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산업화에 성공해 날아오르는 데 걸린 기간을 제시했는데, 로스토우에 따르면
영국은 장장 131년 (1783~1914년) 프랑스는 84년 (1830~1914년) 독일은 74년 (1840~1914년)
볼셰비키 체제의 러시아는 72년(1890~1962년) 일본은 72년(1880~1952년)이 걸렸다.
서구 열강들에 한참 뒤진 1960년대에 출발했던 우리는 불과 20년 만에 이륙에 성공했다.
1975년 말 "탱크를 만드시오. 우선 미제 전차 성능을 우리식으로 바꾸고 끌어올리는
개조사업으로 시작합시다" 박정희는 현대그룹의 왕회장을 만나 대뜸 그렇게 일렀다.
서슬에 밀린 정주영은 알겠다고 일단 대답했지만 뜻밖의 지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76년 7월 21일이고 명칭은 현대 차량이었다.훗날 현대정공으로 바뀌었고 그때 약속대로
각종 기차, 지하철 그리고 지금 우리가 타는 KTX차량까지 만들어 내지만, 당시에는 탱크
개조사업과 신형 전차 설계부터 불붙였다.
미제 M-48 전차는 A-5형으로 개조돼 105 밀리미터 포를 장착했고 미국의 탱크 전문
기술용역회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때 설계했던 탱크를 시승해보지
못한 채 타계했으니 더 없이 아쉽다.
사정거리 180킬로미터 첫 미사일 "백곰"
당시 미사일은 한국이 세계 일곱 번째로 자체 개발하고 보유한 나라임을 선언한 쾌거이자 방위산업
도약을 보여준 성과였다. 그 무렵 박정희는 보안사령관 강창성에게 "핵무기 개발의 95퍼센트는 완료됐다"
고 내비쳤다. 카터 대통령과의 드잡이 속에서 추진해왔던 핵 개발이 가시권에 들어온 것이다.
국산 병기의 첫 탄생일은 1972년 4월 3일이다.
국산무기의 첫 아들 격인 81 밀리 미터 박격포나 카빈 소총 그리고 105 밀리미터 곡사포 등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이름인지도 모른다.지금 우리가 자랑하는 10대 명품 무기란 결코 우연이 아니며
당시 박정희의 의지이자 실무개발 종사자의 피와 땀이 분명했다
박정희는 일본으로부터 8억달러 청구금액을 받고 그걸로 국교정상화를 마무리 지었다는 이유로 "굴욕외교"
"매국외교"의 당사자라는 최악의 욕설을 들었던 사람이다.
그런 아픔을 가졌던 그인지라 8억 달러 종자돈을 밑천으로 한국경제를 완전히 일으켰는데,
그렇게 번 돈을 20여 년 뒤 더 멋지게 쓸 수가 있다면 망설이고 말고 할 필요조차 없었다
하나더 잠실종합운동장도 그의 재임 때인 1977년 일찌감치 시공에 들어갔다. 그게 중요한 대목인데
놀라운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박정희는 서울 올림픽의 실질적인 산파이기도 하다
올림픽 유치를 의결했고 그가 재가했던 것이 1979년 9월 21일이다
<< 박정희, 한국의 탄생 >> 저자 조우석 퍼온 글
실로 박정희대통령각하에 대한 서민적인 삶과 결단력등을 읽고 있노라면 너무도 고박정희 대통령님이
그립습니다.
한가지 박통께서 가장 싫어 했던 말, 거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던 말이 "한강의 기적"이었다한다
대중들이 쓰니까 잠시 양해를 했을 뿐이란다.그자신은 질색팔색을 했다한다.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우리 성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물이나 로또 복권 같은 행운 같은게 아니라는 또렷한 인식때문이란다
한국인 스스로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냈다는 자부심은 그토록 크고 강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