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은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니체의 주장을 자신의 관점으로 끌고와 적극적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니체를 형이상학자로 규정하면서 분명한 선을 긋기도 한다. 이러한 두 관점이 때로는 해석의 애매함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 하이데거는 니체가 주장하는 힘에의 의지1)를 "본질의지"라고 해석한다(NI 71). 항상 힘의 증가를 추구하는 힘에의 의지는 단순한 자기 보존의 충동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보존 욕구는 이미 현존하는 것에 정착하여 자신의 본질에 맹목적이 된다. 이에 비해 힘에의 의지가 항상 상위에 머물고자 하는 것은 본질 속으로, 근원 속으로 귀환 하려는 노력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힘에의 의지를 개별적이고 현실적인 어떤 것에 대한 의욕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넘어 근원으로 돌아 가려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같은곳). 문론 그러한 귀환은 항상 과정중에 있을 뿐이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존재의 심연 속으로의 도약이라는 의미로 해석해 내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또한 니체의 형식 개념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녔던 것과 같은 근원적인 형식 개념을 읽어 내기도 한다. 우리는 이것을 하이데거 자신이 지향하는 형식 개념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작품이 형식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자기 방기하고, 자기 공개를 하지 않는다면-), 예술가는 대상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WM 817)
▶ 하이데거는 여기서 '자기 방기'와 '자기 공개'라는 표현에 주목한다. 이것은 형식을 그속에서 "존재자가 나타나고, 표현되고, 공개되며, 빛을 내면서 순수한 빛 속에 이르는"(NI 138)것으로 이해하는 근원적인 형식 개념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은 주관을 하나의 존재자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속으로 비로소 가져가며, 그 관계 속에서 "존재자는 스스로 자신의 본질에서 축하 받아, 처음으로 열린 지평에 세워지게 되는 축제적인 상황성이 개방된다."(NI 139) 하이데거는 이러한 형식 속에서 순수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라고 주장한다. ▶ 그러나 니체에게 아름다움은 진리와 함께 힘에의 의지의 고양을 위한 계기일 뿐이다. 하이데거는 니체가 주장하는 의지의 본질은 명령이라고 분석한다2). 힘에의 의지는 항상 자신의 유지를 위한 가치와 고양을 위한 가치를 필요로 한다. 이 두 가치 사이에서 힘에의 의지가 움직인다. 니체에 따르면 진리가 힘에의 의지의 유지를 위한 가치이다.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안전하게 확보된 하나의 세계를 필요로 한다. 물론 그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원근법적 가상이다. 그러나 하나의 세계가 열리고 나면 그 세계는 확실하고 참된 것으로 유지된다. 따라서 진리는 생의 존립과 유지를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의 공간의 확보는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라 생의 고양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힘에의 의지가 진리를 넘어서 고양될 수 있게 하는 가치가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이제까지 주어졌던 현실을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으로 추동하고 고양시키는 자극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을 생의 자극제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니체에게 예술과 진리는 모두 힘의 수단으로서 "점령되어야만 하는 진지에 대한 폭격과 본질에 있어서 정확히 동일한 것"3)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힘에의 의지를 본질의지로 해석하는 앞에서의 견해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 이러한 하이데거의 분석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니체가 예술을 통해 시도하는 새로운 가치 설정을 새로운 최고 가치, 또는 기준이 되는 가치의 설정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이데거는 니체가 최고 가치를 "범주"(WM 12)로 본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나의 세계는 범주인 최고 가치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가치들의 체계이다. 그속에서 각각의 가치들은 최고 가치에 비추어 그 가치가 결정된다. 그러한 최고 가치, 즉 범주들은 존재자에 대한 통상적인 규정과 논의 속에서 항상 이미 암묵적으로 함께 말해지고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는 범주가 주제적으로 인식되거나 논의 되지 않는다. 따라서 니체가 예술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설정한다는 것은 이미 열려 있는 가치의 위계질서 속에서 자리바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새로운 가치질서를 창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예술가에게 모든 위계 밖의 어떤 것이다"(WM 803). ▶ 그러나 범주의 전환, 즉 새로운 가치 질서의 설립은 주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주관이 범주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범주가 주관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4).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개인의 의지가 곧 힘에의 의지인 것은 아니다. 힘에의 의지는 주관이 힘에의 의지의 법칙에 순응해 그 지배하에 들어서는 식으로만 주관의 의지가 될 수 있다. 개별적인 개인이 힘에의 의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5). 우리는 예술 작품이 세계의 산물이 아니라 세계가 예술 작품이라는 하이데거의 주장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하이데거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에서 무조건적으로 전개되는 주체성을 발견한다. 주체성의 관점에 선다는 것은 모든 존재자를 주관에 의해 표상된 객체로서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조건지워진 주체성에서는 비진와 비존재가 주체성밖에 존재하면서 그것을 제한하고 유한하게 만드는 한계로 작용한다6). 그러나,
헤겔의 형이상학은 비진리를 진리 안에 지양된 단계와 일면성으로 정립한다. 니체의 형이상학은 비진리를 진리의 본질로서 정립한다. 그러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파악된 진리는 주체에게 참과 거짓을 무조건적으로 관장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주체성은 모든 한계로부터 벗어날 뿐 아니라, 이제 모든 종류의 제한의 설정과 철폐를 관장한다.7)
▶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은 전통적으로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헤겔의 형이상학에서는 완전히 이해된 정신성(rationalitas)이 주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되며, 니체의 형이상학에서는 동물성(animanlitas)이 중심이 된다8). 하이데거는 이들을 최후의 형이상학자들9)로 간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