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도봉산에 올랐다. 장마 비가 오후 쯤 시작 될 것이라 하였는데 비는 오지 않고 바람한 점 없는 후덥지근한 끈적거림만 산행 내내 이어졌다. 하산 길 노인 둘이 계곡물에 잠겨 더위를 달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공중도덕이고 예의고 도리란 것이 지켜본 들 남은 생에 별 반 이롭고 긴요한 것도 아닌 것이란 듯 물속에서 세상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느껴졌다. 볼 테면 보라, 손가락질 하려면 해라. 날 이대로 내버려둬라. 어차피 인생은 사기다.
건조한 날의 더위와는 달리 축 늘어진 가래 섞인 공기는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더 숨겨져 있는 듯싶다.김선일의 뉴스가 새삼 떠오른다. 인간의 삶이란 것이 다 죄와 벌인 것처럼 보여 지기도 한다. 땀 질질 흘려대며 버티고 버티다 운명처럼 가는 것이 인간이란 생각이 불쑥 고개를 쳐든다. 오늘 산에서 본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오늘 같아선 인생을 의지적으로 산다는 말은 사기다.
가슴까지 꽁꽁 얼려주는 생맥주란 입간판을 보고 그곳에 들어갔다. 들어가서 안을 둘러보았다. 바깥에서 볼 때와는 달리 천막으로 둘러 친 거의 야외라 할 포장마차 수준의 간이음식점이다. 순간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주인 여자가 나이 들어 보이는 영감님과 족발을 뜯다가 일어섰다. 생맥주를 시켰다. 가만 보니 영감님도 손님이었다. 젊은 주인여자에게 호감을 보이려 큰 마음먹고 잔돈을 털어 족발을 사주는 것처럼 보였다. 애꿎은 담배만 연실 피며 여자 궁둥이만 졸졸 시선이 쫓아 다녔다. 괜스레 데이트를 방해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눈웃음치는 그 여자 눈빛을 보자 갑자기 그 영감이 불쌍해 보였다. 이건 분명 사기다.
얼마 안 있어 웬 사내가 테이블 앞에 섰다. “전 무명가수 최배호입니다. 이번 테입은 여자하고 같이 불렀지요. 이번에 돈을 벌면 꼭 정식으로 무대에 서겠습니다. 꼭 한번만 사주시지요.”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테이프 표지에 붙은 사진하고 실제 얼굴이 똑 같다. 거기에 노란 양복하고 빗어 올린 머리 스타일까지. 그 말을 듣던 동료가 불쑥 돈을 건넸다. “허, 이 어려운 시기 고생이 많구만, 다음에 성공하면 그 테이프에 그대로 사인해 줘야 돼.”"아, 예 제 무대에 꼭 초대 할 겁니다.”날 답지 않게 훈훈한 느낌으로 5천 원짜리 테이프를 들고 차에 올랐다. 테이프를 사준 동료에게 모두들 한마디씩 했다." 아무튼 언제고 봐도 김 이사는 잔정도 많고 마음이 선해요.”우리 일행을 실은 차가 고속도로에 올라서자 그 테이프 생각이 떠올랐다. 키도 작고 입술도 얇아 뵈던 그 친구가 어느 정도 실력인지 꽤나 궁금해졌다. “김 이사. 한번 들어봅시다.”모두들 재촉을 하였다. 집식구한테 갖다가 준다던 김 이사가 마지못해 테이프 껍질을 벗겨냈다. 이윽고 들려나오는 소리다. 너무도 소리가 작아 좀 크게 틀라고 하였는데 여전히 작은 목소리다. “노랜 어디서 듣던 건데 목소린 괜찮은 것도 같아.”김 이사가 한 소리 했다. “그런 것은 같은데 녹음이 잘못됐나..”
다음 곡을 기다렸다. 많이 듣던 노래이다. 카페가수라 하여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흔하게 구하던 김난영이라는 무명 여가수다. “한 곡 씩 나누어 불렀나보다. 다음엔 그 친구 노래가 나오겠네.”그 다음 곡이 흘러나왔다. 여전히 그 여가수다. 그 다음곡도 또. 사기다. 이런 것 까지 사기를 치냐,분명 사기다. 식상해 버린 김 이산 노랠 끄고 라디오로 돌려 버렸다.
들려오는 뉴스다. “지금 막 김선일씨 유해가 부산에 도착 했습니다.아버지의 칠순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환히 웃는 얼굴로 밟고 싶어 했던 고향땅 부산에 故 김선일씨는 결국 말없는 주검이 돼 돌아왔습니다. 지난 3일 AP통신이 김선일씨 납치와 관련해 외교통상부에 전화 문의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시민들은 참았던 분노를 한꺼번에 쏟아냈습니다.”순간 또 떠오르는 말이 있다.00다.유명인사가 그리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묵살하고 방관만 했을까 정부 당국자가. 이건 늦장대응도 직무 태만도 아니고 분명000.
(2004 6 26 도봉산 다녀오는 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