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갈대
나흘간 천안 상록호텔에서 사회적응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십이월 셋째 토요일이다. 정년퇴직을 앞둔 공직자에게 공무원 연금공단에서 주관한 은퇴 지원 연수였다. 강사로 나온 분들의 얘기가 은퇴 이후 생활에 도움 되겠지만, 그보다 상록호텔 1인실에서 사흘 밤을 보내면서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유년기 이후 학창시절부터 여러 곳을 거친 사십 년 교단생활을 되돌아봤다.
동짓달 긴 밤은 토막잠으로 자고 습관처럼 한밤중 일어나 연수를 마치고 내려온 소회를 글로 남겨놓고 날이 밝아오길 기다렸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아침이었다. 이른 아침밥을 먹고 날이 덜 밝은 여섯 시 반에 산책을 가려고 현관을 나섰다. 두터운 외투를 껴입고 방한모와 목도리를 둘러 그리 추운 줄 몰랐다. 가로등이 켜진 보도를 따라 퇴촌삼거리로 나가니 창원천 산책로였다.
미명일지라도 산책객이 더러 나올 법도 한데 날씩 추워서인지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창원천 건너편 창이대로는 가로등이 켜진 채 오가는 차량이 드물었다. 반송공원 북사면 천변을 따라 반지동 대동아파트를 지나 유목초등학교 곁을 지났다. 명곡교차로가 가까워지니 날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살얼음이 살짝 언 물웅덩이는 쇠백로와 왜가리가 목을 감추고 외발로 서서 아침을 맞았다.
반송소하천이 흘러온 샛강 생태보도교에서 창원천 3호교 밑을 지나니 중대백로 두 마리가 냇물에 노는 물고기를 잡아먹느라 먹잇감에 집중하고 있었다. 파티마병원 건물로 아침 해가 떠오르는 기운이 비쳤다. 그래도 햇살이 퍼지지 않은 때라 마스크에서 입김이 나와 안경 유리알 습기가 시야를 가려 안경을 벗고 걸어야했다. 창원대로 용원지하도 구간에서 공단 배후도로로 올라섰다.
전차와 열차 객차를 생산하는 현대로탬에는 주말인데도 특근하는 근로자들이 새벽같이 몰아온 차들이 이면도로에 세워져 있었다. 창원천 하류는 시든 갈대와 잡풀이 무성했다. 여름이면 정글을 연상할 정도였는데 서리가 내린 이후 잎줄기는 모두 시들어 쇠락해졌다. 덕정교를 지나 봉암갯벌이 바라보이는 곳까지 나아갔다. 갯벌 바닥은 밀물이 밀려와 수위가 점차 높아져 가는 때였다.
겨울 봉암갯벌에는 각종 철새들이 날아와 먹이 활동을 하는데 썰물로 바닥이 드러나야 개체 수가 많았다. 물이 채워져 가는 때라 청둥오리와 논병아리 정도가 수면에서 헤엄쳐 놀았다. 새벽에 집을 나서 2시간가량 천변을 걸었으니 8킬로미터 거리였다. 남천과 합류 지점을 반환점 삼아 되돌아갈 것인지 남천을 따라 거슬러 오를 것인지 정해야 했다. 남천 천변을 따라 걷기로 했다.
지난여름 비가 오던 날 남천을 거슬러 오른 적이 있었다. 지난 봄방학에는 두 가닥 물줄기가 합류한 지점에서 천변을 거슬러 오르다가 특이한 광경을 봤다. 겨울을 남녘에서 난 가마우지들이 진해선 철로 교각에 떼 지어 일렬로 앉아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나는 곧 북녘으로 되돌아갈 녀석들의 열병을 한 몸에 받으며 남면로 산책로를 따라 삼동교를 거쳐 올림픽공원으로 갔더랬다.
남천이 흘러가는 냇물에 몇 마리 오리가 유유히 헤엄쳐 다녔다. 하천 가장자리 무성했던 녹색식물들은 모두 시들고 갈대만 풍성했던 꽃을 달고 흔들거렸다. 산마루 억새나 둔치 물억새는 겨울이면 세찬 바람에 잎줄기가 야위어갔만 갈대는 잎줄기를 그대로 유지한 채 새들의 은신처가 되어주었다. 용제봉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햇빛이 남천 수면에 비치니 갈대는 더 아름답게 보였다.
창원공단 배후 남면로 산책로를 따라 삼동교와 연덕교를 차례로 지난 목동교에 이르러 창원대로를 건너 차원병원 앞에서 빌딩이 숲을 이룬 시내 중심가를 지났다. 염증을 낫게 할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 들렀다가 시청로터리를 지나 용지호수로 갔다. 연일 계속된 추위가 아니라 호수는 얼지 않아 쇠물닭과 고니들이 먹이활동을 하고 있었다. 아직 겨울다운 추위가 더 남아 있지 싶다. 21.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