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의 군선도(群仙圖)

김홍도의 군선도(부분) / 삼성리움미술관소장
넓이 5m가 넘는 화면에 19명의 신선들이 무리지어 어디론가 걸어간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호로병을 들여다보는 선동, 뿔이 하나밖에 없는 푸른 소를 탄 백발의 노인, 나귀를 거꾸로 탄 채 책을 읽는 노인, 바구니와 호미를 어깨에 걸친 여인들까지, 10명, 6명, 3명씩 무리지어가는 인물상들은 한 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다. 게다가 그들은 도덕경, 딱따기(박판), 두루마리, 복숭아 등 진귀한 물건을 소지했고, 그들 주위에는 난데없이 박쥐가 날아든다. 이들의 독특한 자태는 굵기와 꺾기와 꺾임의 변화가 심하게 빠르게 구사된 활달한 옷주름선으로 더욱 부각된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신선들의 회동을 김홍도가 32세에 그린 [군선도 8첩병풍]이다.

왕실요청으로 제작된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의 신선도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신선은 목숨이 정해진 범부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영생의 신선을 닮고 싶은 염원은 조선왕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궁중에서도 실존하지 않는 상상의 인물을 통해 액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입증하듯 조선 왕실에서는 신선도가 많이 제작되었다. 도화서 회원들은 신년을 송축하는 세화(歲畵)에 진채로 선인을 그려 넣어 왕실이나 재상에게 진상했다. 길상화의 기능을 수행한 신선도는 궁중의 중요한 행사를 위한 기념화로도 제작되었다. 왕실의 생일, 혼인 등 경사스러운 행사를 위해 상서로운 신선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신출귀몰한 신선의 현상은 그저 감상하기에도 즐거운 대상이었다.
글씨와 그림 감상을 유독 좋아했던 숙종은 [열성어제(列聖御製, 역대 임금의 시문집)]에 160편 가량의 서화관련 시문을 남겼는데, 이를 소재별로 분류하면 중국고사도 다음으로 신선도가 많다. 숙종이 제화시를 남긴 신선도는 [열선도((列仙圖)], [팔선도(八仙圖)], [요지연도(瑤池宴圖)], [여동빈도(呂洞賓圖)] 등 다양하다. 이렇듯 신선도 감상을 즐겼던 숙종의 취미는 아들 영조를 거쳐 영조의 손자 정조에게까지 계승되었고, 18세기 왕실에서 신선도가 활발하게 생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김홍도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김홍도 역시 화원화가로 이름을 떨쳤던 시기에 어명을 받아 신선도를 그렸다. 어느 날 정조가 희게 칠한 큰 벽에 ‘해상군선’을 그리라고 명하셨고, 김홍도는 진한 먹물 몇 되를 내시에게 준비시키고 모자를 벗고 옷깃을 잡아맨 채 비바람이 몰아치듯 붓을 휘둘렀다. 얼마 후, 집을 무너뜨릴 듯 일렁이는 파도와, 외로이 걸어가는 신선들이 구름을 넘는 광경을 완성했다. 조희룡(趙熙龍, 1797∼1859)의 [호산외사(壺山外史)]에 기록된 이 일화는 김홍도에 대한 정조의 신임과 그 탁월한 그림 솜씨를 알려준다.
또한 김홍도는 어부물(御府物, 궁중의 물건)의 용도로 [삼성도(三星圖)]를 그렸다. [삼성도(三星圖)]는 복, 벼슬, 수명을 관장하는 복록수의 신을 함께 그린 신선도이다. 옛 사람들은 하늘에 복록수(福祿壽)를 관장하는 세 개의 별이 있고 이 삼성이 인간세상을 다스린다고 믿었기 때문에 [삼성도(三星圖)]가 축수용 그림으로 인기가 있었다. 조선 후기 박물관학자였던 서유구(徐有榘, 1764∼1845)도 그가 직접 감상한 중국 삼성도에 관해 서술하면서, 김홍도가 이를 보고 방작(倣作)했다고 언급했다. 김홍도의 [삼성도(三星圖)]는 가로 세로 8척인 대작이었고, 설색이 곱고 우아하여 상서로운 빛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궁중의 물건’이었다.
[신선도 8첩병풍(神仙圖 八帖屛風)]의 여섯 번째 폭인 [삼성도(三星圖)]를 보면, 화면 상단에 아이를 품에 안은 복성, 중간에 붉은 관복을 입은 녹성, 하단에 장죽장을 들고 천도를 보여주는 수성이 있다. 특히 수성은 흰 수염, 대머리, 정수리의 혹으로 표현되는 수노인의 도상을 철저히 따랐고, 녹성은 현직관리로, 복성은 은퇴한 사대부로 연출했다. 이렇듯 김홍도는 화원화가로 활동하면서 궁중에서 요구하는 신선도를 제작했다. 그리고 사대부와 여항문인의 부탁으로 다양한 신선을 도해했다.

김홍도가 그린 군선도
김홍도는 화필이 무르익었던 30대에 신선도를 가장 많이 그렸는데, 특히 여러 신선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군선을 즐겨 형상화했다. [신선도 8첩병풍(神仙圖 八帖屛風)]은 ‘청오자’, ‘수성’, ‘조국구’, ‘삼선(동화자, 종리권, 여동빈)’, ‘자염도사’, ‘황초평’그리고 도상이 불분명한 선동취적으로 구성된 군선도이다. 그는 병풍의 1면에 ‘이군 용눌(이민식)은 그림을 좋아함이 골수에까지 미쳤는데, 나(김홍도)도 그 만큼 용눌을 좋아해서 이를 그려 준다.’라고 제작 동기를 밝혔다. [신선도 8첩병풍(神仙圖 八帖屛風)]가 지난번 ‘오늘의 미술 : 우리미술의 걸작’에서 살펴본 [서원아집도 선면(西園雅集圖 扇面)]과 함께 이민식에게 그려준 그림이었던 셈이다. 김홍도는 [신선도 8첩 병풍(神仙圖 八帖屛風)]에 수록한 신선들을 분리된 화폭에 각각 재현했다. 또한 [선동취적도(仙童吹笛圖)]는 1면에 등장하는 동자와 머리모양, 피리 부는 자세, 복식, 영지버섯이 담긴 바구니까지 유사하다. 단지 선동 뒤에 늠름하게 서 있는 사슴이 묘사되었을 뿐이다.
이 병풍 5면의 ‘삼선’은 도교의 한 종파인 전진교(全眞敎)의 사승관계를 표현한 인물화이다. 동화자는 종리권에게, 종리권은 여동빈에게 전진교의 도통을 전수한 것이다. 또한 1면에 등장하는 [선동취적도(仙童吹笛圖)]는 삼선중 종리권, 여동빈은 4면의 조국구와 더불어 중국 고대부터 내려온 여덟 신선의 구성원들이다. 심의에 유건을 갖춘 선비 복장이 장검을 등에 빗겨 찬 여동빈, 당당한 풍채에 도의를 풀어 헤치고 파초선을 쥔 종리권, 도복이 아닌 관복에 사모를 착용하고 딱따기(박판)을 들고 있는 조국구는 독립된 화면의 주인공으로 도해되었다.
[군선도 8첩병풍(群仙圖 八帖屛風)]이 도상에 화면을 분리했다면 [군선도(群仙圖)]ⅠⅡ에서는 신선들이 군집되었다. [군선도(群仙圖)]ⅠⅡ는 원래 김홍도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풍속화첩(風俗畵帖)〉에 장첩되어 있었던 소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일곱 명의 신선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인물군상은 오른쪽이나 왼쪽의 한 방향으로 쏠렸는데, 이러한 운동감은 다소 거칠게 표현된 옷주름으로 더욱 부각되었다. [군선도(群仙圖)]ⅠⅡ 장엄한 병풍의 위엄이 아닌 신선들의 소박한 일화가 작은 화면에 전달되는 소품이다.
다시 삼성미술관 소장 [군선도 8첩 병풍(群仙圖 八帖屛風)]이다. 선학의 연구에 따르면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제1군의 10명 중, 붓을 들고 두루마리에 글을 쓰는 인물은 문창, 복숭아를 든 소년이 동방삭, 푸른 소를 탄 도인은 노자이다. 제2군의 6명 중 대나무 통처럼 생긴 어고간자를 든 젊은이는 한상자, 딱따기(박판)를 치는 인물은 조국구, 나귀를 거꾸러 탄 노인은 장과로이다. 제3군에서 호미를 든 여인이 하선고, 복숭아를 진 여인이 마고이다.
김홍도는 각 신선의 도상을 충실하게 지키되 이들을 자유롭게 재구성하여 19인의 형상에 활기찬 생명력을 부여했다. 10, 6, 3으로 축소되는 인물군과 그들의 다양한 동세, 밀착된 군상을 안배한 여백, 그리고 무배경 처리, 이는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김홍도의 능력이다.
그렇다면 19명의 신선은 진귀한 물건을 들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혹시 곤륜산에 머물고 있다는 불멸의 여신 서왕모의 생일잔치에 초대받은 것은 아닐까. 김홍도가 재현한 군선의 당당한 자태를 보면서, 일간지의 카피 한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개성과 조화가 공존하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신선들의 표정과 움직임 사실감을 더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