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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유 지대
박 영 준
나는 같은 학교에 이십 년 가까이 있으면서도 매년 신입생 입학시험 때 한 번씩 있는 연금생활 속에 들어가 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이때까지 교수 전체가 집에서 출제를 해 내면 그것을 선정하는 교수 몇 명만이 합숙소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내 차례로 오는 때도 이핑계 저핑계 합숙을 거절해 왔었다.
나는 일제시대에 유치장생활을 대여섯 달 해본 경험이 있다. 그 때 나는 일생 동안 두번 다시 유치장생활을 안 하리라 결심했다. 정신과 아울러 육체가 완전히 자유를 잃는 감금생활처럼 괴로운 일이 세상에 다시 없다는 뼈저린 경험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번 들어가면 정해진 날짜까지 자유를 잃는 합숙생활도 유치장생활과 비슷한 것이란 생각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금년만은 사정이 달랐다. 학교 정책이 변해서 교수 전부가 출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출제위원으로 임명된 교수만이 합숙소에 들어가 출제를 하게 되었다.
비밀올 지키기 위해 학교에서는 입소하기 전날에야 출제위원들의 명단을 본인들에게 통지했다. 그 통지를 받자 나는 건강을 이유로 출제위원을 사절했다. 그것은 형식적인 이유만이 아니었다. 나는 본시 당뇨병 환자다. 그런데다가 환갑이 지나 건강에 대한 자신을 잃고 있다. 일단 들어가면 만 열흘을 감금당해 있어야 하는데 혹시 그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 것인가.
그런데 학교에서는 그 동안 건강에 좋지 않은 현상이 일어나면 도중에라도 나오게 해줄 테니 꼭 들어가 달라는 것이었다. 처음 실시하는 제도고 해서 심사숙고 끝에 정한 것이니까 제발 협력해 달라는 것이었다.
학교 행사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행사라 나는 뜻을 굽히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 갈아입을 내의 몇 벌과 참고서적 몇 권을 가지고 합숙소로 들어갔다. 한번 들어가면 나오는 날까지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현관을 들어설 때 나는 제 발로 걸어 도살장에 들어가는 소를 생각했다. 소는 자기가 죽을 줄 알고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는 것이 아니지만 자유를 잃는다는 것을 알면서 내 발로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라는 것이 절대적이라면 다만 하루의 부자유라도 그것은 인간의 치욕이요 수치다. 비단이나 명주 한 부분에 씻어도 빠지지 않는 기름이나 물감이 묻었을 때 그 부분은 가위로 잘라 버려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일생 가운데 자유를 잃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잘라 버려 일생을 재편집하고 싶은 것이 누구나의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부자유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소위 일 때문이다. 일을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를 얼마든지 희사한다. 일 때문이라면 잠시 가족과 지내는 시간을 빼고 대부분의 시간을 죄수와 함께 철장 안에서 사는 사람도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일을 위해서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창살 없는 구치소로 들어갔다. 들어갈 때 덜컥 문 닫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유치장에 들어갈 때는 유난히 덜커덕 소리를 내며 닫히는 철창문이 그 순간부터 자유를 박탈한다는 신호를 들려 주는 것 같아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다.
작업이 시작되기까지는 출입문을 닫지 않기 때문에 보통 남의 집 들어가듯 들어갔지만, 이층 숙소로 가 지정된 방에 들어갔을 때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것은 유리창문을 열지 못하게 모두 종이로 봉하고 그 위에 시뻘건 도장이 찍혀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외부로 향한 문을 열 수 없다. 그것은 외부와를 완전 차단한다는 뜻이었다. 외부와의 차단이란 곧 자유의 상실을 뜻한다. 자유의 상실이란 생각을 하니 정말 기분이 언짢았다.
그러나 그 자유의 상실은 열흘뿐이다. 구박 십일만 지나면 다시 자유를 찾는다. 그리고 나 혼자만이 아니라 십팔 명의 동료가 공동으로 당하는 일이란 생각이 약간 안도감을 주었다. 죽어도 여러 사람이 같이 죽는다면 죽음을 쉽게 단념할 수가 있다. 부자유 가운데서라도 공동의식을 가지면 덜 외롭다는 말이겠지.
저녁식사 때까지 방과 짐을 정리하며 자유시간을 가졌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에는 시간의 자유가 있다. 아무 때 자도 괜찮고 아무 때 일어나도 좋다. 이 시간의 자유는 아마 육체의 부자유를 반쯤 경감해 줄 것이다. 그런만큼 외부와 차단된 이곳을 완전한 부자유 지대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곳을 완전한 부자유 지대로 생각하는 것은 외부와의 차단에서 오는 강박관념 때문일 것이다.
누워서 빈들거리다가 저녁식사 시간이라는 소리에 일층 식당으로 내려가 동료 교수들과 처음으로 자리를 같이 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와 출제위원장을 빼고는 모두가 사십대 아니면 삼십대의 젊은 교수들이었다. 그 중에는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는 교수도 있다. 말하자면 우리 학교의 엘리트 교수들이다. 나는 내가 앉은 자리에 대해 약간 망설였다. 그것은 내가 위치로나 방향으로나 연상자의 티를 내기 위해 그들과 조금이라도 격리된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는 마음에서였다. 나는 그중 연상자임에 틀림없다. 어딜 가나 그렇다. 연상자라고 해서 앞자리에 앉히거나 또는 좀더 좋은 의자에 앉히는 경우를 가끔 당하지만 구럴 때마다 나는 그리 유쾌하지가 못하다. 택시를 탈 때 운전수가 할아버지 어디까지 가십니까 하고 물을 때마다 나는 이제 완전히 할아버지가 되고 말았구나 하는 슬픔 같은 것을 느낀다. 그러나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릴 때가 거의 되어 출입구 가까이까지 가면 나이 어린 여차장 애가 할아버지 내리십니까 하고 묻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냥 내리십니까 하고 묻는 것보다 일단 할아버지 한 뒤 내리느냐는 말을 묻는 것이 한결 기분 좋게 느껴지던 경험도 없지 않다.
그런 것으로 보아 나는 할아버지란 말을 진심으로 싫어하지 않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틀 앞에서 연로자 대우를 받기는 싫다. 또 그런 대우를 스스로 원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더욱 싫다. 내가 이루어 논 업적이 연로자의 대접을 받을 만하다면 그렇지는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학문을 하는 교수들과 자리를 같이 할 때마다 나는 내 업적에 대해서 위축감을 느끼곤 한다. 대학과 같은 학문사회에서는 교수의 평가를 오직 학문연구에 두고 있다. 일년에 한 번씩 제출하게 되어 있는 교수 실적 보고서에도 발표한 논문 제목을 기록하게 되어 있지 작품 이름을 쓰게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그 실적 보고서를 써본 일이 없고 그것으로 승진되어 본 일도 없다.
그런만큼 그런 사회에서 섣불리 연로자라는 것 하나만으로 특별 취급을 받기는 싫다. 물론 한국에서는 경로사상 때문에 연로했다는 것만으로도 존경을 하고 또 받는 수가 있다. 그러나 경로사상도 점점 허물어져 가고 있는 요즘 본인이 경로사상을 강요한다면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보기 싫어할 것인가? 사실 우리나라에는 경로사상이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버스에 올랐을 때 자리를 비켜주는 젊은 사람을 나는 얼마 보지 못했다. 가끔 그런 사람을 보면 형식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비켜 주는 자리에 앉고 싶지 않은 때가 있다.
어쨌든 나는 빈자리가 있는 데로 가서 젊은 교수들 사이에 끼여 앉았다. 그런데 앉자마자 위원장이 내 자리는 따로 있다면서 맨 앞자리를 가리켰다. 그리로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앞자리가 상좌라고 해서만 그리로 가라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나는 들어올 때 내가 당뇨병 환자라는 것을 말하고 특별 음식을 주문했다. 잡곡밥과 매 끼니 두부 한 모씩을 특별 요구했던 것이다. 그 특별 음식이 맨 앞자리에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음식을 따라 앞자리로 갔지만 상좌는 상좌다. 위원장이 앉아야 할 자리였다. 위원장의 자리
를 뺏어 앉는 것이 송구스러웠다.
그런데 음식을 나르는 사람이 끼니마다 내 특별 음식을 그 상좌에 놓았다. 그래서 나는 그 뒤에도 계속 그 자리에 앉았지만 음식 나르는 사람에게 내 음식을 딴 자리에 놓도록 주의를 시키지 않았다. 역시 상좌에 앉는 것이 그리 불쾌하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위원장이 앞으로의 스케줄에 대한 설명을 했다. 처음 나흘은 출제하는 기간으로 하고 나머지 나흘은 인쇄에 돌릴 톄니까 나흘 안에 출제를 끝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까지의 제도와 달라 이번에는 여기 임명된 출제위원들의 일의 분량이 많고 또 책임이 중하기 때문에 수당을 올리도록 만전을 기하겠다는 말을 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각 교수들이 수당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씩 했다. 나중에는 수당을 올려 주지 않을 땐 출제한 것을 내놓지 말자는 농담까지 나왔다.
일l반 사회에서는 교수가 월급도 많지만 돈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로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개중에는 수입이 많은 교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연구생활을 보장하는 뜻에서 주는 월급이 아니다. 개인적인 외부활동에 의해 받는 보수다. 특히 문과 계통의 교수는 외부적 활동이 미약하기 때문에 대부분이 가난하다. 그런만큼 돈 문제가 나오면 사회의 인식과 달리 가장 심각해지는 것이 또한 교수인 것이다.
나도 돈에 대해서는 다른 교수들과 의견이 같았다. 돈이 필요해서도 그렇지만 열홀 동안 감금당한다는 정신적 고통의 대가는 충분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무 책임자인 교무처장도 그런 방향으로 적극 추진하겠다는 말이었으나 문제는 지원자 수가 결정짓는다고 했다. 지원자 수가 많아야 수입이 많고 따라서 우리의 수당도 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교수들 전부는 이삼 일 남은 지원서 마감일에 신경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마감일이 지나자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금년도 지원자가 작년보다도 적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화제는 왜 지원자 수가 적어졌느냐 하는 데 이르렀다. 모두가 각출이었다. 그러나 종합된 결론은 제도의 변경에 있다는 것이었다. 작년도보다 예비고사 제도가 달라져 서울 학생들도 지방 대학에 많이 지원했다는 것이었다. 서울서 가망이 없는 학생들이 지방 대학이라도 가서 공부하겠다는 것은 좋은 현상일지 모른다. 그렇게 나가다가는 서울 인구가 줄어들 가능성도 있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지방으로 내려간 학생들이 거기서 공부를 잘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입학시험 과목이 많아 지원자 수가 적어진다는 의견도 있었다. 예비고사에서 전과목 전부를 시험 보는데 대학 입학시험에서는 필요한 과목만 보아 수험생의 부담을 경감해 줄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때 불필요한 과목 중 국어를 맨 처음 꼽는 교수가 있었다. 휴게실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때 나는 발설자의 얼굴을 보았다. 젊은 공과 계통의 교수였다.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여보시오, 국어가 국민생활의 기초가 아닙니까? 국어가 학문이 아니라고 무시한다면 민족은 바탕 없는 문화를 형성해도 좋습니까?”
좀 심하다 할 정도로 면박을 주었다. 그 젊은 교수는 대답을 안 했다. 내 말이 잘못이라고 하면 자기는 민족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말을 안 할 뿐 대부분의 국민이 국어교육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대학교에서도 국어시간이 점점 줄어 가고 있는 현상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대학생활 이십 년 동안 계속 분노를 느끼고 있는 문제가 이것이다. 문과대학에서도 서열은 국문과가 제일위다. 입학시험 때에도 맨 첫 시간에 치는 것이 으레 국어로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국어교육의 필요를 논하는 사람이 국어국문학자를 빼고 누가 있는가?
그건 그렇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 그새 하룻밤밖에 지나지 않은 것을 느꼈다. 이제 구분의 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지루함을 느끼면 어떻게 하나? 나는 종이로 열홀의 캘린더를 만들어 벽에 붙였다. 그리고 아침마다 하나씩 빨간 잉크로 지워 가는 것을 즐거움으로 살리라.
그런데 아래층 식당에 가서 나는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보았다.
하나는 조반이 전체적으로 토스트 두 조각과 프라이한 계란 한 개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 밖에 오랜지 주스 한 잔과 우유 한 병이었다. 내가 놀란 것은 그 음식의 종류가 아니었다. 음식의 영양보다도 분량에서 오는 만복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 오던 한국 사람의 배가 언제부터 이렇게 서구화되었는가 하는 사실이었다. 그 서양식 음식에 불만올 말하는 교수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른 교수들보다 매 끼니 두부 한 모를 더 먹는다. 그래서 나도 불평올 말하지 않았지만 만약 내게 두부 한 모가 추가되지 않았다면 공복감 때문에 불평을 터뜨리지 않고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둘째로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어젯밤에 틀림없이 보았던 M교수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그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그의 부재에 대해 말하는 이가 없었다. 나는 식사가 끝나자 위원장에게 M교수가 왜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 위원장이 씁쓸한 얼굴로 M교수가 나가서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어젯밤 열시쯤 나갔다고 말했다.
일단 들어왔다가 일이 바쁘다고 하룻밤도 자지 않고 간 그 교수에 대해서 말 한마디 없는 교수들의 수양에 놀랐다. 남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서양식 교양이 우리나라 교수들의 머릿속에 젖어들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뇰라운 일인가?
옛날 같으면 그런 사람이 나갔을 때 내게도 바쁜 일이 있다면서 나가겠다는 사람이 속출했을 것이다. 조용한 가운데 M교수는 나가고 조용한 가운데 D교수가 대신 들어왔다.
이날부터 나는 출제를 하기 시작했다. 이책 저책을 참고하며 문제를 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반 학생이 다 아는 문제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일반 학생이 다 쓸 수 없는 문제를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그 문제가 다음에 시험 칠 학생들의 공부를 자극시켜 주는 것이기도 해야 한다. 말하자면 고등학교 국어교육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한문제 한문제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것들을 고려하며 인문 사회계와 이공계의 두 가지 문제를 따로 작성하려니 제작시간도 상당히 걸렸다.
나는 요즘 고등학교 학생들의 독서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의 고유 말을 자꾸만 잊어 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특히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고 출제했다. 그리고 작년 시험에 귓밥 인중 등 신체 일부의 이름을 쓰도록 출제해서 일부의 비난도 산 일이 있지만 이번에도 북어 스무 마리를 뭐라고 부르냐는 문제를 만들었다.
우리의 생활용어다. 시험 문제라고 말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요즘 젊은 충이 그런 생활용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으니 국어시험 문제에서나 관심을 기울이게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좌우간 나는 이틀 동안에 내가 맡은 부분의 출제를 끝냈다. 끝내고나니 홀가분한 기분이었지만 과연 문제들이 문제다운 문제인지 회의가 들었다. 그리고 출제를 한 것이 아니라 시험을 치른 기분이기도 했다.
같은 국어과의 K교수가 위원장에 보이고 무난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가 이틀 동안에 출제한 문제를 풀기 위해 몇 해씩 공부한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불쌍하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뿐 아니라 내가 뭐기에 그 많은 학생들을 괴롭히고 있는가 하는 회의도 들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사람이란 자기가 완성된 것도 아닌데 남을 시험하며 사는 수가 많다. 반대로 남을 시험하는 사람이 시험을 받아야 하는 일이 또한 얼마나 많은가? 남을 시험하고 남에게 시험당하며 사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
나는 가끔 신문사나 출판사의 설문을 받는 일이 있다. 그 설문에 대답할 때마다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다. 그뿐인가, 평생 써오는 작품을 쓸 때도 꼭 시험 치는 기분이다.
그런만큼 시험에서 벗어나서 살고 싶다는 것은 하나의 망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내와 같이 생활을 한다는 것도 하나의 시험이다. 점수를 잘 얻으면 아내의 사랑을 받고 점수가 나쁘면 사랑을 못 받는다. 말하자면 남편으로서의 낙제생이다. 모든 사회생활이 다 그런 것 아닐까?
사흘 밤을 잔 다음날부터 나는 할 일이 없었다. 앞으로 할 일이란 인쇄 직전 교정을 보는 일뿐이다. 그러니 앞으로 엿새 동안을 무엇으로 소일할 것인가가 걱정이었다. 일이 없다면 더욱 지루할 것이고, 지루함을 느끼면 부자유란 관념 밑에서 마음과 아울러 육체의 피곤이 가중해질 것이다.
나는 집에서 쓰던 소설 원고를 꺼냈다. 한 오십 장 쓴 것이니 절반만 더 쓰면 된다. 그런데 원고 용지를 대하고 앉으니 갑자기 골치가 띵해지며 문장이 이어져 나가지 않았다. 자꾸만 창 밖만 내다보게 된다. 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높다란 잡목뿐이었다. 잎이 하나도 없는 노목 가지 끝에 까치가 집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까치 두 마리, 그들은 분명 부부일 것이었다. 그 부부 까치는 짤막한 나뭇가지를 물고 와서 형태가 다 된 자기네 집 안으로 들어간다. 한번 들어가면 한참 동안이나 있다가야 나온다. 한 놈이 나오면 다음 놈이 들어간다. 그 동안 한 놈은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나뭇가지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둥지 속에 들어간 놈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기다리지를 않고 그냥 어디로 날아간다. 어쩐지 남남 같다. 나는 그 부부 까치가 함께 둥지 속에 들어가기를 기다렸으나 내가 보는 데서는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남이 엇보는 데서는 애정 표현을 절대로 삼가는 모양이었다. 사람보다도 윤리관이 더 굳은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원고지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붓이 내려가지를 않았다. 이럴 때 나는 눈을 감고 눕는 버릇이 있다. 한참 누웠다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봇을 들면 써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정이 달랐다. 좀체로 안 하는 일이지만 세면소에 가서 세수를 했는데도 글은 써지지 않았다. 나는 복도를 거닐어 봤다.
‘집에 가서 써야지.’
나는 단념했다. 부자유를 느끼는 상태에서 원고가 무슨 원골까? 휴게실로 갔다. 거기서는 젊은 교수들이 늘 모여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어젯밤과 그저께 밤 몇몇 교수가 새벽 세시까지 잠도 자지 않으며 이야기한 것을 안다.
“잠두 자지 않으며 이야기들을 하는 것 같던데…….”
무슨 이야기들이 그리 많으냐는 식으로 물었다. 그랬더니,
“잠이 와야죠.”
웃으며 대답들을 했다.
젊었을 때는 잠을 더 많이 자는 법인데 요즘 젊은이들은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갇혀 있다는 사실이 잠을 오지 않게 하는 모양이다. 자유를 잃었다는 의식이 머리에 박히면 피곤도 느끼지 못하는가 보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들의 화제 속에 끼었지만 오래 있지 못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화제들이 재미있었지만 듣는 데 피곤을 느꼈다. 남들은 밤을 새워 가며까지 하는 이야기를 나는 왜 돋기만 하는데도 피곤을 느낄까? 피곤이 아니라 불안일 것이다. 불안 의식이 한 자리에 끈덕지게 앉아 있게 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도 내가 이야기를 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미있지만 이야기의 재미란 결국 자기가 이야기할 때 느끼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한다. 이야기를 하다가도 계속할 이야기를 그때그때 생각해 내지 못한다.
이야기를 잘 못 하는 사람은 남에게 재미를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재미있는 생활을 해나가지 못한다. 그뿐만도 아니다. 나처럼 학생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직업으로 되어 있는 사람은 더하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지 못하면 그가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고 해도 인기 교수는 될 수 없다. 자기도 시간시간을 메우기에 힘이 겨운 것을 느낀다. 얼마나 우울한 인생인가?
그뿐만도 아니다. 남과 어울리지를 못한다. 사교를 싫어한다. 심해지면 혐 인증(嫌人症)에 결리기가 쉽다.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결국 내가 남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임을 재삼 느꼈다.
나는 또 까치집올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 마리만이 높은 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아무 움직임도 없이 앉아 있더니 살짝 몸을 띄웠다가 사뿐 땅바닥으로 날아왔다. 체중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경쾌함이었다. 잠시 땅바닥에 서 있다가는 다시 높은 가지로 날아가 앉았다. 날 때의 경쾌함, 그것은 공기를 칼로 베는 모습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날아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자유스런 행동인가? 자유스러우니까 그 행동이 경쾌해질 수도 있다. 그러다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갈매기도 자유가 없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남보다 빨리, 남보다 높이 날아야 한다는 의지 때문인 그는 남들처럼 해변가를 날면서 먹이를 구하지 못한다.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비상의 연습을 거듭한다. 말하자면 이중 삼중의 고통을 느낀다.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갈매기가 자기 육체를 스스로 구속시키는 것은 자기의 의지 때문이리라. 가장 지성적이고 가장 큰 꿈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를 구속하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
그런데 나는 내 책임을 다했는데도 정해진 날까지 자유를 구속당해야 한다. 나의 꿈이나 의지 때문이 아니다. 자유롭게 해주면 입시문제가 누설될지도 모른다는 안보 문제 때문이다. 결국 인간 불신에서 오는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대학 교수라 해도 백 퍼센트 신임할 수가 없으니까 감금해 두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감금은 하나의 제도로 굳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학 교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불신을 받고 있는 세상에서 그 불신에서 오는 부자유를 개탄할 수가 있을까? 인간은 결국 자기 손으로 자기의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나는 다시 원고를 쓰려고 했다. 자기 개인의 일을 하면 구속감을 잊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하는 버릇대로 자리에 엎드렸다. 그러나 아무리 딱딱하다 해도 침대 위라 온돌방에 엎드린 것과는 다르다.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내가 만들어 붙인 캘린더만 자꾸 보게 된다. 이때까지 빨간 볼펜으로 작대기를 친 날짜가 나흘밖에 안 된다. 절반도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앞으로 닷새를 어떻게 지내나? 이런 생각만이 머릿속에 떠돌았다. 그러니 결국 원고는 써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작품이란 억지로 쓰는 것이 아니니까 억지로 쓸 생각을 버리자. 나는 결국 원고를 덮어 놓고 말았다.
그러니 할 일이 없다. 세 끼니의 밥을 정해진 시간에 먹는 것과 콜라 환타 같은 음료수를 수시로 마시는 일 외에 정말 할 일이 없다. 심심하고 지루하다. 담배만 자꾸 피우게 된다. 전에는 두 갑으로 충분하던 것이 세 갑 가깝게 피운다. 심심하니까 사이다나 환타 같은 음료수를 수시로 마시게 된다. 집에서는 그런 것 한 잔도 안 마시던 것이 여기서는 매일 세 병 이상 마시게 된다. 심심하면 위장도 심심해지는지 모른다. 자꾸만 허기를 느낀다. 식사시간 삼십 분 전쯤 되면 배가 고파 안타까울 정도다. 고아원에 있는 애들은 배가 불러도 파,
마늘, 심지어는 간장까지 훔쳐 먹는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조금 걸어 봤으면 좋겠다. 등산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리고 등산이란 것도 자유에서 오는 행동이었구나 생각했다.
위험한 길이래도 좋다.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 있는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이 결국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이 아닐까?
그 대신 낚시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유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같았다. 붕어가 잡히지 않아도 참고 견뎌야 하는 견인(堅忍)의 정신이란 결국 자기의 자유를 구속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일요일이었다. 날씨도 좋았다. 바깥 날씨가 영상 4도라고 한다. 등산 가기 좋은 날이다. 많은 사람들이 산에 갔을 것이다. 나는 내가 다니던 등산 코스들을 생각했다. 쉬면서 커피 끓여 먹던 곳도 생각했다. 썩은 나무를 주워다가 불을 피우며 점심 해먹던 일도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현관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 자유도 없다. 연금은 뜰 안의 산책까지는 허락한다고 한다. 그러니 나는 연금 이상의 감금상태에 있디·.
이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젊었을 때 사랑하던 여자가 다시는 옆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하며 팔을 잡는 꿈이었다.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 꿈을 꾸고 난 뒤 기분이 좋았던 것으로 보아 슬퍼지기 전에 꿈이 끝났으리라 생각되었다. 슬프게 끝났다고 해도 기분은 좋았으리라고 생각했다. 과거를 추억하게 만들었다고 해서가 아니라 그런 사랑의 감정 속에 빠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중요한 것이니까.
그 동안 별로 생각도 안 하던 여자였다. 소식을 들어 본 지도 오랜 그 여자를 하필 이런 데서 꿈속에 보았을까? 자유가 그리우니까 자유의 여신으로 그미가 나타났던 것일까? 나는 그 여자를 그렇게 사랑했던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정말 사랑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도 결국 자유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유를 사랑하는 정신에서 사랑하는 것이 참사랑일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다음날 밤에는 아내가 죽은 꿈을 꾸었다. 나는 꿈속에서 울다가 깨었다. 그래서 다음날은 종일 우울했다. 집에 전화를 걸어 알아 봐 달라고 부탁을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아무 일도 없다는 말을 들으면 도리어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아 그만두었지만 그래도 종일 꿈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행히 아무 소식도 없어서 집안에 별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하루는 옛날 애인 하루는 지금의 아내가 번갈아 가며 꿈에 나타났다는 사실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원래 꿈을 믿지 않는다. 꿈이 맞았다고 좋아해 본 일도 없지만 꿈이 나쁘다고 해서 불길한 일을 예상해 본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꿈의 내용보다 그 꿈을 꾸게 된 정신상태를 가끔 생각해 본다. 그런데 그렇게 상반된 꿈을 이틀 새 꾸었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하나는 옛날에 나의 문학과 또 정신과 관계 있은 여자요, 하나는 나의 현실적 살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여자다. 이 두 여자가 꿈의 내용은 각기 다르나 이틀 동안에 번갈아 가며 나타났다는 것은 유폐되어 있는 이 상황 속에서의 탈출을 욕망하는 마음의 표출이다. 그 탈출이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것뿐이다.
어쨌든 인간은 꿈을 꾸며 밤을 보낸다. 세월을 보낸다. 앞으로 사흘 밤만 자면 집에 갈 수가 있다. 그새 입학시험 문제는 필경의 손에 의해 씌어지고 나는 교정을 보았다. 몇 번의 교정을 본 뒤 제록스 사진을 찍어 인쇄에 걸었다.
맨 먼저 국어가 인쇄된 셈이다. 인쇄된 시험지, 그것은 학생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그 시험 문제를 보며 이것이 학생들을 울릴 것인가 웃길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것을 받고 웃는 학생보다 얼굴을 찡그리는 학생이 더 많을 것이다. 우선 긴장들을 하겠지. 답란을 써가다가 막히는 문제가 나왔을 때는 어떤 놈이 이렇게 힘들게 냈을까 하고 욕을 할 것이다. 육천여 명의 응시자 가운데서 그렇게 욕할 학생이 얼마나 될까? 혹시 대부분의 학생이 출제자를 욕하지나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남의 욕을 먹으며 사는 인간이 된다. 혹시 입시에 낙방이 된 학생이라면 출제자를 두고두고 욕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모르는 사이에 두고두고 욕을 얻어먹으며 사는 인간이 된다. 그런데도 나는 남을 울릴 권리가 있기나 한 것처럼 앞으로도 이런 일을 할지 모른다.
앞으로 이 년 뒤에 정년퇴직을 하는만큼 나로서 학생들을 괴롭힐 일이 한 번이나 두 번밖에 없을 것이다. 남을 건드려 욕을 보며 사느니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그 대신 아무에게도 잊혀진 존재로 사는 것이 얼마나 편할까? 빨리 세상에서 은퇴하는 정년퇴직이 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쇄된 문제지를 다시 한번 읽었다. 시험 당일에 한 자의 오자라도 나오면 시험장 전부가 발칵 뒤집힌다. 그런 일이 없도록 교정을 다섯 번이고 여섯 번이고 봐야 한다. 그런데 오자란 그 글을 쓴 사람의 눈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법이다. 으레 맞으려니 하는 선입관념 때문이다. 그래서 출제와 관계없는 사람에게도 보인다. 위원장은 물론이고. 그런데 인쇄되어 나오는 문제지에서 점 하나가 빠진 것이 발견되었다. 보통 글 같으면 이야기할 사람도 없을 작은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르다. 육천여 명이 볼 뿐 아니라 전국 고둥학교 교사들이 읽는다. 더구나 국어시험 문제에 점이 하나 빠졌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인쇄를 얼마 했던 그것을 중단시키고 원지를 교정했다. 그리고 다시 제록스 사진을 떠서 다시 인쇄를 하기 시작했다. 만약 인쇄가 다 끝난 뒤에 글자 하나가 잘못된 것을 발견하면 가차없이 교정하여 다시 찍을 것이다. 그러나 점 하나를 교정하고 그만 인쇄에 회부한 것은 최선을 다하노라고 했는데 그 뒤 또 새로운 오자가 발견된다 해도 할 수 없잖느냐는 식의 체념 때문이었다. 심신이 피곤한 현상이었다. 몸이 비틀리고 머리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태.
나는 내 방으로 가서 침대에 누웠다. 잠 부족이 아닌데도 잠이 왔다. 나는 집에서 하는 버릇대로 밤 열시 반만 되면 잔다. 그리고 아침 여섯시쯤 일어난다. 잠 부족일 리 없다. 그런데도 낮에 두 번 이상의 낮잠을 잔다. 낮잠을 자고 눈을 떴을 때 K교수가 찾아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영어시험 문제는 모조지로 인쇄를 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무슨 일에나 침착하기로 이름 있는 사람이다.
국어를 위시해서 모든 시험 문제지는 갱지로 인쇄되고 있다. 그런데 하필 영어 문제지만을 모조지로 찍다니…….
“정말입니까?”
“다른 교수들두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나는 더 긴 말을 안 했다. 그리고 위원장을 찾아갔다.
“이런 법이 어디 있소? 영어만 모조지로 인쇄를 했다니…….”
나는 흥분해 있었다.
“정말요?”
그는 인쇄하는 곳으로 뛰어내려갔다. 한참 뒤 모조지 문제지를 한 장 들고 와서,
“사무직원의 착각입니다. 갱지 옆에 있으니까 무심코 모조지를 내준 모양입니다.”
경위를 설명했다. 그러나 나는 흥분한 상태 그대로였다.
“영어를 제 나라 말보다 그런 식으로까지 해서 우위에 올려놓을 필요가 뭡니까?”
안 해도 될 말까지 했다. 위원장은 침착한 분이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연구해 보겠습니다.”
결정적인 말은 회피했다.
“위원장의 책임 문제가 될 것입니다.”
협박은 아니나 책임지고 처리하라는 말을 한 뒤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내 방에 돌아온 나는 기분이 나빴다. 결과야 어쨌든 동기가 불순한 것이 아니라면 내가 그렇게 신경질을 부릴 것이 뭐람? 다른 교수들은 가만히들 있는데 나만이 위원장을 찾아가 그럴 필요가 무엇 이었던가?
나는 자유를 잃은 생활에 지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신경이 약한 때문이라고도 생각했다. 이제 이틀 밤만 자면 나갈 수 있다. 어떤 일에도 신경질을 부리지 말자. 나는 스스로 몇 번씩이나 다짐을 했다.
그 뒤 영어 문제는, 인쇄된 것으로 교정 보던 교수가 지문 밑에 친 언더라인의 위치가 틀린 것을 발견하고 문제지를 다시 인쇄하게 되어 문제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잔잔해지고 만 것을 나는 얼마나 다 행하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자는 날 밤의 일이었다. 오밤중에 내 옆방에서 자는 위원장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새벽 두시였다. 웬일인가 하고 귀를 기울였더니 K교수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같이 자는 교수의 코고는 소리 때문에 잘 수가 없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위원장이 자기 방에 빈 침대가 있다면서 자기방에 와서 자란 말에 K교수가 거기서 자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K교수가 그 동안 여드레나 코고는 사람하고 같이 자다가 하필 마지막 날 밤에 와서 자리를 옮겨 잘까 하고 생각했다. 코고는 사람이 이날 밤
에만 코를 골았을 리가 없다. 계속해서 코를 골았는데 K교수가 그 소리를 못 듣고 잡을 잤거나, 자다가 깨기는 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잠들었거나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일이면 나간다는 마지막 날 밤 K교수는 그 코고는 소리를 참고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죄수가 감방에서 별일 없이 지내다가 출감 며칠 앞두고부터 안절부절 잠도 자지 못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부자유 속에 억류되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던 것이 자유를 눈앞에 내다볼 때부터 초조해지고 불안해지는 것이다.
나는 이북 동포들을 생각했다. 정신적인 그리고 육체적인 불안 속에서도 그들은 장기수처럼 부자유에 대해 마비되어 있을 것이다. 부자유를 부자유로 느끼지 않으며 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언제쯤 그 부자유 속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안다면 많은 사람이 미치고 말 것이다. 미치지는 않는다 해도 그날까지 참지를 못해 무슨 일을 터뜨리고야 말 것이다.
드디어 마지막 날이 왔다. 시험 마지막 시간 시험 문제를 전부 배부한 지 삼십 분만 되면 우리는 해방이 된다. 마지막 시간이 세시 오십분부터니까 네시 이십 분이면 집으로 갈 수가 있다.
그 동안 칠팔 시간이 문제였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그런데 그 사이에 자기가 출제한 과목의 시험이 있을 때마다 출제 교수가 잠시 교무처에 나가야 한다. 혹시 출제에 대한 질의가 들어올 때 답변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늦고 이른 것은 있어도 누구나 한 번씩은 나갔다 와야 한다. 그러나 늦게 나가는 교수도 일찍부터 와이샤쓰에 넥타이를 매고 대기상태에 들어갔다. 국어가 첫째 시간이다. 나와 K교수가 위원장의 감시 속에 교무처로 나갔다. 열흘만에 처음으로 현관문을 나서자 무엇보다도 공기가 신선함을 느꼈다. 신선할 정도가 아니었다. 달았다. 달콤한 공기가 시원한 청량제처럼 폐부 속으로 들어올 때 나는 이때까지 썩은 공기 속에서 살았었다는 생각을 했다.
까치집에 있는 나무 밑을 걸었건만 까치를 올려다볼 생각도 안 했다.
다리가 휘청거리지 않음이 다행이었다. 건강에는 지장이 없는 모양이었다.
교무처장실에 들어가자 나는 우리집에 전화를 걸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직 풀리지 않은 몸이라 내가 직접 전화를 걸겠다고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무처장이 나를 쳐다볼 때 오늘 다섯시쯤 집에 도착한다는 말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제가 옆에 있으니까 직접 거셔도 좋습니다.”
그만큼이라도 교수를 신뢰해 주는 교무처장이 고마웠다.
그런데 다이얼을 돌리고 저쪽에서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 나는 목이 메어 말을 꺼내지 못했다. 확실히 아내의 목소린데 그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는 것이었다. 젊은 교수들이 있는 데서 차마 울 수도 없어서 억지로 목소리를 가다듬어,
“나야.”
했다. 그랬더니 아내도 전에 없이 숙연한 목소리로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도 대답을 못 하고 오후 다섯시쯤 집에 도착할 것이란 말만 했다.
아내는 어제부터 내 방에 불을 때놓고 기다린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끊어! 하고 그만 수화기를 놓아 버렸다. 아무래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던 것이다.
삼십 분쯤 앉아 있어도 질의가 오지 않아 다시 갇히려 합숙소에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교수들이 맛이 어떠냐고 묻기에 자유가 좋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 뒤 우리는 모두 외출복을 입은 채 서성거렸다. 서성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초조한 서성거림 이었다.
다시 이십 분, 우리는 전원 합숙소를 나왔다. 현관문을 나설 때 나는 혹시 누가 뒤에서 만세라도 불러 주는 사람이 없는가 해서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뒤에도 앞에도 만세는 고사하고 눈여겨보아 주는 사람도 없었다.
(《한국문학》, 197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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