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져보라 수도 없이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르팍에 상채기를 새기며
제대로 넘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하리라
요즘처럼 아주 작은 어린이용 자전거 말고
페달에 발끝이 닿지도 않는
아버지의 삼천리호 자전거를 훔쳐 타고서
오른쪽으로 넘어질 것 같으면 더욱 오른쪽으로 핸들을 기울여보라
왼쪽으로 넘어질 것 같으면 왼쪽으로 더욱 핸들을 기울여보라
그렇다고 어떻게 되겠느냐
왼쪽 아니면 오른쪽밖에 없는 이 곤두박질 나라에서
수도 없이 넘어져보라
넘어지는 쪽으로 핸들을 기울여야 하는 이치를
자전거를 배우다보면 알게 되리라
넘어짐으로 익힌 균형감각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아비들을 이해할 날도 있으리라
그러던 어느날에사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아슬아슬한 균형으로
네가 아비가 되어 있으리라
(시와 시학사 시인선 13 복효근 시집 <새에 대한 반성문>에서)
요즘 한국은 봄날이지만 이곳 뉴질랜드는 이제 가을로 접어듭니다. 대낮의 햇살은 여전히 뜨겁지만 저녁 햇살은 기분 좋을 정도로 적당히 따스하고 바람이 불면 제법 시원합니다. 저녁을 먹고 1시간 정도 집 근처를 산책하기는 그만입니다.
그냥 걷는 것이 따분하기만 한 딸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우리의 산책길에 따라 나섭니다. 3년 전 이민 오던 첫해에 사주었을 때는 발이 잘 닿지 않던 자전거의 페달을 이제는 가뿐하게 밟습니다. 지난 해에 부쩍 자라서 이제 엄마 키보다 크니, 더 이상 옆에서 거들지 않아도 됩니다.
딸아이 동윤이는 이곳에 와서야 자전거 타기를 배웠습니다. 한국에서는 도로가 워낙 비좁고 위험해서 여러 번 졸라댔는데도 자전거를 사주지 않았지요. 그런데 여기 뉴질랜드에 오니 동네마다 넓은 잔디밭이 있어서 자전거를 탈 만하다 싶어서 중고품으로 한대 사주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잔디밭마다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어서 그림의 떡이지만, 이곳은 잔디밭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으니 자전거 배우기에는 아주 그만이었습니다. 흙바닥이나 아스팔트에서 자전거를 배우다가는 넘어져서 무르팍 깨지기 십상이지만 잔디밭에서는 그럴 염려가 없거든요.
그러나 딸아이에게 자전거를 사주면서 사실 나는 망설였습니다. 자전거에 얽힌 아프고 부끄러운 기억 때문이었지요.
초등학교 시절, 나는 자전거를 사달라고 할 만한 처지가 아니어서 그냥 친구들이 타는 것을 쳐다보기만 했지요. 어쩌다가 친구의 것을 빌려 타려고 해도, 세발자전거는 졸업했지만 두발자전거는 아직 배우지 못해서 조금 가다가는 넘어졌습니다. 그러면 친구들은 자전거도 못 탄다고 나를 놀려댔지요.
보다 못한 단짝 친구가 자신의 자전거로 내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주기로 했습니다. 그 친구가 뒤꽁무니를 붙잡아 줄 때는 괜찮다가도 손만 놓으면 넘어지기를 수십 번 하면서 자전거 타기에 도전했습니다.
하지만 끝내 혼자서 자전거를 유유히 타는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불안스럽게 조금 달리다가는 넘어지기 전에 얼른 멈추는 정도밖에는 배우지 못했지요. 그 이후로도 자전거를 탈 기회가 종종 있었지만, 창피하다고 피하기만 해서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도 자전거를 제대로 타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이사를 가시게 되어 이삿짐을 나른답시고 같은 반 친구들 몇 명과 함께 나섰지요. 짐을 거의 다 옮겨 놓고 보니 자전거 한대가 보이더군요. 친구들은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잠시 쉬는 틈을 이용해서 자전거를 타기로 했습니다.
한명씩 돌아가면서 동네 한바퀴를 돌고 오기로 했는데, 나는 자존심 때문에 차마 자전거를 잘 못 탄다는 말은 못하고 속만 바짝바짝 태웠습니다. 마침내 차례가 되어, 자전거 안장에 오르는데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학교 5학년 때, 그 친구로부터 배운 것이 전부이고 또 그 이후론 한 번도 자전거를 타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몸은 그 오래전 일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처음 얼마 동안은 잘 나가더군요. 그런데 문제는 내리막길이었습니다. 어느 쪽 핸들이 브레이크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나는 그냥 "어, 어, 어!"하는 사이에 내리막길로 접어들었고, 자전거는 엄청난 속도로(적어도 내게는) 내리막길을 내려가더군요.
순간 정신이 아찔하더니,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자전거는 멀쩡했지만 얼굴과 팔과 다리는 온통 긁힌 상처투성이가 되고 말았지요. 그러나 상처에서 배어나오는 피와 얼얼한 아픔보다는 친구들 앞에서 자전거도 제대로 타지 못한다는 것이 들통난 부끄러움에 더 가슴 쓰렸습니다.
한번 그렇게 자전거에 호되게 당하고 나서는 아예 자전거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약 20년의 세월이 흘러 또 다시 나는 자전거와 마주쳐야만 했습니다. 이번에는 직장 동료들과 함께 한 야유회 자리에서였지요.
경기도 가평에 있는 강촌유원지로 야유회를 간 우리는 막국수로 점심을 먹은 후 구곡폭포까지 자전거 하이킹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하필이면 자전거 하이킹이람. 난 속으로 투덜댔지만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니 나만 반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모두들 자전거를 한대씩 빌려서 타고 시원스럽게 달리기 시작하는데, 나는 이리저리 자전거를 매만지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탈 엄두가 나지 않았지요. 천천히 가겠다고 하면서 마지막 한사람까지 모두 보냈습니다. 그리고 혼자 남아 근처의 자전거 전용도로에서 열심히 연습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 되더군요. 조금 달리는가 싶으면 어느새 옆으로 기울고 그러면 넘어질까 겁이 나서 더 이상 달리지를 못하고 멈추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동료들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도 나는 폼나게 자전거를 타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왜 폭포까지 안 왔느냐는 동료들의 질문에, 그냥 뭐 여기에 있고 싶어서, 라고 얼버무리며 대답을 했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벌겋게 달아올랐지요.
그리고 여기 뉴질랜드에 와서 나는 이제 딸아이 앞에서 자전거 타기 시범을 보여야 할 판이니, 어찌 선뜻 자전거를 사주고 싶었겠어요. 그러나 동윤이가 나처럼 되지 말기를 바라면서 자전거를 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집 근처 넓은 잔디밭에서 딸아이에게 자전거 타기를 가르쳐주기 시작했습니다. 딸아이도 나를 닮았는지 한참을 뒤에서 잡아주고 가르쳐 주었는데도 잘 타지를 못하더군요. 하도 잔소리를 해댔더니 마침내 딸아이는 내게 짜증을 내면서 "그럼, 아빠가 한번 타봐!"라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이런, 드디어 운명의 시간이 왔구나. 나는 차마 못 탄다는 말은 못하고 자전거에 올라탔습니다. 힘차게 페달을 밟고 일단 달리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참을 달려도 자전거는 넘어지지 않더군요. 실로 30년만에 자전거 타기에 성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잔디밭을 한바퀴 빙 돌고 와서 동윤이에게 자전거를 건네면서 나는 으쓱거리며 말했습니다.
"잘 봤지? 무서워하지 말고 타봐. 넘어질 것 같으면 그쪽으로 핸들을 돌려봐. 그럼 안 넘어져. 알았니?"
이렇게 말을 하면서 비로소 내가 그동안 자전거를 타지 못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숱하게 얘기는 들었지만 넘어지는 것을 무서워해서, 자전거의 핸들을 항상 넘어지는 쪽과는 반대편으로 돌려왔다는 것을.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지난 30년 동안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내 발과 자전거의 핸들을 잡는 내 손을 지배해 왔다는 것을. 뉴질랜드의 부드러운 잔디밭 위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비로소 그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가끔씩 저녁 무렵에 자전거를 타면서 저는 '넘어지는 쪽으로 핸들을 기울여야 하는 이치'를 생각해 봅니다. 세상이라는 이 넓은 공간에서 삶이라는 자전거를 타고 있는 나는 혹시 눈앞의 장애와 모험을 피하려고만 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문해 봅니다.
위 시에서 복효근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수도 없이 넘어짐으로써 익힌 균형감각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삶이거늘, 나는 그동안 넘어지는 것을 애써 피하려고만 하고, 장애물은 피하고 쉽게 가려고만 하지 않았는가 자문해 봅니다.
그리고는 깨닫습니다. 복효근 시인의 말처럼, 삶이라는 자전거를 타려면 넘어지는 쪽으로 핸들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그러다 보면 그 아슬아슬한 기울어짐 속에서 다시 삶은 똑바로 서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해도 넘어진다면 그것은 아직 내게 모자람이 있는 까닭이고, 그렇게 넘어짐을 통해서 균형 감각을 익히기 위한 것이겠지요.
30년이 걸려 배운 자전거를 타면서 느끼는 이 아비의 균형 감각을 딸아이는 알 수 있을까요? 그 균형 감각은 제대로 넘어지는 법을 배운 연후에 수도 없이 넘어지고 나서야 도달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딸아이는 이해할까요?
그렇게 생각하며 걷고 있는 내 앞을 딸아이의 자전거가 휭 하니 지나갑니다. 그 자전거 바큇살에 부딪혀 반사되는 저녁 햇살이 눈이 부십니다. 막 세상을 건너가기 시작한 삶 하나가, 아직 생채기 하나 없는 삶 하나가 그 부신 저녁 햇살 속을 씽씽 달립니다. 그렇게 달려가다가 넘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는 사람으로 딸아이가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오마이뉴스에서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