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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3:26-43> 가상칠언(架上七言)-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유일한 구원자, 메시야, 그리스도 예수, 강도와 같은 우리들의 믿음으로 얻는 구원
<가상칠언>
1)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5) "내가 목마르다"(요 19:28)
6) "다 이루었다" (요 19:30) - 테텔스타이
7)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1. 가상칠언 두 번째 말씀은 강도와 같은 우리들에게 소망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은 오늘날 “죄인”인 우리들을 예표합니다. 모두가 강도와 같은 죄인인데 한 명은 예수를 구원자로 고백함으로 즉시 낙원에 가고, 그렇지 않은 한편 강도는 음부에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강도와 같이 남의 것을 빼앗고, 또 빼앗기며 살아왔습니다.
강도는 남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는 가장 악랄한 죄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인 강도는 세상법에서 말하는 강도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법으로는 강도가 안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법으로는 강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고자 하는 마음만 먹으면 강도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남을 미워하면 살인죄가 되고, 간음하고자 하는 마음만 먹으면 간음죄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법이 아닌 하나님께서 순전하고 의롭다해야 무죄한 것입니다 (시 51:4)
다윗도 “주께만 범죄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 51:4)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법에 따라 심판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심판하므로 우리 모두 강도가 될 수 밖에 없는 죄인인 것입니다.
① 구원을 받은 강도가 고백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눅 23:42)
당신의 나라, 곧 천국이 있음을 고백하므로 예수님이 자신을 천국으로 이끌수 있는 구원자임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 기억하다(헬라어, 므나오마이)은 생각해달라는 뜻입니다.
그가 이런 고백을 한 것은 어쩔 수 없이, 마지 못해, 다른 방법이 없으니 고백한 고백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 먼저는, 옆에서 같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진정성,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임하실 때에, 기억하소서 이 두 동사가 헬라어 원문에는 과거형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인데 그는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이미 일어난 것처럼 확신을 할 때 사용하는 문법입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확실히 믿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② 강도들 모두 초반에는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마태복음 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가복음 15: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강도들도, 그들도 복수형으로 사용하여 모두 예수님을 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최소한 죽는 순간에는 뉘우치고, 회개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그렇게 많은 환란을 당하고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비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9: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요한계시록 16:9]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
[요한계시록 16:11]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이런 강도가 죽음의 순간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막차에 막차를 탔습니다.
이게 강도와 같은 우리들에게 복음인 것입니다.
③ 그러면 그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조금이라도 선한 구석이 있어서 그런 고백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예수님께로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한복음 6: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에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딤전 2:4) 그러므로 두 강도 모두에게 감동을 주셨다고 봅니다. 그런데 다른 강도는 이에 반응을 하지 않고 오히려 사탄이 주는 음성에 반응을 한 것입니다.
사탄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면 도둑질 당하고 죽음이요 멸망입니다.
반대로 성령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면 생명이요 풍성함입니다.
[요한복음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④ 오늘 밀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즉시 구원을 받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오늘”입니다. 오랜 동안 선한 일을 하여야가 아닙니다. 많은 물질을 드려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하여 계룡산에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0:1-10절에서 구약 신명기 30:11-14절을 인용하여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늘에 올라갈 필요도, 무저갱에 내려갈 필요도 없다고 하면서 구원은 가까이 있는데, 네 마음에, 입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말하기를
[로마서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를 마음으로 믿으면, 그리고 오늘 강도처럼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수련으로가 아닙니다. 행위로서가 아닙니다.
2. 그러면 그가 구원을 받아 들어가는 낙원은 어떤 곳입니까?
사람들이 죽어 가는 곳은 크게 천국과 지옥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도표참조). 당연히 의인은 천국, 악인은 지옥입니다.
① 한편 강도가 간 낙원은 천국입니다.
헬라어 “파라데이소스”, 영어 “파라다이스”입니다.
여호와의 동산입니다(창 13:10, 사 51:3), 물론 이 땅의 에덴동산과는 비교도 안되는 좋은 곳일 것입니다. 이 땅의 것은 하늘의 것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② 바울도 낙원에 갔다 왔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의 영혼이 간 것입니다. 그래서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고후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그는 낙원을 셋째 하늘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장면을 그곳에서 보고 듣고 온 것입니다.
③ 위경 에녹서, 모세의 묵시록에도 낙원을 셋째 하늘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④ 눅 16:22절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가 간 “아브라함의 품”이 낙원일 것입니다.
반대로 부자는 “음부”(헬, 하데스)에 갔다고 했습니다. 거기는 물 한방울이 귀한 곳입니다. 왜냐하면 불꽃 가운데 그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있는 곳과 음부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 오도 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눅 16:23-26)
▶ 음부는 지옥인 것입니다.
음부와 낙원에는 영혼 상태로 가는 곳이므로 최후의 흰 보좌 심판이 있기 전에 가는 중간거처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주님 재림 후 흰 보좌 심판 때에 바다도, 사망도, 음부도 그 죽은 자들을 다 내주고 마지막에는 음부마저도 악인들과 함께 유황 불못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계 20:13)
악인,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의 최종적으로 갈 곳은 볼 못인 것입니다. 역시 지옥입니다.
▶ 아무튼 아무것도 선한 일을 한 것이 없는 한편 강도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므로 이 낙원에 들어간 것입니다.
물론 상급은 없을 것입니다. 순교자나 수많은 헌신을 한 자와 상급이 같다면 불공평하니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또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 만이 유일한 구원자임을 다시한번 가르쳐 줍니다.
① 육신의 눈으로 볼 때에는 힘 없이 죽어가는 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도무지 구원자로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면 너 자신을 구원해 보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죽고 맙니다.
사실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는 분입니다.
(요 10:18)
그래서 스스로 버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② 예수님의 인성, 연약한 모습은 이사야 53장에 잘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 탄생전 약 700년 전의 사람입니다.
[이사야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2)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구약시대 회막(성소와 지성소)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을 눈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 안은 금과 화려한 청색, 홍색, 자색,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은 화려함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바깥은 염소의 털과 붉게 물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으로 덮혀 있습니다. 검고 우중충합니다. 예수님의 인성의 모습인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인성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안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만세와 만대 전에 감추인 비밀인 것입니다. 감추인 보화인 것입니다 (골 1:26,골 2:2, 마 13:44).
발견한 자는 모든 재산을 팔아서 사는 것입니다.
신성에 인성이 덮혀져 있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석가, 무함마드, 공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누가 죽어 부활했으며, 누가 몇 천년 전부터 예언되어 탄생하셨습니까?
누가 자기의 죽음의 날자와 방법을 알았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죽는 날도 어떻게 죽은 줄도 몰랐습니다.
석가는 독버섯 먹고 죽었습니다.
무함마드는 고열과 폐렴으로 죽었습니다.
무함마드는 그의 후계자도 정하지 못하고 죽어 후계자 문제로 지금도 수니파, 시아파로 지금도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성행한 대승불교는 사실 석가가 기르친 가르침과 다릅니다. 이게 불교계에서 말하는 비불설(非佛設)입니다.
주변에 있는 스님들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비불설이 무엇인지? 그가 모른다고 하면 그는 공부안한 분입니다.
석가 입적 후 500년 후에 용수라는 인도승이 만든 대승불교(大乘佛敎)는 석가의 가르침과는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게하기 위하여 만든 새로운 종교와 같습니다.
출가하지 않고 재가 상태에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외치면 해탈이 되고 극락에 간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탄다고 하여 대승인 것입니다.
석가는 사후세계에 대하여 모른다고 했지 극락, 구원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출가하여 해탈하는 것을 목적으로 수행을 했습니다. 그 방법이 팔정도와 같은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수의 사람들이 출가하여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승불교(小乘佛敎)인 것입니다.
마치 대승불교는 기독교에서 파생된 문선명의 통일교처럼 불교의 이단인 것입니다. 통일교의 원리강론을 성경으로 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유일한 구원자입니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누가 감히 죽음 앞에서 구원을 선포합니까? 자신도 죽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인간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님 만이 유일한 구원자인 것입니다.
③ 예수님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 외에도 다양하게 그가 구원자 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이 땅에 살아계실 때에 그의 놀라운 초자연적인 기사와 이적이 그가 구원자임을 증거합니다. 다른 성인들 그런 기적없습니다.
→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자임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다고 누가복음에서만 4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 1500년 동안 40여명의 저자들이 기록한 성경이 이것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 5:39, 46-47), 모세오경, 시편, 선지자의 글 등이 모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했는데, 오늘 우리들까지 받고 있는 성령님이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맺는 말>
강도들 중간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마치 강도의 괴수와 같이 보이나 강도와 같은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들은 모두 강도입니다. 그런 강도가 믿으면 낙원, 믿지 않으면 음부로 가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 오늘 말씀입니다.
한 순간의 고백이 낙원과 음부의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오늘 믿고 죽으면 오늘 낙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선택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