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차꼬에 꿰였을때
시 105편 18-19절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8절에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원뜻이 혼(영혼)이라는 주가 달려 있습니다 즉 그의 혼/영혼이 꿰였다고 해석이 됩니다.
그럼 요셉의 인생중 영혼이 차꼬에 꿰인 시기는 언제일까요?
가능성은 3장면입니다. 창세기의 사건으로 보면 17세에 형들에게 배신당하여 노예로 팔려가는 때입니다. 그다음엔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성폭행미수죄라는 억울한 누명 이후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에 갇힌 경우입니다. 그다음엔 30세에 바로 앞에 서서 총리로 세워졌는데 풀려나기 전 2년입니다. 넓게보면 17세부터 30세 사이의 13년이고 짧게보면 28세부터 30세까지 2년이라 생각합니다.
창40장에 관원들(술 맡은 관원장 떡 굽는 관원장)의 꿈 해석 사건이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 해가 지난 후에(two full years)” 바로가 꿈을 꾸고(창 41:1),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해서 요셉이 불려 나옵니다
요셉이 관원장(술 맡은 관원장)에게 “나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오늘 내가 내 허물을 기억하나이다” 즉 내가 잘못한 걸 이제야 말하겠다라고 하면서 요셉을 소개합니다
저는 이시간이 요셉이 제일 낙심 절망한 시간일거라 생각합니다. 사람은 희망이 아예 없을 때의 고통도 크지만, 희망이 생겼다가 꺼질 때는 마음이 더 꺾이기 쉽습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라는 책을 보면 우리가 어떤 기대를 하였다가 무너질때 더 심하게 좌절합니다. 감옥에서의 꿈해석으로 도움의 문이 열릴 것 같았는데 다시 닫히고, 기다림이 길어지는 시간이 더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기대가 특정 날짜에 걸려 있다가 무너질 때 사람이 급격히 무너진다고 말합니다. 프랭클은 한 동료 책에서는 F가 “전쟁과 고난이 3월 30일엔 끝날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그 날짜가 가까워져 해방이 어려워 보이자 3월 29일 갑자기 고열로 앓기 시작했고, 3월 31일 사망했다고 적습니다. 갑작스런 희망 붕괴가 저항력(면역)을 떨어뜨려 잠복해 있던 감염(티푸스)에 무너진 것으로 해석합니다. 또 다른 사례는 “크리스마스면 집에 갈 거야”가 무너지자, 연말 사망률이 급증했습니다. 1944년 크리스마스~1945년 새해 사이에 수용소 사망률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었는데, 그 이유는 노동·식량·날씨·전염병 같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엔 집에 갈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을 품었다가 아무 좋은 소식이 없자 용기를 잃고 실망에 잠식된 것에서 찾습니다.
요셉 이야기로 생각해보면 “관원장 덕에 곧 풀릴지도”라는 기대가 생겼다가 “잊힘”으로 무너지고, 거기서 2년이 더 흘렀다면 좌절하게됩니다. 우리 시점에서는 2년이라는 기간을 알고있지만 요셉의 시점에서는 풀려나기 1분전에도 자신의 처지를 알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차꼬에 영혼이 꽤인 2년은 그저 망한 시간이었을까요? 수용소에서 사람들이 죽은 이유는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희망을 ‘날짜’에 걸었기 때문에 무너짐도 한 번에 찾아온것입니다. 요셉도 관원장이 풀려나면 곧 좋은 소식이 올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식이 없고, 시간이 더 흘렀습니다. 그때 요셉이 붙잡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이번 달, 이번 절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었습니다.
우리는 자꾸 묻습니다. “언제 풀려날까요?” 시편은 조용히 답합니다.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때까지 하나님은 아무것도 안 하시는 게 아니라, 요셉을 자라게하십니다. 요셉을 성도답게 만드십니다.
요셉이 꿈을 해석하려면 아마도 하나님께 기도했을겁니다. 관원들에게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창 40:8) 바로 앞에서도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창 41:16)라고 답했으니까요 그리고 기도의 응답으로 관원들의 꿈을 해석했을겁니다. 그렇다면 기도응답으로 기대하게하신 하나님게서 그 인간적인 기대마저 무너뜨려 절망까지 이르게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오래 궁금하였습니다 지금 생각은 자라게하심입니다.
요셉이 해석을 받았고, 관원장이 풀려났고,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 요청했으니 요셉 마음속에는 “이제 문이 열리려나?” 하는 기대가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희망의 기둥’을 사람(관원장)에게 걸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2년의 시간 혹은 13년의 시간을 딱 한 문장으로 해석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다.”
즉 하나님은 요셉을 ‘성도답게’ 자라는 시간으로 사용하셨습니다 .
그렇다면 무엇이 자랐을가요?
먼저 능력의 성장입니다. 꿈 해석 능력 자체가 커졌다기보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는 영적 능력이 자라났습니다.
인격의 성장입니다 억울함 속에서도 원망에 잠식되지 않는 힘입니다.
기대의 재배치입니다. 사람의 약속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시간으로 희망의 근거가 옮겨진것입니다.
그러면 단련되어서 자란 요셉은 무엇을 하였까요?
먹였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먹이는 사람’으로 빚으셨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한 문장으로 말하면, 상처받은 사람이 ‘먹이는 사람’이 된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버림받았고, 누명썼고, 잊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총리 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 앉았을 때 어떤 사람이 될지였습니다.
권력을 쥐면 보통 두 길로 갑니다. 하나는 “이제 내 차례다” 하고 원수 갚는 길, 다른 하나는 “이제 살릴 차례다” 하고 품는 길. 요셉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7년 흉년에 바로도 먹이고, 애굽 사람들도 먹이고,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도 먹이고, 마침내 자기 가족까지 먹였습니다. 아마도 보디발도 먹이고 그의 아내도 먹였겠지요 그런데 더 깊이 생각하면 그가 먹인 것은 곡식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은 아니었을까요?
요셉을 단련하여 자라게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요셉이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요셉을 통해 많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빚으셔서, 그 사람의 손을 통해 생명의 통로를 만드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난도 종종 이렇게 다시 읽혀지길 원니다. “왜 나에게 이런 억울한 일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 누군가를 먹이시려는구나.”
여기서 ‘먹인다’는 건 밥만이 아니라, 위로, 용서, 지혜, 길, 그리고 다시 일어설 힘까지 포함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억울한 날도 있고, 기다림이 길어지는 날도 있습니다. 그럴때 “주님, 지금 제 안에 무엇을 빚고 계세요?
누구를 먹이라 하시는 지요?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누군가 높이실 때는, 뽐내게 하시려는 게 아니라 살리게 하시려는 것이고
하나님이 누군가 낮추실 때는, 꺾으려는 게 아니라 그릇을 크게 자라게하시는것입니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주시닌 아버지께서 주신 것은 피하고싶은 억울함과 고난과 감옥과 차고일지라도 언제나 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