홍빛의 홍조가 깨물어 주고 싶을만큼
사랑스러웠다. 불만스럽게 오물거리는 도톰한 붉은 입술이 참을 수 없을만큼 유혹적으로 보인다.
언제 보아도 황홀해 질만치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또 있을까,
팔 안에 안겨있는 륜의 몸은 작으면서도 품에 쏙 들어오는 아담한 체구였다. 생각하려 하지 않았지만
이성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샤오룬의 또 다른 부분이 의문을 제시했다.
이렇게 가벼운데 어떻게 이렇게 부드럽고 폭신하지?
두 손으로 모아쥘 수도 있을 것 같은 가느다란 허리에 한 손에 차지도 못하는 연약한 팔과 다리에도 불구하고
샤오룬의 품에 안겨있는 륜의 몸은 부드럽고 폭신한 느낌이었다.
샤오룬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이내 곧 한숨을 내쉬었다.
예인과의 혼례가 이제 반 년도 채 안남은 상태였으니 조금 더 자제심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샤오룬은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장면들을 지울 수가 없다.
이제 반 년만 더 기다리면 륜이 완전히 제 여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지금처럼
저에게 덤벼드는 일도 없어지겠지...
고분고분하게 현모양처 흉내를 내고 있는 륜의 모습을 떠올리자 샤오룬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륜은 눈을 치켜떴다.
"왜 웃는거야?"
샤오룬은 큭큭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들이야 말로 그의 일생동안 꿈꿔왔던 것이 아닌가,
지난 열 다섯 해 동안 줄곧 자의 반 타의 반 륜에게 억압당하고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기다려야 했던
세월들아, 앞으로 살면서 조금씩 갚아나가 주겠다!
연애 박사 강연은 이 장면을 보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남녀간의 연애 방식에 대한 생각의 차이를 확연히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샤오룬은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어른이 되니 더더욱 륜을 사랑하게 되면서 아이 같아 보이는
그녀가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상대의 나이가 어려 완전히 표현하지 못하는 사랑을
제 나름 표현한다고 하여 보살펴 주는 방식을 선택한 것인데 륜으로서는 그것을 자신을 어리다
취급한다 하여 섭섭한 것이고 더군다나 상대방의 배경과 자신보다 더 상대에게 적합한 듯한
맞수에 그것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상대방과
자신이 처한 상황이 자신이 결코 반항하거나 벗어날 수 없는 상대라면 더더욱.
륜의 입장이 그러하다면 샤오룬은 그동안 자신이 륜을 동생처럼 보살펴 주며 그녀의 응석을 모두 다
너그러이 받아주고 져준 것을 두고 그 동안은 자신이 손해를 봤으니 이제는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돌려받을 때가 됐지도 않느냐는 것이다.
륜은 자기 자신보다는 샤오룬을 위해서라도 그와 동등한 입장이 되기를 원했고 그것을 위하여
제 나름대로 고군분투 하였다. 하지만 남자인 샤오룬은 륜을 여자로 사랑했지만 륜이 여자라는 것은
깨닫지 못했었다. 샤오룬에게 사랑과 누가 주권을 차지하느냐는 싸움은 별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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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급히 나가야 되서 한 분 한 분 언급은 못하지만 댓글 남겨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려요!ㅠㅠ
제가 요즘 다른 분들 소설을 읽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하루 하루 올라오는 새 글이 얼마나 기쁜지
절실히 실감하네요-_-;;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첫댓글 ★
진주는 서용이 훔쳐갔군요-_-;;륜아........ㅠㅠㅠㅠㅠ걍 어서 니 운명으로 가렴......그게 더 나을 것 같아,,,,,
ㅠㅠ 결국 아버님 때문에 그 운명으로 갈거에요~ 앞으로 조만간.. 한 세 편 안에는 나오겠네요
진중하던 우리의 용 아버님께서 일을 치셨군요....;;;
결국은요 하하 담편에는 왜 그랬는지 서용의 심리? 같은거를 표현할 거랍니다
...아버님-_-..어찌 진주를..ㅋㅋㅋㅋㅋㅋ;; 아 전 가면갈수록 왜이렇게 샤오륜이 미워지는걸가요 ㅠㅠ
ㅋㅋ 샤오룬...에 대해서도 변명의 장을 조만간 갖도록 하지요ㅎㅎ
서용.............아버님 왜 그러시는지........ ㅠㅠ 샤오륜과, 서용아버님이 너무 싫어 지려고 합니다 ㅠㅠ 밉상같아요 ㅠㅠ
요즘 이 두 남자 때문에 륜이 고생중이죠ㅎㅎ
아 제발 ㅜㅜ ㅁㄴ이ㅏ러댤ㄴㅇ라팇퍼ㅏㅌㅊㄹ 훔칠게 없어서 륜이의 보물을 ㅜㅜ
다음편에서 곧 변명의 장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ㅎㅎ
빠른 연재 부탁드릴게요~~정주행 했는데 안나왔네요....ㅠ_ㅠ 너무 재밌어요......전 이렇게 재미있는 사극은 진짜 처음봄....... 그 진주를 왜 훔쳐갔을까요? 도박판에 정신이 팔려서?? 혹시 륜이는 첩실로 살아가느니 공녀가 되는 길을 선택하지는 않을까요? 암튼.........제발 빨리 다음편 올려주시길ㅠㅠ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담편도 곧 올릴테니 지켜봐주세요^^
륜이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