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이 무거웠다. 칠흑의 밤과도 같은 분위기였다.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많은 인명이 희생된 가운데 함안 칠원에 있는 한 마을을 방문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오래 전에 해 둔 약속이었다. 어린 아이들이 바다 속 깊은 곳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결코 가벼울 수 없었다. 그래도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침통한 나라 분위기와는 달리 날씨는 유난히 쾌청했다. 좋은 구조 소식을 기다리며 22명의 동문을 태운 버스는 함안을 향해서 시동을 걸었다. 출발 장소는 강남 일원동 중동고 후문이었고 시간은 25일 오전 8시 정각이었다. 경상남도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는 작은 고을 함안이다. 함안(咸安)을 생각하면 편안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이름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모른다. 모두(咸) 편안함(安)을 느끼는 곳, 그것은 우리 모두가 꿈꾸는 것이 아닌가. 또 이런 것도 있지 않나 싶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경남 함양이다. 함안과 함양(咸陽)은 음가가 비슷하다. '함(咸)'은 한자까지 동일하고 양성모음으로 된 '안'과 '양'도 소리가 비슷하다. 고향을 어디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경남 함양'이라고 하면 듣는 이의 절반쯤은 '경남 함안'으로 듣는다. 이 세상에 고향보다 더 편안함을 주는 곳이 달리 있을까. 동문(同門)이라는 것은 신기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100년이 넘는 중동고의 역사 속에 시대와 장소를 달리해 공부한 사람들이지만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벽을 쉬 허물게 되니 말이다. 초등학교와 대학보다도 고등학교 동문이 더 그렇고 많고, 많은 고등학교 동문 중에서도 중동고 동문의 '하나 됨'은 그 강도가 훨씬 크다. 그 '하나 됨'은 사(私)가 아닌 공(公), 즉 국가와 민족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가치는 더 넓고도 깊지 않나 싶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중동학교'와 연관된 인물을 빼면 많은 공백이 발견되는 것도 이런 데 기인한다. 물론 그 배경에는 중동의 설립자 백농 최규동 선생의 민족 교육이 자리하고 있다. 그 동문 중 한 사람이 산돌 손양원 목사이다. 이 분은 3.1운동 발발 직후인 1919년 4월 중동학교에 입학해서 이듬해 4월까지 만 1년 공부하다가 자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자퇴 이유도 부친 손종일 장로가 함안 지역의 3.1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구속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학업을 지속할 수 없었던 데 기인한다. 손 목사의 중동학교 재학 사실이 묻혀 있다가 이 학교 총동문회 백강수 회장 등 몇 사람들의 노력으로 밝혀졌고, 지난 2월 7일 제 107회 졸업식장에서 중동고등학교는 손 목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게 되었다. 교계에서 많이 알려진 훌륭한 사람도 사회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못한 사람도 있고, 사회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사람도 신앙적인 면에서는 점수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부류에 속할 것이다. 손양원 목사는 교계와 사회 양쪽 모두로부터 인정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에 속한다.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를 거부한 강직한 사람,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자로 받아드린 초월적 인물, 한센병 환자들을 끝까지 지키다가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된 순교자, 참으로 말과 행동과 신앙이 일치된 삶을 살다 간 선각자이다. 마음의 확장은 행동반경을 넓게 한다. 손양원 목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고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 우리는 지난 2월 13일 여수 손양원순교기념관을 방문했었다. 그곳은 손 목사가 순교 직전까지 사역하던 한센병 환자들의 신앙공동체 애양원이 있던 곳이다. 그때 함께 한 손양원기념관 건립본부 본부장 박시영 목사가 손양원 목사 생가 복원 및 기념관 착공 사실을 알려주었고, 착공식에 중동고 동문들이 함께 하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간략히 들은 바로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기념사업회가 힘을 합쳐 손양원 목사를 역사 위에 공고히 세우는 작업이었다. 함안군에서 제공한 리무진 버스를 타고 50대 초반부터 70대 중반까지 20년 넘는 터울의 다양한 동문들이 모처럼 어린 아이로 변해 이 행사에 참석하고 있었다. 동심(童心)은 어떤 연배의 사람에게나 필요한 마음이다. 순수하고 타산하지 않는 마음, 이런 것이 모여 새 역사를 창조한다는 마음으로 함안을 향해 달렸다. 총동문회 황병직 사무총장이 함안 가는 길에 진주에 들려 그곳 동문들을 만날 예정이라고 했다. 어디에서 하든 점심 요기를 해야 할 텐데, 진주 동문들이 대접하기로 했다는 것도 공지했다. 진주 촉석루 앞 유정식당, 50년 전통의 음식점에서 우리는 장어구이로 맛있는 시간을 보냈다.
사진설명-손양원 목사 명예졸업장 전달식 전 시간을 내어 함안박물관을 둘러본 뒤 기념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함안에서의 손양원 명예졸업장 전달식은 오후 5시 30분으로 잡혀 있었다. 조금의 시간 여유가 있었다. 함안박물관에 들려 우리의 문화안(文化眼)을 넓힐 시간을 갖는 것도 유익이 될 것 같았다. 시(市)도 아닌 군 단위의 기초자치단체에서 박물관을 갖고 있다는 게 신선하게 느껴졌다. 경제적 풍요가 행복의 조건을 다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내가 사람을 보는 기준에는 지니고 있는 개인의 문화 수준도 크게 반영된다. 이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기관과 단체도 마찬가지이다.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 함안군, 마음이 끄는 자치단체일 뿐 아니라 이런 데 사는 군민들도 나에게 수준 있게 다가온다. 함안박물관에서 20 여 분 가니 칠원면이 나왔다. 우리가 가는 곳은 칠원면 구성리 손양원 목사 생가 복원 터와 기념관 건립 예정지. 면 소재지 치고는 제법 도회지 풍치를 갖추고 있었다. 아파트도 보이고 상가 건물도 나름대로 위용들을 뽑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틀 전(4월 23일) 기념관 착공식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동문들 중 크리스찬이 많았기 때문에 수요 밤 예배가 있는 23일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곳곳에서 그 날의 움직임을 읽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착공식 행사 안내장을 보니 일의 경과와 계획 그리고 건축 개요 등이 상세히 등재되어 있었다.
사진설명-손양원 목사 생가가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고 있었다. 8평 크기의 초가는 어린 시절의 빈한함을 그대로 말해 주는 듯해서 마음이 무거웠다. 사업명은 '애국지사 산돌 손양원(손연준) 선생 기념관'으로 되어 있고 대지 면적은 3,655 m²(1,100평), 생가 복원 30 m²(8평), 기념관 면적은 구체적으로 건축면적 727.15 m²(220.35평), 연면적 1,240.76 m²(375.99평), 규모는 지하 1층, 지상 2층, 구조는 철근콘크리트조, 노출 콘크리트로 외부 마감을 처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기념관 건축을 설계한 이은석 교수(경희대학교, 주 코마건축사 사무소)는 기념관을 세 개의 입체적 방(cube)으로 나누었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손양원 애국지사의 인생 전체에서 드러나는 큰 교훈적 가치는 나라 사랑, 사람 사랑, 하늘 사랑의 세 가지 테마이다. 이 세 테마를 전시하는 단순한 흰 색 큐브, 돌 큐브, 그리고 붉은 색 큐브는 각각 그 가치들을 상징하고 체험이 가능한 살아있는 기념 공간이다”(손양원기념관 안내문에서) 기념관 건립본부 본부장 박시영 목사는 공사 개요 판 앞에서 다시 한 번 설명하는 수고를 했다. 그는 총 공사비가 52억 원 여 소요되는데 국비 11억 7천만 원, 도비 8억 6천만 원, 군비 29억 7천만 원, 기념사업회 2억 원 등으로 충당될 것이라고 했다. 올해 12월 완공 목표로 하고 있긴 한데, 아직 부족하다며 전국의 교회와 성도들의 동참을 간곡히 부탁했다. 각 교회들이 재정적으로 힘들고 어려움이 많겠지만 중앙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이 일에 적극 나설 때 우리 성도들과 교회도 함께 성의를 보여 이 사업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성도 한 사람이 일 만원씩 헌금을 해 주시면 좋겠다고 바람을 밝혔다. 또 64주년 순교 기념일(9월 25일)에 맞춰 개봉되는 영화 ‘죽음보다 강한 사랑 손양원’이 흥행해서 기념관 건립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손양원 목사의 본명이 손연준(孫燕俊)이란 사실을 나는 이곳에서 처음 알았다. 호적에는 손연준으로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산돌은 아이 때 불렀던 이름인데 지금은 아호처럼 사용되고 있고, 손연준이란 본 이름 대신 손양원으로 불리고 있다. 손양원이란 이름은 애양원에서 따 온 것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가치관의 혼란으로 극심한 분열과 갈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럴 때 손양원 목사의 헌신과 용서 그리고 섬김의 정신은 더욱 돋보인다. 특히 원수까지 사랑한 그의 실천적 양심을 많은 사람들이 높이 기리고 있다.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죽인 사회주의자 청년을 양자로 삼은 일은 시대를 초월해 신행일치의 목회자로 회자되고 있다.
사진설명-1906년 손양원 목사의 부친 손종일 장로에 의해 세워진 칠원교회 우리는 손양원 목사의 모교 칠원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칠원교회는 1906년 설립되었으니까 금년으로 108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교회이다. 우리나라 선교 초창기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복음 전파가 어렵기로 소문 난 영남 지방에서 그것도 작은 면에서 108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가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 교회를 개척한 분이 손양원 목사의 부친 손종일 장로이다. 손 장로는 함안 지역의 3.1 만세운동 주모자로 검속되어 1년 옥살이를 한 지사이다. 손양원 목사는 7세 때부터 이 교회에 출석해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부전자전의 모범적 신앙 모습을 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칠원교회에서 손양원 목사 중동고 명예졸업장 전달식이 있었다. 간단하지만 큰 무게를 지닌 전달식이었다. 중동고 백강수 총동문회장이 함안군 군수를 대신해 허호승 부군수에서 전달했고, <중동고백년사>를 칠원교회 최경진 목사에게 전달하고 <칠원교회백년사>를 동문회장이 받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사회를 맡은 박시영 목사는 이 소중한 명예졸업장을 기념관이 완공되는 대로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영구 보존하겠다고 말했다. 이 명예 졸업장은 역사적인 한 인물을 중동인화(中東人化)해서 만방에 공포하며 고이 간직하는 의미가 담긴 것이었다.
사진설명-중동교 총동문회 백강수 회장이 함안군 허호승 부군수에게 명예졸업장을 전달하고 있다. 손양원 목사는 믿음에 철저한 신행일치(信行一致)의 목회자였고, 일제의 불의에 저항한 독립투사였을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극한 대립까지 초극한 민족주의자였다. 이런 점을 국가가 인정해서 손 목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한 바 있다. 1995년의 일이니까 그가 순교한 지 45년 만의 일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의 항일 및 민족 사랑의 공적에 비해 건국 훈장의 등급이 너무 낮다는 것이다. 건국훈장 다섯 등급 중 애족장은 가장 낮은 등급에 속한다. 내가 보기에는 적어도 건국훈장 3등급인 독립장 이상을 추서하는 것이 그분의 업적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몽양 여운형 선생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가 뒤에 일등급인 대한국민장으로 승급해 받은 일이 있다. 손양원 목사의 서훈 승급 문제는 그를 역사적으로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 반드시 재고되어야 할 사안이다.
손양원 목사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의 뜻을 기념사업회 이만열 이사장(전 국사편찬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의 생가와 기념관이 갖는 의미는 중요합니다. 오늘날 혈연 지연 학연과 이념으로 분열되고 갈등과 투쟁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에, 이곳이 용서와 화해, 평화를 상징하는 귀한 성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의 사랑과 화해의 정신이 이곳을 통해 평화의 메시지로 널리 꽃 피었으면 합니다.”(손양원기념관 착공식 기념사에서)
행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칠원교회에서 정성껏 대접하는 저녁 식사를 맛있게 먹은 뒤 타고 온 리무진에 몸을 의탁하고 서울로 향했다. 믿음은 전국을, 아니 세계를 하나로 묶어 준다. 함께 간 중동고 동문만 해도 20 여 년 차이가 나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고, 함안 칠원에서 만난 사람들도 초면이었지만 전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믿음으로 인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 중심에는 주님의 신실한 종 손양원 목사가 자리하고 있다. 그의 기념관이 완공되기까지 필요한 것들을 채워달라고 기도할 것이며, 완공되는 날 산돌 손양원 목사를 만나는 듯한 기쁨으로 그곳에 달려 갈 작정이다.
첫댓글 인터넷신문 <뉴스앤조이> 2014. 5. 1. '문화'면에 '이 사회의 빛, 손양원 목사'란 제목으로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