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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떠도는, 그럴싸하게 꾸며진 유언비어 수준의
박정희 친일행적 10가지,론,,
이것에 대한 명쾌한 반박문을 퍼왔습니다..
어느 분이신지,, 대단하시네요..
(이런 반박문이 나오게끔 한 원문은 따로 퍼오지 않았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은 안 봐도 알것이고, 아직 안 보신 분은 볼 필요 없습니다..^^)
- 펌 -
먼저 현재 인터넷이 떠도는 박통의 친일행적 10가지란 글은 네이버 오픈사전에 등록된 글로서 아무런 증거도 없이, “아님 말고” “~~카더라”란 유언비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글임을 먼저 밝힙니다..
최근 많은 단체에서 박통에 대하여 친일파에 해당되는지 여부에 대한 상반된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친일파의 정의 즉 어디까지를 친일파로 분류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아서 입니다......
따라서 위 논쟁에 대해 크게 분류해보면
1. 적극적 친일행위자만 해당된다 : 을사오적등 대표적 친일파들로서 이부분에 대하여 이견이 없습니다.
2. 일제시대 공직에 있었던자도 포함된다. : 이부분에 대하여 논쟁의 여지가 많습니다..
3. 창씨개명한자도 포함된다 :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가외에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해당되는바, 창씨개명 자체로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습니다..(친일파청산에 반대하는 분들의 대표적 주장)
위의 세가지 분류를 본다면 박통은 2번에 해당됨에 따라 논란이 계속되었으나 현재 개정중인 친일청산법에 의한 친일파는 친일행적위주로 분류함에 따라 위의 1번항에 해당되며 이 기준은 과거 반민특위에서의 친일파 선정기준과 비슷한 것으로서 보여집니다.
먼저 인터넷상에 떠도는 박통의 친일행적10가지란 글을 검토 해 보겠습니다.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 이러한 주장에 대한 증거는 현재 전혀 없으며, 만약 있었다면 박정희대통령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렸을 것이나 현재까지 “~~카더라.” 라는 글만 있을 뿐입니다...
혈서론의 출처가 만주일보라고 하는 데. 만주일보는 1927년에서 1934년까지라고 입니다.
즉 1934년에 폐간되었으나 박통이 입학한 때는 1942년입니다.
만주일보가 보관되어 있는 서울대의 소장목록입니다.. 찾아보시길...
(http://147.46.181.112/lib_service/separate/paper_list.html#마)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
③ 완전한 일본인
- 위의 글들은 주관성이 개입된 글들로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글들도 엄청 많습니다... (예들 들면 지난cbs 방송에서 박통의 제자들이 증언한 박통이 선생으로 있을 당시 민족교육등...)
또한 님을 싫어하는 분들은 님을 극히 나쁘게 평가할 것이며, 님의 친구는 님을 극단적으로 좋은 평가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항을 인용하는 것은 맹인모상 즉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사람의 평가는 오직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 이 주장 역시 허위 날조된 글입니다.
위의 글에서 박정희는 독립군 토벌을 신나게 토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만주에 독립군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박통은 1944년 3월부터 1년 5개월간 만주군제8단(단장은 중국인 唐際榮)소속으로 근무지는 중국 열하(요즈음의 이름은 承德)지방 이였습니다. 이지역은 독립군이 활동하던 지역까지의 지금도 기차로 24시간이나 걸리는 곳입니다..
또한 박통이 만주군에 복무한 1944년 당시의 만주독립군투쟁 항일 기록을 보면 독립군은 1931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내륙지방의 도시인 중경(중국표현으로 "충칭")으로 본부를 옮긴 뒤 거기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즉 1944년 당시에는 만주에는 독립군이 없었습니다..
* 아래 네이버 백과사전를 검색해 보시길 바랍니다..
간도특설대(총79명) - 姜在浩 李元衡 朴鳳祚 金燦奎(金白一) 金錫範 金洪俊 宋錫夏 石希峯 崔南根 崔在恒 신현준 최경만 윤춘근 문이정 趙某(豊田) 김용기 태용범 백선엽 윤수현 이재기 김묵 豊田義雄 吳文剛 李淸甲 申奉均 海原明哲 白川** 金松壯明 伊原久 鶴原** 朴東春 李鶴汶 崔忠義 朴鳳朝許樹屛 金大植 方得官 洪淸波 金龍虎 金致斑 具東旭 朴春植 方太旭 孫炳日 劉仁煥 尹秀鉉 李德振 李龍昊 李東俊 李龍星 李準龍 李逢春 太溶範 崔在範崔炳革 李龍 金忠南 車虎聲 金忠九 柳益祚 朴春範 朴春權 曺昌大 洪性台 李東郁 廉鳳生 吳南洙 金萬玉 金鍾洙 李東和 朴蒼岩 朴泰元 李白日 金龍周 申然植李龍星 任忠植,, 馬東嶽, 桂炳輅, 全南奎
- 2004. 06. MBC에서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만주군의 친일파 내용중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의 명단에도 박정희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MBC 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⑥ 변신의 달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 글은 사실이며 기회주의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집니다. 또한 공산주의를 배신한 것이 왜 기회주의가 되어야 하는지?
그러면 공산주의자로서 그냥 남아 있어야 했다는 뜻인지?
솔직히 공산주의 배신한 것 잘한 것 아닌가요?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 김대중대통령 시절 박통을 친일파로 몰고가기 위하여 박통의 창씨개명인 다카키마사오를 들고 나왔으나, 김대중대통령의 창씨개명명이 도요다다이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없었던 일로 흐지부지되었는데 ....아직도 써먹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오카모토미노루의 창씨개명은 사실 여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창씨개명자체로는 친일파의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⑧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향수
이글 역시 ② ③번과 같습니다...
⑨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1
대통령이 국가이익을 위해서 일본을 방문 및 협조를 받은 것이 친일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지금 일본과 외교관계를 끊어야 합니까? 또한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 외교적 수사법으로 한 발언이 친일파의 기준이 될 수 있는지요? 외교석상에 욕을 하면 그것이 대통령으로 해야 할 일일까요? 역대 대통령 치고 이러한 외교적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는 대통령이 없습니다.
⑩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2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대일청구권문제의 타결을 위해 7차례나 회담, 우리가 요구하는 8억 달러와 일본이 제시하는 최고액 7000만달러중 무상으로 3억 달러, 차관 2억달러, 민간 상업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타결합니다..
즉 80억달러 주겠다는데 박통이 3억달러 받았습니까?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돈 주는 쪽이 일본인데.....
또한 위 금액은 보는 사람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대일청구권을 받은 나라가 있는지요?
수십억달라를 요구만 하고 받지 못하면 괜찮고
그것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아 냈으면 친일파?
- 위 사항은 정책결정사항이며 이러한 정책결정사항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한다면 현대적 개념의 국토 땅 하늘, 바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독도는 과거 신한일어업협정에 의거 한일공동 어로수역의 중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즉 우리의 국토인 바다가 국제법상 일본에게 영유권이 인정되었습니다..
이 협정은 1998년 11월 28일. 김대중 정권(당시 해양수산부장관은 노무현대통령입니다.)당시에 이뤄어 졌습니다.
그럼 김대중대통령이 친일파입니까?
그리고 일본대중문화를 개방한 현재의 노무현 대통령도 친일파입니까?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에게 보상 못 받는 이유가 위의 대일청구권 때문이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 그 당시 대일청구권을 받았기 때문에 현재 못 받는 것일까요?
1993년 김영삼대통령이 정신대문제와 관련하여 대일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발표하였으며, 11월 국제법률가협회에서 일본의 배상의무가 있으며, 19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에 불법인권침해와 위안부 개인의 권리침해에 관한 청구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한국, 타이완, 일본, 필리핀, 타이, 홍콩등 아시아 6개국 여성단체에서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즉 일본으로부터 위안부문제로 보상받은 나라는 현재까지 없습니다.
참고로 각 단체들이 선정한 박통의 친일파 여부는 아래와 같습니다.
- 반민특위 : 해방이후 최초의 친일청산을 위하여 7000명을 조사 이 중 690명을 친일파로 선정하였습니다만 박통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독립 운동가들의 총본산인 광복회(친일반민족행위자 692명)에서도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http://www.kla815.or.kr/)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역사광복운동본부(친일파99명)에서 박통은 신친일파로 분류 돼있습니다.
(http://bluecabin.com.ne.kr/index.html)
내용) 만주에서의 박정희의 행적과 관련, 그가 독립 운동에 참여한 주장에 대한 비판과 만일 일본이 계속 득세하고 있다면 독립 운동가를 학살했으리라는 가정 그리고 해방이후 공산주의 활동 및 정권잡은 이후 경제개발등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친일파가 아닌 신친일파로 분류.(이곳에서도 독립군 토벌에 대해서는 언급은 없음 )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한일역사문제연구소 : 박정희, 장면 해당없음.(http://www.e-hanil.net/)
- 민족문제연구소 : 박통을 친일파로 주장 최근 박통친일행적에 대한 만화를 편찬할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박통의 친일논쟁을 유발 시킨 곳으로 어떤 의미의 친일을 주장하는지는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http://www.banmin.or.kr/)
결론 : 현재까지 밝혀진 박통의 친일행각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 이외 사항은 전부 허위, 날조, 과장된 것들입니다..
물론 현재의 친일청산법에 의거 친일 행적 조사 대상에 포함되어 있으니 박통의 친일행적이 있다면 밝히고 묻어둬선 안되며, 허위사실을 조작해서도 안된다고 봅니다..
다만 현재까지의 자료로는 친일청산법에 의한 친일파라 하기엔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제가 판단할 때 친일행적에 대한 자료가 가장 풍부했던 과거 반민특위에서도 포함되지 않았다면 현재 시점에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지 의문이며, 새로운 사실이 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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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입니다. 근데 <1944년 3월부터 1년 5개월간 만주군제8단>은 <1944년 7월부터 1년 1개월간 만주국군 제8단>으로 정정되어야 보다 정확할 것 같습니다.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었음을 입증한 김대중 [6] 역사학도 09.11.21 /////////// 역사학도님이 올린 윤리강사올린 영상에 100분 토론에 혈서를 가지고 나왔는데 여기서는 카러다라는거고..대체 뭐가 맞나요???????????????
혈서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가지고 나올 수 있는가요? 박한용이 들고나온 것은 혈서가 아니라, 1939년 3월 31일 만주신문 기사 복사본이었습니다. 이것을 그들은 혈서 기사라고 불렀는데, 혈서 기사라면 혈서 사진이 있어야지요. 혈서 사진이 없으면 혈서 목격자라도 있어야지요. 혈서도 없고 아무도 혈서를 본 이도 없습니다. 혈서도 없고 혈서 목격자도 없고, 단지 "혈서가 있다고 한다"는 카더라 기사입니다. 그나마 기사를 작성한 기자 이름조차 없는 유령 기사입니다. 모든 기사에는 반드시 보도 혹은 작성 기자 성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기자 이름조차 없는 유령 기사를 싣는가요?
그것은 기사를 조작할 필요가 있을 때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기사는 최소한의 신빙성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문 이름이 다릅니다. 지난 5년간 만주일보에 혈서 기사가 실렸었다고 주장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만주일보는 1908년에 폐간된 신문이었습니다. 좌빨들이 만주일보가 1908년에 폐간된 사실조차 모르고 무식하게 사기쳐 왔다는 것이 이번에 확실하게 들통났지요. 그리고, 좌빨들은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이라고 쓴 혈서라고 사기쳐 왔는데, 님도 화면으로 보셨겠지만 그런 어귀는 전혀 없다는 것이 이번에 분명히 확인되었습니다.
좌짓님이 언급하신 대로 그들이 혈서 기사라고 부르는 것은 박한용이 들고 나왔으나, 그것은 그들이 여태껏 거짓말 해왔다는 것이 단번에 들통나는 순간이었습니다. 盡忠報國 滅私奉公 혈서설은 새빨간 거짓말임이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님이 그 기사를 다시 한번 눈여겨 보시든가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에게 직접 물어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