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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14-47. 우리가 어찌할꼬? 1. 2018.6.10.
오늘도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말씀을 나누고 그리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아멘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우리 모두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사모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소망, 나의 기쁨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삶의 답이시고 나의 문제를 풀 열쇠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며 사랑과 화해와 축복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도 좌 우 앞뒤에 계신 분들과 인사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저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1.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설교인데 자세히 보면 설교의 양면성을 보여줍니다. 복음의 사실을 선포하면서 청중들에게 부담을 줍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때는 주님이 부활하시고 50일이 되는, 승천하신지 10일이 되는 오순절 날 주일입니다. 구약에서 오순절은 가나안 땅에서 처음 추수를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오순절이란 명칭보다는 칠칠절, 맥추절, 혹은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이란 명칭으로 기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은 추수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추수의 절기에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셨을까?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절기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그 부활하신 날로부터 오십일 째 되는 날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고전15;20,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은 부활의 시작을 알리는 첫 열매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부활하신지 50일째 되는 날 성령이 오심으로, 이미와 아직을 포함하여 저와 여러분을 거두어들이는 영적인 추수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장소는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 교회입니다, 1절에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다 한 곳에 모였습니다. 모인 이유는 주님의 명령 때문입니다. 주님의 명령은 행 1;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 명령과 더불어 약속하시기를 1;5,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인 사람들이 이 주님의 명령과 부탁에 따라 열심히 기도하면서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다 같이 라는 말은 한 마음으로, 같은 마음을 가지고 그들은 한 곳에 모였습니다. 1;14,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 곳인데,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성령의 지시하시는 대로 행동합니다. 4절,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그들은 성령을 받고, 자신들이 아직 배운 바가 없었던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을 했고, 그들 앞에 모여든 각 나라와 지방의 방언으로 말을 하고, 들었습니다. 이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께서 이상한 언어를 제자들의 입에 넣어 주시므로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고, 주님께서 원하셨던 것을 주님께서 원하셨던 방법으로 역사 하셨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얼마나 사모하던 은혜입니까? 이 성령 강림은 요엘이 예언했던 내용입니다. 당시의 사모함입니다. 생각지도 못했고, 경험되지 않았던 은혜입니다. 그래서 7-8, 다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라며, 다른 여러 지방에서 모여 온 사람들은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였고, 다 놀라 기이히 여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역사는 이렇게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우리를 기대하게 합니다. 우리는 감동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달라지고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일어나서 이런 경험을 한 모인 회중에게, 기이히 여기며 의문을 품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합니다. 설교자는 베드로입니다, 이전에는 베드로에게서 볼 수 없었던 일이고,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 설교의 주제는 21절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베드로의 설교는 요엘 선지자가 예언을 했던 내용을 가지고 성취된 사실과 성취되고 있는 사실과 장차 미래에 성취될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은혜 받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찌되었습니까. 37절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입니다. 이들은 베드로의 설교에 대하여 즉각적인 반응을 드러냈습니다. 즉각적인 결과는 청중들의 깨달음과 질문입니다. 교훈과 권고입니다. 순종과 양적 부흥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계속적인 결과로 새로운 의식이 탄생되고, 새로운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새로운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꾸준한 성장을 합니다. 이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고 배경이고 은혜를 나누려는 말씀입니다.
1. 그러면 사람들이 어느 때에 어찌할꼬? 합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각자가 직면한 문제들 앞에서 많은 한숨, 눈물, 통곡 의 소리가 더 높아져 갑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나의 문제들이 해결할 길이 없고 막다른 골목길에서 어찌할꼬? 라는 탄식이 저절로 나옵니다. 무섭고, 큰 잘못을 저지른 후에 죄책감에서 어찌할꼬? 합니다. 중병에 걸려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어찌할꼬?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별 혹은 사별 했을 때에 어찌할꼬? 합니다. 재산상의 큰 손해로 패가망신 했을 때에 어찌할꼬? 합니다. 국가가 외세에 침략을 당하여 망국의 설움을 당하였을 때 어찌할꼬? 합니다. 이런 절망과 탄식은 사실 우리가 흔히 겪어야 하는 고통입니다. 오늘날 진보와 보수, 물질의 분배의 거센 소리와 그것을 조정하고 달래는 소리들, 인구문제, 질병문제, 도덕과 윤리의 문제, 핵문제와 함께 한꺼번에 멸망할 것을 생각하는 공포와 불안에서 어찌할꼬? 하는 부르짖음이 세상을 울립니다. 그런데 이런 어찌할꼬? 는 어느 시대나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것이 고통 중에 사는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어찌할꼬? 는 어떤 내용들일까요?
1-1. 내 자신의 입장에서,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스스로 어찌할꼬? 입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고대가요가 있습니다. 한편의 시가 있습니다. 한국의 고대 가요 중에 공무도하가 라는 시가 있습니다. 공무도하가는 이별의 아픔을 노래하는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여성의 간절함과 절절함을 나타내는 작품입니다. 제목인 공무도하가에서 공은 사랑하는 임이고, 무는 하지 마라는 금지입니다, 도하는 강을 건너다 입니다. 그러니까? 공무도하가는 임이여 강을 건너지 마세요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물을 건너면 어떻게 될까요? 죽겠죠. 결국 이별하게 됩니다.
公無渡河(공무도하) 임이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공경도하) 기어이 물을 건너시다가
墮河而死(타하이사) 물에 빠져 죽으니.
當奈公何(당내공하) 임을 장차 어찌할꼬? 사랑하는 임이 물에 빠져 죽으려 하자 만류를 하지만 결국 이별을 하고, 죽고, 망연자실한 모습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물의 의미 변화를 살펴보면, 첫 번째 단락에 나오는 물은 사랑입니다. 두 번째 단락에 나오는 물은 이별입니다. 세 번째 단락에 나오는 물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강을 건너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강을 건너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을 하게 되고, 결국 죽음을 의미합니다. 사랑 때문에 어찌할꼬? 합니다. 그러니까? 생각하고 기대했던 일이나 삶이나 시설이 안 되었을 때에, 어찌할꼬? 합니다. 더욱이 이런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시간이 없고 급할 때에 이를 어찌할꼬? 합니다.
얼마 전 초등학생 납치사건으로 일본 전국이 떠들썩했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사람이 성범죄자라는 오명을 썼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아파트 부녀회와 입주자 대표 회에서 이 사람에게 이사를 가라고 했습니다. 이사를 가지 않으면 맨션 게시판에 공지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살고 있는 아파트를 분양받을 생각에 집도 예쁘게 꾸며 놓고, 부인과 3살 난 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오명을 쓴 것도 억울한데 이사까지 가라니. 이를 어찌해야합니까. 어찌할꼬? 한탄을 했습니다.
요사이 또 인터넷이 발달되고 sns를 사람들이 많이 합니다. 그래서 댓글을 달아요. 좋은 댓글이면 괜찮지만 악플을 수없이 많이 달면 그 악플을 다는 사람을 어떻게 할까요?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요. 어제 그저께 새로이 생긴 신조어가 나타났습니다. 이부망천이라는 사자성어입니다. 서울에서 살다가 이혼을 하면 부천으로 가고, 거기서 망 하면은 인천으로 간데요. 그 표현입니다. 참으로 의식이 없고 말의 귀중함을 모르는 국가의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국회의원의 말입니다. 예전에 일본에서 지도자로부터 제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도쿄에서 살다가 이혼을 하고 삶이 팍팍해지면 치바로 가고, 치바에서 살다가 망하면 밋또로 간데요. 밋또가 끝입니다. 그러니까? 오사까에서 살다가 이혼을 하고 삶이 팍팍해지면 고베로 가고, 고베에서 망하면 히메지로 온다고 합니다. 치바와 밋또에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고베와 히메지에 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여러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요? 당하고 살고 있는 내 자신의 입장에서요. 이럴 때에 어찌할꼬? 악플을 어찌할꼬? 저절로 합니다. 내 자신이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10년 이상을 도망 다녔습니다. 스스로 감당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3;1-2,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시6;2-3,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떨리나이다. 어느 때 까지 입니까? 시10;1, 어찌하여 멀리서시며, 어찌하여 숨으시나이까? 당하는 입장에서 다윗은 어찌할꼬? 합니다. 히스기아 왕이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이 드십니까? 감당할 수 없습니까? 밀려오는 아픔과 고통 때문에 어찌할꼬? 하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시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로 위로하시고 담대함과 용기를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내 자신이 엄청난 잘못을 하고 감당이 되지 않을 때에 어찌할꼬? 합니다. 내 잘못을 어찌할꼬? 여러분, 주님이 없는 우리의 인생은 원래 죄인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면에서 신앙의 불신과 의심을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도덕과 윤리적인 면에서도 인간은 허물투성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과 함께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것이 허물이고 죄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했다고 합니다. 죄로 인한 인간의 모습은 비참합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입니다. 거기서 나라와 나라가 전쟁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 해결방안이 없습니다. 잊는 것으로 되지 아니하며, 묵인하고 무관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잘못을 한다고 하여 보편적인 시각으로 삶을 살아도 평안이 없습니다. 스스로의 양심이 자신을 향하여 고발을 하고 소리를 치며 영혼을 아프게 하며 고통으로 몰아 갑니다. 잠을 못 이루고 삶이 어지럽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제일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각자가 자기의 그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과 회개치 않음으로 하나님과 단절이 되고 사람들과 불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더욱 더 악하여져 갑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평안도 없으며 사죄의 은총도 없고, 사망에서의 구원도 얻지 못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현대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무감각할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자책이나 죄에 대한 형벌까지도 무시합니다. 죄가 주는 고통과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세상 현대인들의 타락이며, 잘못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입니다. 그런데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따르며 죄의 값은 지불이 됩니다. 오늘의 모든 고통과 비애는 여기에서 오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자신의 영, 생명, 마음, 생각, 행동에 대한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하여 바르게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각자가 자기 자신의 삶을 바르게 이끌어 가지 못합니다. 사람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라는 말씀을 바르게 인식하고 이것을 믿어야만 자신의 존재를 밝히 알게 됩니다. 또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라는 말씀 앞에서 내 자신, 인간의 위치를 알게 하셨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런 인간의 무능과 불결함 앞에서 내 자신을 바라볼 때 연약한 자신을 보면서 어찌할꼬? 탄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가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의 어찌할꼬? 고민과 탄식은 바로 자신을 볼 수 있을 때에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여러분, 사람들의 타락된 상태에서 생각, 마음, 말, 행동이 어느 하나도 선하거나 의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루에 세 번 자기를 살피고 반성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볼 줄 모르거나 바르게 보지 못하면 또한 상황에 대하여 어찌할꼬? 의 탄식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허물에 매여 있습니까? 지금 내 자신을 보면서 나의 허물과 잘못 때문에 어찌할꼬? 하십니까? 어떠한 허물과 죄악 가운데서도 70번 씩 7번, 영원히 저와 여러분을 속죄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면서 어찌할꼬? 가 아니라, 위에 것을 소망하시며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3. 책임 앞에서 어찌할꼬? 할 때가 있습니다. 내 자신의 삶의 불성실 앞에서 어찌할꼬? 합니다. 자녀에 대한 책임 앞에서 어찌할꼬? 합니다. 내가 감당해야 될 일 앞에서 감당할 조건이 안 될 때에 어찌할꼬? 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책임을 감당할 때에 사람대우를 받습니다. 믿음의 생활에서 행할 책임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 하는 일입니다. 그 순종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 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신앙인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는 것이 신앙인의 책임이행입니다. 세상의 사람들과 이웃에게 사랑과 겸손과 온유와 평화, 봉사의 본을 보이면서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온 맘과 정성을 다 하는 것이 신앙인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전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고 한 것을 보면 책임의 중요성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복잡하고 극한 상황은 모두 각자가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데서 비롯됩니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생활의 책임, 사람들 간에 인륜, 윤리와 도덕의 책임, 사회생활의 책임을 바르게 실천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직무에 대한 책임을 다 하면 사업과 직장생활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바람직한 신앙인의 삶의 길은 책임적 성도, 책임적 사회, 책임적 가정, 책임적 교회, 책임적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신앙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응답이며, 사회의 생활에서는 도덕과 윤리에 대한 행동의 진실성입니다. 각자가 신앙 안에서 주어진 일과 맡은 일에 진실할 때 책임을 지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여러 가지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게을러서 안한 사람들을 향하여 세상은 모두 실패자이며 인생의 낙오라고 합니다. 이런 책임의 부분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책감으로부터 어찌할꼬? 라는 탄식이 나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맡기신 영역에서 책임을 다 하여야 삶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에게 맡기시고 부탁하신 모든 일에 성령의 조명하심 속에서 어찌할꼬? 가 아니라, 책임을 다 하시는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주어지는 10 고을 권세의 복을 받으시는 여러분 모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그러면 오늘 본문을 기준으로 왜 어찌할꼬? 했는가?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2-1. 첫 번째 이유는 복음 때문입니다. 37절,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자신들도 모르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합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어떤 설교를 합니까. 16절.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요엘2장의 말씀을 증거 합니다. 이 설교는 초대교회의 처음 설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여러분, 가장 기본적인 것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이 것이 모든 말씀의 주제이고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전한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나사렛 예수님입니다. 22절,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름, 나사렛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권능, 기사, 표적, 때문에 여기는 오류를 시정할 목적으로 귀에 익은 이름 나사렛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그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아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님이시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아이기 때문에 권능, 기사, 표적을 나타냈습니다. 어떤 예수님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본 바요, 들은 바요, 그대로 골고다산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고 이제부터 시작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비밀이고 계획이라고 선포합니다. 어떤 예수님을 말합니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입니다. 베드로가 전하고자 한 예수님이 바로 죽으신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32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인지라.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부활했으니 너희도 살리라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찬송이 무엇입니까?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이것이 우리의 찬송입니다. 이 것을 한마디로 무엇이라 합니까? 복음입니다. 베드로로부터 복음을 듣고 이 사람들이 스스로 우리가 어찌할꼬? 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복음을 접하면 우리가 어찌할꼬? 하게 됩니다. 그러면 복음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에 관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완전함과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인카네이션이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입니다. 3년의 공생애가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모든 사람을 고치시고, 12제자를 부르시고 함께한 모든 사역이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에 대한 증언입니다.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느니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는 예수가 사망에 매어 있을 수 없음이니라. 예수님의 승천과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음에 대한 증언입니다. 예수께서 높임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며 그가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에 대한 증언입니다. 성령입니다. 그가 이 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이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입니다. 그런데 확실한 이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베드로가 전합니다. 이전에는 이런 내용을 알면서도 베드로는 전하지 못했습니다. 이전에 베드로는 복음에 대하여 확신이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이런 사실을 100퍼센트 알지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체험한 베드로는 담대하게 이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 왜 이 복음을 베드로가 청중들에게 전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요엘 선지자가 예언했던 기록된 말씀과 살아있는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예수님이 아닙니다. 이 것 때문에 청중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마음이 뜨겁습니까? 무엇인가 영혼을 두드리십니까? 간절한 심령이 되십니까?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예수님의 전부를 나의 심령 가운데 채우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보이고 성령의 은혜를 받고, 오늘 우리도 내가 어찌할꼬? 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여기에 주의 은혜와 깨달음과 부흥과 축복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무엇을 어찌할꼬? 할까 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들 자신에게 어찌할꼬? 없는 것을 어찌할꼬? 해야 합니다. 나의 심령이 냉랭하고 깨달음이 없음을 어찌할꼬?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했을 때 그 설교를 통해서 이구동성으로 감동을 받고 가슴을 치면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했습니다.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그들의 뺨을 적시었습니다. 가슴속에서는 뜨거움이 있었고 감격은 샘솟듯 했습니다. 그들이 찬송했습니다. 예수여 비오니 나의 기도 들으사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애통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감격이 없고, 깨달음이 없습니다. 십 년을 믿었습니다. 이 십년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형제를 몹시 미워하면서도 회개할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손에 못을 박았음에도 뉘우칠 마음이 없습니다. 여러분, 예배드리는 시간이 어떤 시간입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형편은 니느웨 백성들처럼 잿더미에서 회개해야 될 형편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해야 될 사람입니다. 이 고백이 살길이며, 소망입니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인들은 가슴을 치면서 어찌할꼬?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까운 주위가 온통 범죄요, 눈물이요, 고통이요, 비극입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감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찌할꼬? 해야 합니다. 이 땅의 수많은 신앙인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고 있습니다. 저마다 피리를 불어도 슬퍼하지 않고, 소고를 쳐도 춤을 출 줄 모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깨닫게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무엇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도의 응답도 성령의 능력도 말씀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오늘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마다 새 술에 취하여 살고, 목마른 사슴처럼 살았습니다. 날마다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며 살았습니다. 감당하지 못할 감격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드리는 이 시간 주님을 만난 감격과 성령의 인도하심의 간절한 찬송과 어찌할꼬? 하는 목마름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3. 어찌할꼬? 결과가 무엇인가입니다. 사도들이 만나고 도마가 증거 했던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어찌할꼬? 되풀이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본문38절.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왜 우리의 심령이 이처럼 냉랭하고 영혼이 불안해합니까? 감격이 없기 때문이요, 성령의 능력을 체험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병든 영혼이 있습니까? 심령이 목마르십니까? 성령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17세 되던 해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의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 후 13년 동안이나 종노릇했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옥살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입니까? 30세 되던 때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영광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창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41:38. 바로 왕이 요셉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요셉이 이렇게 성공을 하고,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의 능력이 요셉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릴리 어부출신이 아닙니까. 오늘도 유대인과 모인 사람들이 이 사람들은 갈릴리 출신이 아니냐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3년 동안 따라 다녔지만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빌라도의 법정 뜰에서 3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저주하고 멸시하면서 부인했던 베드로, 그런데 오순절 성령이 임했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베드로는 변화되었습니다. 성령 충만을 통해 소망이 넘쳤습니다. 외치는 메시지에 감동과 능력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어찌할꼬? 고백을 하게 했습니다. 그 능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을 바꾸어 놓습니다. 소극적인 사람을 적극적인 사람으로, 비인격적인 사람을 인격적인 사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 비굴한 사람은 용기를 얻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기쁨을 얻습니다. 낙망된 사람이 소망을 얻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능력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새리, 야곱, 다니엘, 요한처럼 기도합니다. 기쁨과 평화가 생겨납니다. 축복이 절로 들어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복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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