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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英城子山城 -
1. 안시성의 위치
안시성으로 추정되는 영성자산성은 요령성 안산시의 현급시인 해성시 동남쪽 팔리진 영성자촌(海城市 八里镇 英城子村)에 위치하고 있다. 성의 모양새는 일반적인 고구려 산성의 모양과 일치하는 말발굽 생김새이다. 산등성이의 높낮이는 불규칙하나 산등성이는 하나의 동일 된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성의 모양새도 보기 좋고 성을 방어하는데도 아주 안성맞춤인 성이다. 성내 넓이는 동서 1킬로미터, 남북 0.5킬로미터에 총길이 4킬로미터 내외의 작은 성이지만 북쪽으로는 해성하(海城河=태자하 지류), 서쪽으로는 팔리하(八里河)를 해자로 한 절벽이 있어 산성으로서 천혜의 이점을 갖고 있다.
현재의 안시성은 서문지(誓文址)로부터 동쪽으로 길이 나 있으며, 서문지 앞에 영성자성이란 표지판이 있다. 성문 안에는 마을이 있으며 대부분 산허리는 복숭아 과수원으로 개간되어 있다. 동남쪽 정상에 점장대가 있으며 과수원 여기저기 돌무지가 남아있다.
<안시성 서문(표지) 및 남문 입구. 외부인들의 출입을 철저히 막고 있음을 표지로도 알 수 있다.>
영성자산성은 병풍을 두른 듯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고로봉식 산성으로 먼 곳에서도 한눈에 산성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안시성은 토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토성과 석성이 혼축된 성으로 추정한다.
<안시성 산성 모습. 동남모서리에 있는 점장대가 보인다>
원래 안시성은 북으로 백암성, 서쪽으로 건안성이 지켜주는 요충으로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향하는 통로를 지키는 고구려의 간성인데다가 이 지방의 철광을 지켜주는 보루였다. 이 지역의 철과 해성 부근의 마그네슘 생산은 중국을 대표한다. 바로 수와 당이 고구려와 피나는 쟁탈전을 전개한 이유 중 하나다.
그런데, 현재 학계에서는 영성자산성이 안시성인가 대해서 의견이 많다. 안시성은 고구려의 영지로서 10만명 정도가 성민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안시성은 성의 둘레가 2.5km로 고구려의 천리장성의 중간급에 해당된다. 현재 성의 흔적이 가장 잘 남아있다는 요동성의 배후성인 백암성이 성의 둘레가 2.5km이다. 천리장성의 거점성중에 하나인 건안성(성의 둘레 5km)과 비교하더라도 성의 크기가 반 밖에 안 되는 것이다. 당시 성민 10만이 주거하기에는 너무 협소한 것 같고, 그 작은 성으로 수십만의 이세민 친청군을 물리친 것이 의문으로 남는다. 그래서 문화유산위원회의 김일경도 영성자산성보다는 만주 대석교 인근의 해룡천산성이 안시성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유력한 위치로 비정되는 해룡천산성은 산성을 견고하게 쌓은 것은 물론 둘레의 길이가 3000여m나 되어 10만명이 거주할 수 있는 요건은 되지만 당시 장병의 숫자가 현재와 같이 정확한 것은 아니므로 이 문제는 앞으로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 다수의 학자들이 영성자산성을 안시성으로 비정며, 이를 뒷받침해주는 문헌은 여러군데 있다. 일예로 찾는다면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본래 이름은 안촌홀(安寸忽)이다. 안시성은 자연적으로 험준한 요새였으며 주변에 병기의 주원료인 철광석 산지와 곡창지대가 있었다. 영성자산성은 그리 험하지 않다. 다만 주변이 거의 평지로 이루어져 있고 영성자산성만 높은 산등성이를 이루면서 군계일학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험하게 보이는 것이다.
한때는 단동 북쪽에 자리잡은 봉황성이 안시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계집(耳溪集)》 또는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 따르면 단동 북쪽에 위치한 오골성(鳳凰城)이 안시성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말하기를 (봉황성을 보고)
“원래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다만 중국 사서를 무턱대고 베껴 이를 사실로 삼았을 뿐이다. 심지어는 유공권의 소설에서 황제가 포위당한 것까지 인용하여 입증을 하였는데, 이 사실이 <당서> 사마광의 <통감>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고 있으므로, 중국에서는 이 사실을 꺼리는 줄 의심하고 조심하여, 우리나라의 전설 구문들은 감히 한 구절도 싣지 않고 몽땅 빼고 말았다. 나는 여기서 말할 수 있다.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알을 잃어버렸는지는 똑똑히 고증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이 성을 안시성이라고 하는데는 분명히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당서>를 보면 안시성은 평양에서 500리요, 봉황성은 왕검성이라고도 한다고 썼고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나 이러고 보면 무엇을 표준삼아 이름을 붙였는지 모를 일이다. 또 <지지>에는,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의 동북 70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고, 개평현으로부터 동으로 수암하까지 300리요, 수암하로부터 동으로 200리를 가면 봉황성이라고 했으니, 이것으로써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서 말한 평양과 안시성의 거리가 약 500리쯤 된다는 것이 맞아 떨어지는 셈이다.”
2. 안시성의 역사
당태종이 고구려 침공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한 전투가이 안시성 혈전(645년)이다. 수나라의 멸망의 한 원인이 된 살수대첩(612)과 더불어 고구려의 양대 전투 중 하나이다.
당 태종이 집권한 시기를 ‘정관의 치(貞觀之治)’라 할 정도로 영화로운 시대로 간주하는데 중국인들은 모택동이 이끈 ‘문화혁명’에서 진시황제를 복권시키기 전까지만 해도 당태종을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꼽았다. 태종은 국내가 안정되자 국외로 힘을 뻗어 주변의 동돌궐과 서돌궐, 토번, 고창국 등을 차례로 굴복시켰다. 642년까지 당에 굴복하지 않은 나라는 고구려뿐이었다.
당태종은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4년 전인 641년 태종은 직방낭중 진대덕(陳大德)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낸다. 직방낭중은 6부(部) 가운데 병부(兵部)에 속하며, 지도를 관리한다. 즉 진대덕의 임무는 고구려의 도로, 지세, 산세 등을 파악하는 스파이였다. 그것은 『한원』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보고서에 ‘신성-남소성 70리, 평양성-국내성 670리, 평양성-오골성 700리, 안시성-은상 100리, 평양성-압록수 450리’라 적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우선 당나라는 상리(商里) 현장(玄奬)을 사신으로 보내 신라를 괴롭히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고구려를 협박했다. 당의 이런 협박에 연개소문은 굴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신라와 간극이 벌어진 지는 벌써 오래다. 지난번 수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신라는 그 틈을 타 우리 땅 500리를 빼앗아 그 성읍을 모두 차지했으니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은 그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보고를 받고 태종은 다시 644년에는 장엄(蔣儼)을 보내 협박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일축하고 토굴에 가둔다. 전쟁의 빌미였다.
당 태종은 그동안 치밀하게 준비한 정예군 6만명을 유주에 집결시키고 세 갈래 길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총사령관인 이세적이 선발대 6만명을 이끌고 당 태종의 친정군 20만명이 뒤를 따랐고 장량(張亮)이 수군 4만3000명을 500척의 배로 이끌었다.
6월부터 9월까지 3개월여에 걸쳐 치열한 대접전을 벌였지만 안시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성주인 양만춘의 전략에 의해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지형이 험하고 군졸이 용감했다'라는 『신당서』의 기록을 볼 때 안시성의 천혜적인 지형과 군졸들의 사기가 큰 요인으로 보인다. 이적(李勣)이 당태종에게 '성이 함락되면 남자들을 모두 죽이자'고 요구한 사실도 이 전투의 치열함을 나타내 준다.
당태종이 안시성을 공격할 때 안시성 안에는 주민을 비롯한 고구려인 10여만명이 당태종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기의 전투는 고구려에 매우 불리했다.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지원하기 위해 말갈병을 포함하여 고구려군에 지원군을 보냈는데 이들이 안시성 밖에서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고구려의 지휘관 3500명이 당나라로 압송되고 고구려의 용병이던 말갈병은 3300명이 생매장 당했다.
안시성의 고구려군이 당태종의 대군과 접전을 피하고 지구전으로 나서자 당 태종은 난공불락의 안시성을 함락하기 위해 안시성 동남쪽에 흙으로 산을 쌓아 60일 만에 거대한 토성을 완성했다. 이 당시 토성은 근래 위성사진으로도 확인됐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사건이 생겼다. 토산이 안시성 쪽으로 무너지면서 고구려 성벽 일부도 무너진 것이다. 이것이 고구려에게 오히려 기회였다. 원래 토산이 안시성과 연결되었으므로 당나라군에게 유리할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재빨리 성벽 밖으로 나와 이를 점령하고 나무를 쌓아 불을 지르니 당군은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이 때의 부장 부복애는 토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참수되었고 태종은 패전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부복애의 잘린 목을 군사들에게 돌렸다.
그러나 당군은 추위가 일찍 찾아와 물이 얼기 시작하고 말들에게 먹일 건초까지 부족하게 되자 더 이상 고구려와의 전투를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양만춘이 성에 올라 손을 흔들어 주자 당태종이 성주의 기개를 높이 평가하여 비단 백필을 보냈다는 전설 아닌 전설이 있다.
<안시성 내부 모습. 안시성 산허리는 대부분 과수원으로 개간되어 있으며 제법 큰 마을이 있다.>
3. 다시 평가되는 연개소문
안시성의 혈투 기간 중에 당태종과 직접 맞대고 싸운 성주는 양만춘이었으므로 그가 당나라군을 격퇴한 장본인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와의 혈투를 총지휘한 사람은 연개소문이므로 그가 진정한 안시성 대첩의 승리를 갖고 온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이 642년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비롯하여 수백의 대신들을 죽이고 665년 사망할 때까지 23년간 잔인하고 포악한 독재자로 그려지고 있다. 특히 왕을 시해한 후 그 몸을 몇 토막으로 잘라 구덩이에 버린 흉악한 인물로 기록했다. 심지어는 ‘원근을 호령하고 나라 일을 제멋대로 하며 위엄이 있었는데, 몸에 칼 다섯 자루를 차고 있어 좌우 사람들이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말에 오르내릴 때는 항상 귀인무장을 엎드리게 하여 발판으로 삼았다.’고 적었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 설명은 매우 과장된 것이다. 『한원』에는 고구려인들이 몸에 칼 다섯자루와 숫돌을 차고 다니는 것은 고구려 남자들의 일반적인 복식이라고 적었다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 연개소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그가 살던 당시의 특별한 세계 정황 때문이다. 당시 고구려는 위로는 당, 아래로는 신라와 긴장관계에 있었다. 이 중에서도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 등장한 당나라는 고구려의 안보를 위협할 정도의 대제국이었다. 고구려는 당나라와 외교적인 유화책으로 평화를 유지하자는 세력과 당에 저자세를 취할 필요가 없다는 강경한 세력이 양립되어 있었다.
당시 고구려의 영류왕은 화친파였고 연개소문은 강경파였다고 알려져 있다. 우선 영류왕은 당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행동이라고는 하지만 전술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한다. 영류왕 11년(628) 고구려의 일급비밀이라 볼 수 있는 고구려 영토의 지도인 봉역도(封域圖)를 당에 보낸 것이다. 또한 631년 당의 요구대로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운 경관(京觀)을 모두 헐어버렸으며, 640년에는 세자 환권(桓權)을 당에 보내 조공하면서 당나라의 환심을 사기에 바빴다.
문제는 고구려의 화해정책에도 불구하고 당태종이 고구려와 일전불사할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태종이 고구려의 지도를 요구한 것은 고구려가 더 이상 당나라와의 전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평화를 맺자는 것이 아니라, 요구를 거부하면 공격하는 빌미를 확보할 수 있으며, 요구를 들어준다면 그 자료를 갖고 고구려를 침략하겠다는 이중 플레이였다.
결국 무장 출신의 연개소문은 당태종의 화해 제스처가 진정한 화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무력화시킨 후 공격하기 위한 사전 포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 유화정책에도 불구하고 당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생각을 멈추지 않자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대한 강경파들을 포섭하여 영류왕을 살해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후 권한을 거머쥔다.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의 쿠데타가 개인적인 원한이나 우발적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가 여전히 흉잔부도하므로 여러 대인이 왕과 더불어 비밀히 의논해 죽이려다가 누설되었다. 소문이 휘하의 군사를 다 모아 사열하는 것처럼 성의 남쪽에 주찬(酒饌)을 성대히 베풀어 대신들을 초청했다. 그들이 오자 모두 죽이기를 백여 명이나 하고 궁중으로 달려가 왕을 시해하고 몇 토막으로 잘라 구덩이에 버렸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삼국사기』에서 천하의 악당으로 묘사된 데는 편찬자들이 이용했던 거의 모든 자료가 『자치통감』, 『북사』, 『수서』, 『구당서』, 『신당서』 등 중국 측 자료라는 점이다. 즉 『삼국사기』에 그려진 연개소문의 모습은 그에게 패한 당나라인들이 증오심으로 묘사한 연개소문의 모습이다.
연개소문의 평가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일으킨 쿠데타가 승리한 것인지 실패한 것인지에 따라 다르다.
고구려는 제26대 영양왕(재위 590∼618) 때 수(隨) 문제의 위협에 맞서 수나라를 선제 공격했으며, 수문제와 수양제와 벌인 전투에서 승리로 이끌어 수나라를 멸망케 했다. 그런데 그의 뒤를 이은 이복동생 영류왕은 수나라와의 혈전으로 비록 승리는 했지만 고구려가 많은 피해를 본 것은 사실이므로 또 다시 당나라와 결전을 벌일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당나라와의 화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며 당태종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했다. 그런데 영류왕으로 보아서는 연개소문은 아무래도 자신의 사람이 아니었고 당나라에 반하는 강경파로 돌아서자 영류왕 25년, 연개소문을 제거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그를 장성(長城) 축조 감독이라는 한직으로 내보낸다. 연개소문은 한직으로의 좌천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인 것은 물론 당태종의 간계에 의해 고구려가 파멸할 것이 분명해지자 곧바로 반격에 나서 쿠데타를 일으킨다.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당태종은 쾌재를 불렀다. 고구려를 칠 명분을 찾고 있던 그에게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살해했다는 것은 절호의 기회였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한 명분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응징하고 백성을 구원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전쟁 때 전사한 백성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며,
셋째는 사방이 크게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 평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태종은 고구려 침공을 결심한 후 전쟁에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근본을 버리고 곁가지를 취하며, 높은 데를 버리고 낮은 데를 취하며,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취하는 이 세 가지는 모두 좋지 않은 것인데, 고구려를 치는 것이 이러함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연개소문은 임금을 시해하고 대신들을 도륙했으니 한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목을 늘이고 구원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당태종 이세민에게 있어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명분이 되지 않는다. 자신이 624년 수도 장안에서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황태자 건성과 동생 원길을 죽이고 부왕을 내쫓고 즉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에 대한 집념은 645년 안시성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당 태종은 647년 이세적 등을 보내 여러 차례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시도가 실패하자 649년 세상을 떠나면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중단하라고 유언했다. 그가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고 유언한 것은 전투를 계속한다면 수나라와 같이 당나라 자체가 멸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은 당태종의 유언을 어기고 보장왕 17년(658) 정명진•설인귀 등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실패했다. 660년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대군을 공격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662년 소정방이 평양성을 포위해 고구려의 위기가 드높았지만 연개소문이 직접 나서 당의 장수 방효태 등을 청천강에서 전사시키는 등 대승을 거두자 소정방도 평양 포위를 풀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는 당나라와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연개소문이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고 적고 있다. 그가 죽을 때까지 고구려는 무려 20여년 간 당과의 전쟁에서 줄곧 승리한 것이다.
결국 중국은 고구려를 굴복시키기 위해 신라와의 연합에 박차를 가한다. 나당연합에 대해 연개소문은 백제와 연합하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반당 연합세력을 형성한다. 결론적으로 연개소문이 665년에 사망할 때까지 당나라는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지만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상황은 급변한다.
연개소문의 큰아들 남생, 남건, 남산 등의 권력 싸움 등 고구려의 내부 갈등이 드러나 남생은 당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하자 신라와 당은 이를 틈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죽을 때까지 중국을 괴롭힌 연개소문에 대해 중국인들이 극도로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인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의 명예를 깎기 위해 연개소문은 태종의 침공을 받은 후에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더욱 포악한 행동을 자제하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연개소문에 대해서는 단재 신채호가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중국 곳곳을 발로 누비며 현지의 각종 전승(傳乘)과 비사들을 중심으로 연개소문의 활약상을 추적하여 연개소문이 ‘4천 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만한 영웅’이라고 극찬했으며 『독사신론』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연개소문은 우리 4000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이다. 아, 우리 연개소문은 우리 광개토왕의 자손이며, 을지문덕의 어진 동생이요, 우리 만세의 후손들에게 모범이 되거늘 이제 『삼국사기』를 읽으매 첫째는 흉악한 사람이라 하며, 둘째는 역적이라 하여 구절구절마다 오직 우리 연개소문을 저주하는 말 뿐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 나는 이것으로서 후세 역사가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