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까지 수행한 진정한 선객 / 벽암 동일 대종사
입적한 벽암당 동일대종사
지난 6일 입적한 명예원로의원 벽암당(碧岩堂) 동일(東日)대종사는
조계종단의 굵직한 소임을 두루 맡으며 불교발전에 힘썼고,
선객으로써도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이 시대 몇 안 되는 스승중의 스승이었다.
대종사의 이러한 올곧은 정신은 입적하던 그 날까지도 계속됐다.
입적하던 날, 스님은 미리 죽음을 예견한 듯 제자들을 불러놓고
선(禪)문답을 나누며 편안한 열반에 들었다.
스님은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무적벽수(無滴碧水)가 장강(長江)을 이루고 대해(大海)를 고갈(枯渴)시키느니라”고 답하며
삶의 무상함을 설하고 삶이 결코 죽음과 둘이 아님을 밝혔다.
스님은 또 다른 제자가 “제불조사(諸佛祖師)의 의지는 무엇이며
공부는 어떻게 지어가야 합니까”라는 질문에도
“아침에 죽이오, 사시에 마지 올리고 저녁은 없느니라”라고 답하며
“잘 달래주고 기운 내어 정신 차려 절도 있게
살펴가며 살아가야 옳으니라”고 격려했다.
이어 도리를 묻는 질문에
“박수미회(拍手未會)에 작창가(作唱歌)니라
(박수도 치기 전에 노래 부르는 것이니라)”고 덧붙이며
질책하는 것도 아끼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던 스님의 모습은
평소 꾸준했던 수행력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스님은 종단의 소임을 모두 놓은 90년대 말부터
공주 계룡산 신원사 벽수선원에 주석하며
80의 노구에도 선방을 드나들며 납자들을 격려하고
몸소 선 수행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다.
평소 “실천하지 못할 것은 말하지도 말라”고 가르쳤다는 스님은
“언제나 청정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야 된다.”고 강조해왔다.
입적한 벽암당 동일대종사는 1924년 경남 남해에서
부친인 채응조씨와 모친 정성구씨의 4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속명은 채우섭. 16살이 되던 해에 청년 채우섭은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관서(關西)공업전문대에서 공학(工學)을 공부했다.
1945년 암울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대학을 졸업한
청년 채우섭은 삶을 회의했고 공부의 의미를 찾던 중
<육조단경>을 접하게 되어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결국 1947년 가을, 서울 호국사 역경원에서
만공스님의 법제자인 적음(寂音)스님을 은사로 출가하며,
그 이듬해 일승스님에게 구족계를 수지한다.
또 서울 호국사 역경원 대교과를 수료하기에 이른다.
학업을 마친 스님은 불교발전을 위한 실천에 원력을 세우고
이때부터 어렵고 혼란스러웠던 종단 일에 직접 뛰어들어
종단행정과 불사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기 시작한다.
60년 조계종 총무원 교무부장, 65년 불국사 주지,
68년 선학원 원장 및 이사장, 동국학원 이사장 등
종단의 굵직한 소임을 맡으며 스님은 특유의 유연한 추진력으로
자신의 뜻을 점차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스님은 1972년 조계종 중앙종회의장을 거쳐
1978년 조계종 종정 직무대행과 1986년 원로회의 의원을 역임하는 등
종단의 어른스님으로서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난 2004년 대종사 법계를 품수한 스님은 입적까지
공주 계룡산 신원사 벽수선원에 주석하며 제자들에게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자신에게는 엄격한 참석과
계율 정신으로로 수행자의 본분에 부끄럽지 않으려는 스님이고자 했다.
▶ 임종게
春秋空寂冬夏制 (춘추공적동하제)
八旬安居無日月 (팔순안거무일월)
驀得飜身非無處 (맥득번신비무처)
照破峰頭一新月 (조파봉두일신월)
춘추가 비고 고요하여 겨울-여름 비끌어 매었는데
팔십 일평생 안거에 해와 달이 스러졌도다.
홀연히 비어 없는 세월마저 한 몸으로 뒤치니
봉두에서 비추어보매 달빛에 한 몸이 새롭다.
(시간을 던져 지옥에 들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하라 하시고 )
年年日月似溪流 (년년일월사계류)
未滿心懷空白頭 (미만심회공백두)
喝!
해가 가고 해와 달이 시냇물처럼 흐르누나
마음에 머금은 바 있되 채우기도 전에 흰머리만 휘날리누나.
할!
2005. 05. 06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