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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2013 마드리드 퓨전’에 참여한 샘표식품의 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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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발효가 세계인의 주목을 끌고 있다.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지향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뉴욕 타임스>는 2013년 음식 트렌드로 10가지를 꼽았다. 발효는 장기 숙성 육류, 훈제식품, 겨울 채소, 통에서 숙성시킨 핫소스 등과 함께 뽑혔다. 발효식품 하면 우리 된장과 간장이 퍼뜩 떠오른다. 시간과 기다림이 만들어내는 맛이다.
샘표식품 연구개발원, 스페인 알리시아연구소 3개월간 장 프로젝트 참여
우리 장을 세계인의 식탁에 안전하게 착륙시키기 위해 길을 나선 이들이 있다. 샘표식품 연구개발3팀 김종호(43) 부장과 장효순(41) 과장은 지난해 9월 예상하지 못한 발령을 받았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알리시아재단에서 3개월간 파견근무하라는 명이었다. 이들은 알리시아재단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스페인에 우리 장의 씨앗을 심었다. 생존기는 장맛처럼 진하다. 알리시아재단은 2007년에 설립된, 전세계 요리업계에서 전설로 불리는 요리사 페란 아드리아가 이사장으로 있는 요리과학연구소다. 샘표는 지난해 6월 알리시아와 제휴를 맺고, 국산 장이 유럽 음식에 녹아들어갈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일명 ‘장 프로젝트’(장을 이용한 서양요리 연구 프로젝트)다.
장과장은 태어나 스페인 여행은 고사하고 인사말조차 접해본 적이 없다. 이들은 페란 아드리아가 누군지도 몰랐다. 떠나기 전 한달 동안 스페인어 교재를 읽었다. 밤마다 스페인어 동영상을 보면서 따라했다. 10월1일 책자와 동영상 파일을 가방과 노트북에 잔뜩 욱여넣고 알리시아연구소를 찾았다. 반갑게 인사말을 건넸다. 노력한 결과를 따끈하게 맛볼 수확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멘붕이 왔죠. 모두 카탈루냐어를 쓰는 겁니다.” 김 부장은 당황했다. 알리시아연구소가 있는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 주정부의 주도다. 카탈루냐주는 끊임없이 스페인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주장해왔다. 연구소의 한국인 인턴연구원으로부터 “우리 반일감정보다 깊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다. 그들은 다시 카탈루냐어를 밤마다 외워야 했다.
2. 알리시아연구소에서 실험한 초간장 장아찌. 3. 된장을 넣은 푸아그라 요리. |
4. 시금치, 콩, 우리 장을 활용한 음식. 5. 향신간장을 넣은 양파수프. |
이들이 참여한 실험의 주목적은 장을 써서 서양요리 본래의 맛을 유지하면서 더 풍부하게 만드는 법을 찾는 것이었다. 매일 수십 가지 요리가 실험대에 올랐다. 김치찌개도 제 로 끓여본 적이 없는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40대 가장이었던 이들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요리사 출신 인턴연구원의 지시에 따라 감자 깎기, 30가지가 넘는 채소 다듬기, 생선 손질하기에 나섰다. 가시에 독이 있어 찔리면 마비가 되는 생선도 있었다. 육수용 재료였다. “겁났죠. 아주 조심했어요.” 장 과장이 그때를 반추한다.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생선을 다듬을 때 손가락이 잘릴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주의를 들었지만 서투른 솜씨는 결국 피를 불렀다. 다행히 손톱만 조금 떨어져 나간 정도였다.
150개 레시피 개발해 ‘마드리드 퓨전’서 선보여 세계적인 요리사들 장맛에 찬사 보내
6. 우리 장의 맛을 보는 요리사 키케 다코스타(사진 왼쪽)와 후안 마리 아르사크. 7. 알리시아재단 연구원이 우리 장으로 요리 실험을 하고 있다. |
“도마도 룰이 있더라고요. 빨간색은 고기용, 흰색은 야채용, 지적을 당하기도 했죠.” 김 부장의 말이다. 실험을 할 때마다 수북하게 쌓이는 수십장의 접시를 닦거나, 모든 실험이 끝난 오후 4시 반에 4단계에 걸쳐 하는 철저한 청소도 빠지지 않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 보름쯤 지나자 따스한 환대의 눈길이 전해져 왔다. 당시 ‘강남스타일’은 참 요긴했다.
“함께 실험하는 20~30대 인턴연구원들을 저희 숙소로 초청했어요.” 두 사람은 바르셀로나 한인슈퍼에서 재료를 사 잡채·불고기 등을 만들었다. 전날 유튜브에서 ‘강남스타일 하우투 댄스’를 내려받아 밤새 연습을 했다. 인턴들은 준비된 음식을 눈 깜짝할 새 해치우고 두 사람의 댄스 시범에 환호했다.
실험은 서구인뿐 아니라 된장과 간장에 관한 두 사람의 생각을 싹 바꿨다. “우리는 감자탕 하면 고추장, 찌개 하면 된장을 생각하는데, 그들은 고추장을 생선요리, 고기요리, 야채요리에 다 넣고, 볶음요리, 오븐구이, 날로 먹는 요리 등에도 다 적용하는 겁니다. 필요에 따라 요리 앞부분에 넣었다가 마지막에 넣었다가 하는 거예요. 양도 5% 했다가 10% 했다가 다양하게 적용하더군요.” 장 과장의 말이다.
스테이크는 우리식으로 간장에 재워 구우니깐 너무 탔다. 간장을 고기 표면에 발라 구워도 탄내가 났다. 찾아낸 최적의 레시피는 거의 조리가 끝난 상태에서 약간 뿌려주고 살짝 다시 굽는 것이었다. 간장은 고기의 풍미를 높인다는 찬사를 얻었다. 피자 실험은 황홀했다. 피자 도(반죽)를 8개 만들었다. 1개는 현지인의 방식으로, 나머지는 된장, 간장, 장을 기본맛으로 채소 육수를 넣은 장소스, 초간장, 고추장, 쌈장, 향신간장(간장을 기초로 한 조림용 소스)을 발라 구워 만들었다.
맛보고, 다시 도를 빚었다. 올리브오일을 바르고 생토마토를 간 소스에 각각의 장들을 섞고 치즈를 올려 약 10분간 160도에서 구웠다. 장의 양을 줄였다가 늘렸다가 하는 실험이 끝없이 이어졌다. 토마토소스와 장의 비율은 8 대 2가 됐다가 9 대 1이 됐다가 했다. 알리시아 연구원들은 된장이 들어간 피자는 “자연에서 키운 산양 젖 치즈 맛이 난다” “깊이 숙성된 발효 풍미가 느껴진다”고 품평했고, 고추장을 바른 피자에서는 “매운맛의 초리소(돼지고기로 만든 소시지)가 생각난다”고 놀라워했다. 장소스는 3%, 간장은 3%, 향신간장은 4~5%, 된장은 4%, 고추장은 7%, 쌈장은 4%를 섞었을 때 피자와 어울린다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된장과 물, 달걀을 섞어 거품을 내자 푸아그라(거위 간) 맛이 났다. 굳이 잔인한 방법으로 거위를 사육하지 않아도 그 풍미를 콩 발효식품만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라자냐, 코코뱅, 오믈렛 등 다양한 요리가 같은 방식으로 실험에 들어갔다. 6개월간 진행된 갖가지 실험 결과로 400여가지 요리 레시피가 완성되었고, 그중에서 엄선해 150개를 추려냈다.
직접 피자 도도 반죽했던 두 사람은 이제 피자집을 내도 될 경지에 올랐고, 올라(hola·안녕하세요), 베르두레스(verdures·채소) 같은 카탈루냐어는 우리말처럼 친숙해졌다. “장이 세계인의 건강과 맛을 한 단계 높이는 현장을 목격했어요. 다른 나라 음식에 활용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이들의 고군분투는 지난 21일부터 사흘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세계적인 요리박람회 ‘2013 마드리드 퓨전’에서 빛을 발했다. 21일 알리시아재단의 수석요리연구원 자우메 비아르네스(35)가 ‘장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그는 “한국의 장을 6개월 연구한 결과, 된장·간장 등은 스페인·이탈리아 등 서양음식의 맛을 더 깊게 해주는 건강식”이라며 “(장 사용은) 고기요리가 많은 유럽에서 고기 사용을 줄이면서 그 맛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관람객 800여명이 운집한 발표회장에서 우리 장은 단연 눈길을 끌었다. 2012년 미슐랭 가이드 별점 3개를 받은 키케 다코스타도 장을 이용한 3가지 타파스 요리를 선보이며 “발효는 스페인 음식문화에 흔하지 않아 더 흥미롭다. 장은 매우 훌륭한 식품”이라고 말했다. 샘표 부스에는 연일 스타 셰프들이 찾아왔다. 스페인의 세계적인 요리사 후안 마리 아르사크는 여러번 “훌륭하다”고 외쳤고, 브라질 요리의 선두주자 알렉스 아탈라도 “순수한 감칠맛이 느껴진다”고 했다.
한국을 여러 번 방문한 스페인 요리사 조르디 로카는 이미 자신의 새끼 돼지고기 요리나 양파수프, 무화과열매무침(김치와 장을 섞어 넣음) 등에 우리 장을 사용하고 있다며 “완전히 새로운 맛이었고, 아방가르드(전위예술) 같은 내 요리와 딱 맞는다”고 칭찬했다. 그는 “한국의 장이 스페인 현대요리에서 중요한 재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