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una ocasión, Jesús estaba a la orilla del lago Genesaret y la gente se agolpaba sobre Él para oír la Palabra de Dios, cuando vio dos barcas que estaban a la orilla del lago. Los pescadores habían bajado de ellas, y lavaban las redes. Subiendo a una de las barcas, que era de Simón, le rogó que se alejara un poco de tierra; y, sentándose, enseñaba desde la barca a la muchedumbre. Cuando acabó de hablar, dijo a Simón: «Boga mar adentro, y echad vuestras redes para pescar». Simón le respondió: «Maestro, hemos estado bregando toda la noche y no hemos pescado nada; pero, en tu palabra, echaré las redes». Y, haciéndolo así, pescaron gran cantidad de peces, de modo que las redes amenazaban romperse. Hicieron señas a los compañeros de la otra barca para que vinieran en su ayuda. Vinieron, pues, y llenaron tanto las dos barcas que casi se hundían.
Al verlo Simón Pedro, cayó a las rodillas de Jesús, diciendo: «Aléjate de mí, Señor, que soy un hombre pecador». Pues el asombro se había apoderado de él y de cuantos con él estaban, a causa de los peces que habían pescado. Y lo mismo de Santiago y Juan, hijos de Zebedeo, que eran compañeros de Simón. Jesús dijo a Simón: «No temas. Desde ahora serás pescador de hombres». Llevaron a tierra las barcas y, dejándolo todo, le siguieron.
«En tu palabra, echaré las redes»
Rev. D. Blas RUIZ i López
(Ascó, Tarragona, España)
Hoy, el Evangelio nos ofrece el diálogo, sencillo y profundo a la vez, entre Jesús y Simón Pedro, diálogo que podríamos hacer nuestro: en medio de las aguas tempestuosas de este mundo, nos esforzamos por nadar contra corriente, buscando la buena pesca de un anuncio del Evangelio que obtenga una respuesta fructuosa...
Y es entonces cuando nos cae encima, indefectiblemente, la dura realidad; nuestras fuerzas no son suficientes. Necesitamos alguna cosa más: la confianza en la Palabra de aquel que nos ha prometido que nunca nos dejará solos. «Maestro, hemos estado bregando toda la noche y no hemos pescado nada; pero, en tu palabra, echaré las redes» (Lc 5,5). Esta respuesta de Pedro la podemos entender en relación con las palabras de María en las bodas de Caná: «Haced lo que Él os diga» (Jn 2,5). Y es en el cumplimiento confiado de la voluntad del Señor cuando nuestro trabajo resulta provechoso.
Y todo, a pesar de nuestra limitación de pecadores: «Aléjate de mí, Señor, que soy un hombre pecador» (Lc 5,8). San Ireneo de Lyón descubre un aspecto pedagógico en el pecado: quien es consciente de su naturaleza pecadora es capaz de reconocer su condición de criatura, y este reconocimiento nos pone ante la evidencia de un Creador que nos supera.
Solamente quien, como Pedro, ha sabido aceptar su limitación, está en condiciones de aceptar que los frutos de su trabajo apostólico no son suyos, sino de Aquel de quien se ha servido como de un instrumento. El Señor llama a los Apóstoles a ser pescadores de hombres, pero el verdadero pescador es Él: el buen discípulo no es más que la red que recoge la pesca, y esta red solamente es efectiva si actúa como lo hicieron los Apóstoles: dejándolo todo y siguiendo al Señor (cf. Lc 5,11).
♣ 하느님 앞에서의 정직함과 겸손함 ♣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영성생활도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느낄 때일수록 가장 기본적인 하느님과 나의 관계와 그에 임하는 나의 의식에 대해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과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에 대한 의식은 매우 중요한 까닭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파견 소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6,5)고 말하며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하느님 앞에서 죄인임을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을 목격하고 정화된 그는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받아들입니다.
율법과 전통에 능통하였고 학식에 뛰어났던 바오로 사도는 확고한 믿음을 지녔을 뿐 아니라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였고 많은 서간을 남긴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을 ‘죄인들 가운데서 첫째가는 죄인’(1티모 1,15), ‘사랑의 빚쟁이’(로마 8,12), ‘칠삭둥이’(1코린 15,8),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15,9)이라 부릅니다. 앞장서서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던 잘못을 인정한 때문입니다.
평범한 어부 출신이요 성격이 급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분부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그러자 그는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감당할 수 없는 부당한 사람임을 솔직히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 죄스런 모습과 상처를 감추고 싶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보잘것없는 사람이요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자신을 “하느님의 종들 가운데 가장 작은 종”(2보호자 1)이라 하였지요.
참으로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길 바란다면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정직함과 겸손을 지녀야 합니다. 엄청난 선교 업적을 이루고도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1코린 15,10)라고 고백했던 바오로 사도처럼 솔직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나의 장점과 좋은 점만을 가지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 ‘보잘것없는 나’를 사랑하시고, 그런 나를 도구삼아 당신의 사랑과 선을 전하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외없이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보잘것없음을, 죄인임을 고백함으로써 정화되고 거룩하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제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주시는 주님을 믿고, 위선과 교만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고기잡이 기적>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배에 앉아서 호숫가에 있는 군중을 가르치셨는데(루카 5,3),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깊은 데'로 가라고 시몬에게 지시하시고,
물고기를 많이 잡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루카 5,4-7).
(군중은 호숫가에 있었기 때문에 '물고기를 많이 잡은 기적'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적은 제자들만을 위한 기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그 기적은 배고픈 제자들을 먹이기 위한 기적이 아닙니다.
(생계를 도와주기 위한 기적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를 때 모든 것을 버렸는데(루카 5,11),
두 배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이 잡았던 물고기도 당연히 모두 버렸을 것입니다.
2) 그 기적은 안 믿는 어부들을 믿게 만들기 위한 기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음 없는 사람들을 믿게 만들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물론 안 믿고 있다가 기적을 보고 믿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예수님께서 그들을 믿게 만들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신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35절-42절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어부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3)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아직 제자가 아닌 사람들을 제자로 만들기 위해서
그런 기적이 필요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실 때의 장면을 보면,
기적 같은 것은 전혀 없이 그냥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만 있습니다(루카 5,27-28).
(레위는 기적을 본 다음에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말씀'만 듣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4) 이 이야기에는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부들은 이미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있었고,
몸으로는 따라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영적인 준비는 아직 안 되어 있는 상태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물고기를 많이 잡은 기적'은
앞으로 사도들이 하게 될 일, 즉 사도 직무에 대한 가르침으로,
또 '모든 것을 버리게 하기 위한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시대로 물고기를 많이 잡는 기적을 체험한 어부들은
그 기적 덕분에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부들은 물고기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부들이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일"은(루카 5,5)
먹고사는 문제만 신경 쓰면서 사는 인생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인생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는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깊은 데'는 '예수님께서 가라고 지시하신 곳', 또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입니다.
그곳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얻는 곳도 아니고, 부귀영화를 얻는 곳도 아닙니다.
결국에는 모든 것을 버리게 되는 곳,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것'을 받게 되는 곳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0-11)."
여기서 '주님'이라는 호칭은 중요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앞의 5절에서는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가 '하느님'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떻든 베드로는 예수님의 권능을 본 다음에
예수님은 '스승이신 분'이면서 동시에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권능과 권위에 압도당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실제로 떠나 달라는 뜻도 아니고, 자기 죄를 고백하는 말도 아닙니다.
주님이신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먹고사는 것만 신경 쓰면서 사는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달았다는 뜻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한 말씀인데,
그가 한 말을 부정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네가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맞지만,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위대한 사도로 만들어 주겠다."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는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구하여라."입니다.
"나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겠다면,
더 이상 물고기를 낚지 말고 이제부터는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여라."
("더 이상 너 자신이 먹고사는 문제는 생각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는 일만 생각하여라.")
지금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신 이야기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르심과
사도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넓게 생각하면 모든 신앙인의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인생에서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희망할 것인가?
결국에는 빈손으로 남게 될 허무한 인생을 살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구원과 생명을 얻어서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가?
모든 신앙인이 사도들처럼 실제로 모든 것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은 모두 버려야 합니다.
사도가 아니더라도 신앙인은 예수님만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내적 변화를 요구하는 소명
우리는 지난 연중 제3주일과 제4주일의 복음이었던 ’나자렛 설교’(4,14-30)를 통하여
루카복음사가가 구상하는 특유의 ’시간과 공간개념’ 안에서
예수님의 공생활이 개시되었음을 보았다.
루카의 고유한 시공개념은 예수님의 복음선포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없이 공중을 떠돈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바로 그 시간과 그 장소에 항상 현존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나자렛 설교’ 전반부의 핵심이었다.
설교의 후반부는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예언자적 운명을 예고하면서,
그 운명이 복음을 대하는 청자(聽者)의 믿음과 불신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었다.
나자렛 고향사람들이 뻗친 죽음의 손길(4,29)을 벗어나신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 카파르나움을 본격적인 공생활의 무대로 삼으셨다.
거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며, 시몬의 집에 들러 열병을 앓던 장모도 고쳐주셨고,
데려온 온갖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다.
이렇게 예수께서 가시는 그 때와 그 곳에 하느님나라는 실현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4,31-43)
루카복음 5장부터는 예수님의 공적인 가르침과 활동이 더 넓은 차원과 지평으로 펼쳐진다.
오늘 연중 제5주일에 봉독되는 복음은 겐네사렛(갈릴래아,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군중에게 행하신 가르침과, 현직 어부들인 시몬과 그의 동료들로 하여금 엄청난 고기를 잡게 하신
자연이적(自然異蹟)을 통하여 첫 제자들을 얻으신 제자소명사화를 들려준다.
예수님의 활동무대가 회당에 국한되지 않고 이를 초월하는 이유는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예수께서 언제 어디에 계시던 그분이 계신 바로 그 시각과 그 장소가
구원성취의 시간이요 장소이기 때문이다.(루카 4,21)
예수께서 시몬과 그의 동료(안드레아, 야고보, 요한)들을 첫 제자로 삼으신 소명사화는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 모두에 보도되고 있다.
(마태 4,18-22; 마르 1,16-20; 루카 5,1-11; 요한 1,35-42)
마르코의 소명사화가 이들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마태오가 이를 그대로 베꼈고, 루카는 마르코의 원전(原典)에 자연이적사화를 곁들였다.
요한은 제자소명사화의 구조와 내용을 전혀 다르게 편집하였고,
오늘 복음의 자연이적사화를 부활하신 예수의 발현사화와 연결시키고 있는 반면(요한 21,1-14),
루카는 이것을 제자소명사화에 연결시킨 셈이다.
루카의 이러한 의도는 일방적으로 예수님에 의해 불림을 받는 마르코에서와는 달리
시몬(베드로)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군중을 향한 가르침을 마치시고 갑자기 시몬을 향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고 하셨다.(4절)
시몬이 예수께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응답하였다.(5절)
예수께서는 물풀만 걸려든 빈 그물을 씻고 있는 그들을 보시고
밤새 허탕을 쳤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와 시몬은 서로 아는 사이다.
예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을 나오셔서 곧바로 시몬의 집에 들러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일(4,38-39)로 두 사람은 아는 사이가 되었고,
시몬은 예수님의 능력에 이미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마르코는 그 순서를 다르게 보도하고 있는 바,
소명사화(1,16-20)가 먼저고 장모치유(1,29-31)는 그 다음이다.
이 점이 바로 마르코에 없는 자연이적 사화를 루카가 곁들인 이유이다.
천직(天職)이 어부였던 시몬이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루카복음의 매력이다.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삼던 어부들이 밤새 허탕친 짓거리를
어느 누가 지시한다고 해서 또 하러 나가겠는가?
어부들은 이미 지쳐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또 한번 그물을 던지라’고 명하신 것이다.
얼마 전 자기 장모님을 열병에서 단 한마디의 명령(4,39)으로 고쳐주셨던 바로 그분이 말이다.
시몬은 어차피 허탕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5절)라는 토를 달고 가서
그물을 쳤다.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걸려들었다.
이 놀라운 사건이 시몬을 다른 차원으로 끌고 간다.
그는 순간 내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능력 앞에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였던 시몬이 예수께 떠나달라면서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한다.(8절)
예수께서는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시몬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삼으신 것이다.
예수와의 직접적인 대면에서 베드로는 예수께 대한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경험한다.
이는 신비를 경험한 인간의 통상적인 태도이다.
매혹이 강하면 예수를 따를 것이고, 공포가 강하면 예수를 버릴 것이다.
비록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고자 예수를 따라 나섰지만,
매혹과 공포의 양면적 압박은 늘 베드로를 따라다닐 것이다.
신앙이란 아마 매혹과 공포의 양면적 여정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강렬한 내적 변화 없이는 아무도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없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저항하는 죄인[박병규 신부] 2월 7일(연중 제5주일) 루카 5,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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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이 경악할 사건들이 앞다투어 보도된다. 자식을 찢어 죽이는 것, 몽둥이로 내려쳐 죽이는 것, 그 끔찍한 사건 앞에 할 말을 잃은 우리는 ‘헬조선’의 현실이라 되뇌며 분노한다. 분노는 당연한 듯하지만 거북한 것 또한 사실이다. ‘헬조선’이라 말하면서 우리는 ‘헬조선’을 즐기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들은 이 땅, 이 사회를 대상화하는 데 익숙한 나머지 자신의 본모습이 바로 이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에는 둔감하다. 아이를 학대하거나 죽이는 끔찍한 사건에 온갖 비난을 해대면서도 자신의 아이들을 학원에, 과외에, 입시 지옥에 던져 넣고도 ‘현실’을 핑계로 당당할 수 있는 태도가 있는 한, 우리의 분노는 늘 위선적 자위에 불과하다. 어쩌면 우리는 ‘헬조선’을 우리 일상의 끔찍함을 제거 혹은 은폐하기 위한 도구로 즐기는 듯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요즘 우리 주위를 분노케 하는 일련의 끔찍한 사건들보다 더 끔찍한 건, 제 현실을 사유하거나 극복하지 못해 현실에 파묻혀 살아가는 우리의 두려움일 테다. |  | | ⓒ김상훈 |
오늘 복음은 예수를 따르게 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예수는 가르친다. 가르침 중에 예수는 어부가 아님에도 어부에게 그물 칠 곳을 정확히 가리킨다. 밤새 ‘전문적’으로 고기를 잡고자 했으나 잡지 못했던 시몬은 웬일인지 예수의 ‘비현실적’ 명령을 따르게 된다. 이 지점에서 대부분의 주석학자는 주님에 대한 제자됨의 절대적 ‘순종’을 이야기한다. 자신의 의지를 온전히 내려놓음으로써 제자됨의 참모습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가 주를 이룬 해석이다. 예수의 ‘비현실적’ 명령대로 움직인 시몬은 엄청난 고기를 통해 자신의 본모습을 똑똑히 쳐다본다. 스스로 ‘죄인’이라 한다. 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일까. 많은 고기를 보고 겁이나서? 자신의 ‘전문성’이 감당 못할 예수의 신비한 기운이라도 느꼈기 때문에? 아니면 정말 예수가 메시아임을 깨달아서 무조건적인 순종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인이라 고백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한 사유가 오늘 복음의 핵심이다. 자신의 ‘현실’을 포기하거나 거부함으로써 죄인이란 고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건 자기 은폐나 도피에 가깝다. 단순히 절대적 존재 앞에 무릎 꿇고 순종한다고 스스로 죄인이라 고백할 수도 없다. 그런 고백은 찰나의 두렵고 떨리는 순간을 모면하는 비루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거부 반응일 뿐이다. 참으로 죄인이라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을 다르게 볼 수 있는, 현실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저항 정신’에서 가능하다. ‘이제껏 잘못 살았구나’,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었어’, ‘내 속에 너무 갇혀 있었구나’라는 스스로에 대한 ‘저항정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힘이다. 그 힘이 또한 현실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현실을 도모하기 위해 떠나갈 수 있는 힘으로도 작용될 터이다. 예수는 소위 ‘전문적’이라는 ‘현실’을 떠나게 ‘비전문가’로서 시몬을 불러들인다. 기존의 인식체계와 현실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저항의 길은 누구나에게 ‘비전문적’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길을 닦고 그 길을 고르게 하는 일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일이며, 우리 해방을, 우리 구원을 준비하는 길이라는 사실은 복음서마다 이야기되는 요한 세례자의 존재 이유이며 메시아를 갈망하는 우리 신앙인이 살아갈 이유다. 시몬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 ‘낚는다’라는 동사가 그리스말로 ‘조그레오’인데, 그 본디 의미는 ‘살게끔 이끈다, 조종한다’ 이다. 아이들이 끔찍이 죽어 가는 현실 안에 아이들을 살게끔 이끌어 갈 수 있는 새로운 현실을 모색하는 저항 정신이 사람을 낚는 일이다. 세상 어느 나라에도 오늘날 한국사회의 교육 현실과 같은 지옥을 만든 기성세대는 없다. 창피하고 죄스럽고 미안해해야 할 일들 앞에서 ‘헬조선’이라며 탄식하며 현실을 비난하는 건 비겁하다. 지금의 현실에 저항하며 스스로 죄인이라 말하는 게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갖추어야 될 최소한의 예의다. 그 예의를 갖추는 게 신앙이지 현실에 안주하거나 현실 적응력을 키워내는 데 신앙을 소비하는 건, 민망하거나 추하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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