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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계후(繼后)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정릉(貞陵)을 찾아서 ①
-신덕왕후(神德王后) 정릉(貞陵)을 찾다-
지난 2월 12일 정월 삼사순례의 일정 중 세 번째는 정릉이었습니다. 이번 삼사순례의 삼 사는 모두 정릉의 원찰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릉의 원찰인 흥천사에서 2시경 출발 하였는데 지반 번 답사차 밟은 길보다 더 지름길을 있음을 흥천사의 혜경스님으로부터 듣 고 오니 훨씬 빨랐습니다. 흥천사에서 바로 올라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 을 알고 보니 지난 번 답사차 북악스카이웨로 내려왔을 때 걸은 길이었습니다. 그때 정릉 매표소에서 흥천사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니 내려갔다 오르는 길을 가르쳐 주어 그렇 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더 가까운 지름길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여 2시 10분경 정릉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정릉을 지척에 두고 살았는데도 정릉을 한 번 가야지 하면서도 못갔었는데 한 번 가게 되니 두 번째 가게 되었습니다. 그 런데 여기에 살고 있는 분들도 알아보니 정릉이란 소리는 들었어도 가 본 사람은 거의 없 더군요. 사진은 지난 번 가서 미리 찍은 관계로 혼합되어 있습니다. ^^
정릉 매표소
관람시간은 3~10월은 06:00~17:30까지 매표하고 관람시간은 18: 30분까지이고 11~ 2월은 06 : 30 ~16:30까지 매표하고 관람시간은 06 : 30 ~ 17 : 30까지입니다. 요금은 만 19세 ~64세는 1,000원이고 10인이상 단체는 800원입니다. 그 밖은 무료입니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은 휴관합니다. 정릉안내도
정릉 (세계유산 / 사적 제208호)
『정릉은 조선왕조를 창건한 태조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신덕왕후는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로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 현비가 되었고, 방번, 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왕후가 태조 5년(1396년)에 돌아가시자 지금의 중구 정동에 능을 조성하고 능호를 정릉으로 정했다. 태종 9년(1709년) 2월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후궁의 대우를 받고 있었으나 현종 10년(1669년)에 복권이 되어 지금의 능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에 신덕왕후의 신주도 태조가 있는 종묘에 모시게 되었다.』
정릉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각자 손에 든 하얀 물건은 흥천사의 혜경스님이 주신 선물보따립니다. 앞에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산 기념물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조선왕릉 세계유산
『조선왕릉(정릉)은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 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 조선왕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40기)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울어진 신성한 공간이며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제례가 이어 져 오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등재일 : 2009년 6월 30일』
정릉만 세계문화유산이 아니라 조선왕릉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입니다.
정릉에 왔으니 정릉에 대하여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정릉은 조선 제1대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陵)입 니다. 신덕왕후(神德王后 ? ~1396)는 성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로 태 조의 계비입니다. 신덕왕후의 가문은 고려의 권문세가로 태조 이성계가 중앙정계에 진출 하여 정치 영역을 넓혀 조선을 건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태조의 원비(元 妃)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였으나 태조 즉위 전인 1391년(고려 공양왕 3) 세상을 떴기 때문에 신덕왕후가 조선 최초의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신덕왕후는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 사이의 장성한 여섯 아들을 제치고 자신의 아들 방석(芳 碩)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성공했을 정도로 정치적 역량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태조와 의 사이에서 방번(芳蕃), 방석(芳碩) 두 아들과 경순공주(敬順公主)를 두었으며 태조는 신 덕왕후를 극진히 사랑했다고 합니다. 1396년(태조 5) 병환으로 승하했으며, 태조는 신덕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흥천사(興天寺)를 세웠습니다.
태조는 사랑하던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개국공신들의 주장대로 국모를 높이는 뜻에서 공 신수릉제(功臣守陵制)를 채용하고 도성 안 황화방 북원(皇華坊 北原 : 현 정동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을 조영했습니다. 그리고 원찰(願刹)로 능 동쪽에 170여 칸의 흥천사(興天寺)를 세워 조계종의 본산으로 삼았습니다. 처음 능지로 정한 곳은 안암동이었으나 산역을 시작 할 때 물이 솟아 나와서 능지로 채택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후 태조는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방원이 신덕왕후 소생의 두 왕자를 죽이자 정사에 뜻을 잃고 왕위를 방과(芳果 정종)에게 양위하고,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으로 방원이 동복형 방간(芳幹)을 토산으로 귀양 보내고 정종이 왕위를 방원에게 물려주자 태상왕으로 있으면서 자주 정릉에 들러 불공에 정성을 들였다고 합니다.
태종 8년인 1408년 태조 승하 후 능을 옮기자는 의견이 나오자 태종은 지난 날 태조가 계 비 강씨의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데 대한 사감이 있어 태종 9년인 1409년 2월 23일 도성 밖 양주(楊州) 사을한록(沙乙閑麓) 지금의 정릉 자리로 능을 옮겼습니다.
정릉으로 가는 길
한 달 후 태종은 정자각을 헐고 목재와 석재는 각각 태평관(太平館)을 짓는데 썼으며 "석인 은 묻고 봉분은 깎아버려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라."는 명을 내려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 습니다.
1410년, 태종은 생모인 신의왕후(信懿王后) 한씨를 태조의 유일한 정비(正妃)로 태조와 함 께 그 신주를 종묘(宗廟)에 부묘(附廟)하여 신덕왕후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킨 다음, 그 해 광통교(廣通橋 : 현재의 광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구(舊) 정릉의 석물 중 일부인 병풍석 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케 했습니다.
이장된 정릉은 종묘에 부묘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수십 년간 방치되어 왕후의 능이라기보 다는 주인 없는 무덤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던 중 선조 때 신덕왕후의 친정 후손이 국묘봉사자(國墓奉祀者)의 군역(軍役) 면제에 따른 혜택을 보고자 선조가전(宣祖駕前)에 호소하여 비로소 정릉의 소재파악에 나섰습니 다. 이에 변계량(卞季良)의 이장축문(移葬祝文)에서 그 위치를 겨우 알아냈다고 합니다.
선조 14년인 1581년 11월 삼사(三司)에서 건원릉비에 신의, 신덕이 열거되어 있고 강씨가 차비(次妃)로 서술된 점, 태조가 정한 강비의 시책(諡冊)이 엄연한데 후대인들이 부묘를 폐 하고 능을 옮김으로써 중대한 원(寃)을 남게 한 것은 모두 천리에 어긋난다고 하며 신덕왕 후의 시호와 존호를 복귀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6개월 만에 중단 되고, "예(禮)에 두 적척 (嫡妻)가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정자각도 세우지 않고 한식절 제사만 올리는 등 예를 소홀 히 하였습니다.
손에 손잡고
그후 현종(顯宗) 때에 와서 정통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가 중시되고 예론(禮論 : 효종 승하 후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 문제로 일어난 논의)이 일자, 강비를 종묘에 배향 (配享)해야 한다는 부묘 문제가 다시 대두했습니다. 즉 현종 10년인 1669년 2월 판중추부 사 송시열(宋時烈)등이 정릉과 흥천사기문(興天寺記文)이 갖추어 있음을 들어 종묘에 신덕 왕후를 배향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으며, 이로 말미암아 정릉은 260여 년 만에 복구되었 습니다.
그해 11월 1일 신덕왕후가 태묘에 배향되던 날 정릉 일대에는비가 많이 쏟아졌다고 합니 다. 그래서 이때의 비를 신덕왕후의 원(寃)을 씻어주는 비라하여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했다 합니다.
정릉(貞陵) 상설도
정릉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입니다. 이것을 토대로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홍살문(紅箭門)
능에 가기에 앞서 정문(旌門)이 보이는데 이는 영혼이 출입하는 문으로 이를 홍살문(紅箭 門) 혹은 홍문(紅門), 또는 신문(神門)이라 합니다.
우선 정릉 안내자가 능으로 안내를 하기에 능으로 먼저 갑니다.
정자각 위로 능이 보입니다.
우선 정자각으로 가지 않고 능을 먼저 가는데 능으로 가는 길은 정자각 좌측에 있습니다. 입구에 안내 말씀 입간판이 있습니다.
능침 관람 안내. 매일 오후 2시~3시입니다.
저기가 능이라고 선답자(先踏者)는 말합니다. ^^
조금만 오르면 능이 나옵니다.
여기가 능침(陵寢)입니다.
능을 둘러싼 담장을 곡장(曲牆)이라 합니다.
곡장(曲墻)은 능상(陵上)을 보호하기 위해 주위로 東ㆍ西ㆍ北 3면을 둘러쌓은 담장을 말합 니다. 여기는 남ㆍ서ㆍ북면을 둘러쌓은 것같습니다. 능상(陵上)은 무덤으로 봉분(封墳), 산소(山所), 분상(墳上)이라고도 합니다.
능의 모습
능은 단순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능의 방향은 경좌갑향(庚坐甲向)이라 합니다. 서에서 동쪽으로 안좌한 방향을 말합니다. 우선 능상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 (長明燈)이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望柱石)이 있습니다. 또한 능상 앞에는 좌우로 문인석 (文人石)과 석마(石馬)가 세워져 있습니다. 능상 주위로 두 필씩 석양(石羊)과 석호(石虎) 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인석(武人石)도 없고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병풍석(屛風石)도 없는 단순한 형태 의 능입니다. 아마도 처음 조성되었던 정릉은 모든 양식을 갖춘 장엄한 능이었을 것입니 다. 병풍석 뿐만 아니라 무인석 등 최대한 예를 다하여 조성했을 터인데 그런 석물이 모두 태평관을 짓고 광통교 복구공사에 쓰여졌다니 신의왕후의 혼령이 있다면 얼마나 한스러웠 을까 생각해 봅니다.
능상(陵上)과 혼유석(魂遊石)과 장명등(長明燈) 모습입니다.
혼유석(魂遊石)
우리가 흔히 상석(上石)이라 부르는 이 혼유석은 여기에 제물을 차려 놓는 곳이 아닙니다. 이곳에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는 줄 대부분 아시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는 저 밑의 정자각(丁字閣)에서 지냅니다. 이 돌은 혼이 노니는 곳입니다.
혼유석 모습
그리고 혼유석을 받치는 돌은 북같이 생겼다고 해서 고석(鼓石)이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이 정릉이 초라한 무덤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 복구된 것이 현종 때의 일인데 지금의 석물은 그때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단 두 가지는 지금의 정동에 있던 정릉에서 가져온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고석(鼓石)과 장명등(長明燈)이라 합니다.
고석(鼓石)의 모습.
이 문양은 용면(龍面)이 아닐까 합니다. 용은 왕을 상징하는 것이니 왕비인 것이니 그런 문양을 새기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설마 귀면(鬼面)이라 하지는 않겠지요?
장명등(長明燈)
돌아가신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덤 앞에 세우는 등으로 혼유석 앞에 설치하는데 정릉의 장명등은 고려양식이 엿보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장명등은 조선 초기에 정릉에 세워 졌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려 공민왕의 장명등과 거의 같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에는 아무래도 모든 것이 고려의 양식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명등(長明燈) 옆모습
이것은 무슨 문양일까?
이 문양은 태극문양도 보이는데 이 문양은 꼭 불교의 삼보마크와 똑같습니다. 이것을 가 만히 보면 불보살님의 후광처럼 빛이 발산하는 모양이 보입니다.
장명등 앞에서
덕명님, 정파님, 그리고 도훈군이 이 순간을 증명합니다. 왕릉을 찾았으니 이에 대한 여 러 가지 용어나 상식을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다음에도 하나하나 알아보 겠습니다. 2부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 다음은 신덕왕후의 정릉 2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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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존된 세계 문화유산 정릉 , 독특한 혼유석 , 정수님 모자 사진도 잘보이고 정말 다행입니다.그리고 상세한 해설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 어떨까요. 시간이 지나면 출판기념회를 마련 하도록 하겠 습니다. 선답사도 수고 하셨 습니다, 개구리가 소리치는 그날이 오면 월은 기운이 더욱 상승 하리라 믿으며,,,. _()()()_ 소화제 = 화이통 같은 말이지요.
감사합니다. 정릉을 한 번 찾아가니 이런 곳이 있었나 하였고, 순례 때 법우님들과 함께 가니 마음이 더욱 흐뭇하였습니다. 소화제 화이통 _()_
말로만 듣던 정릉도 참배하고, 역사 공부 그리고 불교미술 공부도 하고 갑니다....나무묘법연화경()()()
감사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멋진 사진기로 담으셨으면 좋았을 것을... _()_
능침관람 못해 봤는데...덕분에 잘 봤습니다. _()_
아, 그러셨군요. 그때 관람시간이 넘었나 봅니다. 그렇다면 다음도 기대해 보세요. 석마, 석양, 석호 등도 있습니다. _()_
수모를 겪은 왕릉이네요. 병풍석과 난간석도 없으니 초라함마저 느끼게 했습니다.
과욕은 금물인데 과욕의 댓가를 처절하게 치뤘습니다. 태조가 각히 사랑했기 때문에 최대한 장엄했을 터인데 허망무상하게 되었습니다. 광교 어딘가에 병풍석이 있을 것 같네요. 조선 최초의 국모이니 병풍석에 난간석이 둘러쳐졌을 것이고 문무인석에 그 장엄함이 비할 바가 없었을 것인데... _()_
삼사순례하는 동안 도훈군이 함께해서 마음이 기뻣습니다.나도 나이가 들어서인지ㅎ 옛 어르신들 처럼 커가는 애들이
곁에 같이 다니면 좋더라구요.백우님 도훈군이 대견 하지 않습니까_()_
예, 늘 도훈군은 대견합니다. 초등학교시절부터 보아 왔기에 그 마음은 더합니다. 자주 함께해서 많은 것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저는 20대, 30대 시절에도 절에 다닐 때 70대 거사님, 나이 드신 보살님과 산으로 절로 많이 다녀본 바가 있어노소 나이 불문 다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_()_
정릉 근처만 돌아다녔지 능안에 들어가서 참배하기는 처음이엇네요 역사깊은 곳에서 많은것을 배우며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_()_
우리 법우님들 대부분 정릉이란 말은 들었어도 가 보신 분은 드물 것입니다. 능순례를 해 봐야겠어요. 원찰과 함께... _()_
오랜만에 왔습니다. 정릉 말로만 듣던 정릉이군요. 원래 정릉의 석물은 두 가지군요. 장명등과 고석... 정릉에 얽힌 사실과 사연 잘 읽었습니다. _()_
예, 원래의 정릉에서 가지고 온 석물은 딱 두 개랍니다. 이제 보니 여기도 사진이아났네요. 다시 잡아와야겠군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